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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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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1763년 7년 전쟁의 종결을 위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아헨 조약을 재확인했다.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골자로 했지만, 프로이센의 강대국 부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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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조약 정보
명칭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조약 종류강화 조약
분쟁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의 일부) 종결
서명일1763년 2월 15일
서명 장소작센 선제후국 후베르투스부르크
교섭 대표
프로이센 왕국에발트 프리드리히 폰 헤르츠베르크
서명국
조약 내용
주요 내용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 확정
아헨 화약 (1748년) 재확인
관련 조약
관련 정보파리 조약 (1763년) 참고
기타
Getty 연구소 CONA 아이콘 그래피 기록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 (조약,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 1763)

2. 배경

7년 전쟁(1756년 ~ 1763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해 외교 혁명을 일으켜 이전의 적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국과 방어 동맹(1756년)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방어 대책으로 작센 공국을 침공하였다.[1]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3대 강국 외에도 스웨덴, 작센 등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유일한 아군이었던 영국의 군자금 지원마저 중단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1] 그러나 1762년 1월 5일, 러시아 제국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고, 뒤를 이은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열렬히 숭배했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러시아와 단독 강화가 성립되었다.[1]

긴 전쟁에 지친 여러 나라들은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강화 체결을 계기로 군대를 철수시켰고, 프로이센은 고립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슐레지엔을 다시 탈환했으며, 프랑스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몰아냈다.[1]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오스트리아 혼자서는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프리드리히 2세1763년 라이프치히 근처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1]

2. 1. 7년 전쟁의 전개

7년 전쟁(1756년 ~ 1763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할양된 슐레지엔 지방의 탈환을 기도하고 외교 혁명을 일으켜, 이전의 적이었던 부르봉의 프랑스와 방어 동맹(1756년)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에 대항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먼저 작센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3대 강국 외에 스웨덴, 작센 및 기타 독일 제후들을 적으로 상대해야 했고, 유일한 아군이었던 영국의 군자금 지원마저 중단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1762년 1월 5일,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고, 뒤를 이은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였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러시아와 단독 강화가 성립되었다. 긴 전쟁에 지친 여러 나라들은 이를 계기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17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러시아는 평화를 되찾고, 정복했던 모든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스웨덴도 그 해 평화협정을 맺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슐레지엔을 다시 탈환하였으며, 프랑스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몰아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오스트리아 혼자서는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프리드리히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1763년 라이프치히 근처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7년 전쟁의 강화 조약을 맺었다.

오스트리아는 1748년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 지방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는 7년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동맹국인 영국에 대항하여 러시아, 스웨덴, 작센, 스페인, 프랑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쟁은 175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작센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7년 전쟁은 1756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의 연합군과 대치하면서 시작되었다. 1757년 1월, 제국 의회의 대부분(하노버 선제후국, 헤센카셀 방백령,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작센고타)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의 영향력, 권력, 영토를 확장하려는 목표를 달성했다.

전쟁 초기에는 프로이센이 계속 승리했다. 1757년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과 신성 로마 제국 군대를 격파했다. 프로이센군은 1757년 후반에는 로이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1758년에는 조른도르프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전쟁에 참전하고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들이 프리드리히에 반대하면서 전세가 바뀌는 듯했다. 1759년까지 동프로이센은 러시아의 손에 들어갔고, 베를린은 몇 주 동안 점령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남쪽에서 프로이센을 침공했다. 병력이 크게 부족해진 프리드리히 2세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1758년, 프로이센의 동맹국인 브라운슈바이크의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영국]-하노버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뮌스터 시를 점령했다. 1759년에는 제국군이 작센을 침공하여 프로이센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인해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우위를 되찾게 되었다. 하나는 영국과 하노버의 지원이었는데, 이들은 효과적인 전투원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더 중요한 요인은 1762년 러시아와 스웨덴이 전쟁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여제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했다. 그녀의 후계자인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의 숭배자였으며, 그와 즉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평화를 맺고 정복했던 모든 영토를 반환했으며, 스웨덴도 그해 평화를 맺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기적이라고 불렸다.

