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정통왕당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통왕당파는 프랑스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의 회귀를 추구하며 입헌 군주제와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상에 반대하는 극우 정치 세력이었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쇠퇴했으나, 이후 정통왕당파로 불리며 부르봉 왕가의 왕위 복귀를 목표로 했다. 1870년 파리 포위전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으나 왕정 복고는 실패했고, 이후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지지하는 세력과 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현재는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으며, 유럽 헌법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등 프랑스 독립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 왕위 요구자 - 루이 17세
    루이 17세는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샤를의 추정 왕위 계승 명칭으로, 프랑스 혁명 중 유폐되어 아버지 사후 명목상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여러 미스터리와 자칭 왕위 계승자들을 낳았다.
  • 프랑스의 군주주의 - 6월 봉기
    1832년 6월 봉기는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불안, 경제적 어려움, 콜레라 유행 속에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공화주의자들이 주도했으나 정부군의 진압으로 실패했으며,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자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담고 민주주의 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 프랑스의 군주주의 - 오를레앙파
    오를레앙파는 프랑스 혁명기부터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정치에 영향을 미친 정치 세력으로, 자유주의적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며 공화주의와 결합하여 중도주의 정치를 펼쳐왔다.
  • 프랑스의 반혁명가 - 조제프 드 메스트르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며 반계몽주의와 반합리주의를 주창하고 정부의 권위는 종교에서 기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이자 외교관이다.
  • 프랑스의 반혁명가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프랑스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작가이자 정치가로, 소설을 집필하고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옹호하다가 1848년 혁명 중에 사망했다.
정통왕당파 - [정당]에 관한 문서
개요
명칭 (프랑스어)Légitimistes 레지티미스트
명칭 (한국어)정통왕당파
지지 이념정통주의
역사
창당 시기1830년
해산 시기1877년
이전 정당초왕당파
이념 및 성향
정치 성향극우
주요 이념보수주의
군주주의
반동주의
귀족정
부르봉 왕정복고
조직 및 인물
지도자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자작
피에르-앙투안 베리
오귀스트-알상드르 뒤크로트
관련 단체 (프랑스어)Amis de la Constitution Monarchique
상징
상징색청색, 백색 (부르봉 왕가 상징색)

2. 역사

정통왕당파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의 복귀를 추구한 극우 왕당파 세력이다. 부르봉 왕정 복고 시기에 등장하여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에서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재산 자격 선거를 통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며 입헌 군주제,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면서 정통왕당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이 사망하면서, 샹보르 백작 앙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1]

1848년 혁명 이후 오를레앙파와 연합하여 질서당을 결성, 의회를 장악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지만,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로 다시 소외되었다.[1]

1871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지방의 지지를 받아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지만, 샹보르 백작이 삼색기를 거부하고 백합 문양을 고집하면서 왕정 복고는 무산되었고,[1]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비시 정권 시기에 일부 정통왕당파가 정치적 중요성을 회복하기도 했다.[1] 전후에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1]

현재 정통왕당파는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으며,[1] 일부는 극우 정당이나 가톨릭 전통주의 운동과 연계되어 있다.[1]

단체명설립 연도설명
루이 드 부르봉 개인 비서실공적 업무 및 소통 관리[1]
부르봉 가문 연구소(IMB)1973년프랑스 왕들의 업적 연구 및 유산 보호 활동[1]
프랑스 정통왕당파 서클 연합(UCLF)1979년군주제 연구 및 홍보[1]
정통왕당파 행동 서클(CAL)2012년정치적 목적의 정통왕당파 원칙 홍보[1]


2. 1. 부르봉 왕정복고 (1814–1830)

1814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면서 정통왕당파(울트라)가 등장했다. 이들은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에서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극우 왕당파는 재산 자격 선거를 통해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며, 입헌 군주제와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탈레랑, 리슐리외 공 등을 포함한 루이 18세의 첫 번째 각료들은 극우파가 지배하는 ''선출 불가능한 의회''에 의해 교체되었다. 루이 18세는 이 의회를 해산했지만, 이후 등장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통치하기 쉽지 않았다. 1820년 베리 공 암살 이후, 빌렐 백작을 수장으로 하는 극우파 정부가 복귀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1825년 1월, 빌렐 정부는 성병의 절도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신성 모독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루이 필리프 1세 통치 초기에 폐지되었다. 극우파는 또한 급진주의를 처벌하는 법정을 만들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키기를 원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가가 왕위에 오르면서 극우파의 영향력은 쇠퇴했다.

