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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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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림파는 고려 말부터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던 중소 지주 출신 사대부 세력으로,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훈구파에 대항하여 성장했다. 성종 때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등용되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며, 길재의 성리학 사상을 계승했다. 사림은 향약 보급, 서원 건립 등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나, 연산군, 중종, 명종 시기 사화를 겪으며 훈구파와 갈등을 빚었다. 선조 때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고,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후,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세분화되며 붕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세기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사림 세력이 약화되며 붕당 정치도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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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사림파
한자士林派
로마자 표기Sarim
일본어 (히라가나)しりんは
일본어 (가타카나)사림파
정치
영수김종직 (점필재 김종직)
김굉필 (한훤당 김굉필)
정여창 (일두 정여창)
조광조 (정암 조광조)
이황 (퇴계 이황)
창당조선 성종
해산1575년 (동서 분당)
분당 전사학파
후계 정당동인
종교성리학 (유교)

2. 출현과 배경

사림파는 주자학을 수학한 신흥 과거 관료들이었으며, 대지주를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비해 중소 지방 양반들이 그 중핵을 차지했다. 따라서 조선 성리학이 정치 역학의 근본이었다. 초기 사림파도 주자학자 김종직과 그의 문도들이 중핵을 이루었다.

성종 초기 7년간은 정희대비수렴청정이 이루어지면서 한명회신숙주 등 원로 대신들이 국정을 장악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으로 등장한 龜城君 이준 등 왕족이 1470년 사건으로 폐출되고 왕족의 정치 참여가 금지되면서, 훈구파와 척신들이 주요 정직을 독점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여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사림파가 급격히 성장하자 훈구파는 위협을 느꼈고, 연산군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화를 일으켜 반격했다. 1498년 김종직이 지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이 계기가 되어 많은 사림파가 사형 또는 유배되었다(무오사화). 1504년에는 폐비윤씨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림파와 훈구파를 합쳐 약 50명이 대량 처형되었다(갑자사화). 연산군은 폭정과 사치를 일삼다가 1506년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에 의한 궁중 쿠데타(중종반정)로 왕위를 폐위당했다.

중종은 즉위에 공헌한 공신·훈구파·척신들이 세력을 장악하여 조정에서 주도권을 쥐지 못했다. 1510년경 공신 세력의 기세가 약해지자 1515년 조광조를 등용하여 훈구파에 대항했으나, 조광조는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실패했고, 1519년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 신사림파 세력의 다수가 사형 또는 유배되었다(기묘사화).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남은 사림파 다수도 숙청되면서 그 이후 정국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사림파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으나, 이듬해 인종이 죽으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종이 11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문정왕후의 이복형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 반대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림파가 휘말렸다(을사사화). 1567년, 명종이 죽자 선조가 즉위하여 외척 세력이 일소되고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2. 1. 사림의 등장

길재의 제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배출되어 성종 때 중앙 정치 무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하는데,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에서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기존 정치 세력인 훈구파와 갈등을 빚으며 조선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사화로 인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서원향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학통을 이어가며 발전했다.

사림은 본래 고려 말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 사대부 중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조선 건국 시기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주로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1]

성종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을 등용하여 사림파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들은 네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훈구파의 탄압을 받았으나,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7) '동서분당'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시작을 알렸다.[1] 뚜렷한 학통은 없으나,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길재의 제자였으므로, 길재의 학통이 김종직에게 이어진 것으로 보아 사림을 길재의 학통으로 보기도 한다.[1]

사림 학자들의 철학은 고려 학자 길재(1353~1419)의 성리학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길재이색정몽주에게서 배웠다. 고려가 멸망한 후, 그는 태종의 등용 제안을 거절하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조선 왕조에 봉사하기를 거부하였다. 길재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을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성리학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2]

성종(1469~1495)이 조선의 9대 국왕이 되자,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정치적 성장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사림 학자라 불리게 되었으며, 주로 조선의 삼사(三司)에서 근무하며 세조를 도와 권력을 쌓은 훈구 관료들에게 도전하였다.[2]

2. 2. 사림의 배경

사림은 대부분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간 학자들로, 중소지주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훈구 세력에 비해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농사직설과 같은 농서가 간행되고, 목화와 약초 등의 재배가 널리 퍼지면서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장시가 발달하면서 농촌의 중소 지주인 사림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림은 농민과 공존하는 안정된 농촌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사림 학자들의 철학적 계보는 고려 학자 길재성리학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길재는 정몽주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조선 건국 후 은거하며 김숙자, 김종직 등 새로운 세대의 성리학자들을 양성하였다.[1]

성종은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사림 학자)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사림파는 주자학을 수학한 신흥 과거 관료들이었으며, 중소 지방 양반들이 그 중핵을 차지했다. 성리학은 조선 주자학 발전 원리이자 정치 역학의 근본이었다.[2]

