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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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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희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세종 시대에 영의정을 역임하며 18년간 재상으로 세종을 보필했다. 1363년에 태어나 13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나, 고려 멸망 후 새 왕조 벼슬을 거부하고 은거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치며 농업 개량, 국방 강화, 예법 개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청렴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위의 살인 사건 은폐, 친인척 비호, 간통 등 비리 의혹에 연루되기도 했다. 1449년 은퇴 후 1452년에 사망했으며, 저서로 《방촌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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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기본 정보
황희의 영정
이름황희
원래 이름황희
직책조선영의정
임기1431년 ~ 1449년
전임이직
후임하연
출생일1363년
출생지고려 개경부 개풍 가조리
사망지조선 경기도 파주에서 노환으로 병사
사망일1452년 (90세)
거주지조선 전라도 남원
국적조선
성별남성
별명초명 수로(壽老)
방촌(厖村)
구부(懼夫)
시호익성
종교유교(성리학)
본관장수
배우자초배 최씨 부인(최안(崔安)의 딸)
계배 청주 양씨 부인(양진(楊震)의 딸)
그 외 첩실 1명
자녀아들 황치신, 황보신, 황수신, 황직신
부모황군서(부), 용궁 김씨 부인(모)
관직
직위영의정
임기 시작1431년 10월 8일
임기 종료1449년 10월 21일
전임자구종길
후임자하연
직위1좌의정
임기 시작11427년 2월 21일
임기 종료11430년 12월 9일
전임자1이직
후임자1맹사성
직위2우의정
임기 시작21426년 7월 18일
임기 종료21427년 2월 21일
전임자2조연
후임자2맹사성
한국어 이름
한글황희
한자黃喜
로마자 표기Hwang Hui
매큔-라이샤워 표기Hwang Hŭi
자(字)구부
자(한자)懼夫
자(로마자 표기)Gubu
자(매큔-라이샤워 표기)Kubu
방촌
호(로마자 표기)Bangchon
호(매큔-라이샤워 표기)Bangch'on
시호익성
시호(한자)翼成
시호(로마자 표기)Ikseong
시호(매큔-라이샤워 표기)Iksŏng
아호수로
아호(한자)壽老
아호(로마자 표기)Suro
아호(매큔-라이샤워 표기)Suro

2. 생애

황희는 고려의 관료였으며, 1394년 조선의 관료가 되었다. 1418년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을 옹호하다가 그의 잘못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변호하여 한때 서울에서 유배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 재임용되어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431년 영의정에 임명되어 1449년까지 재직하였고, 18년간 재직 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363년 고려 판강릉대도호부사였던 황군서의 아들로 개경의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1389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거부하고 동지들과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와 동지들의 설득으로 조선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1] 이후 직예문춘추관, 사헌부 감찰, 형조, 예조, 병조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14]

1417년 제3대 왕 태종양녕대군의 왕세자 자격을 박탈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자 이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18] 1418년 즉위한 세종에 의해 다시 벼슬에 기용되었고, 1431년부터 18년간 영의정을 역임하며 세종을 보좌하였다. 청백리로도 알려져 있으며,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났고, 3년 후 90세로 사망하였다.[1]

2. 1. 고려 시대

1363년 고려 판강릉대도호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개경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1389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거부하고 동지들과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와 동지들의 설득으로 조선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1]

2. 1. 1. 출생과 가계

방촌 황희는 자헌대부 판강릉부사를 지낸 황군서의 얼자[12][13]로 송경(松京 :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감문위호군인 김우의 딸 용궁 김씨(龍宮金氏)로 전해지며, 세종실록에 의하면 황희는 황군서의 얼자(孼子[12])라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순왕의 부마인 시중(侍中) 황경(黃瓊)의 후손으로, 증조부 황석부는 고려에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황균비는 고려시대에 참찬(參贊)을 지내고 조선에 와서 그의 출세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추증되었다. 아버지 황군서고려시대에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조선 건국 후 충주 절제사와 도안무사를 역임했다.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는 정실 부인이 아니었다.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던 무렵, 열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말랐었는데, 그가 태어나자 갑자기 물이 다시 흘렀다고 한다. 형제로는 형 황중수와 3명의 누이가 있었다.