2. 2. 7월 왕정 (1830–1848)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가의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면서 정통왕당파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1]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이 사망하면서, 샹보르 백작 앙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1]

2. 3. 제2공화국과 제2제정 (1848–1871)

1848년 혁명 이후, 정통왕당파는 오를레앙파와 연합하여 질서당을 결성, 의회를 장악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이들은 팔루 법을 통과시켜 가톨릭 교회가 중등 교육에 관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1]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이후 다시 정치 무대에서 소외되었다.[1]

1870년 파리 포위전과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정통왕당파는 1871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지방의 지지를 받아 의회 다수당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1] 이때 정통왕당파는 오를레앙파와 융합하여 샹보르 백작 사후 파리 백작이 왕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1] 그러나 샹보르 백작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거부하고 백합 문양을 고집하면서 왕정 복고는 무산되었고,[1]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정통왕당파는 의회 다수당 지위를 잃었다.[1]

2. 4. 제3공화국 (1871–1940)

1870년 보불전쟁 패배와 파리 코뮌 이후, 정통왕당파는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1871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샹보르 백작의 삼색기 거부로 왕정 복고는 실패했다. 샹보르 백작 사후, 정통왕당파는 스페인 부르봉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오를레앙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민족주의 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는 군주주의를 지향하며 정통왕당파의 일부를 흡수했다.

2. 5. 비시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0–현재)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비시 정권 시기에 일부 정통왕당파는 정치적 중요성을 회복했다.[1] 그들 중 일부는 알제리 전쟁 (1954년 - 1962년)에서 비밀 군사 조직을 지원했고, 마르셀 르페브르가 1970년에 창설한 성 비오 10세회는 정통왕당파 운동에 공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전후 정통왕당파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1] 오를레앙 가문의 왕위 요구자인 파리 백작 앙리가 정치적으로 좌익이었던 것과, 부르봉 가문 "적통"의 왕위 요구자인 세고비아 공 하이메의 적극적인 프랑스 왕위 요구 활동으로 인해, 부르봉 가문 "적통"을 지지하는 집단이 강력해졌다.[1] 1980년대까지 하이메의 아들 카디스 공 알폰소는 정통왕당파의 지지를 얻었고, 그의 아들 루이 알퐁스 드 부르봉이 현재 정통왕당파의 왕위 요구자이다.[1]

현재 정통왕당파는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다.[1]

단체명설립 연도설명
루이 드 부르봉 개인 비서실공적 업무 및 소통 관리[1]
부르봉 가문 연구소(IMB)1973년프랑스 왕들의 업적 연구 및 유산 보호 활동[1]
프랑스 정통왕당파 서클 연합(UCLF)1979년군주제 연구 및 홍보[1]
정통왕당파 행동 서클(CAL)2012년정치적 목적의 정통왕당파 원칙 홍보[1]



일부는 극우 정당이나 가톨릭 전통주의 운동과 연계되어 있다.[1] 이들은 유럽 헌법에 거부 반응을 보이며, 프랑스의 독립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1] 파리의 생 니콜라 뒤 샤르도네 교회에 모이는 전통적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행동하거나, 마린 르 펜의 국민연합이나 필립 드 빌리에의 프랑스 운동 집회에 참여하기도 한다.[1] 다수파는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며, 스페인이나 영국과 같은 헌법과 의회를 가진 군주 정체를 프랑스에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1]

3. 스페인 부르봉 가문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것은 ultra vires|권한 남용la이며 프랑스 군주제 기본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정통왕당파는, 1883년 샹보르 백작 사후, 카를리스타 스페인 왕위 요구자를 지지하는 세력(스페인 백색당)과 알폰소 13세의 후손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3]

이들은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를레앙가 왕위 요구자인 앙리 파리 백작의 좌익 성향과 카를리스타 남성 계통 단절, 그리고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와 그의 아들 앙주 공작 알폰소의 노력으로 규모가 커졌다. 1980년대에는 장자 계승 계통 지지자들이 정통왕당파라는 칭호를 완전히 되찾았다.