성종 초기에는 정희대비수렴청정으로 한명회신숙주 등 원로 대신들이 국정을 장악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 이후 훈구파와 척신들이 주요 정직을 독점했고,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했다.[3]

3. 사림의 학맥

학맥상으로는 백이정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진다. 김종직의 대에 이르러 많은 제자를 양성하게 된다.[1]

사림 학자들의 철학적 계보는 고려 학자 길재(1353~1419)의 성리학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길재이색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려 왕조가 멸망한 후, 그는 조선 태종의 등용 제안을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새로운 조선 왕조에 봉사하기를 거부하였다. 길재는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을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성리학 학자들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2]

조선 성종(1469~1495)이 조선의 9대 국왕이 되자, 그는 사림 학자라 불리게 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정치적 성장을 지원하였다. 그들은 주로 조선의 삼사(三司)에서 근무하며, 조선 세조가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때 그를 도와 권력과 부를 축적한 기존의 훈구 관료들에게 도전하였다.[2]


이황 --> 유성룡, 김성일
이이 --> 김장생 --> 김집 --> 송시열

4. 이념과 강령

사림파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향촌에서 중소 지주로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던 신진 사대부들을 말한다. 이들은 유향소를 통해 지방 백성들을 교화하고 수령에게 자문하는 등 향촌 행정을 도왔다. 또한 사림파는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향약을 보급하고, 서원을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다.

4. 1. 향약의 보급

사림은 향약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이에 따라 중국의 여씨향약을 번역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점차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만들어 마을 단위로 시행하였다. 아울러 동네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 시행해 오던 계의 운영 방식을 향약 속에 흡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썼다.

4. 2. 서원

예림서원에 있는 구영당


사림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불교와 같은 다른 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이들은 충과 효를 매우 중요시하여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성리학 윤리 교과서인 소학을 널리 보급했다. 또한 서원을 세워 덕망 높은 유학자를 기르고 지방 양반 자제들을 교육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은 주세붕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후에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이 하사되었다.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받고 면세 혜택을 받았다. 이후 서원은 성리학 발전의 산실로써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늘어났으며, 학문과 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당파끼리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5. 사림의 성장과 사화

길재의 제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중심 인물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김종직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성종 때 중앙 정치 무대에 대거 등장하여 사림파로 불렸으며, 주로 삼사(三司)에서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며 유교적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사림파는 훈구파와의 갈등 속에서 연산군, 중종, 명종 대에 걸쳐 여러 차례 숙청을 당했다. (사림파의 숙청)[1]


  • 무오사화 (1498년): 김종직이 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이 문제가 되어 많은 사림파가 사형 또는 유배되었다.[1]
  •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림파와 훈구파를 합쳐 약 50명이 처형되었다.[1]
  • 기묘사화 (1519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반발한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 신사림파 세력이 다수 사형 또는 유배되었다.[1]
  • 을사사화 (1545년): 명종 즉위 후 외척인 윤원형이 권력을 잡으면서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림파가 희생되었다.[1]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서원향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여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575년 '동서분당' 사건을 계기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의 단초가 되었다.

6. 붕당의 출현

선조가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림을 중용하자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내부 분열로 붕당의 대립이 생겨났다. 붕당 출현의 배경에는 이조 전랑이 있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 정권이 신진 관료 및 김효원을 비롯한 동인과 기성관료 및 심의겸을 필두로 하는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형성되었다.[1]

이후 붕당정치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사색당파의 이념 다툼으로 변질되었고 숙종 때에는 환국으로 인한 피바람이 불게 된다.

대북의 당쟁은 15년간 계속되었고, 남인서인은 협력하여 이에 대항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이 실각하자, 정묘호란·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의 시대에는 서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남인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서인의 세력이 강해지자 1659년에는 남인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그 반동으로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은 숙청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정국에 복귀한다. 숙종 시대에는 남인과 서인의 세력을 번갈아 교체하는 환국정치가 이루어졌다.

1729년 영조소론·노론·남인·소북을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쟁을 억누르려 했지만, 영조 말년인 1762년 사도세자 사망 사건을 둘러싸고, 사도세자의 배척에 긍정적인 노론 중심의 벽파와 배척에 반대하는 남인·소론 중심의 시파로 크게 분열되고, 각 당파 내에서도 분열이 발생했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러한 세력들의 대립을 틈타 정조 옹립에 공을 세운 홍국영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사림 세력은 크게 약해졌다. 그러나 1780년 홍국영은 왕비 시해 미수 사건으로 추방되고, 정권은 사림파의 손으로 돌아왔다. 서양에서 전래된 천주교 수용을 둘러싸고, 벽파 중심의 천주교 배척파인 공서파와 시파 중심의 수용파인 신서파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이 대립은 결과적으로 배척파의 승리로 끝나고, 1791년 최초의 기독교 탄압(신해박해)이 행해져 신서파가 많은 남인은 크게 세력이 약해졌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행해지고 벽파가 실권을 장악하여 신유박해가 행해지고, 신서파가 많은 시파의 남인·소론은 몰락하고, 노론 벽파만 남는 상태가 되었다. 1803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1804년 살아남은 시파 세력 중 한 명이었던 외척 김조순이 노론 세력을 추방하고, 1805년 정순왕후가 죽자, 자신의 본관안동 김씨만을 등용하는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60여 년 동안 특정 일족이 정치를 독점하는 시대가 계속되고, 사림 세력은 소멸한다.

