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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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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관황후는 권력자 곽광의 외손녀이자 상관안의 딸로, 기원전 83년 6세의 나이로 전한 소제의 황후가 되었다. 상관 가문은 곽광과 권력 다툼을 벌였으나, 모반 혐의로 몰락했다. 소제 사후, 창읍왕이 즉위했으나 폐위되고 선제가 즉위하면서 태황태후가 되었다. 곽광 사후 곽씨 일족이 몰락한 뒤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쓸쓸한 만년을 보냈으며, 기원전 37년에 사망하여 소제의 능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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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상관황후
다른 이름효소태후, 효소태황태후
시호효소황후(孝昭皇后)
통치 정보
작위전한의 황후
재위 기간기원전 83년 4월 22일 – 기원전 74년 7월 18일
전임 황후황후 위씨
후임 황후황후 허씨
생애
출생기원전 88년
사망기원전 37년 9월 30일 (52세)
장지평릉
가족 관계
배우자한 소제
아버지상관안
어머니곽씨 (곽광의 딸)

2. 생애

상관씨는 상관걸의 손녀이자 상관안의 딸이며, 어머니는 곽광의 딸이었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 아버지 상관안과 갑장공주 등의 노력으로 불과 6세의 나이에 소제의 황후가 되었다.[24][25][23] 이로 인해 아버지 상관안은 거기장군을 거쳐 표기장군이 되고 상락에 봉해지는 등[26][23][24][25] 상관씨 가문은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리며 곽광과 대립했다.[24]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할아버지 상관걸과 아버지 상관안이 곽광 제거 및 황제 폐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반 죄로 주살되었다. 그러나 상관황후는 나이가 어리고 곽광의 외손녀였기에 연루되지 않고 황후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25] 이후 곽광은 외손녀인 황후가 소제의 유일한 총애를 받아 후사를 낳기를 원하여 다른 후궁들의 접근을 막기도 했으나,[25] 소제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는 못했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후사 없이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25] 15세의 상관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25] 뒤이어 즉위한 창읍왕 유하가 황제로서 부적합한 행동을 보이자, 곽광 등 대신들의 폐위 상소를 승인하였다.[25] 이후 유병기(선제)를 새로운 황제로 맞이할 것을 재가하였고, 선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로 존호를 받았다.[25]

선제 즉위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기원전 66년 외가인 곽씨 일족이 모반 혐의로 주살되는 와중에도 태황태후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25] 이후 원제 시대까지 생존하다가 건소 2년(기원전 37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편 소제의 능인 평릉(平陵)에 합장되었다.[25]

2. 1. 어린 시절과 혼인

효소황후 상관씨는 상관걸의 손녀이자 상관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곽광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상관걸과 외할아버지 곽광은 흉노 출신 관리 김일제와 함께 기원전 87년, 7세의 나이로 즉위한 어린 소제의 공동 섭정이었다.[10] 그러나 김일제가 기원전 86년에 사망한 후, 실질적인 권력은 곽광에게 집중되었고 상관걸은 자신의 낮은 지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상관걸과 상관안은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어린 상관씨를 황후로 만들고자 했다. 기원전 84년, 상관걸은 당시 4살이던 손녀를 소제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곽광은 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다.[11] 이에 상관안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소제의 누이이자 양육을 맡고 있던 악읍공주(또는 갑장공주)와 그녀의 연인 정외인에게 접근했다. 상관안은 정외인에게 결혼이 성사되면 곽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공주와의 관계를 공인받도록 돕겠다고 설득했고, 악읍공주는 이를 받아들였다.[11]

