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시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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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시라크는 1932년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제22대 프랑스 대통령(1995년~2007년)이었다. 파리 시장(1977년~1995년)과 두 차례의 총리(1974년~1976년, 1986년~1988년)를 역임했으며, 신 드골주의자로 활동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라크 전쟁 반대, 유럽 연합 내 프랑스 영향력 강화, 사회 보장 제도 추진 등에 힘썼다. 퇴임 후에는 시라크 재단을 설립하여 평화 증진 활동을 펼쳤으며,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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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시라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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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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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자크 르네 시라크 |
원어 이름 | Jacques René Chirac |
출생일 | 1932년 11월 29일 |
출생지 | 프랑스 파리 |
사망일 | 2019년 9월 26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안장 장소 | 몽파르나스 묘지,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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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프랑스 |
가족 | 배우자 베르나데트 쇼드롱 드 쿠르셀 (1956년 결혼), 자녀 3명 (클로드 시라크, 안 다오 트락셀 포함) |
학력 | 파리 정치 대학 국립행정학교 |
정치 경력 | |
대통령 재임 기간 | 1995년 5월 17일 ~ 2007년 5월 16일 |
대통령 | 프랑스 대통령 |
총리 | 알랭 쥐페 리오넬 조스팽 장피에르 라파랭 도미니크 드 빌팽 |
이전 대통령 | 프랑수아 미테랑 |
다음 대통령 | 니콜라 사르코지 |
총리 재임 기간 (첫 번째) | 1974년 5월 27일 ~ 1976년 8월 25일 |
대통령 (첫 번째 총리 임기) |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
이전 총리 (첫 번째 총리 임기) | 피에르 메스메르 |
다음 총리 (첫 번째 총리 임기) | 레몽 바르 |
총리 재임 기간 (두 번째) | 1986년 3월 20일 ~ 1988년 5월 10일 |
대통령 (두 번째 총리 임기) | 프랑수아 미테랑 |
이전 총리 (두 번째 총리 임기) | 로랑 파비우스 |
다음 총리 (두 번째 총리 임기) | 미셸 로카르 |
파리 시장 재임 기간 | 1977년 3월 20일 ~ 1995년 5월 16일 |
이전 파리 시장 | 사무실 재설립 |
다음 파리 시장 | 장 티베리 |
파리 부시장 | 크리스티앙 드 라 말렌 장 티베리 |
공화국연합 대표 재임 기간 | 1976년 12월 5일 ~ 1994년 11월 4일 |
이전 공화국연합 대표 | 정당 설립 |
다음 공화국연합 대표 | 알랭 쥐페 |
내무부 장관 재임 기간 | 1974년 2월 27일 ~ 1974년 5월 28일 |
총리 (내무부 장관 임기) | 피에르 메스메르 |
이전 내무부 장관 | 레몽 마르셀린 |
다음 내무부 장관 | 미셸 포니아토프스키 |
농업 및 농촌 개발부 장관 재임 기간 | 1972년 7월 7일 ~ 1974년 2월 27일 |
총리 (농업부 장관 임기) | 피에르 메스메르 |
다음 농업부 장관 | 레몽 마르셀린 |
의회 관계 장관 재임 기간 | 1971년 1월 7일 ~ 1972년 7월 5일 |
총리 (의회 관계 장관 임기) | 자크 샤방델마스 |
이전 의회 관계 장관 | 로제 프레이 |
다음 의회 관계 장관 | 로베르 불랭 |
코레즈 도의회 의장 재임 기간 | 1970년 3월 15일 ~ 1979년 3월 25일 |
추가 직책 | |
추가 직책 | 추가 직책 및 훈장 |
군 복무 | |
소속 국가 | 프랑스 제4공화국 |
군대 |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954년 ~ 1957년 |
계급 | 소위 |
소속 정당 | |
소속 정당 | 프랑스 공산당 (1962년 이전) 신공화국연합 (1962년~1968년) 공화국민주연합 (1968년~1976년) 공화국연합 (1976년~2002년) 국민운동연합 (2002년~2007년) |
2. 생애
파리에서 태어난 자크 시라크는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를 졸업하고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여러 행정부에서 활약했으며, 두 차례의 총리(1974~1976년, 1996~1998년)와 파리 시장(1977~1995년)을 역임했다.
신드골주의자였던 시라크는 1981년과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199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2년 재선에 성공했다. 프랑스의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5년으로 단축된 후,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2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2005년 뇌졸중을 앓았으며, 2019년 9월 26일에 사망했다.[9]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자크 시라크는 1932년 11월 29일 파리 5구에서 태어났다.[9] 그의 아버지는 아벨 프랑수아 마리 시라크(Abel François Marie Chirac, 1898~1968)로 항공 회사 임원이었고,[6] 어머니는 마리-루이즈 발레트(Marie-Louise Valette, 1902~1973)로 주부였다.[9] 그의 조부모는 모두 코레즈(Corrèze)주 생테페롤(Sainte-Féréole) 출신의 교사였다.[10] 증조부모는 코레즈(Corrèze)주의 남서부 시골 지역의 농민이었다.[11]시라크는 외동이었으며 (그의 누나 자클린은 그의 출생 10년 전 유아기에 사망했다),[14] 파리의 사립학교인 아템메르 학교(Cours Hattemer)에서 교육을 받았다.[15] 그 후 카르노 학교(Lycée Carnot)와 루이 그랑 학교(Lycée Louis-le-Grand)에 다녔다.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마친 후, 아버지 몰래 석탄 운반선에서 3개월 동안 선원으로 일했다.[16] 18세 때 그의 꿈은 선장이 되는 것이었다.[18]
16세에 시라크는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싶어했고, 파리에서 백러시아계 산스크리트어 교사를 찾았는데, 결국 그 교사는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17세가 되었을 때 시라크는 러시아어에 거의 유창하게 되었다.[16]
샤를 드 골의 영향을 받아 1950년대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L'Humanité프랑스어의 복사본을 판매하고 공산당 세포 회의에 참석했다.[19] 1950년, 그는 핵무기 폐지를 위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스톡홀름 호소에 서명했는데, 이는 그가 미국 비자를 처음 신청할 때 질문을 받게 된 이유가 되었다.[20]
1953년,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한 후, 1957년 프랑스 최고 공무원을 양성하는 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입학하기 전에 하버드 대학교 여름학교에서 비학점 과정을 수강했다.[18] 미국에서 시라크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앤하이저-부시에서 일했다.[21]
시라크는 사무르에서 기갑 기병 예비 장교로 훈련을 받았다.[22] 그런 다음 그는 상관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인맥을 이용하여 알제리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원했다. 그의 상관들은 그가 공산주의 성향이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장교로 임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23] 1965년 그는 감사원의 감사관이 되었다.[24] 1954년, 시라크는 파리정치대학(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 Sciences Po)에 「뉴올리언스 항의 발전(The Development of the Port of New-Orleans)」이라는 지리/경제학 논문을 제출했다.
