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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모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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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모라스는 프랑스의 정치 이론가, 시인, 작가로, 반근대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고전주의를 옹호하고 낭만주의를 비판했으며, 1899년 액시옹 프랑세즈에 가입하여 기관지인 「액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오를레앙 왕조의 부활, 반유대주의, 대독 강경 노선을 선전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화제 타도를 중단하고 대독 전쟁 협력을 지시했다. 비시 정권에 협력하여 대독 협력자로 고발되었고, 1945년에는 아카데미에서 제명, 옥중에서 사망했다. 모라스의 사상은 전통 가톨릭주의, 극우 운동, 라틴 아메리카 보수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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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모라스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샤를 마리 포티우스 모라스
출생일1868년 4월 20일
출생지마르티그, 부슈뒤론, 프랑스
사망일1952년 11월 16일
사망지투르, 프랑스
직업작가, 문학 평론가
국적프랑스
철학적 배경
지역서양 철학
시대20세기 철학
학파모라스주의
실증주의
왕정주의
통합적 민족주의
반동주의
주요 관심사(정보 없음)
영향을 준 인물아리스토텔레스
알리기에리
아퀴나스
바레스
보들레르
보날
버크
샤토브리앙
콩트
쿨랑주
디미에
드루몽

메스트르
플라톤
르낭
소크라테스
소렐
스미스
토크빌
영향을 받은 인물알튀세르
배넌
보데
벨록
베르나노스
부탕
코글린
데그렐
데옹
더글러스
뒤플레시
에드워즈
엘리엇
에볼라
페라라
프랑코
드 골
알레비
하이데거
앙리 6세

고노에
쿠넬트레딘
라캉
란츠
로랑셀리
마에스투
마리탱
니미에
모리아크
마크롱
료티치
페레이라
페론
페탱
퐁피두
살라자르
사르디냐
소렐
티봉
비엘롬스키
주요 사상모라스주의
정치 활동
소속 기관프랑스 행동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Charles Maurras

2. 생애

마르세유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샤를 모라스는 14세에 난청을 앓게 되면서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9] 17세에 파리로 가서 문예지와 정치 신문에 기고하며 오귀스트 콩트실증주의에 심취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왕당파 신문 기자였던 그는 드레퓌스를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유대주의적인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10]

1899년 앙리 뷰조아와 모리스 푸조가 결성한 악시옹 프랑세즈에 가입했고,[9] 1905년에는 기관지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여 오를레앙 왕조의 부활과 반유대주의, 독일에 대한 강경 노선을 주장했다. 프루동이나 조르주 소렐과 같은 직접 행동주의적인 정치·사회 운동의 영향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모라스는 공화제 타도를 일시 중단하고 대독 전쟁 협력을 지시했다. 그는 독일을 경계하면서도 클레망소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는 등 우파적 행보를 보였다. 전후에는 프랑스의 희생에 상응하는 배상과 독일의 해체를 요구했으며, 민족 자결 원칙의 적용과 무배상·무병합에 반대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을 위협으로 간주하면서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지지했다.

1934년 2월 6일의 위기에서는 다른 우익 단체들과 연계하여 공화제 타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인민전선 시기에는 지하 활동을 강요받았다. 1938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프랑코를 지지했다.

나치에 대해서는 반유대주의를 평가하면서도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을 경계했다. 히틀러 집권 후 라인란트 진주에는 이해를 표명했지만, 긴 칼의 밤이나 독소 불가침 조약은 비난했다. 뮌헨 협정을 프랑스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프랑스가 나치 점령하에 놓이자, 모라스는 리옹으로 거처를 옮겨 필리프 페탱의 비시 정권에 협력했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리옹에서 계속 발행되었고, 반독일적 주장은 철회되었지만 유대인, 프리메이슨, 민주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대독 저항 운동가를 테러리스트로 비난하기도 했다.