가계


2. 1. 2. 초기 생애

황희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났으며,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았으며 눈매가 매서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것은 잊지 않았다. 1363년 고려 판강릉대도호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개경 가조리에서 태어났다.[1]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열심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 짐작했다. 일찍이 글을 깨우쳤고 암기력이 뛰어났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1376년(우왕 2년) 음서로 복안궁(安福宮) 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마시에 합격, 1385년 진사시에 급제했다. 1380년 17세에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 최안(崔安)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두었으나, 24세에 부인이 사망하였다. 1388년 26세에 공조전서(工曹典書) 양진(楊震)의 딸과 재혼하여 3남 1녀(치신, 보신, 수신)를 두었다.[1]

20세에 진사 벼슬을 하던 중, 하루는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에서 농부들이 소를 몰며 논을 가는 것을 보았다. 황희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느냐고 물었고, 농부는 황희를 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귀엣말로 누런 소가 더 잘한다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묻자 농부는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흉보면 기분이 상하는 법"이라고 답했다.

농부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황희는 이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별장(別將)이 되었다. 1389년(창왕 원년) 별장 재직 중 문과(文科)에 급제, 적성현 훈도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 학록을 거쳐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에 임명되었다.[1]

2. 2. 조선 건국 이후

1389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1392년 이성계에 의해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에 벼슬하는 것을 거부하고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와 두문동 동지들의 설득으로 새 왕조에 벼슬하게 되었다. 이후 직예문춘추관, 사헌감찰, 형조, 예조, 병조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14]

1418년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옹호하다가 그의 잘못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변호하여 한때 서울에서 유배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 황희는 재임용되어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431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어 1449년까지 재직하였고, 18년간의 재직 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농업 개량을 위해 곡식 종자를 배포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경제지'의 간행물을 '續典'과 ''으로 나누어 내용의 중복, 생략, 내용과 현실 분리를 막았다.[1]

북방의 오랑캐와 남방 지역을 방비하기 위한 국방 대책을 세우는 데 주력하였고, 고려의 예절을 명나라조선 시대의 현실을 고려하여 개정하고 보완하였다.[1]

그는 영의정(Yeonguijeong)을 18년 동안 역임했으며, 총 24년간 왕실에 봉사했다. 영의정은 세 명의 임명된 왕실 총리 중 최고위직이었다. 그는 "정의로운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정치 철학으로 유명했다.[2]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우선순위는 농업 개선, 사회 계층 격차를 심화시키는 법률 완화, 그리고 서자천민 출신의 지원자들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 제공이었다.

2. 2. 1. 조선 건국과 출사

1392년 7월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 72현과 함께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14]

이후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갔다. 1394년(태조 3년)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무하고, 조금 후에 직예문 춘추관(直藝文 春秋館)을 맡았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우습유(右拾遺)에 전직(轉職)되었는데, 이후에 그 뒤 좌천·면직·소환을 반복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로 재직 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선공감 정란을 복직시키는 문제를 놓고, 그가 3년상을 마치지도 않고 관직에 복귀하게 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직첩에 서경하지 않았다가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다시 복직하여 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정치를 논의하였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전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 정종 즉위 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1399년(정종 1년) 초 발언 문제로 파직되었다가 그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고,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1399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로 나갔다가 경원 교수관(慶源 敎授官)으로 재직 중 폄직(貶職)되었다.

2. 2. 2. 정치 활동

1400년(정종 2년) 형조정랑(正郞), 예조정랑, 이조정랑, 병조정랑을 거쳐 1401년(태종 1년) 승정원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이 되었고, 이후 승추부도사(承樞府都事)가 되었다가 이어 병조의랑이 되었다. 1402년(태종 2년) 3월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그러나 1402년 겨울 군무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관직에 추천할 인물이 부족하여, 인물난으로 특별히 추천되어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16]

3년상을 마친 뒤 1404년(태종 4년)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 그해 10월 좌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언에 올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이때 정승인 박석명은 태종 때 다시 황희를 자신의 후임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로 천거해 훗날 명(名) 정승의 길을 열어주었다.[16] 그가 고려 멸망 후 관직을 사퇴하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은 것을 태종은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 사람을 쓰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태종은 박석명의 강력한 추천이 아니었으면 황희를 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16]

1405년(태종 5년) 12월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지신사([17]知申事)에 올랐으며,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태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게 된다.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공신이 아니었으면서도 공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뢰하였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형제를 비판하는데 앞장섰으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은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아 그 후 요직에 중용된다.