6. 1. 동인과 서인의 분열

선조가 사림을 중용하면서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으나, 내부 분열로 인해 붕당의 대립이 생겨났다. 붕당 출현의 배경에는 이조 전랑이 있었다. 이조 전랑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 정권은 신진 관료 및 김효원을 비롯한 동인과 기성 관료 및 심의겸을 필두로 하는 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형성되었다.[1] 이조 전랑은 삼사의 관리에 대한 인사를 주도할 수 있었고, 스스로 후임을 추천할 수 있었다. 또한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통해 이조 전랑을 지원하였다.[1]

서인은 심의겸이 이끌었는데, 그는 명종(1545~1567)의 매형으로 궁궐 서쪽에 집이 있었다. 사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왕실 인척을 부패의 원인으로 여겨 적대시했지만, 심의겸은 이황의 제자였고, 또 다른 문벌 숙청을 계획하고 있던 그의 외숙부를 탄핵하여 사림 학자들을 보호했다.[1] 이이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직에 임명하고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 간의 휴전을 조정함으로써 당파 분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이 사후 두 당파 간의 갈등은 동인이 심의겸과 정철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우세를 점함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1]

1589년, 동인 정여립은 매달 모여 학문을 연구하고 군사 훈련을 받는 모임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모반 혐의를 받았다. 그의 무리는 일본 왜구와의 싸움에서 지방 정부를 도왔기 때문에 비밀 결사가 아니었다. 반면, 정여립은 공화주의에 가까운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상은 공유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한 명의 지배자를 가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의 '대동계'라는 무리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고, 호남 지역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정여립은 체포령이 내려진 후 자살했는데, 이는 유죄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집에서는 동인들의 편지가 발견되었다.[1]

유명한 시인이자 서인의 수장이었던 정철은 이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자였으며,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과 아무리 미약한 관련이라도 있는 동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동인의 기록에 따르면 정철은 동인의 지도자 이발의 80세 된 어머니와 8세 된 아들까지 고문했다. 서인의 기록에 따르면 정철은 선조의 분노로부터 이발과 최영경을 구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노력했다. 어찌 되었든, 그 여파로 1,000명의 동인이 사망하거나 유배되었다. 선조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사림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1]

1575년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분열된 사림파는 격렬한 당파싸움인 붕당정치를 벌이게 된다.[1] 이러한 원인은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가 많아졌지만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관직을 둘러싼 당파 간의 다툼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1]

6. 2. 남인과 북인의 분열

1591년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지만,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인 북인과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되었다.[1] 초기에는 재상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우세했다. 그러나 1602년 임진왜란에서 화의를 제안한 유성룡이 실각하고, 유성룡의 부하 장수 이순신도 제거되면서 원균이 후임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노장을 중심으로 한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장을 중심으로 한 소북으로 분열되었고, 1608년 대북이 광해군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영창대군과 능창대군을 살해하고, 소북은 소수파로 남았다. 대북은 다시 “골북”, “육북”, “중북”의 세 파벌로 나뉘었다.

6. 3. 노론과 소론의 분열

선조 때 사림이 붕당으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고, 숙종환국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었다.[2] 16세기 후반, 사림파는 훈구 세력을 대체하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곧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2] 동인은 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정치적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2]

이러한 분열은 사상 학파와 지역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2] 동인은 주로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고, 남인은 이황의 제자, 북인은 조식 학파를 중심으로 결집했다.[2] 경기도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서인은 이이의 제자들이 주축이었으며, 성혼의 제자들은 소론, 송시열의 제자들은 노론을 형성했다.[2]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서인은 숙종의 외척에 대한 입장 차이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2]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소론이 주도권을 잡았고, 1701년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이 번갈아 정국을 담당하며 남인은 소수 세력으로 전락했다.[2]

7. 붕당 정치의 전개와 폐단

1575년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분열된 후, 사림파는 격렬한 당파 싸움인 붕당정치를 벌이게 된다. 이는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면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지만,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직을 둘러싼 다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1591년 동인이 정권을 장악했지만, 다시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인 북인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초기에는 재상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우세했지만, 1602년 임진왜란에서 화의를 제안한 유성룡이 실각하고, 그의 부하 장수 이순신도 제거되면서 원균이 후임이 되었다.[2]

