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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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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12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오토 1세에게 공작위를 수여하면서 성립되었다. 이 공국은 잦은 분할과 재통합을 겪으며,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칼렌베르크, 괴팅겐, 그루벤하겐 등 여러 공국으로 나뉘었다. 17세기에 하노버가 부상하며 영국 왕위 계승과 연결되었고, 1714년 조지 1세가 영국 왕으로 즉위하면서 영국과 하노버는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1837년 동군 연합이 해소된 후 하노버는 하노버 왕국이 되었고, 브라운슈바이크는 독립 공국으로 존속하다가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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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벨프 가문의 문장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문장
1648년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위치
1648년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위치
일반 명칭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토대독일
상태공국
제국신성 로마 제국
정치 체제군주제
존속 시작1235년
존속 종료1806년
이전하인리히 사자공 패배; 작센 공국 분할; 하인리히가 벨프 가문의 알로디움으로 재투자함
날짜 (이전)1180년, 1181년
사건 시작알로디움이 브라운슈바이크 및 뤼네부르크 공국으로 승격됨
사건 1뤼네부르크 공국과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으로 분할
날짜 (사건 1)1269년
사건 2그루벤하겐 공국 형성
날짜 (사건 2)1291년
사건 3괴팅겐 공국 형성
날짜 (사건 3)1345년
사건 4브라운슈바이크가 볼펜뷔텔과 칼렌베르크 공국으로 분열됨
날짜 (사건 4)1432년
사건 5선제후 라인 관구 가입
사건 종료신성 로마 제국의 종말
날짜 (종료)1806년
이전 국가 1작센 공국
이전 국가 깃발 1Arms of the house of Ascania (ancient).svg
국경 (이전 국가 1)아니요
계승 국가 1하노버 선제후국
계승 국가 깃발 1Flag of Hanover (1692).svg
계승 국가 2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계승 국가 깃발 2Flagge Herzogtum Braunschweig.svg
수도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공용어저지 독일어
통화골드굴덴
탈러
페니히
명칭
역사
성립1235년 공국으로 성립
분할 11269년 뤼네부르크 후국과 브라운슈바이크 후국으로 분열
분할 21432년 브라운슈바이크가 볼펜뷔텔과 칼렌베르크로 분열
소멸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와 함께 소멸
통치자
칭호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통치자 1오토 1세
통치 기간 11235년 - 1252년

2. 공국의 역사

1180년 사자공 하인리히가 작센 공작과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잃은 후, 그의 손자인 오토 1세는 1235년 마인츠의 제국 회의(신성 로마 제국)에서 프리드리히 2세 황제로부터 벨프 가문의 세습 영지를 기반으로 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위를 봉토로 받으며 공국이 성립되었다.

1252년 오토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와 요한 1세가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1269년 공국을 분할했다.[1][2] 알브레히트는 남부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지역을, 요한은 북부의 뤼네부르크-첼레 지역을 차지했다. 이 첫 분할을 시작으로 공국은 이후 수 세기 동안 벨프 가문의 통치 하에 가문의 상속 관행에 따라 수많은 분할과 재통합을 거듭했다. 공국의 권력 중심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에서 첼레와 볼펜뷔텔 등으로 옮겨갔다.

수많은 분할 공국들이 생겨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통합되어 1705년 무렵에는 크게 두 개의 주요 가문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는 칼렌베르크, 뤼네부르크 등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볼펜뷔텔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이었다.

1692년, 칼렌베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선제후 지위를 받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일반적으로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불림)을 창설했다. 그의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1705년 뤼네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아 선제후령의 영토를 확정했고, 1714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여 조지 1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이 시작되어 1837년까지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1814년 빈 회의를 통해 하노버 선제후국은 하노버 왕국으로,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하노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로이센에 병합되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독일 제국의 구성국으로 존속하다가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소멸했다. 현재 이 지역들은 대부분 독일의 니더작센 주에 속해 있다.

