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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도노소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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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는 1809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자 가톨릭 사상가로 활동하며 19세기 스페인의 정치, 사회적 변화에 깊이 관여했다. 초기에는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나, 점차 보수주의로 전향하여 가톨릭,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독재를 옹호하는 사상을 펼쳤다. 그는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말년에는 프랑스 주재 스페인 대사로 활동하며, 저서 "가톨릭,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그의 사상은 칼 슈미트 등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85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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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도노소 코르테스
기본 정보
1849년 페데리코 마드라소가 그린 초상화
존칭 접두사가장 뛰어난
존칭 접미사발데가마스 후작 OIC LH TOSD
출생 이름후안 프란시스코 마리아 데 라 살루드 도노소 코르테스 이 페르난데스 카네도
출생일1809년 5월 6일
출생지바예데라세레나, 스페인
사망일1853년 5월 3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제국
국적스페인
철학적 배경
학파/전통스페인 전통주의
반계몽주의
울트라몬타니즘
주요 관심사정치 이론
정치 신학
영향을 준 인물아우구스티누스
로크
콩디야크
트라시
루소
메스트르
보날
비코
킨타나
기조
프루동
영향을 받은 인물멜라
마에스투
슈미트
에볼라
코헤이아 데 올리베이라
다빌라
카로
비엘롬스키
시대19세기 철학
지역서양 철학
스페인 철학
주요 저서
주요 저서《가톨릭교,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에세이》
정치 경력
스페인 왕립 학술원 좌석 'R'임기 시작: 1848년 4월 16일
임기 종료: 1853년 5월 3일
전임: 하비에르 데 부르고스
후임: 라파엘 마리아 바라트

2. 생애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는 1809년 에스트레마두라 바예 데 라 세레나에서 변호사이자 지주였던 아버지와 상속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배우며 교육받았고, 살라망카 대학교, 카세레스의 산 페드로 대학교, 세비야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존 로크, 루이 드 보날 등의 영향을 받았다.[2][3]

1830년 테레사 카라스코와 결혼했지만 5년 만에 사별하고,[2] 이후 매부와 함께 정계에 입문, 페르디난드 7세 사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며 자유주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4][5]

도노소 코르테스는 페르디난드 7세의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왼쪽)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제1차 카를리스트 전쟁 중에는 반성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학살에 항의하는 각서를 작성했고,[5] 1836년 라 그랑하 봉기 이후 온건당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의 정부를 옹호했다.[6] 1839년 제1차 카를리스트 전쟁이 끝날 무렵 자유주의에 환멸을 느껴 파리로 망명했다가,[7] 1843년 귀국하여 이사벨 2세 즉위에 기여하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7]

1848년 혁명과 동생의 죽음 이후 보수주의로 전향한 도노소는 1849년 "독재론" 연설을 통해 혁명 진압을 옹호하며 사회주의를 비판했다.[9] 1851년 프랑스 주재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어 나폴레옹 3세 즉위에 기여했지만, 이후 정치적 견해차를 보였다.[10] 이 시기 종교적으로 독실한 생활을 하며 가톨릭 신앙 옹호,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비판 저술에 몰두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산 이시드로 왕립 교회에 있는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의 묘


1851년 대표작 ''그 기본 원리에 비추어 본 가톨릭교,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Ensayo Sobre el Catolicismo, el Liberalismo, y el Socialismo Considerados en sus Principios Fundamentales)을 발표, 가톨릭 변증가로 명성을 얻었다.[11][12] 1853년 파리에서 사망하여 산 이시드로 왕립 교회에 안치되었다.[13]

2. 1. 초기 생애 (1809년 ~ 1830년)

에스트레마두라 바예 데 라 세레나에서 1809년 5월 6일에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돈 페드로 도노소 코르테스로 변호사이자 지주였으며,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후손이었다. 어머니는 마리아 엘레나 페르난데스-카네도로 지방의 상속녀였다.[1]