1944년 프랑스 해방 후 드골 정권은 모라스를 대독 협력자로 고발했고, 대독 협력자 재판에서 종신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드레퓌스의 복수다!"라고 외쳤다.[10] 옥중에서도 집필을 계속했지만, 건강 악화로 1952년 사망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모라스는 프로방스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가톨릭적이고 왕당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십 대 초반에 청각 장애를 얻었다.[9] 많은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에 큰 영향을 받았다.[10] 17세의 나이에 ''Annales de philosophie chrétienne''라는 학술지에 첫 기사를 발표했다.[9] 그 후 그는 L'Événement|로제브느망|''L'Événement''프랑스어, ''La Revue bleue'', ''La Gazette de France'', ''La Revue encyclopédique''를 포함한 여러 학술지에 참여하여 고전주의를 칭찬하고 낭만주의를 공격했다.[9]

젊은 시절 어느 시점에서 모라스는 가톨릭 신앙을 잃고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1887년 17세의 나이에 파리에 와서 가톨릭계이자 오를레앙파인 ''Observateur''에서 문학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10] 이때 모라스는 오를레앙파 사상뿐만 아니라 가톨릭 사상가 레옹 올레-라프룬이 검토한 독일 철학,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 그리고 나중에 그의 가장 큰 반대자가 될 기독교 "현대주의자"들의 영감 중 하나인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의 영향을 받았다.[10] 그는 1888년 프로방스 시인 프레데리크 미스트랄과 친분을 맺었고 미스트랄의 펠리브르 운동의 연방주의적 논제를 공유했다.[10] 같은 해 그는 민족주의 작가 모리스 바레스를 만났다.[11]

1890년 모라스는 가톨릭 신자들의 공화국 지지에 대한 라비제리 추기경의 호소를 승인하여 그가 반대한 것은 공화국 자체가 아니라 "파벌적인 공화주의"임을 분명히 했다.[10]

이러한 오를레앙파 성향 외에도 모라스는 보나파르티즘과 일부 특징을 공유했다. 1887년 12월, 그는 대통령 쥘 그레비의 사위인 다니엘 윌슨을 포함한 군사 훈장 매매 스캔들 당시 "도둑들을 물리치자!"라는 외침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는 민족주의적 대중주의자인 불랑제주의 사상에 반대했다.[10] 그러나 1889년 모리스 바레스를 방문한 후, 바레스는 불랑제주의 후보에게 투표했고; 그의 "마음의 반유대주의" ("''anti-sémitisme de coeur''")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했다.[10]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모라스는 바레스의 신문 ''La Cocarde'' (콕카드)에서 잠시 일했지만, 때때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바레스의 의견에 반대했다.[10] ''La Cocarde''는 1880년대 후반 의회 공화국에 위협이 된 불랑제 장군을 지지했다.

1896년 최초의 근대 올림픽을 위해 아테네를 여행하는 동안 모라스는 내부 분열과 ''메테크''(외국인)에 대한 개방성 때문에 멸망할 운명이라고 생각한 ''폴리스''의 그리스 민주주의를 비판하게 되었다.[10]

2. 2. 드레퓌스 사건과 정치 참여

모라스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정치에 참여하여 반드레퓌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것이 군대와 사법 체계를 약화시킨다고 여겨 앙리 대령의 위조 증거(드레퓌스를 비난하는)를 지지했다. 모라스에 따르면 드레퓌스는 국가 이익의 제단에 희생되어야 했다.[10] 그러나 공화주의적 민족주의 사상가 바레스가 드레퓌스의 유대인임을 이유로 유죄라고 비난한 반면, 모라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 공화국"을 비난했다.[10] 바레스의 반유대주의는 유사 과학적 인종주의 당시 이론과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반면, 모라스는 더욱 급진적인 "국가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며 "과학적 인종주의"를 비난했다.[10]

모라스는 1898년 말 모리스 바레스, 지리학자 마르셀 뒤부아, 시인 프랑수아 꼬페, 비평가이자 문학 교수 쥘 르메트르와 함께 민족주의적 반드레퓌스주의 단체인 프랑스 애국 동맹의 설립을 도왔다.[12]