2. 1. 공국 이전의 역사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될 지역은 원래 12세기 작센 공국 부족공국(Stammesherzogtums)의 일부였다. 1170년대에 이르러 당시 작센 공작이었던 하인리히 사자공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 갈등은 1180년, 겔른하우젠에서 열린 궁중의회(Hoftag)에서 하인리히 사자공에게 제국추방령이 내려지고 그의 공작령이 해체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1][2]

황제령으로 인해 하인리히 사자공은 작센 공작과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모두 잃었다. 그는 몇 년간 망명 생활을 해야 했지만, 이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세습재산 영지에 머무는 것은 허락받아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오토 1세가 1448년 뤼네부르크의 작센슈피겔에서 프리드리히 2세 황제로부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를 봉토로 받다.


수십 년 후, 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 사이의 오랜 반목을 끝내기 위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화해의 일환으로 하인리히 사자공의 손자인 오토 1세는 자신이 소유한 영지를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게 넘겼다. 그 대가로 황제는 오토 1세에게 그가 넘긴 영지와 다른 제국 재산의 일부를 합쳐 새로 만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을 봉토로 수여했다. 이로써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2. 2. 공국 성립과 분할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될 지역은 원래 12세기 작센 부족공국의 일부였다. 1170년대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에 대한 제국추방령과 궁중의회(Hoftag)에서의 공작령 해체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하인리히 사자공은 작센 공작과 바이에른 공작 지위를 잃었으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세습 영지는 유지할 수 있었다.

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회의(신성 로마 제국)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화해의 일환으로, 하인리히 사자공의 손자인 오토 1세는 자신의 영지를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새로 창설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위를 봉토로 받았다. 이로써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성립되었다. 1252년 오토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와 요한 1세가 공동으로 공국을 통치했다.

1269년, 두 아들은 공국을 분할 상속했다.[1][2] 알브레히트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 주변의 남부 지역(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령)을, 요한 1세는 뤼네부르크 중심의 북부 지역(뤼네부르크 후령)을 받았다. 이 분할은 이후 공국이 여러 소규모 공국으로 나뉘는 시작점이 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의 영토 분할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내의 왕조 관계 및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의 관계.


공국과 그 하위 공국들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분할과 재통합을 겪었다. 모든 영토는 벨프 가문이 통치했으며, 가문 구성원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종종 사촌 간 결혼을 통해 영지를 관리했다. 이는 당시 살리카법이 토지와 이익에 대한 통제권을 가문 내에 유지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에서 첼레와 볼펜뷔텔로 옮겨갔다. 특정 가계가 단절되면 다른 가계가 영지를 상속받는 방식으로 벨프 가문은 영토를 유지했으며, 동시에 통치하는 가문의 수는 두 개에서 다섯 개까지 다양했다.

분할된 여러 지역 중 일부는 처음에는 벨프 가문 내부의 영지 분할이었고 제국 영방으로 정식 인정받지 못했으나, 1500년에는 대부분 제국 영방으로서 법적 승인을 받았다. 1792년 기준으로 제국 의회에 의석을 가진 주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계 영방은 다음과 같다.

주요 분할 공국 (1792년 제국 의회 의석 기준)
공국명창설주요 사항
뤼네부르크-체레1269년1705년 카렌베르크 후작 게오르크 루트비히 (후일 영국 왕 조지 1세)가 상속.
카렌베르크 및 괴팅겐1495년 (에리히 1세)1635년 게오르크가 상속하여 하노버를 거점으로 삼음. 그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692년 하노버 선제후가 됨.
그루벤하겐1291년 (하인리히 1세)1617년 뤼네부르크 후작 크리스티안이 상속.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1269년1432년 이후 공작이 볼펜뷔텔로 거처를 옮기면서 호칭 변경.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815년-1918년)의 전신.



1705년까지 존속했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계 가문은 카렌베르크-체레 등을 영유한 가문과 볼펜뷔텔을 영유한 가문, 이렇게 두 계통만 남게 되었다.

2. 3. 분할된 공국들



1235년 마인츠의 제국 회의에서 오토 1세가 프리드리히 2세 황제로부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위를 받은 이후, 공국은 벨프 가문에 의해 통치되었다. 1252년 오토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알브레히트 1세와 요한 1세가 공동으로 공국을 다스렸다.