어린 시절, 후안 도노소는 자유주의자 안토니오 벨트란에게서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고 대학 입학에 필요한 과목들을 배웠다. 11살 때, 가정 문제로 추정되는 이유로 살라망카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1년 만에 카세레스의 산 페드로 대학교로 옮겼다. 1823년, 14세에 세비야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고, 182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도노소 코르테스는 세비야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철학을 접했고, 존 로크와 루이 드 보날 같은 자유주의 및 전통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2][3]

집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의 법률 사무소에서 몇 년간 일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었다. 1829년 10월, 카세레스의 산 페드로 대학교에서 미학과 정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다. 그는 낭만주의에 심취하여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했다. 중세의 봉건제를 비판했지만, 교황청과 십자군 전쟁은 유럽 문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믿으며 옹호했다.[2] 프랑스 침입 이후 스페인에 만연했던 합리주의에 심취하여 자유주의 원리를 열렬히 받아들였고,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루소를 "가장 웅변적인 궤변가"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2. 2. 자유주의 정치 활동 (1830년 ~ 1840년)

코르테스는 1830년 테레사 카라스코와 결혼했지만, 외동딸 마리아를 낳은 후 테레사가 사망하면서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끝났다.[2] 이 무렵 후안 도노소는 매부와 함께 정계에 입문했다.[4] 그는 마누엘 호세 킨타나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자유주의자로서 정계에 진출했다.[4] 페르디난드 7세 국왕 사후, 도노소는 스페인 자유주의자 대다수와 함께 고왕의 네 번째 부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스페인 왕위 계승 주장을 지지했다. 그들은 페르디난드의 성직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동생인 카를로스와 그의 보수 지지자들(카를리스트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1832년 도노소는 페르디난드 국왕에게 여성 계승이 국왕의 1830년 실정령에 부합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새로운 섭정 여왕은 도노소를 국무부의 직책에 임명했다.[5]

도노소는 고왕 페르디난드 7세의 부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왼쪽)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고왕의 동생인 카를로스(오른쪽)에 대한 지지했다.

1833년 페르디난드 국왕의 사망은 제1차 카를리스트 전쟁을 촉발시켰다. 도노소는 1834년 7월 마드리드에서 반성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 저지른 학살(수도사들의 학살)에 대해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항의하는 각서를 작성했다.

1836년 라 그랑하에서 일어난 봉기 이후 도노소의 견해는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왕궁의 병사들은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자유주의적 1812년 헌법을 재실시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도노소는 내각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총선에서 자유주의적 온건당의 의원으로 코르테스에 선출되었다. 온건당은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고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다. 이때 그는 당을 위해 “대의 정부에 대한 옹호”라는 일련의 강연을 했는데, 대의 정부와 합리주의를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독재가 때로는 불가피한 악이라고 옹호했다.[6]

1837년부터 1840년까지는 도노소의 언론 활동이 쇠퇴한 시기였다. 그는 ''엘 코레오 나시오날'', ''엘 포르베니르'', ''엘 빌로토''와 같은 여러 출판물에 글을 기고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보수주의적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도노소는 빅토르 위고의 메리 스튜어트 묘사를 비판했고, 종교 의식에서 풍부한 예술품 사용을 옹호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가장 방대한 논문인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1838년 8월 또는 9월 ''엘 코레오 나시오날''에 실렸는데, 고전주의낭만주의 예술 형식의 종합을 촉구했다. 도노소의 논문은 그에게 많은 악명과 비난을 가져왔고, 코르테스 의원 65명이 도노소를 파괴적인 인물로 규탄했다.[7]

도노소는 언론의 힘을 인식하고 자신의 출판물을 통해 공공 논의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지만, 동시에 언론과 언론의 자유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저널리즘이 거의 신성한 직업이라고 믿었지만, 이 직업이 종종 남용되어 무분별한 수다와 험담을 퍼뜨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론이 혁명적, 사회주의적, 반기독교적 사상을 퍼뜨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비판했다. 도노소는 언론의 자유 자체가 기독교 도덕 원칙의 포기의 결과라고 믿을 정도였다. 그는 편집자들이 혁명을 증진시키는 새로운 사제 계급이며, 기독교 교리의 권위가 끝없는 논쟁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가 중앙 집권화와 관료화를 달성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는 것을 비판했다.[8]