1899년, 모라스는 모리스 푸조와 앙리 보주아가 전년에 만든 신문의 분파인 잡지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 AF)''를 창간했다.[9] 모라스는 빠르게 이 운동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고, 푸조와 보주아를 군주제로 개종시켰으며, 이는 이 운동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그는 레옹 도데와 함께 이 운동의 잡지 ''라 르뷔 드 락시옹 프랑세즈''(La Revue de l'Action Française)를 편집했는데, 이 잡지는 1908년 ''락시옹 프랑세즈''(L'Action Française)라는 더 짧은 제목의 일간 신문이 되었다. AF는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와 반동적인 주제를 혼합하여 좌익 공화당원들이 이전에 지지했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치 우익으로 이동시켰다.[13] 1905년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이 시행되는 동안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1899년 그는 군주제를 지지하는 짧은 글 "독재자와 왕"(Dictateur et roi)을 썼고, 1900년에는 합법주의 계열의 기관지인 ''라 가제트 드 프랑스''(La Gazette de France)에 발표되어 그를 유명하게 만든 ''왕정 조사''(Enquête sur la monarchie, Investigations on Monarchy)를 출판했다. 모라스는 1901년과 1902년에 신문 ''르 피가로''(Le Figaro)에 13편의 기사를 발표했고, 1902년 11월부터 1903년 1월까지 에두아르 드르몽의 반유대주의 신문 ''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에 6편의 기사를 발표했다.[11]

1905년부터 1908년 사이에 왕정주의자 연맹인 ''까멜로 뒤 루아''(Camelots du Roi)가 시작되었을 때, 모라스는 의회 외 연맹을 통한 정치적 행동주의 개념을 도입하여 쿠데타의 가능성을 이론화했다.[10] 모라스는 또한 1905년 액시옹 프랑세즈 회원을 모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리그 닥시옹 프랑세즈(Ligue d'Action Française)를 설립했다. 회원들은 공화정 체제와 싸우고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Prince Philippe, Duke of Orléans (1869–1926)) 휘하의 군주제 복고를 지지할 것을 서약했다.[14]

액시옹 프랑세즈의 초기 회원들 중 상당수는 베르나르 드 베쟁, 미술사가 루이 디미에, 수필가 레옹 드 몽테스키우를 포함한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라스가 왕당파 연맹의 친가톨릭 정책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5]

2. 3. 제1차 세계 대전부터 1930년대 말까지

모라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 제국에 맞서 프랑스의 참전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소까지 지지했다.[9]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하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독일과의 협력 정책을 비난했다.[9] 1923년 제르맹 베르통은 레옹 도데와 모라스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액시옹 프랑세즈 동료 마리우스 플라토를 암살했다.[16]

1925년 모라스


1925년, 모라스는 폴 팽르베 정부의 내무장관 아브라함 슈라멕의 살해를 촉구했고,[11] 이로 인해 벌금형과 1년형(집행유예)을 선고받았다.[11]

1929년 교황 비오 11세는 ''액시옹 프랑세즈''를 비난하고, 모라스의 저술들을 금서 목록에 포함시켰다.[17] 이는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고, 많은 회원들이 탈퇴했으며, 운동은 쇠퇴기를 맞았다.[18]

1936년 모라스는 인민전선의 총리 레옹 블룸에 대해 그의 유대인 출신을 강조하며 다시 한번 살해 위협을 가했다.[11] 그는 이로 인해 1936년 10월 29일부터 1937년 7월 6일까지 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11] 그는 평화주의자들에 합류하여 1938년 뮌헨 협정을 칭찬했다.

1930년대에 많은 액시옹 프랑세즈 회원들은 로베르 브라시야, 뤼시앵 르바테, 아벨 보나르, 폴 샤크, 클로드 잔테 등 파시즘으로 전향했고, 이들 대부분은 파시스트 신문 ''나는 어디에나 있다''의 직원이었다.

모라스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프란시스코 프랑코,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지했지만, 아돌프 히틀러에 반대하며 나치즘의 인종 차별 정책을 비판하고 ''나의 투쟁''의 완전한 번역을 요청했다.

1938년 모라스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액시옹 프랑세즈''에 대한 비난을 철회했다.[18]

2. 4. 비시 정권, 체포 및 사망

1940년 6월, 샤를 모라스는 레옹 도데, 모리스 푸조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 기사에서 샤를 드골 장군을 칭찬했다.[21] 1941년 2월 이전에는 필리프 페탱 원수를 "신의 축복"이라고 묘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23] 마르라는 페탱이 정치적 재능을 가지고 프랑스의 상징이라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며 그를 "신의 축복"이라 칭송했다.[22]