현재 프랑스 정통왕당파가 '루이 20세'로 여기는 루이 알퐁스 드 부르봉은, 1987년 오를레앙가 및 다른 부르봉가가 그의 앙주 칭호 사용과 프랑스 순수 문장 사용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1989년 3월 프랑스 법원은 관할권 부족을 이유로 기각했다. 그는 아버지 쪽 할머니를 통해 프랑스 시민권을 가졌으며, 카페 왕가의 최고 정통 대표로 인정받는다.

4. 왕위 계승 논쟁

정통왕당파는 앙시앵 레짐의 기본법을 프랑스 왕위 계승의 근거로 삼는다. 이 법은 카페 왕조 초기에 형성되었다.

정통왕당파에 따르면, 군주제는 기본적인 정부 형태이며, 군주는 필수적인 행정가이다. 왕위 계승은 세습되며 살리카법에 따른 장자 상속으로 이루어진다. 즉, 여성과 카페 왕조의 적장자가 아닌 남성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다. 또한 왕은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

정통왕당파의 다른 신조는 다음과 같다.


  • 왕관의 연속성(또는 즉시성): 군주가 사망하면, 그의 상속자는 어떠한 공식적인 즉위식 없이 자동적이고 즉시 왕이 된다. 심지어 정치적 상황이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더라도 왕위는 계승된다.
  • 왕관의 불가양성(또는 양도 불가능성): 왕관은 왕의 개인적인 소유가 아니다. 따라서 왕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퇴위, 포기, 또는 스스로 선택한 상속인의 임명 등을 통해 왕위 계승 순위를 변경할 수 없다. 이 주장은 필리프 5세와 그의 후손들의 왕위 계승 권리의 유효성에 관한 정통왕당파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필리프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것은 무효이며,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오를레앙 왕가보다 먼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국적이 왕위 계승의 전제 조건인지에 대해서는 정통왕당파 내에서 의견이 갈린다. 스페인 앙주 왕가의 지지자들은 외국 국적의 군주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4] 다른 사람들은 왕위 요구자와 그의 조상 모두 프랑스 국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5][6]

5. 정통왕당파 왕위 요구자 목록 (1792년 이후)

(장 3세)
1883–1887

1822년 5월 15일, 아란후에스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의 아들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인판타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1847년 2월 6일
자녀 2명1887년 11월 21일
호브
65세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
(샤를 11세)
1887–1909
1848년 3월 30일, 류블랴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
1867년 2월 4일
자녀 5명
베르트 드 로앙 공주
1894년 4월 28일
자녀 없음1909년 7월 18일
바레세
61세하이메, 마드리드 공작
(자크 1세)
1909–1931
1870년 6월 27일, 베베이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의 아들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미혼1931년 10월 2일
파리
61세알폰소 카를로스, 산 하이메 공작
(샤를 12세)
1931–1936
1849년 9월 12일
런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다스 네베스
1871년 4월 26일
자녀 없음1936년 9월 29일
비엔나
87세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알퐁스 1세)
1936–1941
1886년 5월 17일, 마드리드
스페인의 알폰소 12세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1906년 5월 31일
자녀 7명1941년 2월 28일
로마
54세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
(자크-앙리 1세)
1941–1975
1908년 6월 23일, 세고비아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의 아들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엠마누엘 드 담피에르
1935년 3월 4일, 로마 (1947년 5월 6일 이혼)[10], 자녀 2명
샬롯 루이세 아우구스테 타이데만
1949년 8월 3일, 비엔나 (시민 결혼만 해당, 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음), 자녀 없음1975년 3월 20일
장크트갈렌
67세
알폰소 공,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퐁스 2세)
1975–1989
1936년 4월 20일, 로마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아들
엠마누엘 드 담피에르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
1972년 3월 8일, 엘 파르도 왕궁 (1982년 이혼, 1986년 무효화), 자녀 2명1989년 1월 30일
비버 크릭
53세루이 공, 앙주 공작
(루이 20세)
1989–현재
1974년 4월 25일, 마드리드
알폰소, 앙주와 카디스 공작의 아들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마리아 마르가리타 바르가스 산타엘라
2004년 11월 5일, 카라카스
자녀 4명


5. 1. 샹보르 백작 사망 이전

1870년대, 정통왕당파와 오를레앙 왕가 계승자들은 프랑스 군주제 복원을 위해 경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루이 필리프 1세의 손자인 필리프 도를레앙(Philippe d'Orléans), 파리 백작은 아이가 없었던 샹보르 백작의 왕위 주장을 받아들였다. 샹보르 백작은 필리프가 자신의 후계자로서 왕위를 주장할 권리를 인정했고, 그가 죽은 후 많은 정통왕당파들은 필리프의 후손들을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여 연합주의자(Unionists)로 알려지게 되었다.[7][8]

루이 14세의 증손자였던 스페인 국왕 필리프 5세의 프랑스 왕위 포기가 무효라고 주장한 샹보르 백작의 후계자로 오를레앙 왕가를 받아들이지 않은 일부 정통왕당파들도 있었다.