2. 3. 보수주의로의 전향 (1840년 ~ 1848년)

1839년 제1차 카를리스트 전쟁이 끝날 무렵, 도노소는 자유주의, 합리주의, 부르주아에 대한 환멸을 느껴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섭정이 무너지자 도노소는 전 섭정 여왕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하며 1841년 3월부터 1843년 가을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섭정 시대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7]

1843년 말 스페인으로 돌아온 도노소는 이사벨 2세 여왕에게 과반수 지위를 부여하여 발도메로 에스파르테로의 섭정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실에 대한 공로로 도노소는 젊은 여왕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 1844년 5월 나르바에스 장군이 총리로 취임했다. 교황 비오 9세의 초기 개혁으로 펠레그리노 로시를 교황령의 총리로 임명하면서 도노소의 자유주의는 잠깐 동안 다시 부상했다.[7]

1848년 혁명과 로시 암살, 그리고 도노소의 독실한 카를리스트 동생 페드로의 죽음은 도노소 사상에서 자유주의의 흔적을 완전히 없앴다. 1849년 1월 도노소는 코르테스에서 "독재론"이라는 연설을 통해 스페인에서 혁명 활동의 흔적을 진압한 나르바에스 장군의 행동을 옹호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거세게 비난했고, 사회주의를 기독교 도덕과 무신론의 침식의 결과로 공격했다. 이후 도노소는 나르바에스를 강하게 비판했고, 코르테스에서 그를 비난하는 연설은 나르바에스의 사임으로 이어졌다.[9]

도노소 코르테스는 2월 혁명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듬해 로마 공화국 수립에서는 자유주의가 혁명을 조장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보수 반동의 입장으로 완전히 전향했다. 그는 1849년 1월, 마드리드 의회에서 「독재에 관한 연설」을 통해 2월 혁명은 유럽 문명의 붕괴를 가져온 것이며, 혁명에 대한 구제책은 가톨릭으로의 귀의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재 정권을 수립했던 나르바에스 장군을 지지하게 되었고,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하지만 후에 나르바에스와 나폴레옹의 정권 부패를 엄격하게 비판한다).

2. 4. 보수 반동 사상가로서의 활동 (1848년 ~ 1853년)

1851년, 도노소는 프랑스 주재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어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할 루이 나폴레옹 대통령(후일 황제)의 궁정에 신임장을 제출했다. 도노소는 처음에 나폴레옹의 측근이었으며, 쿠데타 자금 조달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노소와 나폴레옹이 공통의 지적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노소는 새로운 정권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황제의 스페인 백작 부인 외제니 드 몽티조와의 결혼식에서 이사벨 2세 여왕을 대표했다.[10]

이 시기에 도노소의 삶은 새로운 경건함을 띠게 되었다. 그는 순례를 떠났고, 수의를 입었고, 빈센트 드 폴 수도회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빈민가와 감옥을 방문했으며, 그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했다. 그는 또한 자유주의 프랑스 가톨릭과 그 지도자인 뒤판루 주교에 반대하는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10]

이 기간 동안 도노소 코르테스는 ''Ensayo Sobre el Catolicismo, el Liberalismo, y el Socialismo Considerados en sus Principios Fundamentales''(1851)[11], 즉 ''그 기본 원리에 비추어 본 가톨릭교,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책은 후안 도노소의 절친한 친구인 루이 뷔유요의 요청으로 쓰여졌다. 이 책은 코르테스를 가톨릭 변증가의 최고 수준에 올려놓았고 그를 극단적 교황 중심주의의 옹호자로 만들었다. 이 책은 인간 운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인간 철학 체계의 무능력과 사회적, 정치적 구원을 위한 인류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설명하고 있다.[12] 그는 자유주의를 궁극적으로 무신론적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다리로 비난한다.[10]