2. 2. 정치 경력 초기
파리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난 자크 시라크는 1954년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를 졸업하고, 1956년부터 1년간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복무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여러 행정부에서 활약하였다.1962년 4월, 시라크는 조르주 퐁피두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시라크의 정치 경력을 시작하게 하였다. 퐁피두는 시라크를 자신의 보호자로 여겼고, 일을 처리하는 그의 능력 때문에 "나의 불도저"라고 불렀다. Le Bulldozer프랑스어라는 별명은 프랑스 정계에서 유행했는데, 그의 거친 태도를 가리키기도 했다. 이 별명은 1988년 대통령 선거까지도 유지되었다.[25]
퐁피두의 제안에 따라 시라크는 1967년 골리스트로서 국민의회 의석에 출마했다.[18] 그는 좌파의 텃밭인 고향 코레즈 département프랑스어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골리스트의 쇠퇴라는 맥락에서 이 놀라운 승리는 그가 사회부 장관으로 정부에 입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라크는 1940년 6월 18일의 호소 당시 드골 장군의 유일한 동반자와 결혼으로 인척 관계에 있었기에 드골의 측근에 있었지만, "골리스트"보다는 "퐁피두파"에 가까웠다. 1968년 5월 혁명으로 프랑스가 학생과 노동자의 불안으로 흔들렸을 때, 시라크는 휴전 협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18] 그 후 경제국무장관(1968~1971)으로서 경제재정부 장관을 지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긴밀하게 협력했다.[26]
몇 달 동안 의회 관계부 장관직을 수행한 후, 시라크는 1969년 드골의 퇴임 후 대통령으로 선출된 퐁피두 휘하에서 1972년 농업부 장관 겸 농촌개발부 장관이 되면서 처음으로 고위직에 올랐다. 시라크는 프랑스 농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인물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으며, 프랑스의 이익과 상충되는 미국의, 서독의 그리고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의 농업 정책을 비난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74년 2월 27일, 레이몽 마르셀랭의 사임 후 시라크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7] 1974년 3월 21일, 그는 르 몽드프랑스어가 그 존재를 폭로한 후 프라이버시 문제로 SAFARI 프로젝트를 취소했다.[28] 1974년 3월부터 그는 퐁피두 대통령으로부터 당시 1976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대통령 선거 준비를 위임받았다. 퐁피두가 1974년 4월 2일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선거는 앞당겨졌다.
시라크는 총리 피에르 메스메르를 중심으로 골리스트들을 결집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자크 샤방-델마는 "퐁피돌리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마를 선언했다. 시라크와 다른 사람들은 비골리스트계 의회 다수파 지도자인 지스카르 데스탱을 지지하는 "43인의 호소"를 발표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프랑스에서 수년 만에 가장 경쟁적인 선거 운동 끝에 퐁피두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그 대가로 신임 대통령은 시라크를 내각 수반으로 선택했다.
1932년 11월 29일 파리 5구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행원이었으며, 후에 항공 회사 임원이 되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베르사유(Versailles)의 리세 오슈(Lycée Hoche), 파리 8구의 사립 아토메르 학교(Cours Hattemer), 파리 17구의 리세 카르노(Lycée Carnot), 파리 5구의 리세 루이 르 그랑(Lycée Louis-le-Grand) 등 4개교에 재학했으며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취득하고, 1954년 파리정치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하버드대학교 서머스쿨에 유학한 경험이 있다. 1950년대에는 프랑스 공산당원이었으며, 스톡홀름 어필(Stockholm Appeal)에 서명하는 등 활동했다.[140] 1956년 징집되어 장교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 부상을 입었다. 1959년 프랑스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하고 국가공무원이 되어 1962년까지 회계감사관을 지냈다. 이후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휘하에서 총리를 지낸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의 비서실에 들어가 퐁피두의 후원을 얻으며 급속히 출세했다. 이 무렵부터 왕성한 활동력으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퐁피두 총리 비서실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는 후에 총리가 되는 에두아르 발라뒤르(Édouard Balladur)가 있었는데, 당시부터 "역동적인 시라크, 차분한 발라뒤르"로 불리며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1967년 퐁피두의 권유로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사회 문제 장관으로서 최초로 각료직을 경험했다. 이후에도 여러 각료직을 역임했고, 퐁피두 정권 하에서 1972년 농업장관, 1974년 내무장관 등 중요한 각료직을 역임했다.