그 결과 기원전 84년 말, 어린 상관씨는 황제의 후궁인 첩여로 먼저 입궁했다.[11] 이후 시원 4년(기원전 83년) 갑인일(음력 3월)[23] (양력 4월 24일[12]), 불과 6세의 나이로 황후에 책봉되었다.[24][25] 같은 해 6월에는 고제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을 치렀다. 황후의 아버지가 된 상관안은 이 일로 거기장군에 임명되었고,[26] 나중에는 표기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인 기원전 82년 6월에는 상락후(桑樂侯)라는 열후 작위까지 받았다.[23][24][25] 이러한 빠른 승진은 마침 곽광이 휴가를 간 사이 할아버지 상관걸이 영상서사(정부 문서 총괄) 업무를 대행하며 신속하게 처리했기에 가능했다. 이 혼인을 계기로 상관씨 가문은 외척의 지위를 확보하고 곽광과의 본격적인 권력 다툼을 시작하게 된다.[24]

2. 2. 황후 시절

상관안은 아버지 상관걸과 당시 권력자였던 곽광의 도움 없이, 아익공주와 그녀의 애인 정외인을 통해 자신의 딸을 소제의 황후로 만들고자 했다. 곽광은 황후 후보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상관안은 아익공주와 정외인을 설득하여 딸을 먼저 첩여로 입궁시켰다. 시원 4년(기원전 83년) 갑인일, 상관씨는 불과 6세의 나이로 황후에 책봉되었다.[23][24][25] 같은 해 6월에는 고제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을 치렀다. 황후의 아버지 상관안은 거기장군에 임명되었고,[26] 이후 표기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인 기원전 82년 6월에는 상락(桑樂侯)에 봉해졌다.[23][24][25] 이러한 신속한 조치는 곽광이 휴가를 간 사이, 할아버지 상관걸이 영상서사(정무 총괄) 직을 대행하며 이루어졌다. 이후 상관씨 일가는 외척의 지위를 이용하여 곽광과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24]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상관걸과 상관안 부자는 아익공주, 소제의 형으로 황제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연 효왕 유단, 그리고 국가 재정 독점 체제가 약화되는 것에 반감을 가진 부승상 상홍양 등과 결탁하여 곽광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13][14][15] 처음에는 유단이 소제에게 곽광이 황제의 권한을 부당하게 행사한다고 모함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공모자들은 소제가 조사를 명하면 즉시 곽광을 체포하여 처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14세였던 소제는 보고서의 내용이 조작되었음을 간파하고 곽광의 무죄를 선언하며 음모를 막았다.

같은 해 말, 공모자들은 다시 곽광 제거를 시도했다. 아익공주가 곽광을 연회에 초대하여 살해하고, 소제를 폐위시킨 뒤 유단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획이었다.[15] (일설에는 상관씨 가문이 유단마저 제거하고 상관걸이 직접 황제가 되려 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음모는 아익공주의 하녀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었고, 상관걸, 상관안을 포함한 공모자들과 그 일족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아익공주와 유단은 자결하였다.[9] 상관황후는 나이가 어렸고 곽광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아 황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25] 이로써 상관황후는 어린 나이에 친정 가문 전체가 몰락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7] 황후의 어머니는 이전에 사망하여 무릉곽 동쪽에 장사지내고 경부인(敬夫人)으로 추존되었으며, 무덤을 지키도록 조치되었다. 상관황후는 개인 노비를 보내 상관걸과 상관안의 무덤을 돌보게 했다.[25]

곽광은 외손녀인 상관황후가 소제의 유일한 총애를 받아 후사를 낳기를 원했다. 소제가 병을 앓자, 곽광의 의중을 파악한 신하들과 어의들은 다른 후궁들이 소제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궁녀들에게 활동이 불편한 바지를 입혀 황제의 손길이 닿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관황후는 소제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다.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하자,[25] 당시 15세였던 상관황후는 황태후로 신분이 격상되었다. 어린 나이와 외척 가문의 몰락으로 인해 황후 시절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2. 3. 창읍왕 폐위와 선제 즉위

기원전 74년, 소제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25] 곽광 등 대신들은 무제의 손자 중 하나인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맞이했다.[16][17][18] 이로써 당시 15세였던 상관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19][25]