비시 프랑스국민혁명은 마르라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이를 전적으로 지지했다.[9] 마르라는 1941년 《오직 프랑스만》을 출판하여 ''프랑스 우선주의''(France d'abord) 정책을 주장했다. 이는 프랑스가 페탱 하에서 정치적, 도덕적으로 스스로를 회복하고 1940년 프랑스 패배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문제를 해결한 후 외국 점령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프랑스를 떠나 군사 투쟁을 계속한 드골주의자들의 태도와는 대조적이었다.[25]

마르라는 1940년 유대인의 지위에 관한 법률이 너무 온건하다고 비판하는 한편,[10] 《오직 프랑스만》에서 프랑스인이 독일의 모델에 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반독일 회의를 개최하는 등 오랫동안 이어져 온 독일 반감을 계속 표명했다.[25] 그는 런던의 "반체제 인사"와 파리 및 비시의 협력자들(뤼시앵 르바테,[26] 로베르 브라시야, 피에르 라발, 마르셀 데아 등)[27] 모두에 반대했다. 1943년에는 독일이 마르라를 체포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28]

프랑스 해방 후, 1944년 9월 마르라는 모리스 푸조와 함께 체포되어 리옹 고등법원에서 "적과의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에는 많은 불규칙성이 있었지만,[29] 마르라는 무기징역과 시민권 박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자동 해임되었으며,[9] 판결에 대해 "드레퓌스의 복수다!"라고 반응했다.[10] 역사학자 위버는 마르라에 대한 재판이 정치적이었고, 배심원들이 그의 정적이 작성한 명단에서 뽑혔다고 주장하며 그에게 불리하게 조작되었다고 평가했다.[30]

리옴과 클레르보 감옥에 수감되었던 마르라는 1952년 3월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앙리 보르도의 지원을 받았으며, 보르도는 뱅상 오리올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마르라의 사면을 요청했다. 마르라는 투르의 클리닉으로 이송되어 얼마 후 사망했는데, 마지막 날에 어린 시절의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 최후의 성사를 받았다.[31]

3. 사상

샤를 모라스는 프랑스 반근대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사상은 고전주의적 요소를 가지며 낭만주의에 반대했다. T. S. 엘리엇, 토마스 어니스트 흄, 에즈라 파운드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아르튀르 드 고비노모리스 바레스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모라스는 조르주 소렐과 같이 반민주주의적 태도를 보였으며, 앙드레 지드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뤼시앙 루바테는 모라스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 대독 협력 파시스트가 되면서 결별했다. 모리스 블랑쇼는 간접적 영향을 받아 초기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했다.

모라스는 왕권을 통해 민주주의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고 믿고 군주제를 지지했다.

3. 1. 모라스와 펠리브르

프로방스 출신 작가인 모라스는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을 비롯한 프로방스 작가들이 프로방스어와 문학을 보호하고 장려하기 위해 설립한 문학 및 문화 협회인 페리브르주(Félibrige)에 참여했다.[10] 이 협회의 이름은 제자나 추종자를 의미하는 프로방스어 단어인 ''félibre''에서 유래했다.

3. 2. 정치 사상

모라스의 정치 사상은 강렬한 민족주의("전체주의적 민족주의")와 강력한 정부를 기반으로 한 질서 있는 사회에 대한 믿음에 기초했다. 이는 그가 프랑스 군주제와 가톨릭 교회를 지지한 기반이었다.[9]

그는 공격적인 정치 전략을 구상했는데, 이는 정치적 행동에 대한 왕당파들의 무관심과 대조적이었다.[10] 그는 역사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반동적인 사상이라는 역설, 즉 단순한 보수주의에 반대되는 반혁명의 형태를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10] 그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는 그가 "자연적 불평등"에 반하는 것으로 판단한 모든 민주주의 원칙을 거부하고,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모든 발전을 비판하며, 세습 군주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다.[9]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퇴폐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부분적으로는 이폴리트 테네와 에르네스트 르낭의 출판물을 읽으면서 영감을 받았고, 고전주의를 존경했다. 그는 프랑스가 1789년 혁명 기간 동안 그 위대함을 잃었다고 느꼈는데, 그 위대함은 로마 제국의 속주로서의 기원에서 물려받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천 년 동안 프랑스를 만든 40명의 왕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프랑스 관찰자(Observateur Français)』에서 프랑스 혁명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다고 썼다.