1884년조선 말기의 초상화가 채용신(1850년~1941년)이 그린 황희 영정. 황희가 살았던 시대에는 흉배가 없었으므로 잘못된 그림이다.


이후 대호군·지신사를 거쳐 1409년(태종 9년) 8월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가 12월 형조판서로 승진했다. 이후 사헌부대사헌, 1410년(태종 10년) 2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그해 7월 다시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411년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그해 9월에는 병조판서명나라에 다녀왔다.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견명사(遣明使)·참찬·평안도 도순문사·한성판사(漢城判使) 등 내외의 주요 관직에 있으면서 문물(文物)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와 함께 점차 왕의 신뢰를 쌓아갔는데, 그는 중추원을 없애 병제를 병조로 일원화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 이방원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신임을 얻는다. 이후 태종은 모든 정사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1418년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옹호하다가 그의 잘못된 행실에도 불구하고 변호하여 한때 서울에서 유배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 황희는 재임용되어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431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어 1449년까지 재직하였고, 18년간의 재직 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농업 개량을 위해 곡식 종자를 배포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경제지'의 간행물을 '續典'과 ''으로 나누어 내용을 중복하거나 생략 또는 내용과 현실에서 분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1]

한편, 북방의 오랑캐와 남방 지역을 방비하기 위한 국방 대책을 세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폭넓은 예절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고려의 예절을 명나라조선 시대의 현실을 고려하여 개정하고 보완하였다.[1]

그는 영의정(Yeonguijeong)을 18년 동안 역임했으며, 총 24년간 왕실에 봉사했다. 영의정은 세 명의 임명된 왕실 총리(나머지는 우의정좌의정) 중 최고위직이었다. 그는 "정의로운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정치 철학으로 유명했다.[2]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우선순위는 농업 개선, 사회 계층 격차를 심화시키는 법률 완화, 그리고 서자천민 출신의 지원자들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 제공이었다.

2. 2. 3. 세자 폐위 반대와 유배 생활

1413년 (태종 13년) 이조판서로 재직 중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는 문제에 반대 의견을 내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되었다가, 다시 복직하였다. 1416년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그의 비행을 옹호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로 복귀하였다. 1418년 (태종 18년)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국본(國本)을 쉽게 바꾼다며 반대하다가 폐서인되어 교하(交河) 지방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태종이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날 때, 교하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 남원으로 유배지를 옮겨[18] 5년을 더 머물렀다.

양녕대군 폐위 반대는 순간적으로 태종의 분노를 초래했으나, 후에 태종은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황희는 군사요충지인 남원에서[19]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2. 2. 4. 복직과 세종의 신임

1422년(세종 4년) 2월 태종은 그를 소환하여 직첩(職牒)을 주며 세종에게 부탁하여 곧 등용토록 하였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1422년 3월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되돌려받고 관직에 복귀했으며, 10월 경시서제조,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11]

그는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고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다.[11] 그는 야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하는 호인(好人)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세종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용했다.[11]

1423년 5월 예조판서를 거쳐 7월 기근이 장기화된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백성 구휼을 잘 하고 선정을 펴서 민심을 얻었다. 그가 이임하자 관동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아쉬워하였고, 특히 1425년 강원도 삼척에서는 중국주나라 때 선정을 베풀었던 문왕의 서자인 소공에 비유하여 그의 행차가 머물렀던 곳에 대를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였으며, 지금도 '정승고개'라고 부르며 유덕을 기린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해 12월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 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특별 승진 임명하고 그대로 강원도관찰사를 겸임하게 했다. 세종대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크고 작은 잘못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과 비호를 받아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2. 2. 5. 정승 승진

1424년 6월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에 임명되고, 1425년 3월 사헌부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다. 이때 남원부사가 보낸 뇌물을 받았는데, 1425년 3월 남원부사가 보낸 뇌물을 수뢰한 고위 관리를 조사할 때 다른 재상들과는 달리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여 당시 여론에서 황희만이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0]

1426년 (세종 8년) 2월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5월 의정부우의정에 임명되었고, 판병조사를 겸임하였다. 1427년 의정부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올랐다. 1월 좌의정 겸 판이조사를 재임중 어머니 용궁 김씨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왕의 특명으로 복직되어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 도체찰사에 겸임되었다. 평안도 도체찰사로 낙산성기를 답사한 뒤 영변 약산을 요충지로 판단하고, 영변대도호부의 설치를 건의하여 평안도 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되었다.