정권을 잡은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노장을 중심으로 한 대북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장을 중심으로 한 소북으로 분열되었다. 1608년 대북이 광해군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영창대군과 능창대군한국어을 살해하고, 소북은 소수파로 남았다. 대북은 다시 “골북”, “육북”, “중북”의 세 파벌로 나뉘었다.[2]

대북의 당쟁은 15년간 계속되었고, 남인과 서인은 협력하여 이에 대항했다. 1623년 서인과 인조의 쿠데타(인조반정)로 대북이 실각하자, 정묘호란·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의 시대에는 서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남인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서인의 세력이 강해지자 1659년에는 남인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그 반동으로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은 숙청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했다.[2]

1729년, 영조소론·노론·남인·소북을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정치한국어를 실시하여 당쟁을 억누르려 했지만, 영조 말년에는 1762년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사건을 둘러싸고, 사도세자의 배척에 긍정적인 노론을 중심으로 한 벽파와 배척에 반대하는 남인·소론을 중심으로 한 시파한국어로 크게 분열되고, 각 당파 내에서도 큰 분열이 발생했다.[2]

서양에서 전래된 천주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벽파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배척파인 공서파와 시파를 중심으로 한 수용파인 신서파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이 대립은 결과적으로 배척파의 승리로 끝나고, 1791년에는 최초의 기독교 탄압(신해박해한국어)이 행해져 신서파가 많은 남인은 크게 세력이 약해졌다.

7. 1. 환국 정치

1680년 숙종이 남인의 전횡을 막고자 남인을 대량으로 추방하면서(경신환국) 서인이 정국에 복귀했다. 그러나 서인은 숙종의 외척에 대해 비판적인 소론과 타협적인 노론으로 분열되었다. 숙종 시대에는 남인과 서인의 세력을 번갈아 교체하는 환국 정치가 이루어졌다. 1694년에는 소론이 주도권을 잡았고, 1701년 이후에는 노론과 소론이 번갈아 정국을 담당했으며, 남인은 소수 세력이 되었다.[2]

7. 2. 세도 정치

19세기에 들어와 조선 정치는 학문적 당파가 아닌 인척 관계가 왕위를 장악하게 되면서 변화했다. 19세기 대부분 동안 안동 김씨가 정부를 장악하여 전국적으로 극심한 부패가 만연했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러한 세력들의 대립을 틈타 정조 옹립에 공을 세운 홍국영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사림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1780년, 홍국영은 왕비 시해 미수 사건으로 추방되고, 정권은 사림파의 손으로 돌아왔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행해지고 벽파가 실권을 장악하여 기독교 대탄압(신유박해)이 행해졌다. 신서파가 많은 시파의 남인·소론은 몰락하고, 노론 벽파만 남는 상태가 되었다.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그만두자, 1804년, 살아남은 시파 세력 중 한 명이었던 외척인 김조순이 노론 세력을 추방하고, 1805년에 정순왕후가 죽자, 자신의 본관안동 김씨만을 등용하는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이후 60여 년 동안 특정 일족이 정치를 독점하는 시대가 계속되고, 사림 세력은 소멸한다.

참조

[1] 서적 Lee (1984)
[2] 서적 Lee (1984)
[3] 문서 심의겸 - 기호학파(율곡학파, 우계학파)
[4] 문서 김효원 - 영남학파(퇴계학파, 남명학파) 및 화담학파
[5] 문서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주로 퇴계학파. 류성룡, 이원익 등
[6] 문서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주로 남명학파. 이산해, 정인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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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서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홍여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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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서 인조반정 주도세력. 이귀, 김류, 최명길, 심기원 등
[13] 문서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김상헌 등
[14] 문서 원두표 및 그 추종자들
[15] 문서 김자점 및 그 추종자들
[16] 문서 김집 및 그 추종자들
[17] 문서 김육 및 그 추종자들
[18] 문서 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
[19] 문서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윤휴, 윤선도, 허목, 심광수 등
[20] 문서 송시열 및 그 추종자들
[21] 문서 윤증 및 그 추종자들
[22] 문서 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박문수 등
[23] 문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이인좌, 심유현, 김일경 등
[24] 문서 척신정치 반대. 김종수 등
[25] 문서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홍봉한, 정후겸, 김상로 등
[26] 문서 천주교 박해 주장. 홍의호, 홍낙안 등
[27] 문서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안정복, 신후담 등
[28] 문서 천주교 박해 반대.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
[29] 문서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심환지, 김달순 등
[30] 문서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홍국영, 채제공, 김조순, 심상규 등
[31] 문서 정순왕후 사망 이후 벽파 세력을 전멸시키고 정권 독점. 김조순, 박종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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