그러나 창읍왕 유하는 황제가 된 후 즉시 자신의 옛 창읍 출신 부하들을 무분별하게 등용하고,[16][17][18] 소제의 상중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예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유람했으며, 고기 섭취와 성관계를 삼가지 않았고, 황제의 옥새 관리도 소홀히 했다. 심지어 소제의 상중에 자신의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았다.[25]

황제로서의 이러한 부적절한 행동은 그를 옹립했던 곽광을 크게 실망시켰다. 곽광은 농상서(農桑署) 장관 전연년의 제안을 받아들여 창읍왕을 폐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른 고위 관리들을 소집하여 폐위 계획을 알리고, 거부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위협하며 동참을 강요했다.

곽광과 대신들은 집단으로 상관 황태후의 궁궐로 가서 창읍왕의 죄상을 보고했다. 상관 황태후는 이들의 폐위 계획에 동의했으며,[25] 즉시 황제의 창읍 측근들의 궁궐 출입을 금지하고, 장안에게 명령하여 200명에 달하는 그들을 체포하게 했다. 이후 아무것도 모른 채 소환된 창읍왕은 보좌에 앉아 보석으로 만든 예복을 입은 상관 황태후와 그 옆에 늘어선 대신들을 보고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곽광과 고위 관료들은 창읍왕의 주요 죄목(상중 기간 예법 위반, 옥새 관리 소홀, 부적절한 측근 등용 및 포상, 상중 연회 및 유흥, 부적절한 제사 등)을 열거한 탄핵 조항을 상관 황태후 앞에서 낭독했다. 상관 황태후는 창읍왕을 직접 꾸짖은 뒤 탄핵 조항을 승인하고 창읍왕의 폐위를 명령했다.[25]

창읍왕이 폐위된 후 약 한 달 동안 상관 황태후는 보고를 받으며 모든 중요한 국가 대사를 직접 처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하후승에게서 유교 경전을 배우기도 했다.

곽광은 새로운 황제 후보를 물색했다. 그는 무제의 유일한 생존 아들인 광릉왕 유서를 황위 계승에서 배제하고,[16] 병길의 추천에 따라 새로운 인물을 찾았다. 그는 바로 과거 무고의 난 때 여태자 유거(상관 황후의 외증조부)의 손자로 민간에서 자란 유병기였다.

곽광은 이 제안을 상관 황태후에게 정식으로 올렸고, 황태후는 이를 승인했다. 평민 신분이었던 유병기를 바로 황제로 세울 수는 없었기에, 먼저 양무후(陽武侯)로 봉한 뒤 같은 날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가 바로 선제이다.[25] 선제가 즉위하면서 상관 황태후는 태황태후의 존호를 받았으며, 남은 생애 동안 이 지위를 유지했다.[25]

2. 4. 태황태후 시절

기원전 74년, 소제가 아들 없이 갑작스럽게 붕어하자, 당시 15세였던 상관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곽광 등 대신들은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그의 행동이 황제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폐위를 결정하고 상관 황태후에게 상소했으며, 황태후는 이를 승인했다. 이후 곽광은 유거 태자의 손자인 유병기를 새로운 황제로 추천했고, 이 역시 상관 황태후의 승인을 받았다.[25] 유병기가 선제로 즉위하면서 상관 황태후는 태황태후의 존호를 받게 되었다.[25]