2. 3. 총리 시절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1974년 5월 27일 의회 다수파의 "지스카르 지지파"와 "비지스카르 지지파"를 화해시키기 위해 시라크를 총리로 지명했다. 41세의 시라크는 프랑스 정계의 jeunes loups|젊은 늑대들프랑스어의 전형으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전 대선 운동에서의 역할 때문에 그를 배신자로 여긴 "골리즘의 거장들"의 적대감에 직면했다. 1974년 12월, 그는 더 고위급 인사들의 의지에 반해 공화당을 위한 민주주의자 연합(UDR)의 지도자직을 맡았다.[29]총리로서 시라크는 지스카르 대통령이 제안한 사회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유럽의 독립과 같은 골리즘의 기본 원칙은 유지될 것이라는 점을 골리스트들에게 설득하는 데 곧 착수했다. 시라크는 퐁피두의 전 고문인 피에르 쥘리에와 마리-프랑스 가로의 조언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1974년 자크 샤방-델마에 대한 운동을 조직했다. 그들은 지스카르 데스탱의 정책이 보수적 유권자들을 당황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그와의 충돌을 주장했다.[29]
지스카르가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을 이유로 시라크는 1976년 총리직에서 사임했다.[30] 그는 프랑스의 여러 보수 정당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여 골리스트 UDR을 신골리즘 그룹인 공화당 집회(RPR)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시라크의 첫 총리 재임 기간은 최저 임금과 사회 복지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진 점을 고려할 때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기도 했다.[29]
1986년, 시라크는 다시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직책 |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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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
외무부 장관 | 장 소바냐르그(Jean Sauvagnargues) |
국방부 장관 | |
내무부 장관 | 미셸 포니아토프스키(Michel Poniatowski) |
경제재정부 장관 | 장피에르 푸르카드(Jean-Pierre Fourcade) |
공업·관광·우정·통신부 장관 | 미셸 도르나노(Michel d'Ornano) |
고용사회부 장관 | 미셸 뒤라푸르(Michel Durafour) |
사법부 장관 | 장 르카뉘에(Jean Lecanuet) |
국민교육부 장관 | 르네 아비(René Haby) |
보건부 장관 | 시몽 베일(Simone Veil) |
농업부 장관 | 크리스티앙 보네(Christian Bonnet) |
대외무역부 장관 | |
장비부 장관 | 로베르 갈리(Robert Galley) |
상공부 장관 | |
협력부 장관 | 피에르 아벨랭(Pierre Abelin) |
개혁부 장관 | 장자크 세르방슈라이버(Jean-Jacques Servan-Schreiber) |
삶의 질 부 장관 |
직책 |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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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 |
외무부 장관 | 장-베르나르 라몽(Jean-Bernard Raimond) |
국방부 장관 | 앙드레 지로(André Giraud) |
내무부 장관 | 샤를 파스카(Charles Pasqua) |
국무장관 겸 경제·재정·민영화 장관 | 에두아르 발라뒤르(Édouard Balladur) |
산업·관광·우정·통신 장관 | 알랭 마들랭(Alain Madelin) |
고용·사회부 장관 | 필립 세갱(Philippe Séguin) |
사법부 장관 | 알뱅 샬롱(Albin Chalandon) |
국립교육부 장관 | 르네 모노리(René Monory) |
문화·통신부 장관 | 프랑수아 레오타르(François Léotard) |
농업부 장관 | 프랑수아 기욤(François Guillaume) |
해외 영토부 장관 | 베르나르 퐁(Bernard Pons) |
주택·장비·지역계획·교통부 장관 | 피에르 메니에니(Pierre Méhaignerie) |
국회 관계 장관 | 앙드레 로시노(André Rossinot) |
협력부 장관 | 미셸 오릴락(Michel Aurillac) |
2. 4. 파리 시장 시절
1977년 시라크는 파리 시장 선거에서 대통령의 측근인 미셸 도르나노와 맞붙어 승리했다. 파리 코뮌 이후 중단되었던 파리 시장직을 기스카르가 신설하면서, 시라크는 이 직을 맡게 되었다. 이는 1871년부터 1940년까지 프랑스 제3공화국 지도자들이 수도의 시정을 장악하는 것이 시장에게 너무 큰 권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31]시라크는 1995년까지 파리 시장으로 재직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31] 그는 노인, 장애인, 한부모 가정을 돕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거리 청소용 모토크로트(Motocrotte)를 도입했으며,[32] 기업들이 파리에 남도록 유인책을 제공했다. 반면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고객주의적" 정책을 시행했다고 주장한다.
시라크의 파리 시장 및 시의원 경력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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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장 | 1977년–1995년 (사임,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취임). 1983년, 1989년 재선. |
파리 시의원 | 1977년–1995년 (사임). 1983년, 1989년 재선. |
자크 시라크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3. 대통령 재임 (1995-2007)
취임 직후, 시라크는 남태평양 무루로아 환초에서 핵실험을 재개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44] 국내적으로는 사회 보장 제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95년 대규모 파업에 직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44]
유럽 연합 정책과 관련하여 시라크는 프랑스의 목소리를 강화하려 노력했다. 1978년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기스카르의 친유럽 정책에 반대하며 민족주의적 전환을 꾀하기도 했다.[33]
1981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 출마했으나 낙선했고,[35] 이후 우파 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86년 총선에서 우파 연합이 승리하면서 총리로 임명되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협치를 이루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시라크는 국영 기업 민영화, 부유세 폐지 등 경제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37] 그러나 대학 개혁 시도는 학생 시위와 경찰 폭력 논란으로 인해 철회되었다.[37]
외교적으로는 아프리카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며,[38] 신칼레도니아의 분리주의 운동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38]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오넬 조스팽을 꺾고 당선된 시라크는 2002년 재선에 성공했다. 두 번째 임기 동안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목소리를 주도했다.[63]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한 무력 사용에 반대하며,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했다.[63]
국내적으로는 유럽 헌법 국민투표 부결, 파리 교외 폭동, 노동법 개정 반대 시위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최초 고용 계약(CPE) 도입 시도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 철회되었다.