동쪽에서 혼자 싸우게 된 오스트리아군은 부르커스도르프 전투 (1762년 7월)에서 패배했다. 프랑스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아메리카에서는 루이부르 (1758), 퀘벡 (1759)을 잃었고 서인도 제도에서 일부 영토를 잃었다. 인도에서는 플라시 (1757)와 퐁디셰리 (1761)에서의 영국의 승리로 프랑스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바다에서는 프랑스가 마온을 영국으로부터 빼앗았지만 (1757년) 퀴베롱 만 (1759)에서 호크에게 패배했다. 1761년 가족 협약에 따라 스페인이 전쟁에 참전했지만, 프랑스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2. 2. 외교 혁명

7년 전쟁(1756년-1763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프로이센에 할양된 슐레지엔 지방을 되찾기 위해 외교 혁명을 일으켜, 이전의 적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국과 방어 동맹(1756년)을 맺은 사건이다. 프리드리히 2세(대왕)의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는 먼저 작센 공국을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3. 조약의 내용

4. 결과 및 영향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통해 7년 전쟁이 종결되면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영유를 확정짓고, 아헨 조약의 내용이 재확인되었다.[1]

7년 전쟁 초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었다. 그러나 1762년 러시아의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2세와의 단독 강화를 추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탈환하고,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7년 전쟁과 동시에 북미 대륙에서 벌어진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1763년 2월 10일 파리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4. 1. 프로이센의 강대국 부상

오랜 협상 끝에 전쟁에 지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간의 평화는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의 평화는 파리에서 맺어졌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전쟁 전의 상황을 복원했지만, 프로이센이 주요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주었다.[1]

4. 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갈등 지속

오랜 협상 끝에 전쟁에 지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간의 평화는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의 평화는 파리에서 맺어졌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전쟁 전의 상황을 복원했지만, 프로이센이 주요 유럽 강국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주었다.

4. 3. 국제 정세 변화

7년 전쟁(1756년 ~ 1763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할양된 슐레지엔 지방 탈환을 위해 외교 혁명을 일으켜, 숙적이었던 버번 왕가의 프랑스와 방어 동맹(1756년)을 체결한 것에 대항하여 프리드리히 2세가 작센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1]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3대 강국 외에도 스웨덴, 작센 및 기타 독일 제후국들과 대립하였고,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영국의 군자금 지원마저 중단되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까지 고려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1] 그러나 1762년 1월 5일, 러시아 제국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녀의 후계자인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열렬한 숭배자였기 때문에 러시아와 단독 강화 조약을 맺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1]

전쟁에 지친 다른 국가들도 이를 계기로 군대를 철수시켰고, 프로이센은 고립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슐레지엔을 다시 탈환하고, 프랑스군을 라인강 서쪽으로 몰아냈다.[1]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는 프로이센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1763년 라이프치히 교외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프리드리히 2세와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1]

4. 4. 북미 지역

프랑스군은 북아메리카에서 루이부르 (1758년), 퀘벡 (1759년)을 잃었고 서인도 제도에서 일부 영토를 잃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Peace of Hubertusburg (treaty, Prussia and Austria 1763) https://getty.edu/co[...] Paul Getty Trust 2019-05-19
[2] 웹사이트 Der Friede von Hubertusburg http://www.freundesk[...] Freundeskreis Schloss Hubertusburg - Wermsdorf 2019-05-19
[3] 서적 Definitiv-Friedens-Tractat, welcher zwischen Ihrer Kayserl. auch zu Hungarn, und Böheim Königl. Apostolischen Majestät [et]c. [et]c. und Seiner Majestät dem König in Preussen [et]c. [et]c. zu Hubertburg den 15. Febr. 1763. geschlossen worden: Nebst dem Kayserlich-Allergnädigsten Commissions-Ratifications-Decret, An Eine Hochlöblich-allgemeine Reichs-Versammlung zu Regenspurg, de dato 24. Febr. 1763. Die Reichs-Sicherheits-Materie betreffend https://archive.org/[...] Miz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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