결국 1269년, 두 형제는 공국을 분할하기로 결정했다.[1][2] 알브레히트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을, 요한 1세는 뤼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을 각각 상속받았다. 이는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여러 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뉘고 합쳐지는 복잡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공국이 계속해서 분할된 주된 이유는 벨프 가문의 상속 관행 때문이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살리카법의 영향으로 영토와 권력을 가문 내에서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벨프 가문 역시 긴밀한 친족 관계(사촌 간 결혼 등)를 유지하며 영지를 분할 상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공국 내에는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 계통 아래 여러 분가들이 생겨났고, 때로는 동시에 2개에서 5개의 가문이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기도 했다. 권력의 중심지 역시 초기의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에서 점차 첼레와 볼펜뷔텔로 옮겨갔다.

이렇게 분할된 공국들은 일반적으로 통치자가 머무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불렸다. 특정 가문의 대가 끊어지면 다른 가까운 친척 가문이 그 영지를 상속받아 통합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상속 과정에서 다시 분할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역사적으로 약 12개 정도의 분할 공국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일부는 공식적인 제국의 영방(Reichsstand)으로 인정받지 못한 내부적인 영지 분할에 불과했지만, 많은 공국들이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다.

1792년 제국 의회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계통의 다음 4개 분할 국가가 공식적인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 뤼네부르크 공국
  • 칼렌베르크 공국-괴팅겐 공국 (1495년 통합)
  • 그루벤하겐 공국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수많은 분할과 통합을 거듭한 끝에, 1705년 무렵에는 실질적으로 두 개의 주요 가문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는 칼렌베르크, 뤼네부르크 등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가문(훗날 하노버 선제후국 형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볼펜뷔텔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이었다.

2. 3. 1.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1269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의 첫 번째 분할 이후에 형성되었다. 1432년, 브라운슈바이크 시민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은 거처를 볼펜뷔텔의 워터 캐슬로 옮겼다. 이 성은 확장되었고, 볼펜뷔텔 마을은 왕실의 소재지로 발전하면서 공국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546년부터 볼펜뷔텔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족장인 헨리, 브라운슈바이크-단넨베르크 공작의 거처가 되었다.[3]

1634년 프리드리히 울리히 공작이 사망한 후, 볼펜뷔텔 공국은 그의 사촌인 아우구스트 2세에게 상속되었다.

1753년에서 1754년 사이, 새롭게 건설된 브라운슈바이크 궁전으로 거처가 다시 브라운슈바이크로 옮겨졌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7년부터 1813년까지 볼펜뷔텔 공국은 나폴레옹의 위성 국가였던 베스트팔렌 왕국에 병합되었으나,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인 영방의 지위를 유지했다.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1815년에 공국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1866년에 북독일 연방에 가맹했고,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1884년, 볼펜뷔텔계의 마지막 군주인 빌헬름이 후사 없이 사망했다. 독일 제국 정부는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었던 하노버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가 공위를 잇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섭정을 두어 공국을 통치하게 했다. 이는 당시 프로이센이 주도하던 독일 제국과 하노버 왕가 사이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3년, 하노버 왕세자의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 루이제와 결혼하면서 하노버 가문과 호엔촐레른 가문의 오랜 적대 관계가 해소되었다. 이에 빌헬름 2세는 사위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를 계승하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생존해 있던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상속권을 포기했다.)

2. 3. 2. 칼렌베르크 공국 (이후 하노버 선제후국)

1432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이 다이스터와 라인 사이에서 획득한 영지가 칼렌베르크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초기에 이 공국은 북쪽으로 니엔부르크 근처의 호야 백국과 경계를 이루었고, 좁고 구불구불한 띠 모양으로 라인 강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분스토르프와 하노버를 지나 볼펜뷔텔 공국에 이르렀다. 1495년에는 괴팅겐 주변으로 영토가 확장되었으나, 1584년에는 다시 볼펜뷔텔 가문으로 귀속되었다.

1634년 상속 분배의 결과로 칼렌베르크는 뤼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고, 1635년 프리드리히 울리히 공작이 자식 없이 사망하여 볼펜뷔텔계가 단절되자, 뤼네부르크 계통의 게오르크가 칼렌베르크를 상속받아 다시 독립 공국이 되었다. 게오르크는 하노버를 그의 ''레지덴츠''(거처)로 선택했다. 이후 칼렌베르크는 1665년에 그루벤하겐 공국 인근 영토를, 1705년에는 뤼네부르크 공국 주변 영토를 추가로 획득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게오르크의 아들 크리스티안 루드비히와 그의 동생들은 1648년에 체레를 상속받아 형제 간에 칼렌베르크와 체레를 나누어 다스렸다.

