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홍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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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홍양은 전한 시대의 정치가로, 어려서부터 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3세에 시중(侍中)이 되었다. 무제(武帝) 치세에 소금, 철, 술의 전매를 실시하고 균수법을 추진하여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했으나, 이러한 정책에 대한 반발도 컸다. 어린 소제를 보좌하는 과정에서 곽광 등과 함께 연왕 유단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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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홍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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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국어 이름 | 상홍양 |
한자 | 桑弘羊 |
생몰 | 기원전 152년 ~ 기원전 80년 |
자 | 子均 (자균) |
출생지 | 낙양 |
국적 | 한나라 |
관직 및 경력 | |
직책 | 산대부 대사농 |
주요 정책 | 염철전매제 균수법 평준법 |
주요 업적 | 국가 재정 확충, 경제 안정 |
사상 및 평가 | |
사상적 기반 | 법가 |
평가 | 경제 정책의 혁신가, 국가주의 경제관 확립 |
가족 관계 | |
시대 | 한무제 시대 |
2. 생애
상홍양은 어릴 때부터 셈에 밝아 열세 살에 조정에 불려갔다. 기원전 120년, 소금, 철,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대농승에 임명되어 균수법을 추진하였다.
기원전 110년, 치속도위 겸 영대농에 임명되어 지방에 염철관, 균수관을 설치, 정책을 구체화하고 각지 물류를 조정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 이 공으로 좌서장 작위를 받았다.[3]
그러나 상홍양의 정책에 대한 반발도 컸다. 기원전 81년, 전국의 지식인들이 수도로 와 정책을 비판하고 소금, 철, 술 전매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어사대부 상홍양은 이에 반론했고, 술 전매는 폐지되었으나 다른 정책은 유지되었다.
무제 사후, 어사대부로서 곽광, 김일제, 상관걸과 함께 어린 소제의 보정을 맡았으나, 실질적인 결정은 곽광이 주도했다. 기원전 80년, 상관걸과 함께 연날왕 옹립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2. 1. 출신과 초기 경력
상홍양은 낙양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낙양은 한나라의 주요 상업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셈에 탁월하여, 13세에 뛰어난 계산 능력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중(侍中)이 되었다.[3] 시중은 황제가 궁궐에서 재능 있는 인재를 얻고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으며, 많은 중요한 관료들이 이 직책을 시작으로 경력을 쌓았다. 상홍양은 26년 동안 시중으로 재임했다.2. 2. 재정 정책 시행과 성과
기원전 120년 (원수 3년), 상홍양은 소금, 철, 술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대농승(大農丞)에 임명되었고, 이후 균수법을 추진하였다.[3]기원전 110년 (원봉 원년), 치속도위 겸 영대농(令大農)에 임명되어 지방에 염철관, 균수관을 설치하여 정책을 구체화하고, 각지의 물류를 조정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 이 공으로 좌서장 작위를 받았다.[3]
상홍양은 국고를 채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산세 정책을 시행했다.
- 장인, 은행가, 상인, 수레와 배의 소유주는 자산 규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 소규모 토지 소유자는 공식 세율의 절반만 납부하면 되었다.
- 자산을 허위 신고하거나 은폐하면 자산 몰수와 1년간 국경 추방으로 처벌받았다.
- 은폐 사례를 신고하면 몰수된 자산의 절반을 보상으로 받았다.
2. 3. 반대와 논쟁
상홍양의 정책은 재정 확충에는 기여했지만, 동시에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기원전 81년(시원 6년), 전국의 지식인들이 수도 장안으로 와 상홍양의 정책을 비판하고 소금, 철, 술의 전매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어사대부 상홍양은 이에 반론을 펼쳤고, 그 결과 술의 전매는 폐지되었으나 이외의 정책은 유지되었다.[3] 이 논쟁은 《염철론》에 정리되어 있다.2. 4. 몰락과 죽음
기원전 87년, 상홍양은 삼공 중 하나인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이는 정부 내 세 최고위직 중 하나였다.[2] 무제가 죽고 어린 소제가 즉위한 해에, 상홍양은 곽광, 김일제, 상관걸로 구성된 삼두정치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결정은 보정대신 중 곽광이 오로지했다.[2]시원 7년(기원전 80년)(원봉 원년), 상관걸과 함께 연날왕을 제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살되었다.[2] 이는 그가 연왕 유단의 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어 한나라 왕위를 찬탈하고 곽광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2] 그 결과, 상홍양의 전기는 《한서》에 포함되지 않았다.
3. 평가
상홍양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상홍양은 뛰어난 경제적 식견과 정책 추진력으로 한나라의 재정 안정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소금, 철, 술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고, 균수법을 추진하여 물류를 조정하고 재정 수입을 향상시켰다.[3] 이러한 정책들은 당시 군사 행동으로 인해 재정 위기에 빠진 한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둘째, 상홍양의 정책이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상업 활동을 위축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3] 특히 전매제에 대한 반발이 컸는데, 기원전 81년 (시원 6년)에 열린 염철 회의에서 전국의 지식인들은 상홍양의 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회의에서 술의 전매는 폐지되었지만, 다른 정책들은 유지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염철론》에 정리되어 있다.
참조
[1]
간행물
Zizhi Tongjian vol.23
0080-10-20
[2]
서적
불명
1986
[3]
논문
桑弘羊生年考
2005-03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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