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 참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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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0인 참수 경쟁은 1937년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보도된, 두 일본군 장교가 누가 먼저 칼로 100명의 중국인을 죽이는지 경쟁했다는 내용이다. 이 경쟁은 난징 대학살 이전에 난징으로 가는 도중에 벌어졌다고 알려졌으며, 이후 두 장교는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150명 살해를 목표로 다시 경쟁하기로 했다고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언급되었고, 두 장교는 학살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난징 대학살의 진실성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고, 일본 내에서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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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참수 경쟁 | |
---|---|
개요 | |
명칭 | 백인 참수 경쟁 (百人斬り競争) |
관련 사건 | 난징 대학살 |
배경 | |
시기 | 1937년 중일 전쟁 중 난징 전투 기간 |
장소 | 중국 난징으로 향하는 경로 |
관련자 | |
경쟁자 |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 노다 쓰요시 소위 |
보도 기자 | 아사미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자 |
사건 경과 | |
발단 |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일본군 장교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누가 먼저 100명을 베는지 경쟁을 시작함. |
보도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서 "백인 참수 경쟁"을 보도. 아사미 기자가 경쟁 상황을 기사화. |
결과 | 무카이 토시아키는 106명, 노다 쓰요시는 105명을 살해했다고 보도됨. 누가 먼저 100명을 넘겼는지 불분명하여 경쟁은 150명으로 연장됨. |
논란 및 재판 | |
전개 | 종전 후, 이 사건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일본군의 잔혹 행위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됨. 중국에서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됨. |
명예훼손 소송 | 1990년대에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의 유족이 아사히 신문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함. 2003년, 도쿄 지방 재판소는 신문 기사가 허위 사실이라는 주장을 기각하고 유족의 패소를 판결함. |
판결 요지 | 재판부는 "백인 참수 경쟁" 자체가 완전히 허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함. 다만 기사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함. |
역사적 논쟁 | |
쟁점 | 사건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됨. 일부에서는 신문 보도가 과장되었거나 허위라고 주장함. |
일본 극우 세력 | 일본 극우 세력은 이 사건을 난징 대학살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도 함.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난징 대학살 일본의 전쟁 범죄 도쿄 재판 |
2. 당시의 보도
1937년, 마이니치 신문(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자매지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일본군 장교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 두 명이 칼로 누가 먼저 100명을 죽이는지 경쟁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 경쟁은 난징 대학살 이전 난징으로 가는 도중에 벌어졌으며, 1937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4건의 기사로 보도되었고, 마지막 두 건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번역 게재되었다.
두 장교는 경쟁에서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누가 이겼는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12월 13일 ''도쿄 니치니치 신문'' 기사에서 아사미 카즈오와 스즈키 지로 기자는 두 장교가 150명 살해를 목표로 새로운 경쟁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당시 ''니치니치'' 기사의 헤드라인은 "경쟁에서 100명 참수 - 무카이 106명 – 노다 105명 – 두 2등 중위, 연장전에 돌입"이라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었다.