선제가 즉위한 후, 어린 나이의 상관 태황태후는 정치 전면에서 물러나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종종 자신의 외가 친척인 곽씨 일족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이했으며, 선제의 첫 황후인 허평군과도 자주 식사를 함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기원전 71년, 그녀의 외조모인 현(顯)이 자신의 딸이자 상관 태황태후의 이모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허평군을 독살했을 때, 상관 태황태후는 이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0][21][22] 오히려 곽성군이 황후가 된 후, 상관 태황태후와 곽 황후의 관계는 이전 허평군과의 관계보다 더 서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68년, 외할아버지이자 막강한 권력자였던 곽광이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도 아들 곽우(霍禹)를 비롯한 곽씨 일족은 여전히 높은 관직을 유지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선제는 곽씨들의 오만함에 불만을 품고, 형식적인 지위는 유지시키면서 점차 실권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는 곽씨 일족의 불안감을 키웠다. 기원전 67년, 선제가 사망한 허평군의 아들 유석(훗날 원제)을 태자로 책봉하자, 곽 황후의 어머니 곽현은 딸에게 태자 살해를 지시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66년, 곽현이 자신이 허평군을 독살했음을 아들과 조카들에게 실토하면서 곽씨 일족은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곽우를 비롯한 곽씨 일족은 선제를 폐위하고 곽우를 황제로 세우려는 반란을 계획했다. 그들은 상관 태황태후에게 연회를 열어 정적들을 유인, 살해하려 했으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곽씨 일족 전체가 처형되었고,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상관 태황태후는 외가 전체를 잃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25]

상관황후의 묘, 산시성, 셴양 핑링(平陵)


곽씨 가문이 몰락한 후 상관 태황태후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녀는 유교 경전을 가르쳐 준 스승 하후승(夏侯勝)이 사망했을 때 상복을 입고 극진히 예우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외척의 권력 다툼 속에서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되고 황태후, 태황태후의 자리에 올랐으나, 외가가 몰락한 후에는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 없이 조용히 지낸 것으로 보인다.

건소 2년(기원전 37년), 선제의 아들 원제의 치세에 상관 태황태후는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남편인 소제의 능인 평릉(平陵)에 합장되었다.[25]

3. 가족 관계


  • '''아버지''': 상관안(上官安중국어), 상락후(桑樂侯)[23][24][25]
  • * '''친할아버지''': 상관걸( 上官桀중국어), 안양후(安陽侯)[24]
  • '''어머니''': 곽씨(霍氏), 경부인(敬夫人)으로 추존[25]
  • * '''외할아버지''': 곽광( 霍光중국어), 박륙후(博陸侯)[24]
  • ** '''고모''': 곽성군( 霍成君중국어), 한 선제의 황후
  • '''남편''': 한 소제( 漢 昭帝중국어)[25] - 슬하에 자녀 없음.
  • * '''시아버지''': 한 무제( 漢 武帝중국어)
  • * '''시어머니''': 조첩여( 趙婕妤중국어)

4. 평가 및 기타

(내용 없음)

4. 1. 평가

상관황후는 6세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소제의 황후가 되었다.[24][25] 남편인 소제 역시 어렸기 때문에, 결혼 초기 상관황후가 조정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황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80년, 아버지 상관안과 할아버지 상관걸을 포함한 친정 상관씨 가문이 곽광과의 권력 다툼 끝에 모반 혐의로 멸족되는 비극을 겪었다.[7][9][15] 당시 황후는 나이가 어렸고 곽광의 외손녀였기 때문에 연좌되지 않고 황후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25] 이는 어린 황후가 정치적 격변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외할아버지인 곽광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 의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곽광은 황후가 소제의 유일한 총애를 받아 후사를 낳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소제가 다른 후궁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25]

기원전 74년, 소제가 후사 없이 2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25] 15세의 상관황후는 과부가 되었고 황태후로 격상되었다. 이후 곽광 등 대신들의 결정에 따라 창읍왕 유하를 폐위하고[25] 선제를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명목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선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25]

선제 시대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비교적 조용한 삶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선제의 첫 황후인 허평군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기원전 71년 곽광의 부인 선(顯)이 자신의 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허평군을 독살했을 때[20][21][22] 이 음모에는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후 황후가 된 이모 곽성군과의 관계는 허평군과의 관계만큼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6년, 곽광 사후 그의 아들 곽우 등이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곽씨 일족마저 처형되면서[25] 상관황후는 외가 쪽 가족마저 모두 잃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외척 가문의 몰락 속에서도 태황태후의 지위를 유지하며 원제 시대까지 살다가 기원전 37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소제의 평릉에 합장되었다.[25]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되었으나 외척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실권을 누리지 못하고 개인적인 비극을 연이어 겪으며 정치적 격변기의 희생양이 된 인물로 평가받는다.

