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왕당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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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통왕당파는 프랑스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의 회귀를 추구하며 입헌 군주제와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상에 반대하는 극우 정치 세력이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쇠퇴했으나, 이후 정통왕당파로 불리며 부르봉 왕가의 왕위 복귀를 목표로 했다. 1870년 파리 포위전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으나 왕정 복고는 실패했고, 이후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세력과 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현재는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으며, 유럽 헌법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등 프랑스 독립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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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왕당파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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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프랑스어) | Légitimistes 레지티미스트 |
명칭 (한국어) | 정통왕당파 |
지지 이념 | 정통주의 |
역사 | |
창당 시기 | 1830년 |
해산 시기 | 1877년 |
이전 정당 | 초왕당파 |
이념 및 성향 | |
정치 성향 | 극우 |
주요 이념 | 보수주의 군주주의 반동주의 귀족정 부르봉 왕정복고 |
조직 및 인물 | |
지도자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자작 피에르-앙투안 베리 오귀스트-알상드르 뒤크로트 |
관련 단체 (프랑스어) | Amis de la Constitution Monarchique |
상징 | |
상징색 | 청색, 백색 (부르봉 왕가 상징색) |
2. 역사
정통왕당파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의 복귀를 추구한 극우 왕당파 세력이다. 부르봉 왕정 복고 시기에 등장하여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에서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재산 자격 선거를 통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며 입헌 군주제,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면서 정통왕당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이 사망하면서, 샹보르 백작 앙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1]
1848년 혁명 이후 오를레앙파와 연합하여 질서당을 결성, 의회를 장악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지만,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다시 소외되었다.[1]
1871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지방의 지지를 받아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지만, 샹보르 백작이 삼색기를 거부하고 백합 문양을 고집하면서 왕정 복고는 무산되었고,[1]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비시 정권 시기에 일부 정통왕당파가 정치적 중요성을 회복하기도 했다.[1] 전후에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1]
현재 정통왕당파는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으며,[1] 일부는 극우 정당이나 가톨릭 전통주의 운동과 연계되어 있다.[1]
단체명 | 설립 연도 | 설명 |
---|---|---|
루이 드 부르봉 개인 비서실 | 공적 업무 및 소통 관리[1] | |
부르봉 가문 연구소(IMB) | 1973년 | 프랑스 왕들의 업적 연구 및 유산 보호 활동[1] |
프랑스 정통왕당파 서클 연합(UCLF) | 1979년 | 군주제 연구 및 홍보[1] |
정통왕당파 행동 서클(CAL) | 2012년 | 정치적 목적의 정통왕당파 원칙 홍보[1] |
2. 1. 부르봉 왕정복고 (1814–1830)
1814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면서 정통왕당파(울트라)가 등장했다. 이들은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에서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극우 왕당파는 재산 자격 선거를 통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며, 입헌 군주제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쳤다.탈레랑, 리슐리외 공 등을 포함한 루이 18세의 첫 번째 각료들은 극우파가 지배하는 ''선출 불가능한 의회''에 의해 교체되었다. 루이 18세는 이 의회를 해산했지만,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통치하기 쉽지 않았다. 1820년 베리 공 암살 이후, 빌렐 백작을 수장으로 하는 극우파 정부가 복귀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1825년 1월, 빌렐 정부는 성병의 절도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신성 모독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루이 필리프 1세 통치 초기에 폐지되었다. 극우파는 또한 급진주의를 처벌하는 법정을 만들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키기를 원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가가 왕위에 오르면서 극우파의 영향력은 쇠퇴했다.
2. 2. 7월 왕정 (1830–1848)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면서 정통왕당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1]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이 사망하면서, 샹보르 백작 앙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1]2. 3. 제2공화국과 제2제정 (1848–1871)
1848년 혁명 이후, 정통왕당파는 오를레앙파와 연합하여 질서당을 결성, 의회를 장악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이들은 팔루 법을 통과시켜 가톨릭 교회가 중등 교육에 관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1]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이후 다시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다.[1]1870년 파리 포위전과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정통왕당파는 1871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지방의 지지를 받아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1] 이때 정통왕당파는 오를레앙파와 융합하여 샹보르 백작 사후 파리 백작이 왕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1] 그러나 샹보르 백작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거부하고 백합 문양을 고집하면서 왕정 복고는 무산되었고,[1]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정통왕당파는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었다.[1]