다른 병사들과 역사학자들은 치열한 백병전에서 적을 연속으로 살해해야 하는 이 경쟁의 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37] 노다 자신도 귀향 연설에서 "실제 전투에서 칼로 4~5명밖에 죽이지 못했다"고 말했다.[125]
이 경쟁은 가고시마시 구사무다 초등학교의 부교재에서 "피가 끓고 살이 춤추는, 쾌활한 이야기"로 소개되는 등 지역 사회에서 영웅담으로 칭찬받았다.[24]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38년 1월 25일)에는 노다 소위가 난징 입성까지 105명, 그 후 253명을 베었다는 편지와 백인 참수의 노래가 소개되었다. 가고시마 지역 신문들은 노다 소위가 374명을 베었다고 자랑하거나, 지역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경쟁담을 들려주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2. 1. 언론 보도 목록
번호 | 매체 | 날짜 | 주요 내용 |
---|---|---|---|
1 | 도쿄일일신문 | 1937년 11월 30일 | 무카이 소위와 노다 소위가 누가 먼저 적병 100명을 베는지 경쟁 중. 우시에서 시작, 현재 65 대 25 (창저우 인터뷰 기사).[79][80][103][104][105][106][107][108][95][109] |
2 | 도쿄일일신문 | 1937년 12월 4일 | 창저우 출발, 단양까지 86 대 65. 무카이 소위는 단양 중정문 공격, 노다 소위는 오른손목 경상.[110] |
3 | 도쿄일일신문 | 1937년 12월 6일 | "구용 입성에도 양 소위가 최전선 분전", 89 대 78.[111][112] |
4 | 도쿄일일신문 | 1937년 12월 13일 | 자금산 공략전 때 106 대 105. 10일, 150명 베기 경쟁 시작. 11일 중산릉 근처.[113][114][115][116][117][118][119][120][121][122][123][124][125][65][126] |
5 | 가고시마 매일신문 | 1937년 12월 16일 | 도쿄일일신문 후속 기사 |
6 | 가고시마 매일신문 | 1937년 12월 18일 | 도쿄일일신문 후속 기사 |
7 | 오사카 매일신문 | 1938년 1월 25일 | 노다 소위가 난징 입성까지 105명, 그 후 253명을 베었다는 편지. 백인 참수의 노래 소개. |
8 | 가고시마 아사히신문 | 1938년 3월 20일 | 노다 소위 가고시마 귀환. 374명 참수. |
9 | 가고시마 신문 | 1938년 3월 21일 | 노다 소위 374명 참수. 지역 어린이, 학생들에게 경험담 전달. |
10 | 가고시마 아사히신문 | 1938년 3월 22일 | 노다 소위 아버지, 아들 전과(374명 참수) 소개. |
11 | 가고시마 신문 | 1938년 3월 26일 | 노다 소위, 백인 참수 강연. |
12 | 도쿄일일신문 | 1939년 5월 19일 | 무카이 소위, 500명 참수 목표, 현재 305명 참수. |
13 | 신세계 아사히신문 | 1939년 6월 12일 | 노다 중위 전사(오보), 무카이 중위 500명 참수 목표. 애도가 부러질 때까지 노력.[23] |
마이니치 신문(''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자매지)과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1937년 일본군 장교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두 명이 칼로 100명을 먼저 베는 시합을 했다고 보도했다.[23] 이 경쟁은 난징 대학살로 가는 도중에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1937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4건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마지막 두 건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번역 게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00인 참수 경쟁에 대한 기록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의 문서에 실렸다. 1947년, 무카이와 노다는 미국 육군(U.S. Army)에 체포되어 스 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범죄인 인도를 통해 중국으로 이송되어 난징 전범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32]
3. 전개 과정
두 장교는 전투 중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누가 실제로 경쟁에서 이겼는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12월 13일 ''도쿄 니치니치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아사미 가즈오와 스즈키 지로 기자는 150명 살해를 목표로 경쟁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고 한다. 같은 날 ''니치니치'' 기사의 헤드라인은 "경쟁에서 100명 참수 - 무카이 106명 – 노다 105명 – 두 2등 중위, 연장전에 돌입"이라는 믿기 힘든 기록을 보도했다.