그는 이러한 쇠퇴의 뿌리를 계몽주의와 종교 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악의 근원을 칼뱅이 귀화한 나라와 루소의 출생 국가를 언급하며 "스위스 사상"이라고 묘사했다. 모라스는 또한 프랑스의 쇠퇴에 대해 "반프랑스"를 비난했는데, 그는 이를 "프로테스탄트, 유대인, 프리메이슨 및 외국인의 4개의 연합 국가"로 정의했다(그가 후자를 위해 실제로 사용한 단어는 외국인 혐오 용어인 ''métèques''이다). 실제로 그에게는 처음 세 가지가 모두 "내부의 외국인"이었다.[32]

반유대주의와 반프로테스탄트주의는 그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였다. 그는 종교 개혁, 계몽주의, 그리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결과가 모두 개인이 국가보다 자신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데 기여했고, 그 결과 국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모라스는 군주제 부흥을 주장했지만, 그의 군주제와 가톨릭에 대한 지지는 명시적으로 실용적인 것이었는데, 그는 국교가 공공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모리스 바레와는 대조적으로, 자아에 기반한 일종의 낭만적 민족주의 이론가인 모라스는 자신의 견해를 감정, 충성심, 신앙이 아닌 이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그는 실증주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를 존경했는데, 그는 혐오했던 제3공화국 정치인들 중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관념론에 반대했다. 모라스는 정통적이고 비정통적인 정치적 행동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는 왕당파 군주주의자들이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비타협적인 보수적 가톨릭교와 현대 세계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 속으로 물러났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프랑스 액션의 카멜로 뒤 루아 연맹은 좌익 반대자들과 자주 거리 폭력에 가담했고, 마르크 상니에의 사회주의적 가톨릭 르 실롱도 마찬가지였다). 모라스는 유대인 정치인에 대한 폭력 선동 혐의로 두 번 유죄 판결을 받았고, 첫 번째 유대인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은 모라스의 동료들이 가한 부상으로 거의 사망할 뻔했다.[33] 그의 슬로건은 "La politique d'abord!"("정치가 먼저다!")였다. 다른 영향으로는 프레데리크 르 플레, 영국 경험론(이를 통해 그는 데카르트 합리론과 경험론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10] 그리고 르네 드 라 투르 뒤 팽이 있다.

모라스의 종교적 견해는 정통적이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그 계층적 구조와 성직자 엘리트가 그의 이상적인 사회의 이미지를 반영했기 때문에 정치적 가톨릭 교회를 지지했다. 그는 교회가 프랑스를 하나로 묶는 시멘트이자 모든 프랑스인을 하나로 묶는 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말에 따르면 "네 명의 무명 유대인이" 쓴 복음서를 불신했지만,[34] 성경의 "위험한 가르침"을 많이 감추었다고 주장하는 가톨릭 교회를 존경했다. 모라스의 복음서 해석과 그의 전체주의적 가르침은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생애 말년에 모라스는 결국 불가지론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의 종교적 비정통성에도 불구하고, 모라스는 수도회와 프랑스 왕위 계승자 파리 백작 필리프를 포함한 프랑스 군주주의자들과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가지론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우려하게 했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는 모라스의 저서 중 일부를 금서 목록에 올리고 프랑스 액션 철학 전체를 비난했다. 모라스의 책 7권은 이미 1914년에 이 목록에 올랐고, 모라스에 대한 자료가 비오 10세에게 제출되었다.

가톨릭 성직자들을 우려하게 한 것은 그의 불가지론뿐만 아니라, 그가 ''politiques d'abord''를 주장하면서 영적인 우선순위와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 권위와 교황 자신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의 근본이라는 것은 자크 마리탱의 책 『영적인 우선순위(Primauté du Spirituel)』에서 알 수 있다. 마리탱은 프랑스 액션과 관련이 있었고 모라스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운동에 대해 불안해한 것은 1926년 위기 이전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그가 모라스와 프랑스 액션에서 멀어지게 된 계기였다. 이 교황의 비난은 그의 많은 신봉자들에게 큰 놀라움이었고, 이 운동에 큰 피해를 입혔다. 교황의 금지는 나중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1939년에 해제되었는데, 이는 모라스가 아카데미에 선출된 지 1년 후였다.[35]