말년에 그는 그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일련의 서신을 교류했다. 그는 또한 교황 비오 9세와 짧게 서신을 교환하며 갈리카니즘과 민주주의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도노소의 많은 사상은 비오 9세의 회칙 ''쿠안타 쿠라''와 그에 첨부된 ''오류 목록''에 통합되었다.[10]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는 1853년 5월 3일 파리의 스페인 대사관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현재 산 이시드로 왕립 교회의 왕족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13]

도노소 코르테스는 2월 혁명에 위기감을 느꼈다. 1849년 2월부터 11월까지 베를린에 스페인 대사로 부임했고, 1851년 2월부터 사망한 1853년 5월 3일까지 파리에서 스페인 대사로 근무했다. 1851년 교황권 최상주의자 루이 비요(Louis Veuillot)의 요청으로 쓰여진 『가톨릭,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평(Ensayo sobre el catolicismo, el liberalismo, y el socialismo considerados en sus principios fundamentales)』은 가톨릭 옹호와 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비판의 저서이다.

3. 사상

1848년 혁명과 펠레그리노 로시 암살, 그리고 독실한 카를리스트였던 동생 페드로의 죽음은 도노소의 사상에서 자유주의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9]

1849년 1월, 도노소는 코르테스에서 "독재론"이라는 연설을 통해 스페인에서 혁명 활동을 진압한 나르바에스 장군의 행동을 옹호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거세게 비난했고, 사회주의를 기독교 도덕과 무신론이 확산된 결과로 공격했다.[9] 그러나 이후 나르바에스를 강하게 비판하며, 코르테스에서 그를 비난하는 연설은 나르바에스의 사임으로 이어졌다.[9]

1849년 2월부터 11월까지 베를린 대사로, 1851년 2월부터 1853년 5월 3일 사망할 때까지 파리에서 스페인 대사로 근무했다. 1851년 교황권 최상주의자 루이 뷔유요의 요청으로 ''그 기본 원리에 비추어 본 가톨릭교,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Ensayo sobre el catolicismo, el liberalismo, y el socialismo considerados en sus principios fundamentales)을 저술했는데, 이는 가톨릭 옹호와 신학적 입장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1] 그는 자유주의를 궁극적으로 무신론적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다리로 비난한다.[10]

도노소는 언론의 힘을 인식하고 자신의 출판물을 통해 공공 논의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과 언론의 자유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8] 그는 언론이 혁명적, 사회주의적, 반기독교적 사상을 퍼뜨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비판했다.[8] 그는 언론의 자유 자체가 기독교 도덕 원칙을 저버린 결과라고 믿었으며, 편집자들이 혁명을 이끄는 새로운 사제 계급이며, 기독교 교리의 권위가 끝없는 논쟁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8]

3. 1. 독재론

1848년 혁명과 로시 암살, 그리고 도노소의 독실한 카를리스트 동생 페드로의 죽음은 도노소 사상에서 자유주의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9] 1849년 1월 도노소는 코르테스에서 "독재론"이라는 연설을 통해 스페인에서 혁명 활동의 흔적을 진압한 나르바에스 장군의 행동을 옹호했다. 도노소는 코르테스에서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거세게 비난했고, 사회주의를 기독교 도덕과 무신론이 확산된 결과로 공격했다.[9] 도노소는 나중에 나르바에스를 강하게 비판했고, 코르테스에서 그를 비난하는 연설은 나르바에스의 사임으로 이어졌다.[9]

3. 2. 가톨릭, 자유주의, 사회주의 비판

1849년 1월, 도노소는 코르테스에서 "독재론"이라는 연설을 통해 스페인에서 혁명 활동을 진압한 나르바에스 장군의 행동을 옹호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거세게 비난했고, 사회주의를 기독교 도덕과 무신론의 침식의 결과로 공격했다.[9] 그는 독재 정권을 수립했던 나르바에스 장군을 지지하게 되었고,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10] 그러나 이후 나르바에스와 나폴레옹의 정권 부패를 엄격하게 비판한다.[9]