다른 병사들과 역사학자들은 두 중위가 치열한 백병전에서 적을 연속으로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37] 노다 자신도 고향에서 "실제 전투에서 칼로 4~5명밖에 죽이지 못했다... 적의 참호를 점령한 후, 우리는 그들에게 '니 라이 라이'(你来来|너, 와, 와중국어)라고 말하곤 했다. 중국군 병사들은 우리를 향해 참호 밖으로 잇따라 나올 정도로 어리석었다. 우리는 그들을 줄 세워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베어 넘겼다."라고 말했다.[125]
전쟁 중 보도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번호 매체 날짜 주요 내용 1 도쿄일일신문 1937년 11월 30일 무카이 소위와 노다 소위가 누가 먼저 적병 100명을 베는지 경쟁 중. 우시에서 처음으로 현재 65대 25 (창저우에서의 인터뷰 기사).[23] 2 도쿄일일신문 1937년 12월 4일 창저우 출발부터 단양까지 86대 65로 갱신. 무카이 소위는 단양 중정문 첫 번째를 결행, 노다 소위도 오른손목에 경상.[23] 3 도쿄일일신문 1937년 12월 6일 구용 입성에도 양 소위가 최전선에서 분전, 89대 78.[23] 4 도쿄일일신문 1937년 12월 13일 자금산 공략전 때 106대 105. 노다 "이봐, 나는 백오인데, 너는?" 무카이 "나는 백육이다!" 10일 정오 대면하여 새롭게 150명 베기 경쟁 시작. 11일 낮 중산릉을 내려다봄.[23] 5 가고시마 매일신문 1937년 12월 16일 도쿄일일신문의 후속 기사[23] 6 가고시마 매일신문 1937년 12월 18일 도쿄일일신문의 후속 기사[23] 7 오사카 매일신문 1938년 1월 25일 노다 소위가 나카무라 겐로에게 백인 참수를 자랑하는 편지가 도착. 난징 입성까지 105명을 베었지만 그 후 253명을 베었다는 것, 『백인 참수의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 소개.[23] 8 가고시마 아사히신문 1938년 3월 20일 노다 소위가 가고시마로 귀환. 374명을 베었다고 말했다.[23] 9 가고시마 신문 1938년 3월 21일 노다 소위가 374명을 베었다고 말했다. 지역 어린이, 학생들에게 백인 참수 경쟁담을 나눴다.[23] 10 가고시마 아사히신문 1938년 3월 22일 노다 소위의 아버지 이세쿠마 씨가 아들의 전과 (374명 참수)를 소개.[23] 11 가고시마 신문 1938년 3월 26일 노다 소위가 신도관에서 백인 참수 강연.[23] 12 도쿄일일신문 1939년 5월 19일 무카이 소위가 노다 소위와 헤어진 후 약속한 500명 참수를 이루기 위해 분투 중. 지금까지 305명을 베었다.[23] 13 신세계 아사히신문 1939년 6월 12일 노다 중위는 전사했지만(오보), 무카이 중위는 약속한 500명 참수를 이루기 위해 애도가 부러질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함.[23]
제1보 회견에 참석하여 두 소위의 사진을 찍은 도쿄일일신문 카메라맨 사토 후리토시는 명예훼손 소송 진술서에서 "기사를 본 것은 이듬해 1월에 난징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후였는데, 그때의 인상은 '아사미는 거짓말을 썼군'이라는 감상입니다"라고 진술했다.[79] 소송 증인 심문에서는 "(백인 참수는) 100% 믿을 수 없습니다", "(기사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80]
4. 전후 재판 및 처형
이들은 난징 대학살 당시 300명 이상의 중국인을 살해한 다나카 군키치와 함께 기소되었다. 세 사람은 모두 난징 전투와 그 이후의 대학살 과정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1948년 1월 28일 위화타이 구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32] 무카이와 노다는 모두 35세였고, 다나카는 42세였다.
4. 1. 난징 군사법정
난징 군사법정에서 무카이와 노다는 "우리 국민"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32] 두 사람은 백인 참수는 허풍 또는 전투 행위였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정은 이들이 전쟁 중 포로 및 비전투원을 대상으로 공동으로 연속적인 학살을 자행했다고 판결했다.[32]
5. 논쟁
1937년 마이니치 신문(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자매지)과 도쿄 니치니치 신문은 일본군 장교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 간의 이른바 '100인 참수 경쟁'을 보도했다. 이 경쟁은 칼로 먼저 100명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난징 대학살 이전 난징으로 가는 도중에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5] 1937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4건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마지막 두 건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번역 게재되었다.