2. 4. 제3공화국 (1871–1940)
1870년 보불전쟁 패배와 파리 코뮌 이후, 정통왕당파는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1871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샹보르 백작의 삼색기 거부로 왕정 복고는 실패했다. 샹보르 백작 사후, 정통왕당파는 스페인 부르봉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민족주의 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는 군주주의를 지향하며 정통왕당파의 일부를 흡수했다.2. 5. 비시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0–현재)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비시 정권 시기에 일부 정통왕당파는 정치적 중요성을 회복했다.[1] 그들 중 일부는 알제리 전쟁 (1954년 - 1962년)에서 비밀 군사 조직을 지원했고, 마르셀 르페브르가 1970년에 창설한 성 비오 10세회는 정통왕당파 운동에 공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전후 정통왕당파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1] 오를레앙 가문의 왕위 요구자인 파리 백작 앙리가 정치적으로 좌익이었던 것과, 부르봉 가문 "적통"의 왕위 요구자인 세고비아 공 하이메의 적극적인 프랑스 왕위 요구 활동으로 인해, 부르봉 가문 "적통"을 지지하는 집단이 강력해졌다.[1] 1980년대까지 하이메의 아들 카디스 공 알폰소는 정통왕당파의 지지를 얻었고, 그의 아들 루이 알퐁스 드 부르봉이 현재 정통왕당파의 왕위 요구자이다.[1]
현재 정통왕당파는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1]
단체명 | 설립 연도 | 설명 |
---|---|---|
루이 드 부르봉 개인 비서실 | 공적 업무 및 소통 관리[1] | |
부르봉 가문 연구소(IMB) | 1973년 | 프랑스 왕들의 업적 연구 및 유산 보호 활동[1] |
프랑스 정통왕당파 서클 연합(UCLF) | 1979년 | 군주제 연구 및 홍보[1] |
정통왕당파 행동 서클(CAL) | 2012년 | 정치적 목적의 정통왕당파 원칙 홍보[1] |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것은 ultra vires|권한 남용la이며 프랑스 군주제 기본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정통왕당파는, 1883년 샹보르 백작 사후, 카를리스타 스페인 왕위 요구자를 지지하는 세력(스페인 백색당)과 알폰소 13세의 후손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3]
정통왕당파는 앙시앵 레짐의 기본법을 프랑스 왕위 계승의 근거로 삼는다. 이 법은 카페 왕조 초기에 형성되었다.
일부는 극우 정당이나 가톨릭 전통주의 운동과 연계되어 있다.[1] 이들은 유럽 헌법에 거부 반응을 보이며, 프랑스의 독립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1] 파리의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교회에 모이는 전통적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행동하거나, 마린 르 펜의 국민연합이나 필립 드 빌리에의 프랑스 운동 집회에 참여하기도 한다.[1] 다수파는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며, 스페인이나 영국과 같은 헌법과 의회를 가진 군주 정체를 프랑스에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
3. 스페인 부르봉 가문
이들은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를레앙가 왕위 요구자인 앙리 파리 백작의 좌익 성향과 카를리스타 남성 계통 단절, 그리고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와 그의 아들 앙주 공작 알폰소의 노력으로 규모가 커졌다. 1980년대에는 장자 계승 계통 지지자들이 정통왕당파라는 칭호를 완전히 되찾았다.
현재 프랑스 정통왕당파가 '루이 20세'로 여기는 루이 알퐁스 드 부르봉은, 1987년 오를레앙가 및 다른 부르봉가가 그의 앙주 칭호 사용과 프랑스 순수 문장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1989년 3월 프랑스 법원은 관할권 부족을 이유로 기각했다. 그는 아버지 쪽 할머니를 통해 프랑스 시민권을 가졌으며, 카페 왕가의 최고 정통 대표로 인정받는다.
4. 왕위 계승 논쟁
정통왕당파에 따르면, 군주제는 기본적인 정부 형태이며, 군주는 필수적인 행정가이다. 왕위 계승은 세습되며 살리카법에 따른 장자 상속으로 이루어진다. 즉, 여성과 카페 왕조의 적장자가 아닌 남성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또한 왕은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
정통왕당파의 다른 신조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국적이 왕위 계승의 전제 조건인지에 대해서는 정통왕당파 내에서 의견이 갈린다. 스페인 앙주 왕가의 지지자들은 외국 국적의 군주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4] 다른 사람들은 왕위 요구자와 그의 조상 모두 프랑스 국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5][6]
5. 정통왕당파 왕위 요구자 목록 (1792년 이후)
(장 3세)
1883–1887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의 아들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인판타
1847년 2월 6일
자녀 2명
호브
65세
(샤를 11세)
1887–1909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1867년 2월 4일
자녀 5명
베르트 드 로앙 공주
1894년 4월 28일
자녀 없음
바레세
61세
(자크 1세)
1909–1931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의 아들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
파리
61세
(샤를 12세)
1931–1936
런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1871년 4월 26일
자녀 없음
비엔나
87세
(알퐁스 1세)
1936–1941

스페인의 알폰소 12세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906년 5월 31일
자녀 7명
로마
54세
(자크-앙리 1세)
1941–1975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의 아들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1935년 3월 4일, 로마 (1947년 5월 6일 이혼)[10], 자녀 2명
샬롯 루이세 아우구스테 타이데만
1949년 8월 3일, 비엔나 (시민 결혼만 해당, 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음), 자녀 없음
장크트갈렌
67세
(알퐁스 2세)
1975–1989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아들
엠마누엘 드 담피에르
1972년 3월 8일, 엘 파르도 왕궁 (1982년 이혼, 1986년 무효화), 자녀 2명
비버 크릭
53세
(루이 20세)
1989–현재

알폰소, 앙주와 카디스 공작의 아들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
2004년 11월 5일, 카라카스
자녀 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