4. 2. 대중 매체


  • 황후: 장안, 후궁의 난 (2008년, 중국) - 셰팡
  • 운중가 ~사랑을 노래하다~ (2013년, 중국) - 마오 샤오퉁

참조

[1] 문서 "jia'yin'' day of the 3rd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Shi'yuan'' era, per vol.23 of ''Zizhi Tongjian''"
[2] 문서 Son of Shangguan Jie
[3] 문서 eldest daughter of Huo Guang
[4] 문서 Lady Shangguan's biography in Book of Han indicated that she was 6 (by East Asian reckoning) when she was made empress.
[5] 문서 "''dingyou'' day of the leap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Jian'zhao'' era, per vol. 29 of ''Zizhi Tongjian''"
[6] 서적 Overt and Covert Treasures: Essays on the Sources for Chinese Women's History https://books.google[...]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Press
[7] 논문 Zhao Chongguo: A Professional Soldier of China's Former Han Dynasty https://muse.jhu.edu[...] 2008
[8] 서적 Civil-Military Relations in Chinese History https://www.taylorfr[...] Routledge 2014
[9] 서적 Rumor in Early Chinese Empire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
[10] 논문 Reasons for Changing the System of Prime Ministers in the Western Han Dynasty https://www.tandfonl[...] 2013-07
[11] 논문 Spring Colors in the Han Palace: A Late Qing Reappraisal of the Life of Empress Zhang (202–163 BCE) https://brill.com/vi[...] 2022-06-09
[12] 문서 jiayin day of the 3rd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Shi'yuan era, per vol. 23 of Zizhi Tongjian
[13] 간행물 Permeation of Traditional Genres into Fiction https://doi.org/10.1[...] Springer Nature 2024-01-25
[14] 논문 Discourses on Salt and Iron: A First Century B.C. Chinese Debate over the Political Economy of Empire https://doi.org/10.1[...] 2012-06-01
[15] 논문 Inevitable Treason: Dong Zhongshu's Theory of Historical Cycles and Early Attempts to Invalidate the Han Mandate https://www.jstor.or[...] 1995
[16] 논문 From Stone Canal to Orchid Terrace: Libraries and Archives in the Two Han Capitals https://brill.com/vi[...] 2023-12-12
[17] 논문 Hairstyle and Headgear Transgressions, and the Concept of "Fuyao" (Ornamentation Anomaly) in Early China https://www.jstor.or[...] 2019
[18] 간행물 2 Emperor Ming and Emperor Zhang (57–88) https://brill.com/di[...] Brill 2024-01-25
[19] 간행물 4 The Dowager Deng and Emperor An (106–125) https://brill.com/di[...] Brill 2024-01-25
[20] 간행물 Convention and Nature: The Outbreak of the Rebellion (756–57) https://brill.com/di[...]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24-01-25
[21] 간행물 From Women in Taiwan's History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 to Recent Case Studies of Gender Practice Under the Academic Glass Ceiling https://doi.org/10.1[...]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24-01-25
[22] 웹사이트 Male brushstrokes and female touch: medical writings on childbirth in Imperial China https://escholarship[...] 2024-01-25
[23] 문서 반고: 《한서》 권7 소제기제7
[24] 문서 반고: 《한서》 권68 곽광김일제전 중 곽광
[25] 문서 반고: 《한서》 권97상 외척전(外戚傳) 상 중 효소상관황후
[26] 문서 반고: 《한서》 권19 하 백관공경표제7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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