그해 좌의정으로 교하현령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현령의 아들을 행수로 임명한 사실이 드러났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무고한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신의 사위 '서달'을 비호, 방면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일이 드러나 사헌부사간원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한달만에 복직하였다.

1428년에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를 받았는데, 박포의 난으로 박포(朴苞)가 처형된 뒤 그의 아내는 황희의 집 뒷편에 토굴을 짓고 그 안에 은신해 있었다. 1430년 (세종 12년) 말(馬) 1천여 마리 이상을 폐사하게 하여 재물 손실과 근무 과실혐의로 투옥된 제주도 감목관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사로운 정으로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2. 3. 생애 후반

1418년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을 옹호하다가 유배되었으나, 세종 즉위 후 재등용되었다. 1431년 영의정에 임명되어 1449년까지 재직하였다. 1452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

2. 3. 1. 영의정 재직

1431년(세종 13년) 9월 영의정부사에 올랐다.[21] 이후 18년 동안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1449년(세종 31) 87세로 은퇴하였다.[21]

의정부영의정으로 재직하는 동안 농업 개량, 예법 개정을 추진했고, 양반가문 자손 중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를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국방강화 정책을 펼쳐 야인과 왜 방어책을 세워 김종서최윤덕 등을 적극 중용케 하였고, 그들을 통해 4군6진 개척을 건의하였다.[21]

형관들의 남형 금지 조항을 신설하게 했고, 산에서 소나무를 벌목할 때는 반드시 관청 허가를 맡도록 규정하여 소나무 남벌 금지령을 제정하였으며, 지역 수령들의 근무실적을 조사하여 태만한 수령을 처벌하게 하는 제도를 제정했다.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우수한 품종의 곡식을 거두어서 대량 생산한 뒤 곡식종자를 보급하게 하였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하여 식량과 의복 재료를 쉽게 구하게 했다.[21]

정도전 사후 경국대전이 사문화되다 시피 하자, 새로운 법령 보완집인 《경제육전(經濟六典)》 편찬을 감독하여 간행하였다.[21]

옥사(獄事)와 국문을 결정할 때 관용(寬容)으로써 주로 처리하려 하자 죄인을 쉽게 용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형벌을 경(輕)하게 하여 실수할지언정 억울한 형벌을 할 수는 없다.”하였다.[21]

그는 "정의로운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정치 철학으로 유명했다.[2] 재임 기간 동안 농업 개선, 사회 계층 격차를 심화시키는 법률 완화, 서자나 소생 출신의 지원자들이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 제공을 우선순위로 하였다.[2]

2. 3. 2. 은퇴와 죽음

세종은 황희가 은퇴하려 하자 병으로 쇠약해져 여러 번 은퇴를 만류하였다.[1] 1449년(세종 31) 87세로 은퇴하여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1452년에 사망하였다.[1] 당시 향년 90세였다.[1]

3. 평가와 비판

황희는 사후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미화, 신격화되었다. 이들은 양반 집단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황희 신화[20]'를 창조하고 확대했다. 그의 청렴함은 청빈함으로 왜곡,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부패와 물의는 가려졌다.