1692년, 칼렌베르크 공작이자 게오르크의 막내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선제후의 지위를 부여받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을 세웠다. 이 선제후국은 일반적으로 하노버 선제후국 또는 구어체로 ''쿠르하노버''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 승격은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선제후의 수를 늘리는 문제와 연결되어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선제후령의 실제 영역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 게오르크 루드비히 시대인 1705년이 되어서야 확정되었고, 1708년 제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701년 왕위 계승법 제정 이후, 영국의 앤 여왕은 자신의 재종사촌이자 프로테스탄트 신도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1714년, 게오르크 루드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 간의 동군 연합이 시작되었다. 이 동군 연합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1814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국은 다른 영토를 흡수하여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837년 영국 왕 윌리엄 4세가 사망하면서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남성 후계자인 윌리엄 4세의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계승했지만, 영국 왕위는 여성 상속이 가능했기에 조카인 빅토리아가 계승했기 때문이다.

하노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 섰다가 프로이센 왕국에 패배하여 정복당하면서 소멸하였다.

2. 3. 3. 뤼네부르크 공국

뤼네부르크 공국은 1269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이 처음 분할되면서 형성되었다.[1][2] 오토 1세의 두 아들 중 동생인 요한 1세가 뤼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영토를 상속받아 뤼네부르크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형인 알브레히트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 주변의 남부 지역을 차지했다.

뤼네부르크 공국은 벨프 가문의 여러 분파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수세기에 걸쳐 더 작은 영지로 분할되거나 재통합되는 과정을 겪었다. 뤼네부르크 시 자체는 1512년까지 벨프 가문의 소유였고, 1571년에는 칼푀르데 관구가 공국의 월경지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국의 주요 권력 중심지는 뤼네부르크에서 첼레로 옮겨갔다.

1269년 창설된 뤼네부르크-체레 계통은 1705년까지 존속한 주요 영방 중 하나였다. 1705년, 마지막 뤼네부르크 공작인 게오르크 빌헬름이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뤼네부르크 직계는 단절되었다. 그는 이미 1658년에 자신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양도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이자 게오르크 빌헬름의 사위(그의 딸 조피 도로테아와 결혼)였던 게오르크 루트비히(훗날 영국의 조지 1세)가 뤼네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다. 상속된 뤼네부르크 공국은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이미 통치하고 있던 칼렌베르크 후령과 통합되었다. 칼렌베르크 후령은 1692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일반적으로 하노버 선제후령으로 불림)으로 승격되었으며, 뤼네부르크의 통합으로 선제후령의 영토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2. 3. 4. 괴팅겐 공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가장 남쪽에 위치했던 공국이다. 남쪽으로는 뮌덴에서 시작하여 베저 강을 따라 홀츠민덴까지 이어졌으며, 동쪽으로는 괴팅겐 시를 중심으로 라이네 강을 따라 노르트하임과 아인벡까지 영토가 뻗어 있었다.

괴팅겐 공국은 1345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 분할되면서 형성되었다. 이후 1495년에는 칼렌베르크 공국과 통합되었다. 통합된 공국은 에리히 1세가 다스리기 시작했다.

2. 3. 5. 그루벤하겐 공국

1291년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인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창설되어 1596년까지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공국은 졸링 언덕의 북부 지역, 아인벡 근처의 라이네 강 유역, 그리고 아이히스펠트 북쪽과 남서부 하르츠 지역에 걸쳐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국은 여러 차례 더 작은 영지로 분할되었다. 1596년 그루벤하겐 가계가 단절되자 영지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로 넘어갔으며, 1617년에는 뤼네부르크 후작 크리스티안이 상속했다. 이후 1665년에는 칼렌베르크 가문에 양도되었다.

2. 3. 6. 기타 분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과 그 산하 공국들의 역사는 수많은 영토 분할과 재통합으로 특징지어진다. 공국 내부에 반복적으로 생성된 하위 공국들은 일반적으로 통치자의 거주지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특정 가문의 대가 끊기면 다른 가문이 영지를 상속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 계통 내에서도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가문(혹은 계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두 개에서 다섯 개에 이르는 왕조 계통이 동시에 공국 내 영토를 나누어 통치하기도 했다.

