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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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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7년 5월 16일 헌정 위기는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대통령과 의회 간의 권력 다툼으로 발생한 정치적 위기이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왕당파가 우세한 상황에서, 대통령 마크마옹은 온건 공화주의자 쥘 시몽 총리를 해임하고 왕당파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에 하원은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마크마옹은 의회를 해산했지만, 총선에서 공화주의자가 다수를 차지하면서 마크마옹은 굴복하고 쥘 아르망 뒤포르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 사건은 왕당파의 몰락과 의회 중심제의 확립을 가져왔으며,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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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
사건 개요
사건명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
로마자 표기Osip-yuk chil-lyuk-nyon O-wol Sib-yuk-il Heon-jeong-wi-gi
프랑스어 명칭Crise du seize mai
발생일1877년 5월 16일
장소프랑스
원인대통령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과 프랑스 하원 간의 정치적 갈등
공화주의 세력의 부상과 왕정복고주의 세력의 저항
주요 참여자
대통령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수상쥘 시몽 (사임), 알베르 드 브뢰유 (임명)
공화주의 지도자레옹 강베타, 쥘 페리, 아돌프 티에르
사건 경과
1877년 5월 16일마크마옹 대통령, 쥘 시몽 수상을 해임하고 알베르 드 브뢰유를 임명
1877년 6월 25일하원 해산
1877년 10월 14일총선거 실시, 공화주의 세력 승리
1879년 1월 30일마크마옹 대통령 사임, 쥘 그레비 대통령 당선
결과 및 영향
결과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대통령의 권한 약화 및 의회주의 확립
공화주의 세력의 확고한 우위 확보
영향프랑스 정치 체제의 변화 및 공화주의 가치 확산

2. 배경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구성된 국회는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아니스트로 이루어진 왕당파가 과반을 차지했다. 1876년 선거까지 왕당파가 의회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반공화주의자들이 공화국을 이끄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왕당파는 마크마옹을 대통령으로 지지했고, 그의 임기는 7년으로 정해졌다.

1875년, 아돌프 티에르쥘 페리, 레옹 강베타와 함께 공화국 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듬해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했지만, 프랑스 상원은 왕당파가 근소한 차이로 다수를 차지했고, 하원은 공화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여 정치적 혼란은 불가피했다.

2. 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왕당파의 부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구성된 국회는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로 이루어진 왕당파가 과반을 차지했다.[2] 이들은 나폴레옹 3세의 몰락으로 탄생한 제3공화국을 과도기적인 체제로 인식하고 왕정 복고를 추진했다.[2] 1876년 선거까지 왕당파가 의회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반(反)공화주의자들이 공화국을 이끄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2]

왕당파는 정통왕조파에 속하는 마크마옹을 공화국 대통령으로 지지했다.[2] 그의 임기는 7년으로 정해졌는데, 이는 두 왕당파 세력이 합의점을 찾기 위한 시간이었다.[2]

1873년, 정통파가 지지하던 부르봉 왕가의 수장 앙리, 샹보르 백작을 왕위에 앉히려던 시도는 앙리 5세의 비협조로 실패했다.[2] 마크마옹 대통령은 그를 국회로 데려와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앙리 5세는 백기 성명서를 통해 군주제의 상징인 백색 깃발 (백합 문장)을 버리고 공화제의 상징인 삼색기를 택하지 않겠다고 밝혔다.[2] 그는 복고 왕정이 혁명의 모든 흔적, 특히 삼색기를 제거하여 혁명이 찢어놓은 군주제와 국가 간의 통일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2] 그러나 일반 대중은 삼색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앙리 5세의 결정은 군주제의 빠른 복귀에 대한 희망을 꺾어 놓았다.[2]

결국 왕당파는 늙고 자녀가 없는 앙리 5세가 사망하면 그의 더 자유주의적인 후계자인 필리프, 파리 백작에게 왕위를 제안하기로 하고, "임시"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다.[2] 그러나 앙리 5세는 1883년까지 생존했고, 그 무렵에는 군주제에 대한 열정이 식어 파리 백작은 프랑스 왕위를 제안받지 못했다.[2]