시라크는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국제적 대응을 촉구했으며, 테러 위협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64]
3. 1. 첫 번째 임기 (1995-2002)
1995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시라크는 유대인 강제 추방에 대한 프랑스의 책임을 인정한 최초의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1995년 7월 16일, 1942년 7월 1만 3천 명의 유대인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기 위해 수용되었던 벨로드롬 디베르(Vel' d'Hiv) 강제 연행 장소에서 시라크는 "프랑스는 그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라고 말했다. 그는 강제 연행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 나치의 요구에 복종한 4,500명의 프랑스 경찰과 헌병들"이며, "점령군의 범죄적인 어리석음은 프랑스인들, 프랑스 국가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라고 덧붙였다.[46][47][48]
프랑수아 미테랑이 1995년에 사임한 후, 시라크는 군사위원회에 가입하고 통합군사령부로의 복귀를 협상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나토와의 화해를 시작했지만, 미국과의 동등성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아 실패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사회당 중심의 내각과의 공존을 강요받은 후, 그리고 2003년 이라크에 대한 프랑스의 유엔 거부권 위협 이후 악화된 프랑스-미국 관계로 인해 추가적인 시도의 가능성은 무산되었다.
3. 1. 1. 주요 정책 및 사건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시라크는 우파 도전자였던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획일적 사고"를 비판하고 "사회적 균열"을 줄이겠다고 약속하며 중도로 이동하여, 2차 투표에서 프랑스 사회당 후보 리오넬 조스팽을 52.6%의 득표율로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4] 그는 감세와 일자리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취임 초기 그의 정책은 노동 쟁의를 완화하는 데 거의 효과가 없었다. 국내적으로는 시라크와 그의 보수파 총리 알랭 쥐페가 도입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긴축 조치, 특히 예산 삭감은 매우 인기가 없었다. 연말 시라크는 1995년 11월~12월에 1968년 5월 이후 가장 큰 총파업으로 이어진 주요 노동자 파업에 직면했다.[44]
취임 직후 시라크는 환경 단체들의 국제적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5년 무루로아 환초에서 핵실험을 재개했다.[44] 이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하기 몇 달 전이었다.[44] 1996년 2월 1일 시라크는 프랑스가 "영원히" 핵실험을 종식하고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에 가입할 의향이 있다고 발표했다.[44]
1997년, 시라크는 보수적인 경제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를 높이기 위한 도박으로 조기 총선을 위해 의회를 해산했지만, 오히려 격렬한 반발을 야기했고, 그의 권력은 이후의 반발로 약화되었다. 사회당(PS)은 좌파의 다른 정당들과 연합하여 시라크의 보수 동맹들을 완파하여 시라크를 조스팽(1997~2002) 총리와 5년간의 새로운 공동정부 시대로 몰아넣었다. 공동정부는 시라크 대통령의 권력을 상당히 약화시켰다.[44]
시라크의 입지는 파리 시의 RPR 자금 조달에 대한 스캔들로 인해 약화되었다.[44] 2001년, 베르트랑 들라노에(PS)가 이끄는 좌파는 수도 시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다.[44] 2000년 9월 22일 Le Monde|르 몽드프랑스어가 보도한 내용에서, RPR 자금 조달 책임자인 장-클로드 메리는 시라크가 네트워크를 조직했고, 1986년 10월 5일 메리가 국가 계약의 혜택을 받은 기업들로부터 받은 5백만 프랑을 현금으로 시라크의 개인 비서인 미셸 루생에게 건네줄 때 직접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고 시라크를 직접적으로 비난했다.[50][51]
두 임기 동안 그는 엘리제 궁의 총 예산을 105% 증가시켰다(20년 전 4370만 유로에 해당하는 금액에서 9000만 유로로). 그는 대통령 차량 수를 두 배로 늘렸다. 궁전 차고에는 61대의 차량과 7대의 스쿠터가 있었다. 그는 145명의 직원을 추가로 고용했다. 그가 동시에 고용한 사람들의 총 수는 963명이였다.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그는 군사 예산을 감축했다. 그의 첫 번째 임기 말에는 GDP의 3%를 차지했다.[52] 1997년, 항공모함 클레망소호(''Clemenceau'')는 37년의 복무 후 퇴역했고, 자매함인 포슈호(''Foch'')도 2000년에 37년의 복무 후 퇴역하여, 2001년 샤를 드골호(''Charles de Gaulle'')가 취역할 때까지 프랑스 해군은 항공모함이 없었다.[53] 그는 또한 핵무기 지출을 감축했으며, 프랑스 군대의 전투기 수를 30% 감축하는 계획을 발표했다.[54]
2000년 7월 25일, 시라크 대통령과 영부인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제26차 G7 정상회의에서 돌아오는 길에 샤를 드 골 국제공항에 착륙한 후 에어 프랑스 4590편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55]
3. 2. 두 번째 임기 (2002-2007)
2002년 대선에서 시라크는 1차 투표에서 20%의 득표율을 기록,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과의 2차 투표에서 "사기꾼에게 투표하라, 파시스트에게 투표하지 마라"라는 구호 아래 82%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56] 그러나 두 번째 임기 동안 그의 인기는 점차 하락했다.[56]
좌파 사회당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시라크는 우익 정치를 재편하여 (UMP)을 창당했고, 2002년 총선에서 UMP는 쉽게 승리했다. 2002년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 기념행사 중 시라크는 극우 단체 회원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61]
블라디미르 푸틴(시라크는 그를 "개인적인 친구"라고 불렀다)[62], 후진타오,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함께 시라크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주요 목소리로 등장했다. 그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를 무력으로 제거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했다.[63]
2005년 7월 21일, 마다가스카르 방문 중 시라크는 1947년 마다가스카르 봉기 탄압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과거 국가 개입에 반대했음에도 불구, 시라크 정부는 어려움을 겪는 제조업체 알스톰(Alstom)에 28억유로의 지원 패키지를 승인했다.[59] 2004년 10월에는 중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알스톰에 10억유로의 계약과 투자를 약속받았다.[60]
2006년 1월, 시라크는 프랑스 이익에 대한 테러 공격 후원 국가에 대해 핵 공격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64]
2006년 7월, G8 회의에서 시라크는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억제를 위한 국제적 행동을 지지했다. 2005년 5월 29일, 유럽 헌법 조약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55%의 반대로 부결되었고,[71] 이후 시라크는 총리를 도미니크 드 빌팽으로 교체했다.[71] 2005년 가을 파리 교외 폭동과 2006년 봄 대규모 학생 시위 이후, 시라크는 최초 고용 계약(CPE)을 철회했다.