두 장교는 경쟁에서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누가 이겼는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 기사에 따르면, 아사카이 가즈오와 스즈키 지로 기자는 150명 살해를 목표로 새로운 경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병사들과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치열한 백병전에서 적을 연속으로 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개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5] 노다 자신도 고향 연설에서 실제 전투에서 칼로 죽인 사람은 4~5명뿐이라고 밝혔다.[5] 그는 "적의 참호를 점령한 후 '니 라이 라이'(你来来|너, 이리 와중국어)라고 말하면 중국군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나왔고, 그들을 줄 세워 베었다"고 설명했다.[5]
이 경쟁은 1967년 호라 토미오 (와세다 대학 역사학 교수)가 난징 사건에 관한 문서를 발표할 때까지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1971년 혼다 가쓰이치가 아사히 신문에 관련 기사를 기고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5]
일본에서 이 기사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특히 살인 경쟁의 진실성이 논쟁의 대상이었다.[5] ''산케이 신문''과 일본 정치인 이나다 도모미는 ''아사히''와 ''마이니치'' 신문사에 전쟁 당시 보도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6]
혼다 가쓰이치는 살인 경쟁 이야기를 중국 주둔 일본군에 미치는 영향의 맥락에서 다루었다. 그는 일본 참전 용사 우노 신타로가 9명의 포로 목을 벤 경험을 언급하며,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살인이 잔혹한 처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게 되었다고 밝혔다.[7]
2000년, 밥 와카바야시는 "살인 경쟁 자체는 언론인에 의해 날조"되었지만, "난징 만행 전체의 역사성에 대한 전면적인 논쟁을 촉발했다"고 결론 내렸다.[8] 그는 이 논쟁이 일본 국민의 만행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켰다고 평가했다.[8]
중국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이 경쟁에 대한 전시를 포함하고 있다. ''재팬 타임스''는 이 경쟁의 존재가 수정주의자들이 전체 컬렉션의 정확성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도록 허용한다고 지적했다.[8]
이 경쟁은 1994년 영화 ''블랙 선: 난징 대학살''과 2009년 영화 ''존 라베''에 묘사되었다.
2003년 4월,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의 가족은 혼다 가쓰이치, 가시와 쇼보, 아사히 신문,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 8월 23일, 도쿄 지방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법원은 "뉴스 기사의 내용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언급했지만, 역사적 논의의 일부라고 판결했다.[9] 2006년 12월, 일본 최고 재판소는 도쿄 지방 법원의 결정을 지지했다.[10]
민간인 살해와 관련하여, 중국에서는 민간인에게 저항할 것이 요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을 환영한다며 깃발을 흔드는 부인들의 행렬 뒤에서 변의대가 일제 사격을 가하거나, 어린아이조차 방심할 수 없었다는 증언도 있다. 또한 쇼와 20년(1945년)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본토 결전을 위해 국민의용대를 조직한다고 발표했을 때 난바라 시게루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장은 "게릴라를 하면 학살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5. 1. 진위 논란