왕위 요구자초상화출생결혼사망요구한 문장
프랑스의 루이 16세
1792–1793
1754년 8월 23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작센의 마리 조제프, 프랑스의 도피네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1770년 5월 16일
자녀 4명
1793년 1월 21일
파리
38세
프랑스의 루이-샤를, 도팽
(루이 17세)
1793–1795
1785년 3월 27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미혼1795년 6월 8일
파리
10세
--
루이 18세
1795–1824
(프랑스 국왕 1814–1815, 1815–1824)
1755년 11월 17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작센의 마리 조제파, 프랑스의 도피네
사보이의 마리 조제핀
1771년 5월 14일
자녀 없음
1824년 9월 16일
파리
68세
샤를 10세
1824–1836
(프랑스 국왕 1824–1830)
1757년 10월 9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작센의 마리 조제파, 프랑스의 도피네
사보이의 마리 테레즈
1773년 11월 16일
자녀 3명
1836년 11월 6일
고리치아
79세
--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루이 19세)
1836–1844
1775년 8월 6일, 베르사유
샤를 10세의 아들
사보이의 마리 테레즈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테레즈
1799년 6월 10일
자녀 없음
1844년 6월 3일
고리치아
68세
--
앙리, 샹보르 백작
(앙리 5세)
1844–1883
1820년 9월 29일, 파리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아들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캐롤린, 베리 공작부인
마리아 테레지아 폰 오스트리아-에스테
1846년 11월 7일
자녀 없음
1883년 8월 24일
프로스도르프 성
63세
--


5. 1. 1. 부르봉 왕가

1870년대, 정통왕당파와 오를레앙 왕가 계승자들은 프랑스 군주제 복원을 위해 경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필리프 도를레앙(Philippe d'Orléans), 파리 백작은 루이 필리프 1세의 손자였는데, 아이가 없었던 샹보르 백작의 왕위 주장을 받아들였다. 샹보르 백작은 필리프가 자신의 후계자로서 왕위를 주장할 권리를 인정했고, 그가 죽은 후 많은 정통왕당파들은 필리프의 후손들을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여 연합주의자(Unionists)로 알려지게 되었다.[7][8]

샹보르 백작의 후계자로 오를레앙 왕가를 받아들이지 않은 정통왕당파들은 루이 14세의 증손자였던 스페인 국왕 필리프 5세의 프랑스 왕위 포기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1883년(샹보르 백작이 후사 없이 사망했을 때) 왕위는 필리프 5세의 남계 후손에게 넘어갔다. 1883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맏이는 후안, 몬티손 백작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카를로스 4세의 차남: 필리프 5세의 손자)는 조카인 이사벨 2세에게 스페인 왕위를 빼앗겼고, 그의 후손들은 스페인에서 카를리스타 왕위 요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를리스타 분파가 1936년에 단절되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그녀의 손자인 알폰소 13세를 통해 이사벨 여왕의 스페인 왕위 계승 계통과 다시 합쳐졌다. 알폰소 13세는 또한 (공식적으로) 그녀의 배우자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공작 (카를로스 4세의 셋째 아들 스페인의 인판테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를 통해 손자)의 손자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필리프 5세의 직계 남계 후손 중 가장 선임자였다(하지만 그 당시 알폰소는 스페인 제2공화국에 의해 폐위된 상태였다). 알폰소의 사망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 요구는 다시 분리되었는데, 그의 장남 하이메, 세고비아 공작은 신체적 장애로 인해 스페인 왕위 요구를 포기했고, 몇 년 후 정통왕당파의 원칙에 따라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현재의 프랑스 정통왕당파 왕위 요구자는 하이메의 후손이며, 현재 스페인 국왕은 그의 동생인 돈 후안의 후손이다.[9]