3. 2. 1. 주요 정책 및 사건
유럽연합 정책에서 프랑스의 강한 발언권을 주장했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시라크는 기스카르 대통령의 친유럽 정책에 반대하며 민족주의적 전환을 꾀했다.[33] 자동차 사고 후 병원에 입원한 그는 "늘 프랑스의 침체에 대해, 친외국 세력은 평화롭고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행동한다"고 선언했다.[33]
1981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1차 투표에서 18%의 득표율로 탈락했다.[35] 그는 2차 투표에서 기스카르를 지지했지만, 이는 사실상 사회당 후보인 프랑수아 미테랑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고, 미테랑이 당선되었다.[36] 기스카르는 자신의 패배에 대해 시라크를 비난했다.[36]
1981년 총선에서 우파가 패배했지만, 시라크는 우파 야당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사회당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며 경제적 자유주의에 동조했다. 1986년 총선에서 우파 연합이 승리하자, 미테랑 대통령은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했다.[36] 협치로 알려진 이 권력 분담 체제에서 시라크는 국내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가졌다.
시라크 내각은 많은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고, 고액 자산가에 대한 부유세를 폐지했다.[37] 대학 개혁 계획은 학생 시위와 말릭 우세킨 사망 사건으로 인해 철회되었다.[37] 시라크는 이후 경찰 폭력에 대해 신중해졌다.[37]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시라크는 아프리카 문제에 대한 주요 고문이었던 자크 포카르를 소환했다.[38] 또한 신칼레도니아의 반식민주의 운동에 대한 군사 개입을 명령하여 19명의 민병대원이 사망했다.[38] 그는 장-마리 르펜의 국민전선과의 동맹을 거부했다.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당선 직후 남태평양의 무루로아 환초에서 핵실험을 강행하여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고, 이그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141]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2001년 미국 동시다발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아프간 침공에는 찬성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에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중국의 후진타오와 함께 반대했다.
급속한 유럽 통합 정책은 국민들의 불안을 야기했고, 2005년 국민투표에서 유럽 헌법이 부결되었다. 파리 교외 폭동 사건이 발생하여 계엄령이 선포되었다.[141]
2006년, 초기 고용 계약 (CPE)을 중심으로 한 기회균등법 제정에 반대하는 시민 폭동과 파업이 발생했다.[141] 시라크는 CPE를 사실상 철회해야 했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141]
2002년 대선에서 82%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두 번째 임기 동안 인기가 점점 떨어졌다.[56] 2006년, ''이코노미스트''는 시라크를 "5공화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엘리제 궁 거주자"라고 보도했다.[57]
2005년 7월 21일 마다가스카르 공식 방문 중 시라크는 1947년 마다가스카르 봉기의 탄압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과거 국가 개입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라크 정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조업체 알스톰(Alstom)에 28억유로의 지원 패키지를 승인했다.[59] 2004년 10월 시라크는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Hu Jintao)와 무역협정에 서명했는데, 이 협정에서 알스톰은 10억유로의 계약과 중국 내 미래 투자 약속을 받았다.[60]
2002년 7월 14일, 바스티유의 날 기념 행사 중 시라크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61]
블라디미르 푸틴(시라크는 그를 "개인적인 친구"라고 불렀다)[62], 후진타오,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함께 시라크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주요 목소리로 등장했다.
2005년 2월 5일 토고 지도자 그나싱베 에야데마가 사망하자 시라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의 아들 파우르 그나싱베를 지지했다.[38]
2006년 1월 19일, 시라크는 프랑스의 이익에 대한 테러 공격을 후원하는 어떤 국가라도 프랑스가 핵 공격을 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64]
시라크는 2006년 7월 14일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비판했다.[65]
2006년 7월, G8은 국제 에너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가졌다. 시라크는 G8 정상 회담에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문제를 억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행동을 지지했다.
2019년 시라크 사망 후, 루브르 아부다비로 이어지는 거리는 2019년 11월 자크 시라크 거리로 명명되었다.[68]
시라크는 강력한 친 모로코 정책을 옹호했으며, 서사하라 분쟁에 대한 이미 확립된 친 모로코 프랑스의 입장은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69]
시라크 대통령은 2004년 9월 발표된 랑도 보고서를 요청했고, 혁신적 재정 메커니즘에 관한 기술 그룹 보고서와 결합하여, 이 문서들은 혁신적인 재정 메커니즘의 다양한 기회를 제시하고 있다.[70] 유니테이드(UNITAID) 프로젝트가 탄생했다.[70]
2005년 5월 29일, 프랑스에서는 유럽연합 헌법 조약 비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55%가 조약을 거부하며 '반대' 캠페인이 승리했다.[71] 국민투표 패배 이후 시라크 대통령은 총리를 도미니크 드 빌팽으로 교체했다.[71]
2005년 가을, 민중 폭동에 이어 2006년 봄 발생한 대규모 학생 시위 이후, 시라크 대통령은 제안된 최초 고용 계약(CPE)을 철회했다.
4. 퇴임 이후
2005년 9월 초, 시라크는 의사들이 "혈관 사고"라고 묘사한 사건을 겪었다. 공식적으로는 "경미한 뇌졸중"[72] 또는 경증 뇌졸중(일시적 허혈 발작으로도 알려짐)[73]으로 보고되었다. 그는 회복하여 얼마 후 업무에 복귀했다.