1971년, 혼다 가쓰이치는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던 르포르타주 『중국의 여행』(이후 단행본화)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논쟁을 촉발시켰다. 혼다는 두 소위를 A소위, B소위로 익명으로 표현했다. 이에 대해 이자야 벤다산(야마모토 시치헤이)은 "백인 참수 경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왜 두 소위를 익명으로 했는가. 실명을 밝혀주기 바란다. 이 이야기는 '전설'인 것인가. 이 두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명을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33]。이에 대해 혼다는 두 소위의 실명이 기재된 신문 기사나 스즈키 지로 기자, 시시메 아키라의 육필 원고(후술)를 제시하며 "이래도 전설이라고 주장하겠는가"라고 반론했다[34]。야마모토는 군대의 상식이라는 경험에 근거한 논법으로, 스즈키 아키라는 난징 군사 재판의 기록과 무카이 소위를 아는 사람들에 대한 취재라는 방법으로 허위를 주장했다[35]。이후 스즈키는 잡지 분재의 주장을 묶어 "난징 대학살의 환상"을 출판[36]하여 오야상을 수상했다. 야마모토는 액션 배우의 담화, 일본도 수리에 관여한 나루세 세키지의 저서 『싸우는 일본도』, 일본도의 강도 시험에 입회한 재료 공학 O 공학 박사의 편지[37], 자신의 체험 등을 바탕으로 "일본도로 정말 벤다고 해봤자 3명 정도"(액션 배우) 등을 인용하여 "일본도는 휙휙 백 명을 베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38]。
하타 이쿠히코는 야마모토에 대해 "1. 무저항의 포로를 세워 베는 것을 상정 외로 하고 있는 것" "2. 나루세 저서에서 유리한 부분만 이용하고 불리한 사례를 무시하고 있는 것에서 '트릭 내지 오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39]。호리 토미오도 같은 관점에서 야마모토 시치헤이와 스즈키 아키라를 비판하고 있다。
야마모토는 시체의 손목과 발을 일본도로 절단한 후 칼자루가 흔들린 자신의 체험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40]。하타는 우노 신타로(귀국자 연락회 활동가)를 예로 들어 세워 베기라면 몇 명(10명)이라도 고장 없이 벨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41]。하지만 『일본도의 근대적 연구』(고이즈미 히사오)에 따르면, 2명으로 고장이 발생하고 중대한 고장도 있다.
노다 소위가 편지에서 나카무라 겐로에게 백인 참수를 고백하고, 신문 보도 내용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지 않았고[47], 무카이 중위 자신이 아사미, 미츠모토, 스즈키 기자와는 별도의 특파원에게 2년 후에 이야기한 "305명 참수" 기사가 2004년에 재발견된 것으로 "백인 참수 경쟁은 아사미 기자 등 일방적인 창작 기사였다"라는 스즈키 아키라, 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설은 부정된다[48]。
혼다 가쓰이치 등은 "백인 참수 경쟁"의 사실이 다음과 같은 자료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주장했다.[50]
# 당시 신문 등의 자료 (도쿄일일신문의 기사)
# 도쿄일일신문의 기사 외 보도
## 노다 소위가 나카무라 겐로에게 보낸 편지가 소개되었다. 그 안에서 "백인 참수 경쟁"과 같은 스포츠적인 일이 가능, 난징 입성까지 "105명을 베었다"가 그 후 "253명을 쳐 베었다"며 "백인 참수 경쟁"의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 노다 소위가 귀국했을 당시 기사에서는 "374명을 베었다"며 노다 소위가 "백인 참수 경쟁"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 무카이 소위는 "이번에는 천인 참수다", "노다 소위와 헤어진 후 약속한 오백인 참수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305명을 베었다"라고 말했다.
# 노다 소위의 아버지 노다 이세구마는 쇼와 42년 6월 시점에서 노다 소위가 "난징 입성 전에 백인 참수 경쟁을 같은 연대의 무카이 소위와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51]
# 노다 소위와 같은 중대에 소속되어 있던 모치즈키 고사부로는 수기 『나의 지나 사변 (사비판)』에서 노다 소위가 비무장 일반 농민을 베었다는 것, 지나인을 보면 무카이 소위와 서로 빼앗으려 할 정도로 격화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 시시메 아키라는 "중국" 1971년 12월호에 투고한 논문에서 노다 소위의 강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향토 출신 용사라든가, 백인 참수 경쟁의 용사라고 신문이 쓰고 있는 것은 나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돌격해서 백병전 속에서 벤 것은 4, 5명밖에 없다. 점령한 적의 참호를 향해 '니라이라이'라고 외치면 시나병은 바보라서 우르르 몰려 나와 이쪽으로 온다. 그것을 늘어세워 놓고, 모조리 벤다. 백인 참수라고 평판이 났지만, 사실은 이렇게 벤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시시메 아키라의 동급생이었던 카라시마 카츠이치는 시시메에게 보낸 편지에 노다가 포로를 베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적고 있다.