뤼네부르크 공국, 칼렌베르크 공국(이후 괴팅겐 공국과 통합), 그루벤하겐 공국,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등 1792년 제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주요 분할 국가 외에도 여러 분가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기타 분가들로는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있었다.

  • 단넨베르크 Dannenbergde
  • 하르부르크 Harburgde
  • 기프호른 Gifhornde
  • 베베른 Bevernde
  • 오스테로데 Osterodede
  • 헤르츠베르크 Herzbergde
  • 잘츠데르헬덴 Salzderheldende
  • 아인벡 Einbeckde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분할 국가는 총 12개 정도로 추정되지만, 이들 중 일부는 단순히 왕가의 내부적인 영지 분할에 따른 것이었을 뿐, 신성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가(Reichsstand)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3. 하노버의 부상과 영국과의 관계

1635년, 뤼네부르크 계통의 게오르크 공작이 카렌베르크와 괴팅겐을 상속받아 거처를 하노버로 옮기면서 하노버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69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선제후 지위를 부여받았고, 그의 아들 게오르크 루드비히는 1705년 뤼네부르크-체레까지 통합하여 하노버 선제후령의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하노버의 부상은 영국과의 관계로 이어졌다. 1701년 영국에서 제정된 1701년 왕위 계승법은 프로테스탄트 신도의 왕위 계승을 규정했는데, 이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가 앤 여왕의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게오르크 루드비히는 영국의 왕 조지 1세로 즉위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하노버 선제후국 간의 동군 연합이 시작되었다.

이 동군 연합은 1837년까지 1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나, 영국 왕 윌리엄 4세 사후 살리카법에 따른 상속 규정 차이로 인해 해소되었다. 영국 왕위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하노버 왕국(1814년 선제후령에서 승격)의 왕위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에게 각각 계승되면서 양국의 인적 결합은 종결되었다.

3. 1. 하노버 선제후국

1432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에서 분리된 켈렌베르크 공국은 하노버 선제후국의 전신이 되었다.[1][2] 1635년, 뤼네부르크 가문의 게오르크가 이 공국을 상속받아 하노버를 수도로 정했으며,[1][2]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은 1648년 체레를 상속받아 칼렌베르크와 번갈아 통치했다.[3]

1692년, 게오르크의 막내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공작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선제후 지위를 얻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가 되었고, 이로써 하노버 선제후국이 성립되었다.[1][2] 이 승격은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선제후 수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와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는 당시 유럽의 주요 갈등이었던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사이의 대립과 연관되어 있었다. 선제후국은 구어체로 ''쿠르하노버''(Kurhannoverde)로도 알려졌다.[1]

1705년, 게오르크 빌헬름 공작이 사망하자 뤼네부르크 공국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게오르크 루드비히(후일 영국의 조지 1세)에게 상속되어 칼렌베르크 공국과 통합되었다.[1][3] 이 영토 통합은 1705년에 이루어졌으나, 선제후국으로서 공식적인 인정은 1708년 제국 의회에서 받았다.[3]

1701년 영국의 1701년 왕위 계승법은 가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에게만 계승권을 한정했다. 이는 당시 북유럽과 영국 등지에서 고조되던 반가톨릭 정서를 반영한 조치였다.[3] 이 법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드비히는 영국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었고, 1714년 그의 사촌인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영국의 왕 조지 1세로 즉위했다.[3] 이로써 하노버 선제후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사이에 개인 연합이 성립되어 1837년까지 지속되었다.[3]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질서를 재편한 1814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국은 영토를 확장하여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1][3]

3. 2. 영국과의 동군연합

169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당시 칼렌베르크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선제후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그가 곧 뤼네부르크-체레를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었으나, 제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 선제후의 수를 늘리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1705년 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이 사망하자, 그의 사위이자 조카인 게오르크 루트비히(훗날 영국의 조지 1세)가 뤼네부르크를 상속받아 칼렌베르크와 통합했다. 이 통합된 영지는 공식적으로 1708년 제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 통칭 하노버 선제후국이 되었고,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브라운슈바이크 및 뤼네부르크 선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1701년 왕위 계승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당시 영국을 포함한 북유럽에서 고조되던 반(反) 가톨릭 정서 속에서,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앤 여왕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도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앤 여왕의 가장 가까운 프로테스탄트 친척이었던 하노버의 조피(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부인이자 조지 1세의 어머니)가 왕위 계승자로 지정되었다. 조피는 앤 여왕보다 몇 주 먼저 사망했지만, 그녀의 아들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계승권을 이어받았다.

