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률 (구세군)
1. 개요
황종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에 활동한 구세군의 지도자이다. 1909년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에 입대하여, 1933년 조선인 최초로 구세군 사령관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에 동조하고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참여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으며, 광복 후 구세군 교단을 재건하고 한국 전쟁 중에는 인민군을 환영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는 한국 구세군 조직과 행정의 기초를 세운 지도자였으며,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했다. 1953년 정령 계급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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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86년 10월 15일 |
|---|---|
| 사망 | 1963년 1월 23일 (향년 76세) |
| 직업 | 목사 |
| 소속 교단 | 구세군 |
| 주요 활동 | 구세군 사관 구세군 대한본영 참령 구세군 대한본영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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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여부 | 친일반민족행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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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 기관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 결정 년도 | 2009년 |
| 친일 행위 상세 내용 | 1943년 8월 잡지 《신시대》에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징병제 감사 익성대회’에 참가 징병 감사 강연에 참여 |
| 서훈 | 건국포장 (200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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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이원수 (작가)
이원수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여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작품으로 논란이 있다. -
1887년 출생 -
윌리엄 프롤리
미국의 배우이자 보드빌리언인 윌리엄 프롤리는 1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시트콤 《아이 러브 루시》의 프레드 머츠 역과 《내 세 아들》의 '버브' 오케이시 역으로 특히 유명하며 《아이 러브 루시》로 다섯 차례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
1887년 출생 -
장 아르프
장 아르프는 프랑스-독일계 예술가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콜라주, 부조, 조각 등의 작품 활동을 했으며,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랑프리 등을 수상했다. -
1961년 사망 -
최인규 (1919년)
최인규는 연희전문학교와 뉴욕대학교를 졸업 후 대한교역공사와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4대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3·15 부정선거의 총책임자로 지목되어 4·19 혁명 이후 구속,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
1961년 사망 -
이정재 (1917년)
이정재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활동한 폭력배이자 정치 깡패로, 경찰 출신으로 동대문 상인 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자유당과의 유착을 통해 정치 테러에 가담했으나,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사형당해 권력과 배신의 삶을 마감했다.
2. 생애
황종률은 1909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에 입대하여 1953년 은퇴할 때까지 구세군 안팎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는 구세군사관학교 교관, 영국 런던 만국총회 참석, 1933년 조선인 최초 구세군 사령관 등 초기에는 국제적인 경험을 쌓고 구세군 내에서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담화 발표,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참여, 학병 지원 유세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광복 후에는 구세군 재건에 힘썼으나, 한국 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 환영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으로 피난하여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구세군 조직과 행정의 기초를 다진 핵심적인 지도자였으며, 교단 외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구세군 입대
1909년 9월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에 입대했다. 1910년 경성 구세군사관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뒤 구세군 서대문영 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1914년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구세군 만국총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2.2. 구세군 지도자 활동
1920년 이후부터 구세군 해주 지방관, 구세군 서울남자 육아원장, 구세군 충남 지방관을 역임했다. 1933년 3월에는 외국인이 맡아오던 사령관 자리에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올라 제8대 사령관 겸 구세군 전장서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10월 영국 구세군 본영과 영국인 선교사의 지휘를 받던 조선구세군이 일본 구세단에 강제로 편입된 뒤부터 1945년 7월까지 총무부장으로 근무했다.
광복 후 1946년 구세군 교단을 재건해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개신교 행사 개최에 구세군 대표로서 참가한 일이 있다. 인민군이 후퇴한 뒤 부산으로 피난하여 한경직이 회장을 맡아 조직한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에 감리교의 유형기, 성결교의 김창근과 함께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황종률은 한국 구세군 조직과 행정의 기초를 세운 핵심적인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아동복지회,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 대한성서공회 등 교단 밖에서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53년 정령 계급으로 은퇴하였다.
2.3.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 황종률은 구세군 지도자로서 일제에 협조했다. 기독교 교단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 등에 동참했을 때, 구세군의 신사참배 계획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1943년 11월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라는 어용 단체에 구세군 대표로 참가했다.
1942년에는 조선종교전시보국회가 파견하는 순회강연반에 포함되어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유세를 폈다. 이때 황종률은 불교계 혜화전문학교 교수 김동화와 함께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순회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서양 종교에 대한 탄압 또한 거세졌고, 구세군은 1943년 폐쇄되었다.
2.4. 광복 이후 활동
1946년 구세군 교단을 재건해 서기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개최한 개신교 환영 행사에 구세군 대표로 참가했다. 인민군이 후퇴한 뒤 부산으로 피난하여 한경직이 회장을 맡은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에 감리교의 유형기, 성결교의 김창근과 함께 부회장으로 참여했다.
2.5. 교단 외부 활동 및 은퇴
황종률은 한국 구세군 조직과 행정의 기초를 세운 핵심적인 지도자였으며, 기독교아동복지회,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 대한성서공회 등 교단 밖에서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53년 정령 계급으로 은퇴하였다.
3. 논란 및 평가
황종률은 일제 강점기 구세군 지도자로서 친일 행적과 관련된 논란이 있다. 1943년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구세군 대표로 참가했으며, 1942년에는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유세를 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환영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이후 부산으로 피난하여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황종률은 한국 구세군의 조직과 행정의 기초를 세운 지도자로 평가받으며, 기독교아동복지회,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 대한성서공회 등 교단 밖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1. 친일 행적 논란
일제 강점기 말기 구세군 지도자로서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다. 기독교 교단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 등에 동참했을 때 구세군의 신사참배 계획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고, 1943년 11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라는 어용 단체에 구세군 대표로 참가했다.
1942년에는 조선종교전시보국회가 파견하는 순회강연반에 포함되어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유세를 폈다. 이때 황종률은 불교계 혜화전문학교 교수 김동화와 함께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순회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서양 종교에 대한 탄압 또한 거세졌고, 구세군은 1943년 폐쇄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2. 한국 전쟁 중 행적 논란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황종률은 구세군 대표로서 조선인민군 환영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부산으로 피난, 한경직 목사가 회장을 맡은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에서 감리교 유형기, 성결교 김창근과 함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3.3. 긍정적 평가
황종률은 한국 구세군 조직과 행정의 기초를 세운 핵심적인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기독교아동복지회,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 대한성서공회 등 교단 밖에서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4. 부정적 평가
황종률은 일제 강점기 말기 구세군 지도자로서 일제에 협조하였다. 기독교 교단이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 등에 동참했을 때 구세군의 신사참배 계획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고, 1943년 11월 조선전시종교보국회라는 어용 단체에 구세군 대표로 참가했다.
1942년에는 조선종교전시보국회가 파견하는 순회강연반에 포함되어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유세를 폈다. 이때 황종률은 불교계의 혜화전문학교 교수 김동화와 함께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순회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서양 종교에 대한 탄압 또한 거세졌고, 구세군은 1943년 폐쇄되었다.
한국 전쟁 때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뒤, 개신교 행사 개최에 구세군 대표로서 참가한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