# 두 소위가 작성한 유서에서도 두 소위가 "백인 참수 경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신문 기사가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 아사미, 스즈키 양 기자 및 사토 후리히사 카메라맨의 논문에서는 기자가 두 소위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썼다고 일치되게 언급하고 있다.
# 난징 공략전에서 포로와 일반 민중에 대한 살해는 매우 흔한 현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 이상에 제시된 각 자료는, 노다 등이 농민 등을 살해한 현장을 목격한 자료, 노다 소위가 "백인 참수 경쟁"을 했고 포로를 살해했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자료, 두 소위가 취재 기자에게 스스로 "백인 참수 경쟁"에 대해 이야기했던 자료이며, 이러한 자료를 뒷받침하는 자료의 존재 등 서로의 자료가 지지하고 보완하여 "백인 참수 경쟁"의 사실과 포로 살해의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는 "백인 참수에 대해, 저는 통설과는 약간 다른 견해입니다. 이것은 포로의 깎아 베기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백 명은 과장이겠지만, 백인 참수를 했다고 알려진 두 소위 중 한 명은 유명해진 후 모교 초등학교에서 강연을 하여 학생들에게 그것은 포로를 벤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이 몇 명 있어요. 포로의 깎아 베기라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52]。
하타 이쿠히코는 1991년 여름, 시시메 아키라의 증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고시마 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의 동급생 명부를 토대로 문의하여, "노다 중위가 허리에서 칼을 뽑아 깎아 베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었다"라는 가라시마 가쓰이치의 증언, "실제로는 포로를 벤 것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솜옷을 입고 있어서 좀처럼 베어지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는 기타노조노 요시노리의 증언, 노다가 전교생 앞에서 검도장에서 포로의 깎아 베기 모습을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나중에 검도 교사로부터 "터무니없는 짓이다"라고 훈계받았다는 히다카 마코토의 증언 등을 소개하며, "아무래도 일반 주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다가 백병전뿐만 아니라 포로를 늘어놓고 깎아 베기를 한 것을 '고백'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라고 말했다[53]。
5. 2. 주요 부정설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군 소위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난징으로 진격하면서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가 경쟁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주요 부정설은 다음과 같다.- 무카이 소위의 부상: 무카이 소위는 단양에서 벌어진 포격전에서 부상을 입고 전선을 이탈했기 때문에,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증언이 있다.[63] 당시 위생병 T씨의 편지에는 "무카이 소위의 부상은 사실"이며 부상 후의 행동도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고 한다.[64]
- 근대 전투의 특성: 총기가 발달한 근대 육상 전투에서는 백병전으로 개인의 전과를 경쟁한다는 개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63]
- 두 소위의 직책: 무카이 도시아키는 포병대의 소대장이었고, 노다 쓰요시는 대대의 부관이었다.[67] 두 사람 모두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백병전에 참가하는 병과가 아니었으며, 병과가 다른 두 사람이 "어떤 전과를 경쟁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한, 무카이 소위는 군도로 전투한 경험이 없다고 한다.[63]
- 전시 보도의 목적: 당시 보도는 두 소위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는 전의 고양 및 무용담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63]
- 민간인 살해 가능성: 만약 발도에 의한 전투가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이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살인 게임"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도쿄 니치니치 신문의 기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63]
이러한 정황들로 인해, 100인 참수 경쟁은 조작되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5. 3. '앉아 베기' 설