1714년 8월 1일, 앤 여왕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영국의 국왕 조지 1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영국 왕국과 하노버 선제후국 사이에 동군 연합이 성립되었으며, 이는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조지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조지 2세, 증손자 조지 3세가 영국 국왕과 하노버 선제후를 겸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지만, 조지 3세는 선제후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1814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으며, 조지 3세는 초대 하노버 국왕이 되었다.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은 1837년 영국 왕 윌리엄 4세가 사망하면서 해소되었다. 영국 왕위는 살리카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조카인 빅토리아가 계승했지만, 살리카법을 따르는 하노버 왕국에서는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하노버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123년간 이어져 온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은 끝나게 되었다.

3. 3. 하노버 왕국과 동군연합의 해소

1714년 게오르크 루드비히(영국 왕 조지 1세)가 영국 왕으로 즉위하면서 성립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하노버 선제후령은 다른 영토를 흡수하였고, 1814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어 창설되었다.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은 1837년 영국 왕 윌리엄 4세가 사망하면서 소멸되었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왕위는 윌리엄 4세의 조카인 빅토리아에게 계승되었으나, 하노버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상속받게 되었다.

이후 하노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였다가 프로이센에 의해 정복되어 소멸되었다.

4.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운명

볼펜뷔텔 방계는 나폴레옹 시대1807년부터 1813년까지 베스트팔렌 왕국에 하노버와 함께 병합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독립을 유지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독립 상태를 유지하며 1866년에는 북독일 연방에 가맹했고, 1871년에는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1884년 볼펜뷔텔 방계의 마지막 군주인 빌헬름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공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정당한 상속자는 가장 가까운 남계 친족인 하노버 왕가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하노버 왕세자)였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이 주도하던 독일 제국 정부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하노버 왕국이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던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계승을 금지했다. 대신 제국 정부는 섭정을 임명하여 공국을 통치하게 했는데, 이는 하노버 가문에 대한 정치적 견제이자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수십 년 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유일한 딸이었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와 결혼하면서 하노버 가문과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가 해소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정치적 화해가 이루어졌고, 1913년 빌헬름 2세는 자신의 사위가 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위를 계승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 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아들의 계승을 위해 자신의 상속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과거 하노버 왕국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 존재했던 영토는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 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5.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및 후계자



1180년 사자공 하인리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작센 공작과 바이에른 공작 작위를 박탈당했다. 몇 년간 망명 생활을 했으나, 이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세습재산)에 머물 수 있었다.

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회의(신성 로마 제국)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의 화해의 일환으로, 하인리히의 손자 오토 1세는 자신의 영지를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게 양도했다. 그 대가로 황제는 양도된 영지와 제국 재산의 다른 넓은 지역들을 합쳐 새로 창설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위를 오토 1세에게 봉토로 수여했다. 1252년 오토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와 요한 1세가 공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1269년, 공국은 처음으로 분할되었다.[1][2] 알브레히트 1세는 브라운슈바이크 주변의 남부 지역(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령)을, 요한 1세는 뤼네부르크 지역의 북부 영토(뤼네부르크 후령)를 받았다. 이 두 지역은 이후에도 벨프 가문의 소유로 남았으며(뤼네부르크는 1512년까지, 브라운슈바이크는 1671년까지), 1571년에는 칼푀르데 관구가 공국의 월경지가 되었다.

공국의 여러 지역은 수세기에 걸쳐 더 분할되고 재통합되었으며, 모두 벨프 가문이 통치했다. 벨프 가문 구성원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종종 사촌 간 결혼을 통해 가문의 결속을 다졌다. 이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 흔한 관행이었으며, 살리카법은 토지와 이익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권력의 중심지는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에서 점차 첼레와 볼펜뷔텔로 옮겨갔다.