프랑스에서 반근대주의의 대표적인 존재이며, 그 사상은 고전주의적 요소를 포함하여 반낭만주의적이며, T. S. 엘리엇, 토마스 어니스트 흄, 에즈라 파운드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계보는 아르튀르 드 고비노모리스 바레스를 계승하며, 대독 협력파 파시스트가 되어 모라스와 결별한 작가 뤼시앙 루바테는 젊은 시절 모라스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강한 영향을 받았다. 조르주 소렐도 모라스의 반민주주의적인 태도에 동의했으며, 동세대 작가 앙드레 지드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문예 비평으로 유명한 모리스 블랑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극우 이데올로그로 출발했다.

왕권이라는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존재를 일부러 두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해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군주제를 지지했다.

3. 3. 유산

모라스는 전통 천주교주의, 극우 운동, 라틴계 보수주의, 통합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36] 그와 액시옹 프랑세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안토니오 사르디냐, 레옹 드그렐, 알바로 알칼라-갈리아노 이 오스마 등 여러 인물과 유럽의 자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자크 마리탱은 1927년 교황청이 액시옹 프랑세즈를 비난하기 전까지 모라스와 가까웠으며,[36] 초기 저술에서 민주주의를 비판했다.[36] 모라스주의는 반혁명 전쟁을 이론화한 비밀결사대 회원들의 저술에도 영향을 주었다.[36] 스페인에서는 에스파냐 행동이 극우 군주제뿐만 아니라 모라스 운동의 이름까지 채택했다.[37]

그의 영향은 라틴 아메리카까지 미쳐, 멕시코에서 "작은 모라스"라는 별명을 가진 헤수스 기사 이 아세베도,[36] 카를로스 페레이라, 라우레아노 발레닐라 란츠 등이 있다.[36] 플리니우 코레이아 드 올리베이라도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하나이다. 모라스의 사상은 브라질 독재 정권을 지지한 가톨릭 근본주의자들,[36] 시떼 카톨릭 그룹과 유사한 "크리스토스의 꾸르실료"에도 영향을 주었다.[36]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 알레한드로 아구스틴 라누세, 안토니오 임베르트 바레라, 엘리아스 웨신 이 웨신도 "크리스토스의 꾸르실료"에 참여했다.[36] 아르헨티나에서는 로돌포 이라수스타, 후안 카룰라와 같은 민족주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38]

2017년 스티브 배넌이 샤를 모라스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39]