왕위 요구자초상화출생결혼사망요구한 문장
프랑스의 루이 16세
1792–1793
1754년 8월 23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그리고 작센의 마리 조제프, 프랑스의 도피네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1770년 5월 16일
자녀 4명
1793년 1월 21일
파리
38세
프랑스의 루이-샤를, 도팽
(루이 17세)
1793–1795
1785년 3월 27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아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미혼1795년 6월 8일
파리
10세
--
루이 18세
1795–1824
(프랑스 국왕 1814–1815, 1815–1824)
1755년 11월 17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그리고 작센의 마리 조제파, 프랑스의 도피네
사보이의 마리 조제핀
1771년 5월 14일
자녀 없음
1824년 9월 16일
파리
68세
샤를 10세
1824–1836
(프랑스 국왕 1824–1830)
1757년 10월 9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그리고 작센의 마리 조제파, 프랑스의 도피네
사보이의 마리 테레즈
1773년 11월 16일
자녀 3명
1836년 11월 6일
고리치아
79세
--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루이 19세)
1836–1844
1775년 8월 6일, 베르사유
샤를 10세의 아들
그리고 사보이의 마리 테레즈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테레즈
1799년 6월 10일
자녀 없음
1844년 6월 3일
고리치아
68세
--
앙리, 샹보르 백작
(앙리 5세)
1844–1883
1820년 9월 29일, 파리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아들
그리고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캐롤린, 베리 공작부인
마리아 테레지아 폰 오스트리아-에스테
1846년 11월 7일
자녀 없음
1883년 8월 24일
프로스도르프 성
63세
--
후안, 몬티손 백작
(장 3세)
1883–1887
1822년 5월 15일, 아란후에스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의 아들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인판타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1847년 2월 6일
자녀 2명
1887년 11월 21일
호브
65세
--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
(샤를 11세)
1887–1909
1848년 3월 30일, 류블랴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그리고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
1867년 2월 4일
자녀 5명
베르트 드 로앙 공주
1894년 4월 28일
자녀 없음
1909년 7월 18일
바레세
61세
--
하이메, 마드리드 공작
(자크 1세)
1909–1931
1870년 6월 27일, 베베이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의 아들
그리고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
미혼1931년 10월 2일
파리
61세
--
알폰소 카를로스, 산 하이메 공작
(샤를 12세)
1931–1936
1849년 9월 12일
런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그리고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다스 네베스
1871년 4월 26일
자녀 없음
1936년 9월 29일
비엔나
87세
--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알퐁스 1세)
1936–1941
1886년 5월 17일, 마드리드
스페인의 알폰소 12세의 아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1906년 5월 31일
자녀 7명
1941년 2월 28일
로마
54세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
(자크-앙리 1세)
1941–1975
1908년 6월 23일, 세고비아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의 아들
그리고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첫 번째 결혼
엠마누엘 드 담피에르
1935년 3월 4일
로마
1947년 5월 6일 이혼[10]
자녀 2명
1975년 3월 20일
장크트갈렌
67세
알폰소 공,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퐁스 2세)
1975–1989
1936년 4월 20일, 로마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아들
그리고 엠마누엘 드 담피에르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
1972년 3월 8일
엘 파르도 왕궁
1982년 이혼, 1986년 무효화
자녀 2명
1989년 1월 30일
비버 크릭
53세
--
루이 공, 앙주 공작
(루이 20세)
1989–현재
1974년 4월 25일, 마드리드
알폰소, 앙주와 카디스 공작의 아들
그리고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
마리아 마르가리타 바르가스 산타엘라
2004년 11월 5일
카라카스
자녀 4명


5. 2. 샹보르 백작 사후 (스페인 부르봉 왕가)

1883년 샹보르 백작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는 펠리페 5세의 남계 후손에게 넘어갔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맏이는 후안, 몬티손 백작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카를로스 4세의 차남이자 펠리페 5세의 손자)는 조카인 이사벨 2세에게 스페인 왕위를 빼앗겼고, 그의 후손들은 스페인에서 카를리스타 왕위 요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9]