혼다 가쓰이치, 하타 이쿠히코 등은 두 소위의 행위가 이른바 '앉아 베기'(포로 학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당시 신문 자료, 노다 소위의 발언, 관련자 증언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50]노다 소위는 고향에서 한 연설에서 "실제 전투에서 칼로 4~5명밖에 죽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적의 참호를 점령한 후, 우리는 그들에게 '니 라이 라이'(你来来|니 라이 라이중국어)라고 말하곤 했다. 중국군 병사들은 우리를 향해 참호 밖으로 잇따라 나올 정도로 어리석었다. 우리는 그들을 줄 세워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베어 넘겼다."라고 설명했다.[50]
하타 이쿠히코는 노다 소위가 모교에서 학생들에게 포로를 베었다고 이야기했으며, 이를 들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고 증언했다.[52] 시시메 아키라는 노다 소위의 강연 내용을 소개하며, 노다가 "백인 참수라고 평판이 났지만, 사실은 이렇게 벤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한 시시메의 동급생이었던 카라시마 카츠이치는 시시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다가 포로를 베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적었다.[50]
진 이쿠히코는 노다가 전교생 앞에서 검도장에서 포로를 앉혀 베는 모습을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나중에 검도 교사로부터 "터무니없는 짓이다"라고 훈계받았다는 히다카 마코토의 증언 등을 소개하며, 노다가 포로를 앉혀 베기를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고 말했다.[53]
노다 소위의 부하였다는 모치즈키 고사부로는 회상록에서 노다 소위가 비무장 일반 농민을 베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노다 소위가 "저기 있는 지나인을 데려와라"라고 명령하여 끌려온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노다 소위가 군도를 휘둘러 목을 베었다고 기록했다. 모치즈키는 이러한 행위가 무카이 소위와 경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연대장이나 대대장도 이를 알고 묵인했다고 주장했다.[50]
6. 명예훼손 재판
혼다 가쓰이치는 "백인 참수 경쟁"이 여러 자료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주장했다.[50]
자료 종류 | 내용 |
---|---|
도쿄일일신문 기사 및 기타 보도 | |
노다 이세구마 (노다 소위 아버지) 증언 | 쇼와 42년 6월, 노다 소위가 난징 입성 전 무카이 소위와 백인 참수 경쟁을 했다는 것을 인정.[51] |
모치즈키 고사부로 (노다 소위와 같은 중대 소속) 수기 | 『나의 지나 사변』에서 노다 소위가 비무장 일반 농민을 베었고, 무카이 소위와 경쟁이 격화되었다고 기록. |
시시메 아키라 논문 및 카라시마 카츠이치 편지 | 시시메 아키라: "중국" 1971년 12월호 논문에서 노다 소위 강연 내용("...백인 참수 경쟁의 용사... 실제로... 벤 것은 4, 5명... 점령한 적의 참호를 향해 니라이라이라고 외치면... 우르르 몰려 나와... 모조리 벤다...") 소개. 카라시마 카츠이치: 시시메에게 보낸 편지에 노다가 포로를 베었다는 이야기 기록. |
두 소위 유서 | "백인 참수 경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신문 기사가 되었다고 인정. |
아사미, 스즈키 기자 및 사토 카메라맨 논문 | 두 소위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썼다고 일치되게 언급. |
기타 자료 | 난징 공략전에서 포로와 일반 민중에 대한 살해가 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 다수 존재. |
혼다 가쓰이치는 이상의 자료들이 노다 등이 농민 등을 살해한 현장 목격, 노다 소위가 "백인 참수 경쟁"을 했고 포로를 살해했다는 취지로 이야기, 두 소위가 취재 기자에게 스스로 "백인 참수 경쟁"에 대해 이야기, 이러한 자료를 뒷받침하는 자료의 존재 등 서로 지지하고 보완하여 "백인 참수 경쟁"과 포로 살해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7. 현대적 평가 및 영향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는 100인 참수 경쟁과 관련된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는 난징 대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이 경쟁은 일부 영화에서도 묘사되었다.[5]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이 사건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일부는 난징 대학살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이 사건을 이용하기도 한다.[5] 산케이 신문과 이나다 도모미 의원은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에 전쟁 당시 이 경쟁에 대한 보도를 철회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6]
밥 와카바야시는 2000년에 "살인 경쟁 자체는 언론인에 의해 날조"되었지만, "난징 만행 전체의 역사성에 대한 전면적인 논쟁을 촉발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이 논쟁이 "보수 수정주의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민의 만행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키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피해자임을 인식하게 했다"고 평가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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