2. 2. 앙리 5세의 백기 선언과 왕정 복고 좌절

1873년, 정통왕조파가 지지하던 부르봉 왕가의 앙리 5세는 백기 선언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 대신 왕정의 상징인 백기를 사용하겠다고 주장했다.[2] 앙리 5세는 복고 왕정이 혁명의 모든 흔적, 특히 삼색기를 제거하여 혁명이 찢어놓은 군주제와 국가 간의 통일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2] 그러나 일반 대중은 삼색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에, 앙리 5세의 완고한 태도는 왕정 복고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약화시켰고, 결국 왕정 복고는 실패로 돌아갔다.[2]

이로 인해 왕당파는 앙리 5세가 사망하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인 필리프, 파리 백작에게 왕위가 넘어가기를 기다렸다.[2] 그러나 앙리 5세는 1883년까지 생존했고, 그 무렵에는 군주제에 대한 열정이 식어 파리 백작은 프랑스 왕위를 제안받지 못했다.[2]

2. 3. 1875년 헌법과 정치적 불안정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구성된 국회는 정통주의자와 오를레아니스트로 이루어진 군주제 지지자들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1876년 선거까지 왕당파가 의회에서 우세하여, 반공화주의자들이 공화국을 이끄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왕당파는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의 임기는 7년으로 정해졌다.

1873년, 앙리 5세를 왕위에 앉히려던 시도는 그의 백기 성명서[2] 발표로 인해 실패했다. 앙리 5세는 군주제의 상징인 백기를 버리고 공화제의 상징인 삼색기를 택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군주제 회복에 대한 희망을 꺾었다.

1875년, 아돌프 티에르는 온건파 공화주의자 쥘 페리, 레옹 강베타와 함께 공화국 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1876년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했지만, 그 결과는 복잡했다.

구분결과
상원왕당파가 근소한 차이(151석 대 149석)로 다수
하원공화파가 압도적인 다수
대통령왕당파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결과적으로 왕당파 대통령과 공화파 하원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는 불가피했다.[2]

3. 1877년 5월 16일의 위기

1877년의 위기는 대통령이었던 마크마옹이 행정부 수장이자 온건파 공화주의자였던 쥘 시몽을 해임하고 오를레아니스트였던 알베르트 드 브로이 공작이 이끄는 "도덕 질서(Ordre moral)"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촉발되었다. 마크마옹은 대통령 중심의 정부를 선호한 데 반해, 공화주의자 의원들은 의회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정치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하원은 새로운 행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1877년 5월 16일, 조르주 클레망소, 장 카시미르-페리에, 에밀 루베 등을 포함한 363명의 하원 의원은 '363인의 성명서'라는 이름의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3]

마크마옹은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치렀으나, 하원에서 323명의 공화주의자와 209명의 왕당주의자가 당선되어 대통령에 대한 반대가 뚜렷하게 되었다.

3. 1. 마크마옹 대통령의 쥘 시몽 총리 해임

1877년 5월 16일, 제3공화국의 대통령 마크마옹은 행정부 수반이자 온건 공화파였던 쥘 시몽을 해임하고, 왕당파(오를레앙파)였던 알베르 드 브로이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헌정 위기가 촉발되었다.[3] 마크마옹은 대통령 중심제를 선호했지만, 공화파 의원들은 의회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정치 기관이라고 생각했다.[3]

3. 2. 하원의 불신임 결의와 의회 해산

조르주 클레망소, 장 카시미르-페리에, 에밀 루베 등을 포함한 363명의 하원 의원들은 '363인의 성명서'라는 이름의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 마크마옹 대통령은 의회 해산을 단행하고 1877년 프랑스 총선을 다시 치렀으나, 공화파가 다시 하원의 다수를 차지했다.