1848년 혁명과 펠레그리노 로시 암살, 그리고 도노소의 독실한 카를리스트 동생 페드로의 죽음은 도노소 사상에서 자유주의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9]

1849년 2월부터 11월까지 베를린 대사로 부임했고, 1851년 2월부터 사망한 1853년 5월 3일까지 파리에서 스페인 대사로 근무했다. 1851년 교황권 최상주의자 루이 뷔유요의 요청으로 ''그 기본 원리에 비추어 본 가톨릭교,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Ensayo sobre el catolicismo, el liberalismo, y el socialismo considerados en sus principios fundamentales)을 저술했는데, 이는 가톨릭 옹호와 신학적 입장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11] 이 책에서 도노소는 인간 운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인간 철학 체계의 무능력과 사회적, 정치적 구원을 위한 인류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성을 설명하고 있다.[12] 그는 자유주의를 궁극적으로 무신론적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다리로 비난한다.[10]

3. 3. 언론 비판

도노소는 언론의 힘을 인식하고 자신의 출판물을 통해 공공 논의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과 언론의 자유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8] 그는 저널리즘이 거의 신성한 직업이라고 믿었지만, 이 직업이 종종 남용되어 무분별한 수다와 험담을 퍼뜨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론이 혁명적, 사회주의적, 반기독교적 사상을 퍼뜨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비판했다.[8]

도노소는 언론의 자유 자체가 기독교 도덕 원칙을 저버린 결과라고 믿었다.[8] 그는 편집자들이 혁명을 이끄는 새로운 사제 계급이며, 기독교 교리의 권위가 끝없는 논쟁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8] 또한 정부가 중앙 집권화와 관료화를 이루기 위해 언론을 이용하는 것을 비판했다.[8]

4. 영향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도노소 코르테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2년 슈미트의 저서 『정치 신학』의 마지막 장에서는 “반혁명의 국가철학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도노소 코르테스 등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1950년에는 도노소 코르테스에 대해 논한 저서를 발표했다.

4. 1. 칼 슈미트에 대한 영향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칼 슈미트[14][15]는 도노소 코르테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슈미트는 1922년 저서 『정치 신학』의 마지막 장("반혁명의 국가철학에 관하여")에서 도노소 코르테스를 다루며, 결단의 중요성과 주권 개념을 인식한 그의 공로를 칭찬했다.[16] 또한 슈미트는 도노소의 『독재론』이 역사의 진보적 개념의 몰락을 시작했다고 평가했다.[17]

5. 저서

출판 연도제목비고
1854년 ~ 1855년가비노 테하도 정리 및 서문, 돈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 발데가마스 후작 작품집(Obras de Don Juan Donoso Cortés, Marqués de Valdegamas)테하도 인쇄소 출판, 총 5권
1946년돈소 코르테스, 후안, 발데가마스 후작 (1809-1853) 전집(Obras Completas de Donoso Cortés, Juan, Marqués de Valdegamas, 1809-1853)카톨릭 출판사 출판, 총 2권
1970년전집(Obras Completas)카를로스 발베르데 편집, 서문 및 주석, 카톨릭 출판사 출판, 총 2권


참조

[1] 서적 Juan Donoso Cortés https://books.google[...] Universidad de Alicante 2017-01-16
[2] harvnb
[3] 서적 Donoso Cortés The Bruce Publishing Company 1951
[4] 간행물 Los Comienzos Parlamentarios de Donoso Cortés 1989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백과사전 Donoso Cortés, Juan
[12] 간행물 Church and State https://archive.org/[...] 1867
[13] harvnb
[14] 간행물 Comments on Carl Schmitt and Juan Donoso Cortes 1995
[15] 간행물 Carl Schmitt and Donoso Cortes 2002
[16] 서적 Political Theology: Four Chapters on the Concept of Sovereignty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7] harvnb
[18] 서적 Donoso Cortes: Readings in Political Theory https://books.google[...] Sapient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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