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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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는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대제사장으로,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탈취했으나, 헤로데 대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처형당했다. 그는 로마의 간섭과 가족의 수난을 겪었으며, 파르티아와 동맹하여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안티고노스 2세의 죽음으로 하스몬 왕조는 멸망하고 헤로데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의 무덤과 쿰란 문서와의 연관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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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
히브리어 | (마타티야후) |
통치 | |
칭호 | 유대의 왕 및 대사제 |
왕조 | 하스몬 왕조 |
통치 기간 | 기원전 40년 – 기원전 37년 |
선임자 | 아리스토불루스 2세 |
후임자 | 왕정 폐지 |
대사제 선임자 | 히르카누스 2세 |
대사제 후임자 | 하나넬루스 |
가계 | |
아버지 | 아리스토불루스 2세 |
종교 | |
종교 | 유대교 |
2. 즉위 전
안티고노스 2세는 하스몬 왕조의 왕자로,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기원전 63년, 아버지와 함께 폼페이우스에게 포로로 잡혀 로마로 끌려갔으나, 기원전 57년에 탈출하여 유다로 돌아왔다. 로마군에 대항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원로원은 그를 석방했지만 왕조적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형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안티고노스는 숙부 히르카누스 2세가 안티파트로스의 꼭두각시라고 주장하며 로마의 도움을 얻어 그를 전복하려 했다.
2. 1. 로마의 간섭과 가족의 수난
기원전 63년,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다투다 로마 장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 의해 퇴위당하면서, 안티고노스는 아버지 및 자매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다.[1] 아버지와 함께 한 차례 탈옥해 유다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1] 이후 안티고노스와 그의 자매들은 유대에 남는 것이 허락되었다.[1] 그 사이 안티고노스의 형 알렉산드로스는 종종 로마와 히르카노스 2세에게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패배했다.기원전 49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실권을 잡자, 카이사르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석방하여 유대로 보냈으나, 그는 폼페이우스파에게 독살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폼페이우스의 명령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처형되었다. 안티고노스는 폼페이우스 몰락 후 히르카노스 2세와 그의 오른팔 안티파트로스를 카이사르에게 고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기원전 47년, 시리아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방문하여 안티파테르와 히르카누스 2세의 찬탈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기원전 42년에는 매형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유다 정부를 장악하려 했지만, 헤로데에게 패배했다.[1]
3. 파르티아와의 동맹과 왕위 탈취
기원전 40년, 안티고노스 2세는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고 왕위 탈취를 시도했다.[1] 파르티아는 시리아를 침공했는데, 유대 왕좌에 반(反)로마 통치자가 앉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노스가 그들에게 많은 양의 금과 여성 노예 500명을 약속하자 파르티아는 병사 500명을 지원했다.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히르카노스 2세는 귀가 잘린 채 바빌론으로 보내졌으며, 헤로데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쳤다. 이후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에 의해 공식적으로 왕이자 대제사장으로 선포되었다.[1]
3. 1. 파르티아의 지원과 예루살렘 점령
기원전 40년,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와 동맹을 맺고 왕위 탈취를 노렸다. 파르티아의 태수 바르자프라네스와 왕자 파코로스는 안티고노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로 진출했다. 헤로데와 파사엘은 안티고노스 군을 요격했지만, 파코로스에게 속은 파사엘과 히르카노스 2세는 바르자프라네스에게 갔다가 붙잡혔다.[1] 헤로데는 친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마사다, 이어서 이집트를 거쳐 로마로 망명했다. 파르티아 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안티고노스를 왕위에 앉혔다. 안티고노스는 히르카노스의 양쪽 귀를 잘라 대제사장으로 복위하지 못하게 했다. 파사엘은 자결했다(독살되었다고도 한다).[1]3. 2. 히르카노스 2세와 파사에로스의 최후
기원전 40년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와 동맹해 왕위 탈취를 노렸다. 파르티아의 태수 바르자흐라네스와 왕자 파코로스는 안티고노스의 요구에 따라 시리아로 진출했다.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로데와 파사엘은 안티고노스 군을 요격했지만 파코로스에 속은 파사엘과 히르카노스 2세는 바르자플라네스를 찾았다가 붙잡혔다. 헤로데는 친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탈출해 마사다, 이어 이집트를 거쳐 로마로 망명했다.[1] 파르티아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해 약탈하고 안티고노스를 왕위에 올렸다.[1] 안티고노스는 히르카노스의 귀를 베어내어 대제사장으로 복위하지 못하게 했다.[1] 파사엘은 자결했다(독살되었다고도 한다).[1]4. 죽음과 하스몬 왕조의 종언
기원전 40년, 헤로데는 원로원의 추천과 삼두정치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으로 유대 속주의 왕으로 임명되었다.[2] 헤로데는 기원전 39년에 유대로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다. 기원전 38년 봄, 헤로데는 갈릴리 지역과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유대 지역을 장악했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예루살렘 포위를 봄까지 연기했다. 로마군이 도시를 점령했지만, 안티고노스의 지지자들은 로마군이 성전 내부 뜰에 도달할 때까지 저항했다.[3] 안티고노스는 안티오키아로 끌려가 처형되었고,[4] 이로써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렸다.[1]