황희가 죽은 이후에도 양반 관료 집단은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를 계속 재창조, 인용함으로써 군주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20]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양반 기득권 세력이 군주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20] 이후 그가 청백리라는 주장은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으나, 1970년조선왕조실록대동야승 등의 문헌을 한글로 국역하는 과정에서 그의 부패, 청탁 행위가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3. 1. 긍정적 평가

황희는 성품이 원만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20] 농업 개량을 위해 곡식 종자를 배포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하여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하려 했다.[1] 또한, 북방의 오랑캐와 남방 지역을 방비하기 위한 국방 대책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1] 고려의 예절을 명나라와 조선 시대의 현실에 맞게 개정하고 보완하는 등 폭넓은 예절을 얻기 위해서도 노력했다.[1]

그는 "정의로운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2] 재임 기간 동안 농업 개선, 사회 계층 격차를 심화시키는 법률 완화, 서얼 출신에게 과거 응시 기회 제공 등에 힘썼다.[2]

홍여하는 황희의 영정에 행장을 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3. 2. 부정적 평가

황희는 사후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미화, 신격화되었다. 양반 집단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황희 신화[20]'를 창조하고 확대했다. 그의 청렴함은 청빈함으로 왜곡,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의 부패와 물의는 가려졌다. 황희가 죽은 이후에도 양반 관료 집단은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를 계속 재창조, 인용함으로써 군주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20]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양반 기득권 세력이 군주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20] 이후 그가 청백리라는 주장은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으나 조선왕조실록대동야승 등의 문헌을 1970년대 한글로 국역하는 과정에서 그의 부패, 청탁 행위가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어느 지방 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황희에게 부탁하자 황희는 아들의 벼슬을 주는 대신 그에게 땅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땅과 벼슬자리를 교환하자는 거래라며 사대부들의 비난이 있었고, 황희의 비리 사건을 포착한 사헌부는 즉시 황희의 비리 사건을 조정 공론으로 확대하여 그를 탄핵했으며, 삼사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황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 처벌이 불가능했고,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이 심해지자 세종은 임시방편으로 황희를 잠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영의정부사로 기용한다.

3. 3. 맹사성, 윤회와의 비교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도 건강이 나빠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게 하였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았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25]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25]

그래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25]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25] 이에 반해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25]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4. 논란과 의혹

황희는 여러 논란과 의혹에 휩싸였다.

황희의 청빈함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세종은 황희에게 재상급 과전을 지급하라고 명했지만, 실제로 황희는 과전을 지급받고 있었고,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도 있어 부유했다.[20] 그는 청렴한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했으며, 이는 후대에 청빈함으로 과장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20]

조선 초기, 황희는 두문동에 은거하고 양녕대군을 지지하는 등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20]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청렴한 이미지를 내세워야 했다는 분석도 있다.[20]

황희는 사위 서달이 아전을 때려죽인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이 사건에는 맹사성, 서선 등 고위 관료들이 연루되었으며,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을 비판했다.[22]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잠시 파직했다가 다시 기용했다.

또한, 황희는 처남들의 범죄를 변호하고,[22]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소문에도 휘말렸다.[11] 박포의 아내는 황희의 집 토굴에 숨어 살았는데, 이때 황희가 그녀와 간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3]

4. 1. 청빈함에 대한 논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의 관료였던 황희에게는 직급 수준의 과전(科田)이 지급되었다. 과전을 빼앗긴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준 장본인은 바로 세종 임금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4년 3월 18일에 세종은 유배에서 복직된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다.[20] 이는 세종 즉위 이전에 황희가 충녕대군(세종) 대신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을 지지하다가 교하(交河)와 남원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반대한 황희를 복권시키면서 과전을 돌려준 것은 대단한 정치적 관용이라 할 수 있었다.[20]

황희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견해에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세종 자신이 황희에게 재상급 수준의 과전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는데, 막상 황희가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감탄하기보다는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편이 타당하다.[20] 세종이 방문했을 때 황희가 초라하게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기에 그는 정부로부터 과전을 지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20]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 다시 집안을 일으켰으며,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등이 있었으므로 크게 탐욕을 부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었다.

그는 분명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청렴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20] 이는 후대에 그를 신격화, 미화하는 과정에서 청빈함과 가난함으로 과장되었다.

4. 2. 의도적인 청렴함과 정치적 약점

청렴한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만 재상 직책의 존폐 논란이 최소화될 수 있고, 또 세력이 없는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만 재상직에 대한 군주의 견제가 완화되는 동시에 재상이 된 동료 관료의 권력 독점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20] 황희 역시 실소득과 관계없이 청렴한 생활을 대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양반 관료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재상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20] 물론 그가 사치를 피하고 청렴을 선택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 뒤에는 그 같은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20]는 견해가 있다.