카를리스타 분파가 1936년에 단절되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이사벨 2세 여왕의 손자인 알폰소 13세를 통해 이사벨 여왕의 스페인 왕위 계승 계통과 다시 합쳐졌다. 알폰소 13세는 또한 (공식적으로) 그녀의 배우자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공작(카를로스 4세의 셋째 아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손자)의 손자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펠리페 5세의 직계 남계 후손 중 가장 선임자였다. 하지만 그 당시 알폰소는 스페인 제2공화국에 의해 폐위된 상태였다. 알폰소의 사망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 요구는 다시 분리되었는데, 그의 장남 하이메, 세고비아 공작은 신체적 장애로 인해 스페인 왕위 요구를 포기했고, 몇 년 후 정통왕당파의 원칙에 따라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현재의 프랑스 정통왕당파 왕위 요구자는 하이메의 후손이며, 현재 스페인 국왕은 그의 동생인 돈 후안의 후손이다.[9]

왕위 요구자초상화출생결혼사망요구한 문장
후안, 몬티손 백작
(장 3세)
1883–1887
1822년 5월 15일, 아란후에스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의 아들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인판타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1847년 2월 6일
자녀 2명
1887년 11월 21일
호브
65세
--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
(샤를 11세)
1887–1909
1848년 3월 30일, 류블랴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
1867년 2월 4일
자녀 5명
베르트 드 로앙 공주
1894년 4월 28일
자녀 없음
1909년 7월 18일
바레세
61세
--
하이메, 마드리드 공작
(자크 1세)
1909–1931
1870년 6월 27일, 베베이
카를로스, 마드리드 공작의 아들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공주
미혼1931년 10월 2일
파리
61세
--
알폰소 카를로스, 산 하이메 공작
(샤를 12세)
1931–1936
1849년 9월 12일
런던
후안, 몬티손 백작의 아들
마리아 베아트릭스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다스 네베스
1871년 4월 26일
자녀 없음
1936년 9월 29일
비엔나
87세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알퐁스 1세)
1936–1941
1886년 5월 17일, 마드리드
스페인의 알폰소 12세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1906년 5월 31일
자녀 7명
1941년 2월 28일
로마
54세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
(자크-앙리 1세)
1941–1975
1908년 6월 23일, 세고비아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의 아들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
첫 번째 결혼
엠마누엘 드 담피에르
1935년 3월 4일
로마
1947년 5월 6일 이혼[10]
1975년 3월 20일
장크트갈렌
67세
알폰소 공,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퐁스 2세)
1975–1989
1936년 4월 20일, 로마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아들
엠마누엘 드 담피에르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
1972년 3월 8일
엘 파르도 왕궁
1982년 이혼, 1986년 무효화
자녀 2명
1989년 1월 30일
비버 크릭
53세
--
루이 공, 앙주 공작
(루이 20세)
1989–현재
1974년 4월 25일, 마드리드
알폰소, 앙주와 카디스 공작의 아들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
마리아 마르가리타 바르가스 산타엘라
2004년 11월 5일
카라카스
자녀 4명


6. 정통왕당파의 분파

정통왕당파는 여러 분파로 나뉜다.



이 외에도, 비시 프랑스 시기에는 정통왕당파들이 정치적인 중요성을 회복하기도 했으며, 성 비오 10세회와 연관된 종교적인 정통왕당파, 국민연합 등과 연계된 정치적인 정통왕당파,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는 정통왕당파 등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7. 계보

부르봉 왕가, 오를레앙 가문,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가계도
부르봉 왕가오를레앙 가문스페인 부르봉 가문


참조

[1] 백과사전 Legitimism Wiley-Blackwell
[2] 웹사이트 Lawsuit brought by the comte de Clermont against the duc d'Anjou (1988–89) http://www.heraldica[...] 2014-08-02
[3] 웹사이트 Apanages in the French Monarchy http://www.heraldica[...] 2014-08-02
[4] 웹사이트 The French Legitimist Case http://www.chivalric[...]
[5] 간행물 Revue d'Histoire Diplomatique https://books.google[...] Société d'Histoire Générale et d'Histoire Diplomatique: Société d'Histoire Diplomatique 1889
[6] 웹사이트 The Nationality Requirement in the French Succession laws http://www.heraldica[...] 2004-12-31
[7] 서적 The ralliement in French politics, 1890–1898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8] 웹사이트 Henri-Scipion-Charles, marquis de Dreux-Brézé http://www.heraldica[...]
[9] 문서
[10] 서적 The Book of Kings Garnstone Press
[11] URL https://archive.org/[...]
[12] 뉴스 Dom Duarte de Bragance : « La République est très démocratique, mais a déjà mis le pays en banqueroute par deux fois ! » https://lincorrect.o[...] 2019-02-2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