4. 1. 헤로데의 반격과 예루살렘 함락
기원전 40년경, 헤로데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받아 원로원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지명되어 시리아를 거쳐 유대로 향했다.[2] 헤로데는 마사다에 남은 친족을 구출하고 예루살렘을 압박했다. 헤로데의 동생 요세푸스가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시리아 총독 소시오스의 원군 덕분에 헤로데 측에 전세는 우위가 되었다.[3] 기원전 37년 9월,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안티고노스는 소시오스에게 항복했다. 안티고노스는 구명을 탄원했지만, 소시오스는 그를 안티고네(안티고노스의 여성명)라고 부르며 비웃고 포박했다. 안티고노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인도될 수 있도록 안티오키아로 보내져 참수당했다.[4] 안티고노스가 죽은 뒤 헤로데가 헤로데 왕조를 열었고, 하스몬 왕조는 멸망했다.[1]4. 2. 안티고노스 2세의 처형
기원전 37년 9월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안티고노스는 소시오스에게 항복했다.[1] 안티고노스는 목숨을 구걸했지만, 소시오스는 그를 '안티고네'(안티고노스의 여성 이름)라고 조롱하며 체포했다.[1] 이후 안티고노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넘겨지기 위해 안티오키아로 보내져 참수되었다.[1]요세푸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안티고노스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했다.[5]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그의 ''로마사''에서 안티고노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며, "안토니우스는 이 사람들[유대인]을 어떤 헤로데에게 맡겨 통치하게 했지만, 안티고노스는 십자가에 묶어 채찍질했다. 로마인들이 다른 어떤 왕도 받지 않았던 형벌이었고, 그래서 그를 죽였다"라고 기록했다.[5]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가 안티고노스의 목을 베었는데, "그 형벌이 왕에게 가해진 최초의 사례"라고 주장한다.[6]
4. 3. 하스몬 왕조의 몰락과 헤로데 왕조의 시작
기원전 40년경, 헤로데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받아 원로원에서 유대의 왕으로 지명되어 시리아를 거쳐 유대로 향했다. 헤로데는 마사다에 남은 친족을 구출해 예루살렘을 압박했다. 헤로데의 동생 요세푸스가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지만 시리아 총독 소시오스의 원군 덕분에 헤로데 측에 전세는 우위가 됐다. 기원전 37년 9월 예루살렘은 함락됐고 안티고노스는 소시오스에게 항복했다. 안티고노스는 구명을 탄원했지만 소시오스는 그를 안티고네(안티고노스의 여성명)라고 부르며 비웃고 포박했다.[2] 안티고노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인도될 수 있도록 안티오키아로 보내져 참수당했다.[4] 안티고노스의 죽음으로 하스몬 왕조는 멸망하고, 헤로데가 헤로데 왕조를 열었다.[1]요세푸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안티고노스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한다.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며 그의 ''로마사''에서 "안토니우스는 이 사람들[유대인]을 어떤 헤로데에게 맡겨 통치하게 했지만, 안티고노스는 십자가에 묶어 채찍질했다. 로마인들이 다른 어떤 왕도 받지 않았던 형벌이었고, 그래서 그를 죽였다"라고 기록한다.[5]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가 안티고노스의 목을 베었는데, "그 형벌이 왕에게 가해진 최초의 사례"라고 주장한다.[6]
5. 논란이 되는 무덤
1971년, 예루살렘 동부에서 건설 공사를 위해 흙을 제거하던 중 묘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 따르면 이곳이 마지막 하스몬 왕인 안티고노스 2세의 묘소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7] 그러나 이스라엘 고대 유물 관리국의 고고학 및 인류학 큐레이터를 역임한 인류학자 조 지아스는 이 이론이 단순한 도시 전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971년에 발견된 유일한 참수된 해골과 후에 손대지 않은 묘소를 재조사한 결과, 그 해골은 노년 여성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곳에서 발견된 다른 유해들은 안티고노스 2세와 관련될 수 없으며, 이 전설이 여전히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은 묘소 위에 위치한 건물 주인의 노력 덕분이다.[8][9]
6. 쿰란 문서와의 연관성 (논란)
성서학자 그레고리 도우드나는 2013년에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가 쿰란 문서에서 악한 제사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라고 제안했다.[10][11] 도우드나에 따르면, 안티고노스는 하바쿡 주해의 '악한 제사장'과 나훔 주해의 운명적인 통치자, 즉 쿰란에서 발견된 문서들의 배후 인물이었다.
참조
[1]
백과사전
Antigonus Matthathias
http://jewishencyclo[...]
[2]
서적
The History of the Jews in the Greco-Roman World: The Jews of Palestine from Alexander the Great to the Arab Conquest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3]
문서
Antiquities XIV 16:2
[4]
문서
Antiquities 15.1.2.9
[5]
문서
Roman History
[6]
문서
Life of Antony
[7]
웹사이트
The Tomb of the Last Hasmonean?
http://people.ucalga[...]
2019-03-21
[8]
웹사이트
A Jerusalem tomb, 'blind leading the blind' or just another Day in Paradise?
https://bibleinterp.[...]
Mark Elliott and Patricia Landy
2014-04
[9]
웹사이트
Tomb Inscription at Givat Hamivtar
http://cojs.org/tomb[...]
Center for Online Judaic Studies (COJS)
2009-01-12
[10]
서적
Qumran Revisited: A Reassessment of the Archaeology of the Site and its Texts.
Archaeopress
2013
[11]
웹사이트
A Narrative Argument that the Teacher of Righteousness was Hyrcanus II.
http://www.biblei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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