또한 황희 스스로가 청빈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다.[20] 조선 초기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는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는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건국을 반대하면서 한때 두문동에 은거했었다.[20] 1416년에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충녕대군(세종) 대신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람이다. 그는 번번이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또 그런 뒤에는 매번 지조를 꺾고 새로운 정권에 참여한 인물이다.[20]

그렇기 때문에 황희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고,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흠 잡힐 만한 행동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20]

4. 3. 사위의 죄악 은폐 논란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관아의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살인 사건은 조용히 은폐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샀는데, 이때 일부 선비들의 공론에 의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여기에는 황희 뿐 아니라 의정부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사헌부대사헌 조계성까지 연루되어 있었다고 한다.

황희는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사성과 함께 살인사건의 전말을 축소, 은폐하였으며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실세라고 불리던 황희-맹사성이 동시에 수습에 나섰으니 그 왜곡과 조작이 심하였다. 이 사건은 두 정승인 황희와 맹사성의 위엄에 눌려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마는듯 했지만, 이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은 사헌부가 사건을 캐나가기 시작하자 그 배후에 여러 지방 관아 수령들 뿐 아니라 형조판서 서선이 직접적으로 사건 은폐를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선의 배후에서 편의를 봐주고 있던 핵심부에는 우의정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에 격분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와 같아." 며 세종을 흔들었고, 세종은 예의상 맹사성과 황희를 파직했다가 불과 7일 만에 다시 기용하는 또 한번의 파격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4. 4. 친인척 부패 옹호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가 법에 어긋난 일을 저질러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사간원에서 소문만 듣고 처리한 것이라며 글을 올려 변명하여 처남들을 구(救)하였다.[22]

4. 5. 간통, 범죄자 은닉 논란

황희는 매관매직으로 돈을 벌었고 남의 아내와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다.[11] 여러 비리 사건에 휘말린데다가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는 간통죄와 살인자 은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었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었다. 얼마 후 회안대군 방간을 조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난이 방원의 승리로 끝난 후 박포는 방간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참수된다.

이 때 박포의 아내는 살인 후 도망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에 토굴을 짓고 그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를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박포의 아내가 충청북도 죽산현(현재의 안성시 죽산면)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집안의 다른 종 중 한 명이 이를 알게 되었다. 박포의 아내는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23]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한성부로 들어왔다. 그 후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23] 이는 그의 집 북편의 토굴을 본 누군가에 의해 새어나가 각지로 소문이 확산되었다.

5. 저서


  • 《방촌집》
  • 《방촌선생실기》

6. 황희가 등장하는 작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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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웹사이트 뿌리깊은 나무 http://programs.sbs.[...] 2018-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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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웹사이트 단막극 <퐁당퐁당 love> http://www.imbc.com/[...] 2018-05-20
[7] 뉴스 권화운, '스카이캐슬' 캐스팅..정준호·조재윤과 호흡 https://star.mt.co.k[...] Star News 20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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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문서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10년, 12년, 13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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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서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 2월 21일 기록
[13] 문서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6월 25일 기록
[14] 뉴스 두문불출은 ‘두문동 72현’에서 나온 말이다. http://www.knyhnews.[...] 경남연합신문 2020-08-25
[15]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6] 뉴스 조선초 박석명은 '충직의 화신' 증손자 박원종은 '반정의 주역'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9-01-03
[17] 문서 지신사는 후일 직책이 도승지로 개편된다.
[18] 웹인용 인사/조직 뇌물, 청탁, 가족비리로 얼룩진 황희 정승 20년 영의정 지낸 비결은? https://dbr.donga.co[...] 동아비지니스리뷰 2014-07
[19] 웹인용 [역사의 향기/표지석] <68>남원부 관아터 https://www.sedaily.[...] 서울경제 2020-01-05
[20] 웹사이트 황희의 '청백리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2006-12-24
[21] 뉴스 영상(領相)과 총리(總理)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6-03-20
[22] 문서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1452) 2월 8일 기록
[23] 문서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1428) 6월 25일 기록
[24] 문서 세종실록 91권, 세종 22년(1440) 10월 12일 기록
[25]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6] 웹사이트 황희 정승의 진정한 자식 교육 http://ajournal.co.k[...]
[27] 서적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8] 문서 극 중에서는 영의정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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