황윤길
1. 개요
황윤길은 황희의 후손으로, 조선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89년 정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에서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부사 김성일과 의견 대립을 겪었다. 귀국 후에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이를 후회했다. 황윤길의 묘는 고양시에 있으며, 여러 드라마에서 그의 역할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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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서인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서인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임진왜란 관련자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임진왜란 관련자 -
허균
허균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로서, 홍길동전, 교산시화, 도문대작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나, 진보적인 사상과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2. 생애
황희의 4대손이며 황치신의 증손이자 황사경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황징(黃懲)이다.
황윤길의 가계는 훈구파였지만, 그는 사림파에 가담하여 출사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가까이 지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조 때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3. 조선 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589년 황윤길은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1590년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부사(副使)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이 함께 통신사 임무를 수행했다.
3.1. 통신사 파견 배경
豊臣秀吉일본어가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선에서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탐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정탐꾼이 파견된다는 보고를 듣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경계와 검문을 강화하자, 선조는 공식적인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황윤길은 정사(正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왜의 사신이었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4월 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에 들어갔다. 부사(副使) 김성일 등과 관백(關伯)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서인 황윤길은 정치적으로는 동인에 속하였던 김성일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반면 같은 동인으로서 서인의 편을 든 종사관 허성(許筬)은 이후 동인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1590년에서 1591년 사이에 선조는 황윤길을 대표로, 김성일과 허성을 수행으로 하여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통상적인 외교 사절단은 정사, 부사, 서장관 등 세 명의 주요 인물로 구성되었으며, 사절단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하는 서기관도 1명 이상 포함되었다.
이 외교 사절단의 연표는 다음과 같다.
3.2. 여정
1590년 3월, 황윤길 일행은 선조의 명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했다. 대마도에서는 일본 측의 무례한 태도에 항의하며 1개월을 지체하기도 했다.
황윤길은 정사(正使)로, 김성일은 부사(副使)로, 허성은 서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의 일원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이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3.2.1. 대마도(쓰시마)
1590년 4월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은 당연히 영접사를 파견해서 사신을 인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는 산 위의 국본사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가마를 탄 채 뜰 아래까지 와서 통신사 일행을 노하게 하였다. 그래서 부사(副使) 김성일은 그들의 거만함을 지적하며 1개월을 지체한 후에야 출발하였다.
3.2.2. 오사카
1589년 11월 18일 조선통신사 정사로 임명된 황윤길은 1590년 3월, 일본 사신 소 요시토시 등과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히데요시는 조선 통신사를 냉대했으며,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당시 실록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눈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와 흑포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하여 모시고 있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 준비는 전혀 해 놓았지 않았고, 앞에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냈는데 수작하고 읍배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에서 서성거리다가, 조선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였다. 음악을 듣다가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히데요시가 웃으면서 시녀를 불러 아이를 건네주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다.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외모와 행동을 상세히 기록하여 보고했다. 히데요시는 왜소하고 원숭이 형상이었으며, 눈은 빛났지만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였다.
3.3. 히데요시와의 만남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에서 황윤길은 정사(正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왜의 사신이었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4월 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에 들어갔다. 부사(副使) 김성일 등과 관백(關伯)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3.4. 귀국 보고와 갈등
1591년 3월, 황윤길 일행은 부산항을 통해 귀국했다.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고, 그의 눈에 광채가 있으며 담략이 남달라 보인다며 "앞으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예고하였다. 그러나 부사(副使) 김성일은 "전혀 그러한 조짐이 없었사옵니다."라고 하며,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으니 두려울 것이 못 됩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을 하였다. 서장관 허성은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했으나, 동인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러한 상반된 보고는 조선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김성일은 서인인 황윤길의 주장을 정쟁으로 몰아갔다는 비판을 받는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전쟁 발발 여부를 묻자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동요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3.4.1. 조총 입수
1591년 황윤길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 두 자루를 구해 조선에 바쳤다. 그러나 조정에서 조총을 실용화할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발발 이후, 황윤길의 경고는 재평가받았다.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1591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황윤길은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5. 사후
황윤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2009년 8월 31일 고양시 향토유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