2007년 3월 11일 방영된 녹화 방송에서 그는 널리 예상되었던 대로 대통령직 3선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00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임기가 5년으로 단축되었으므로, 그의 두 번째 임기는 첫 번째 임기보다 짧았다.)[74] 시라크는 "제 인생 전체를 프랑스 봉사와 평화에 헌신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퇴임 후에도 프랑스에 봉사할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75] 그는 방송 중 어떤 후보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극단주의 정치에 반대하는 호소에 그의 연설 몇 분을 할애했는데, 이는 장-마리 르펜에게 투표하지 말라는 유권자들에 대한 은근한 촉구이자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르펜과 전통적으로 연관된 주제들을 포함하도록 그의 선거 운동을 방향을 잡지 말라는 권고로 여겨졌다.[76]
퇴임 직후인 2008년 6월, 시라크는 시라크 재단[77]을 설립했다. 이후 재단은 분쟁 예방, 물과 위생 접근, 양질의 의약품 및 의료 접근, 토지 자원 접근, 문화 다양성 보존 등 5가지 옹호 프로그램을 통해 평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재단은 지역 주민을 참여시키고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는 현장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시라크는 재단이 매년 수여하는 분쟁 예방 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78]
프랑스 전 대통령으로서 그는 종신 연금과 신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헌법위원회의 종신 당연직 위원이었다.[79]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6개월 후인 2007년 11월 15일 처음으로 위원회에 참석했다. 사르코지의 승리 직후, 시라크는 레바논 전 총리 라피크 하리리의 가족이 빌려준 파리 볼테르 강변(Quai Voltaire)에 있는 복층 아파트로 이사했다. 디디에 슐러 사건 당시, 슐러는 하리리가 RPR의 정치 자금 조달에 불법적으로 참여했다고 비난했지만, 재판부는 추가 조사 없이 사건을 종결했다.[80]
2011년 6월에 출판된 회고록 2권에서 시라크는 후임자인 니콜라 사르코지를 "까탈스럽고, 경솔하고, 충동적이며,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하고, 비프랑스적인" 인물이라고 비웃었다.[81][82] 시라크는 이전에 사르코지를 해임하는 것을 고려했으며, 2002년 장-마리 르펜의 약진을 허용한 데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83] 2010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시라크는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 인물이었던 반면, 사르코지는 32위였다.[81]
2008년 4월 11일, 시라크의 사무실은 그가 심장 박동 조율기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고 발표했다.[84]
시라크는 晩년에 건강이 악화되고 기억력이 감퇴되었다. 2014년 2월, 그는 통풍 관련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85][86] 2015년 12월 10일, 시라크는 파리의 병원에 입원했지만, 건강 상태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며, 약 일주일간 중환자실에 머물렀다.[87] 그의 사위인 프레드릭 살라-바루에 따르면, 시라크는 2016년 9월 18일에 폐렴으로 다시 파리의 병원에 입원했다.[88]
시라크는 2019년 9월 26일 가족들에 둘러싸인 채 파리 6구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89] 9월 30일에는 파리 생술피스 교회에서 미셸 오페티 파리 대주교가 집전하는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약 175개국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전·현직 국가 및 정부 수반과 국제기구 대표 69명이 포함되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장-클로드 융커, 옌스 스톨텐베르그, 블라디미르 푸틴, 세르조 마타렐라,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샤를 미셸, 빅토르 오르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사아드 하리리, 보루트 파호르, 살로메 주라비치빌리, 토니 블레어, 장 크레티앵, 바이라 비케-프라이베르가, 빌 클린턴, 하미드 카르자이, 다이빙궈 등 많은 장관들도 참석했다.
이 날은 프랑스의 국가 애도일로 선포되었으며, 오후 3시에 전국적으로 묵념이 진행되었다. 공개 행사 후 시라크는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몽파르나스 묘지에 매장되었다. 안도라에서는 사흘간의 국가 애도를 선포했다.[90] 레바논은 전 대통령의 장례식 날을 국가 애도일로 선포했다.[91][92]
5. 논란
자크 시라크는 파리 시장 재임 시절부터 여러 부패 혐의에 연루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측근들의 유죄 판결로 이어졌다.[105] 1999년 논란이 된 사법 결정에 따라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면책 특권을 부여받았고, 대통령직 수행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증언을 거부했다.[105]
파리 시청 운영에 대한 조사는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시 공무원 수가 25% 증가하고(약 35,000명 중 2,000명이 시라크가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던 코레즈(Corrèze) 지역 출신) 재정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105] 파리 상수도 시스템 민영화 과정에서 시라크의 측근인 제롬 모노(Jérôme Monod)가 이끌던 기업들이 매우 싼값에 인수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05] 풍자 신문 르 까나르 앵셰네(Le Canard enchaîné)는 파리 시가 지불한 막대한 "식비"(연간 1500만 유로)를 폭로했는데, 이 비용은 로제 로마니(Roger Romani)가 관리했으며 그는 1978~93년 기간의 모든 기록을 파기한 것으로 알려졌다.[105] 매년 수천 명이 파리 시청 리셉션에 초대되었고, 많은 인사들이 시 소유 아파트에 머물렀다.[105]
2007년 5월, 시라크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면책 특권이 종료되었고, 같은 해 11월 공금 유용 혐의로 예비 기소되었다.[106] 그는 범죄 혐의로 공식 수사를 받은 최초의 전 프랑스 국가 원수로 기록되었다.[107] 2009년 10월 30일, 판사는 파리 시장 재임 시절의 횡령 혐의로 시라크의 재판을 명령했다.[108]
2011년 3월 7일, 시라크는 파리 시장(1977~95) 재임 당시 정당 활동가 28명에게 허위 시청 직책을 제공한 혐의로 공금 유용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109][110] 시라크와 함께 9명이 2건의 별도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109] 알랭 쥐페(Alain Juppé)는 2004년 동일한 사건으로 14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111]
2011년 12월 15일, 시라크는 유죄 판결을 받고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111] 그는 공금 유용, 배임, 불법적인 이해충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집행유예는 그의 나이, 건강 상태, 전직 국가 원수라는 지위를 고려한 것이었다.[112] 그는 의사들이 그의 신경 문제가 기억력을 손상시켰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111] 그의 변호팀은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11][113]