공국과 그 산하 공국들의 역사는 수많은 분할과 재통합으로 특징지어진다. 반복적으로 생성된 하위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통치자의 거주지를 따라 명명되었으며, 법적으로는 공국의 지위를 가졌다. 특정 가문이 단절되면 다른 가문이 그 영지를 상속받는 방식으로 영토가 유지되었다. 예를 들어, 브라운슈바이크의 구(Old), 중(Middle), 신(New) 가문과 뤼네부르크의 구, 중, 신 가문 등이 존재했으며, 동시에 통치하는 왕조 계통의 수는 두 개에서 다섯 개까지 다양했다.

1792년 시점에는 다음과 같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계통의 영방들이 제국 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영방창설 및 주요 변동 사항
뤼네부르크-체레1269년 창설. 1705년 카렌베르크 후작 게오르크 루트비히(영국 왕 조지 1세)가 상속.
카렌베르크 및 괴팅겐1495년 에리히 1세가 창설. 1635년 게오르크가 상속하여 하노버를 거점으로 삼음. 그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692년 하노버 선제후가 됨.
그루벤하겐1291년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하인리히 1세가 창설. 1617년 뤼네부르크 후작 크리스티안이 상속.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1269년 창설. 1432년 이후 공작이 볼펜뷔텔로 거처를 옮기면서 호칭 변경.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815년-1918년)의 전신.



1705년까지 존속했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가문은 카렌베르크-체레 등을 영유한 가문과 볼펜뷔텔을 영유한 가문의 두 곳뿐이었다.

1634년, 볼펜뷔텔 후령과 칼렌베르크 후령을 통치하던 프리드리히 울리히가 자식 없이 사망하여 볼펜뷔텔계가 단절되자, 뤼네부르크 계통의 게오르크가 1635년에 볼펜뷔텔 후령을 상속하고 거처를 하노버로 옮겼다. 게오르크의 아들들은 1648년에 체레를 상속받아 이후 체레와 칼렌베르크를 분할 통치했다.

1692년, 게오르크의 막내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선제후 칭호를 받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하노버 선제후)를 칭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선제후 수를 늘리는 결과를 낳아 제국 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당시 유럽의 주요 이념 대립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과 가톨릭 반종교 개혁 사이의 갈등과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은 종종 영토 확장을 노리는 군주들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결국 이 승격 조치는 1708년 제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1705년까지 뤼네부르크, 칼렌베르크, 체레 등 여러 영방을 통합하여 실질적인 선제후령의 영토를 확정했다. 그는 1707년 연합법에 따라 영국 왕위 계승자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1701년 왕위 계승법에 따라 영국의 왕위 계승권이 프로테스탄트 신도에게만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714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이 성립되었다.

이 동군 연합은 1837년까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하노버 선제후령은 다른 영방을 흡수하여 1814년 빈 회의 결정에 따라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837년 영국 왕 윌리엄 4세가 사망하자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윌리엄 4세의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계승했지만, 영국 왕위는 조카인 빅토리아가 상속했기 때문이다.

1866년,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정복되어 소멸되었다.

한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은 1634년 프리드리히 울리히 사후 아우구스트 2세가 상속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잠시 베스트팔렌 왕국에 병합되었던 시기(1807년-1813년)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1815년 빈 회의 결정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완전히 독립했으며, 1866년 북독일 연방에 가맹하고 1871년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1884년 볼펜뷔텔계 마지막 군주인 빌헬름이 사망하자, 독일 제국은 가장 가까운 남계 상속인인 하노버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공위 계승을 금지하고 대신 섭정을 두어 통치했다. 그러나 하노버 왕세자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 루이제와 결혼하면서 하노버 가문과 호엔촐레른 가문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빌헬름 2세는 1913년 사위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하노버 왕국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 존재했던 지역은 현재 독일 니더작센 주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Royal Arms of Britain http://www.heraldica[...] 2016-05-10
[2] 서적 Memoirs, and Letters and Journals, of Major General Riedesel During His Residence in America J. Munsell
[3] 서적 Le Duc de Brunswick: Sa vie et ses moeurs. Extraits der notes 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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