4. 작품


  • Théodore Aubanel프랑스어 (1889)
  • Jean Moréas프랑스어 (1891)
  • Le Chemin du Paradis, mythes et fabliaux프랑스어 (1894)
  • Le voyage d'Athènes프랑스어 (1896–1899)
  • L'Idée de la décentralisation프랑스어 (1898)
  • Trois idées politiques : Chateaubriand, Michelet, Sainte-Beuve프랑스어 (1899)
  • Enquête sur la monarchie프랑스어 (1900)
  • Anthinéa : d'Athènes à Florence프랑스어 (1901) (Lettres des Jeux olympiques프랑스어 포함)
  • Les Amants de Venise, George Sand et Musset프랑스어 (1902)
  • L'Avenir de l'intelligence프랑스어 (1905)
  • Le Dilemme de Marc Sangnier프랑스어 (1906)
  • Si le coup de force est possible프랑스어 (1910)
  • Kiel et Tanger프랑스어 (1910)
  • La Politique religieuse프랑스어 (1912)
  • L'Action Française et la Religion Catholique프랑스어 (1914)
  • L'Étang de Berre프랑스어 (1915)
  • Quand les Français ne s'aimaient pas프랑스어 (1916)
  • Les Conditions de la victoire프랑스어, 4권 (1916–1918)
  • Tombeaux프랑스어 (1921)
  • Inscriptions프랑스어 (1922)
  • Poètes프랑스어 (1923)
  • L'Allée des philosophes프랑스어 (1924)
  • La Musique intérieure프랑스어 (1925)
  • Barbarie et poésie프랑스어 (1925)
  • L'Action française et le Vatican프랑스어 (1927)
  • Lorsque Hugo eut les cent ans프랑스어 (1927)
  • Le prince des nuées프랑스어 (1928)
  • Un débat sur le romantisme프랑스어 (1928)
  • Vers un art intellectuel프랑스어 (1928)
  • L'Anglais qui a connu la France프랑스어 (1928)
  • Corps glorieux ou Vertu de la perfection프랑스어 (1929)
  • Promenade italienne프랑스어 (1929)
  • Napoléon pour ou contre la France프랑스어 (1929)
  • De Démos à César프랑스어 (1930)
  • Corse et Provence프랑스어 (1930)
  • Quatre nuits de Provence프랑스어 (1930)
  • Triptyque de Paul Bourget프랑스어 (1931)
  • Le Quadrilatère프랑스어 (1931)
  • Au signe de Flore프랑스어 (1931)
  • Heures immortelles프랑스어 (1932)
  • Dictionnaire politique et critique프랑스어, 5권 (1932–1933)
  • Prologue d'un essai sur la critique프랑스어 (1935)
  • Quatre poèmes d'Eurydice프랑스어 (1937)
  • L'amitié de Platon프랑스어 (1937)
  • Jacques Bainville et Paul Bourget프랑스어 (1937)
  • Les vergers sur la mer프랑스어 (1937)
  • Jeanne d'Arc, Louis XIV, Napoléon프랑스어 (1937)
  • Devant l'Allemagne éternelle프랑스어 (1937)
  • Mes idées politiques프랑스어 (1937)
  • La Dentelle du Rempart프랑스어 (1937)
  • Pages africaines프랑스어 (1940)
  • Sous la muraille des cyprès프랑스어 (1941)
  • Mistral프랑스어 (1941)
  • La Seule France프랑스어 (1941)
  • De la colère à la justice프랑스어 (1942)
  • Pour un réveil français프랑스어 (1943)
  • Poésie et vérité프랑스어 (1944)
  • Paysages mistraliens프랑스어 (1944)
  • Le Pain et le Vin프랑스어 (1944)
  • Au-devant de la nuit프랑스어 (1945)
  • L'Allemagne et nous프랑스어 (1945)
  • Les Deux Justices ou Notre J'accuse프랑스어 (1947)
  • L'Ordre et le Désordre프랑스어 (1948)
  • Maurice Barrès프랑스어 (1948)
  • Une promotion de Judas프랑스어 (1948)
  • Réponse à André Gide프랑스어 (1948)
  • Au Grand Juge de France프랑스어 (1949)
  • Le Cintre de Riom프랑스어 (1949)
  • Mon jardin qui s'est souvenu프랑스어 (1950)
  • Le Mont de Saturne프랑스어 (1950)
  • Tragi-comédie de ma surdité프랑스어 (1951)
  • Vérité, justice, patrie프랑스어 (모리스 푸조(Maurice Pujo)와 함께) (1951)
  • À mes vieux oliviers프랑스어 (1952)
  • La Balance intérieure프랑스어 (1952)
  • Le Beau Jeu des reviviscences프랑스어 (1952)
  • Le Bienheureux Pie X, sauveur de la France프랑스어 (1952)
  • Pascal puni프랑스어 (사후 출판) (1953)
  • Lettres de prison (1944–1952)프랑스어 (사후 출판) (1958)
  • Lettres passe-murailles, correspondance échangée avec 자비에르 발라(Xavier Vallat) (1950–1952)프랑스어 (사후 출판) (1966)


; 영어 번역

  • 《지성의 미래와 프랑스의 각성을 위해(The Future of the Intelligentsia & For a French Awakening)》, Arktos Media (2016)


; 한국어 번역

  • 《베네치아의 연인들 조르주 상드뮈세》 (후지모토 토시오 역, 야요이 서방(야요이 선서), 1972년)
  • 《미스트랄의 지혜》 (하타나카 토시로 역, 아오야마샤, 1987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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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웹사이트 A Celebration of Conservative Politics in France https://kirkcenter.o[...] 2007-03-20
[7] 웹사이트 The Revenge of Maurras https://www.firstthi[...] 2019-11-01
[8] 뉴스 Macron criticized over comments on antisemitic figure Philippe Pétain https://www.jpost.co[...] 202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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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Spain's First Democracy: The Second Republic, 1931–1936 1993
[38] 서적 Las Derecha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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