2006년 4월과 5월, 시라크 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도미니크 드 빌팽이 2004년 니콜라 사르코지에 대한 비밀 조사를 프랑스 고위 정보원에게 의뢰했다는 혐의(클레어스트림 사건)로 위기에 봉착했다. 시라크는 이 사건에 대해 "공화국은 소문의 독재, 중상의 독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114][115]
프랑스 주간지 『르 까나르 앵셰네』는 2007년 5월, 시라크가 일본의 한 은행에 거액의 비밀계좌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혹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시라크는 이에 대해 "진실과 명예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145][146]
2007년 11월, 시라크의 파리 시장 재임 시절 직원 허위 고용 의혹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2009년 10월, 시라크는 공금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다.[147] 이는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대통령 출신이 형사 사건으로 기소된 첫 사례였다. 2011년 12월, 법원은 시라크에게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6. 평가
자크 시라크는 대통령 취임 후, 남태평양 지역 핵개발 실험과 국내 사회 보장 제도 추진에 힘썼다. 유럽연합 정책에서 프랑스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프랑스 영화 산업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93]
긴 공직 생활 동안 시라크는 종종 패러디나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1976년 아스테릭스 만화 시리즈 ''오벨릭스와 친구들''에서는 젊고 매력적인 관료 캐릭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고, 르 베베트 쇼프랑스어에서는 과잉 흥분하고 겁 많은 캐릭터로 등장했다. 풍자 인형극 르 기뇰 드 랭포프랑스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였으며,[94] 부패 혐의 이후에는 공금을 횡령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심지어 슈퍼 멍퇴르프랑스어(Super Menteur, '슈퍼 거짓말쟁이')라는 슈퍼히어로 이중 인격을 가지기도 했다.
1988년 밴드 파라벨룸은 "Anarchie en Chiraquie"("시라크 땅의 무정부 상태")라는 노래로 시라크를 비판했고, 1995년 제브다는 이민 가정의 "소음과 악취"에 대한 시라크의 발언을 비판했다.[95]
프랑스 펑크 밴드 르 망파는 Chirac en prison프랑스어('시라크가 감옥에')이라는 노래와 기뇰프랑스어이 제작한 뮤직비디오로 그를 비판했다.[96] 생세밀리아는 "Bienvenue en Chiraquie"("시라크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노래에서 시라크를 정치 마피아 두목으로 묘사했다. 2005년 6월, 생세밀리아는 생방송 중 정치적 행위로 "Bienvenue en Chiraquie"를 연주하여 방송 중단을 당하기도 했다.[97]
시라크는 태평양 핵실험으로 히로시마 50주년을 기념한 공로로 1996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했다.
영화 ''W''에서는 J. 그랜트 알브레히트가, ''특별한 관계(The Special Relationship)''에서는 마크 리우폴이 시라크를 연기했다.[98] 베르나르 르 코크는 La Dernière Campagne프랑스어와 ''정복(The Conquest)''에서 시라크를 연기했다.[99][100]
시라크는 베르나데트 시라크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클로드는 아버지의 홍보 담당 보좌관 겸 개인 자문관이었고,[117] 로랑스는 거식증을 앓았다.[118] Anh Dao Traxel은 시라크 부부의 양녀이다.[119] 시라크는 결혼 생활 외에도 많은 관계를 맺었다.[120][121][122]
샤를 드골과 조르주 퐁피두의 영향을 받은 드골주의자였던 시라크는 프랑스의 국익과 영광을 중시했다. 퐁피두는 시라크를 "불도저"라고 평가하며 그의 행동력을 칭찬했지만, 성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시라크를 "자신이 왜 돌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돌아가는 팽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소탈한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으며, 송아지 머리와 맥주를 즐겨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여 프랑스의 분별력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지만, 사담 후세인과의 친분으로 "자크 이라크"라고 불리기도 했다.[149] 미국 동시다발 테러 사건 이후 친미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이라크 전쟁 직전 반대로 돌아서면서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국내 문제로는 벨로드롬 디베르 대량 검거 사건에 대해 프랑스의 잘못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2005년 유럽 헌법 조약 국민투표 부결은 그의 정치적 위신을 떨어뜨렸다. 실업, 이민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장-마리 르펜의 국민전선과 니콜라 사르코지의 등장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라크는 북한을 "테러 국가"로 규정하고 국교를 맺지 않았다.[152]
일본 문화 애호가였던 시라크는 일본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일본 방문 시 통역의 실수를 지적할 정도로 일본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애견에게 "스모"라는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스모를 좋아했다.[153] 일본 스모 협회는 시라크 사망 당시 애도를 표했다.[154]
외교적으로도 일본을 중시하여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 등에 조의를 표하고, 아베 신조와의 회담에서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했다.[155] 2016년 도쿄 올림픽 유치를 지지하기도 했다.[156]
시라크는 회상록에서 일본에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고 언급하며, 스모에서 인생의 교훈을 배웠다고 밝혔다.
6. 1. 긍정적 평가
샤를 드골과 조르주 퐁피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시라크는 드골주의자 중 한 명으로서 프랑스의 국익과 프랑스의 영광을 중시했다. 정치적 스승인 퐁피두는 시라크를 “불도저”라고 평가하며 그의 왕성한 행동력을 칭찬했지만, 성숙이 과제라고 평가했다.[149] 프랑수아 미테랑 또한 시라크의 행동력에 비해 냉정한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하며 권력 중추에 복귀할 것을 예언했다.[150]관료 출신 엘리트였지만 소탈한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중과의 친근함을 어필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허세를 부리는 모습으로 풍자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151]
대통령 재임 시절,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것은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반대와 반전 여론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이 강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라크 전쟁 이후의 혼란과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사실은 프랑스의 분별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자크 이라크"라고 불리기도 했다.[152]
미국 동시다발 테러 사건 이후 미국과의 협력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친미적인 인물이었지만, 이라크 전쟁 직전 개전에 반대함으로써 미국에서는 “배신당했다”는 반응이 있었고, 미·프 관계는 악화되었다.