3. 3. 마크마옹의 굴복과 뒤포르 내각 출범

레옹 강베타가 "프랑스가 그 주권의 소리를 내면, 굴복하거나 사임해야 할 것이다" (se soumettre ou se démettre|스 수메트르 우 스 데메트르프랑스어)[3]라고 말할 정도로 여론은 마크마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마크마옹은 굴복하고, 온건 공화파인 쥘 아르망 뒤포르를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의회의 권한을 인정하는 내각을 구성했다.

뒤포르의 헌법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 각료는 하원에 책임을 진다. (1896년 제도적 위기 이후, 상원은 각료를 통제할 권리를 얻었다.)
  • 의회 해산 권한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제3공화국 기간 동안에는 다시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필리프 페탱도 1940년에는 감히 의회를 해산하지 못했다.

4. 위기의 결과 및 영향

이 헌정 위기는 왕당파의 패배를 확정지었다. 마크마옹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고 1879년 1월 사임했다. 샹보르 백작 사후, 여러 오를레앙파는 "공화국은 [프랑스인]을 가장 적게 분열시키는 정부 형태"라는 아돌프 티에르의 말을 인용하며 공화제를 지지했다. 이들은 프랑스 최초의 우익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부 독립적인 급진파와 급진사회당 우익은 실용주의 공화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반교권주의는 여전히 프랑스 좌익과 우익을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었다.

헌법 분야에서, 대통령제는 의원 내각제를 선호하여 최종적으로 거부되었고, 의회 해산권은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비시 프랑스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은 의원 내각제를 기반으로 설립되었으나, 샤를 드골은 이를 거부했다. 드골은 1958년 5월 위기에서 권력을 되찾아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을 설계했다. 1962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그의 권위를 더욱 강화했다.

1968년 5월 위기 이후, 공존 정부 하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갈등을 재개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여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가 동기화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2000년 국민투표에서 받아들여졌다.

4. 1. 의회 중심제의 확립

이 헌법 위기로 대통령제 대신 의회제가 확립되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의회해산권은 다시 사용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제한되었다.[1] 비시 정권 이후 세워진 프랑스 제4공화국(1946–1958) 역시 이러한 의회제를 바탕으로 하였다.[1] 샤를 드 골은 이러한 의회제를 멸시하고 거부했다.[1]

4. 2. 왕당파의 몰락과 공화정의 안정화

이 헌정 위기는 왕당파의 몰락을 확정지었다. 마크마옹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고 1879년 1월 사임했다. 샹보르 백작은 정통왕당파오를레앙파 사이의 동맹 붕괴를 초래한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1883년에 사망하면서 왕정 복고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여러 오를레앙파는 "공화국은 [프랑스인]을 가장 적게 분열시키는 정부 형태"라는 아돌프 티에르의 말을 인용하며 공화국에 합류했다. 이들은 프랑스 최초의 우익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이후, 일부 독립적인 급진파와 급진사회당 우익은 실용주의 공화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반교권주의는 오랜 경쟁자들 사이의 간극으로 남아있었다(그리고 실제로 프랑스 좌익과 우익 사이의 주요 구분 기준으로 남아있다).

4. 3. 제5공화국 헌법에 미친 영향

1877년 위기의 경험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정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샤를 드 골은 제4공화국의 의회 중심제가 가진 폐단을 없애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을 만들고자 하였다. 1962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이러한 드골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은 드골 개인의 필요에 맞춘 것이었지만, 대통령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에도 의존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여러 동거 정부를 거치면서 대통령과 총리 간의 갈등이 다시 나타났다. 이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줄여 대통령 선거와 총선 시기를 일치시킴으로써 이러한 갈등을 막고자 했으며, 이는 2000년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참조

[1] 서적 France Under the Republic: The Development of Modern France (1870–1939) 1940
[2] 논문 "The Monarchy According to the King: The Ideological Content of the 'Drapeau Blanc,' 1871–1873" 1988
[3]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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