국내 문제로는 벨로드롬 디베르 대량 검거 사건에 대해 프랑스 국가의 잘못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이는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6. 2. 부정적 평가
시라크는 파리 시장 재직 시절 공금 횡령과 관련된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42] 아비장의 Côte d'Ivoire|코트디부아르|코트디부아르프랑스어 주민들은 그를 "도둑"이라고 불렀으며,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 (1960~1993)을 지지했다.[38] 시라크는 다당제 민주주의가 "일종의 사치"라고 발언하기도 했다.[38]2011년 회고록에서 시라크는 후임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를 "까탈스럽고, 경솔하고, 충동적이며, 불성실하고, 배은망덕하고, 비프랑스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했다.[81][82] 2010년 여론 조사에서 시라크는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 인물이었던 반면, 사르코지는 32위였다.[81]
파리 교외 폭동 사건은 오랜 이민 동화 정책의 허점을 드러냈다. 2006년 「초기 고용 계약 (CPE)」 제정에 반대하는 시민 폭동과 파업이 발생했고, 시라크는 CPE를 철회해야 했다. 여론조사 지지율은 29퍼센트(%)로 최저치를 기록했다.[141]
프랑수아 미테랑은 시라크를 “자신이 왜 돌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돌아가는 팽이 같은 인간”, “어떤 에너지, 어떤 행동력, 어떤 활기인가. 아쉬운 것은 냉정한 판단력이 부족하다”라고 평가했다.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의 친분 때문에 “자크 이라크”라고 불리기도 했다.[149][150]
2005년 유럽 헌법 조약 국민투표 부결은 시라크의 정치적 위신 저하와 유럽 통합 침체를 초래했다.
젊은이들의 실업, 이민자 증가에 따른 사회적 갈등도 해결하지 못했다. 장-마리 르펜의 국민전선과 사르코지의 등장을 불렀다.
시라크는 “테러 국가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며 북한과의 국교를 거부했다.[152]
7. 기타
자크 시라크는 일본 문화에 대한 깊은 조예로 유명한 친일파였다. 유년 시절 기메 미술관을 방문하며 동양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학생 시절에는 만엽집을 읽었으며, 엔도 슈사쿠 등 일본 문학을 즐겨 읽었다. 온천을 좋아하여 일본 방문 시 자주 온천욕을 즐겼으며, 일본 고미술품을 다량 소장하고 있었다.[153]
일본 방문 시 총리대신 관저에 전시되어 있던 토우(土偶)를 하니와(埴輪)라고 설명한 통역을 나무랐을 정도로 일본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이후 "토우와 하니와를 구분할 줄 아는 친일파"로 불렸다. 애견의 이름을 "스모(スモウ)"라고 지을 정도로 대일본상사(大相撲)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스모"가 시라크를 여러 번 물어 결국 떠나보내야 했다.[153] 주일대사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엘리제궁(エリゼ宮)에 매일 대일본상사(大相撲)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1999년 1월, 당시 수상 고부치 게이조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기노하나 고지가 메이지 신궁에 봉납(奉納)한 밧줄과 군배(軍配)를 선물하자 크게 기뻐했다. 가장 좋아하는 역사는 고토니시키 코토무네였으며, 고부치 수상과 고토니시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엘리제궁을 방문하는 일본 요인들에게는 "미나모토 요시이에와 칭기즈칸의 관계" 등을 화제로 삼아 놀라게 했다.
2005년 3월 26일 방일은 공사를 합쳐 45번째였는데, 오사카에서 열리고 있는 대일본상사(大相撲) 춘궁(春場所)을 방문하고, 2005년 일본 국제 박람회를 관람한 후, 상황(上皇明仁)(일왕)과 수상을 만났다. 스모 관전을 마치고 경기장을 나설 때 관중들이 "시라크"를 연호하는 등 스모 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153]
그가 사망했을 때, 일본 스모 협회의 호쿠쇼카이 노부요시(하치카쿠 이사장)는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라 놀랐습니다. 생전에 스모를 매우 좋아하셔서 여러 번 스모 관전을 위해 발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생전의 각별한 친절에 깊이 감사드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애도했다.[154]
외교 정책적으로도 일본을 중시했다. 2003년 11월 29일 이라크에서 일본 외교관 2명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위로 서한을 보냈고, 2005년 4월 25일 발생한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에 대해서도 조의를 표명했다. 2006년 9월 6일 유히토 친왕(悠仁親王) 탄생 시에는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가장 빨리 일왕(현재의 상황(上皇))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2007년 1월 12일 아베 신조와의 회담에서는 "일본이 없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어리석다"라며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입에 대한 지지와 협력을 약속했다.
2008년 10월 14일 모리 요시로와의 회담에서 2016년 도쿄 올림픽 유치에 대해 "일본을 지지하고 싶다. 일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럭비 월드컵의 일본 유치에도 지원할 의향을 보였다.[155]
자신의 회상록 1권에서 "일본에 있으면 집에 있는 것처럼 완전히 편안하다"라고 언급했다. 인생에 대한 많은 교훈을 스모에서 배웠으며,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문화와의 만남은 고등학교 시절에 다녔던 파리의 기메 미술관이었다고 밝혔다. 스모에 대해서는 "싸움 전에 두 명의 스모 선수가 서로 노려보는 시선보다 강한 시선은 없다"라고 말했다.[156]
일본텔레비전방송망(닛테레) 계열 프로그램 '제9회 미국 횡단 울트라 퀴즈'(1985년)에서 당시 파리 시장이었던 시라크의 초청으로 파리가 결승지가 되었고, 1986년과 1995년에는 대일본상사(大相撲) 파리 공연을 직접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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