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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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대회로, 아르헨티나가 첫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는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와 아마추어 축구 협회 간의 갈등, 칠레의 대회 불참, 브라질의 선수 차출 제한 등 복잡한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훌리오 리보나티의 활약에 힘입어 우루과이를 꺾고 우승했으며, 대회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아르헨티나에서 축구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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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국제 축구 대회 정보]에 관한 문서 | |
---|---|
대회 정보 | |
대회 이름 | 남아메리카 국가 선수권 대회 |
다른 이름 | 코파 아메리카 (1975년부터) |
연도 | 1921년 |
개최국 | 아르헨티나 |
개최 기간 | 10월 2일–30일 |
참가 팀 수 | 4 |
참가 연맹 수 | 1 |
경기장 수 | 1 |
도시 수 | 1 |
결과 | |
우승 | 아르헨티나 |
우승 횟수 | 1 |
준우승 | 브라질 |
3위 | 우루과이 |
4위 | 파라과이 |
통계 | |
총 경기 수 | 6 |
총 득점 수 | 14 |
최다 득점자 | 훌리오 리보나티 (3골) |
대회 연혁 | |
이전 대회 | 1920년 |
다음 대회 | 1922년 |
2. 대회 배경
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르헨티나 축구계의 분열과 칠레의 대회 개최 포기라는 복잡한 배경 속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AFA)와 아마추어 축구 협회(AAmF) 간의 갈등,[3] 칠레 축구 연맹의 AAmF 초청과 철회, 브라질의 선수 구성 문제, 파라과이의 훈련 시간 부족 문제 등 여러 난관을 겪었다.[3] 이러한 문제들은 오노리오 푸에이레돈 아르헨티나 외무부 장관 주재 회의와 각국 대표들의 논의를 통해 해결되었고, 결국 칠레에 대한 처벌 없이 대회가 진행되었다.[3]
2. 1. 아르헨티나 축구계의 분열과 칠레의 초청
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AFA)와 1년 전에 결성된 반대파 아마추어 축구 협회(AAmF) 사이의 격렬한 분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칠레 축구 연맹은 AAmF에 칠레에서 토너먼트를 개최하라는 초청을 보냈는데, 보카 주니어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축구의 빅 5''가 AAmF에 가입했으며, AAmF는 자체 챔피언십에 20개 팀이 참가했다. AAmF가 초청을 수락한 후, 마누엘 세오아네, 움베르토 레카나티니, 루이스 셀리코, 칸디도 가르시아, 알베리코 자발레타 등 저명한 선수들이 기차로 칠레로 갔다. AFA는 이 초청을 도발로 받아들여 남미 축구 연맹(CSF)에 칠레 축구 연맹(FFCh)의 처벌을 요청했다.[3]칠레 축구 연맹은 처벌 가능성을 인지하고 칠레가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팀을 철수시켰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 유사한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파울리스타'' 선수를 포함하지 않고 ''카리오카스'' 선수만으로 팀을 구성했다. 파라과이는 로사리오를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으며, 뉴웰스 올드 보이스와 티로 페데랄과의 친선 경기를 치렀다. 파라과이 선박은 에르네스토 첼리, 가비노 소사, 훌리오 리보나티 (아르헨티나 대표로 소집) 등 로사리오 선수들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데려왔다.[3]
9월 29일, 칠레 사건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아르헨티나 외무부 장관 오노리오 푸에이레돈이 회의를 주재했으며, 파라과이 대표는 훈련 시간 부족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대회를 시작하기로 합의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칠레 대표는 AAmF에 보낸 초청을 "아르헨티나 축구 재통합을 위한 한 걸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고, 우루과이 대표는 칠레가 처벌받을 경우 대회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다른 대표들의 지지로 아르헨티나는 조건을 수용했고, 칠레에 대한 처벌 없이 대회가 열렸다.[3]
AAmF는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와 같은 시기에 프리메라 디비시온 챔피언십을 진행하며 대회를 무시했다. 35라운드는 아르헨티나가 챔피언으로 등극한 결승전과 같은 날인 10월 30일로 예정되었다.[3]
2. 2. 칠레의 대회 불참과 각국의 입장
이 대회는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AFA)와 1년 전에 결성된 반대파 아마추어 축구 협회(AAmF) 사이의 격렬한 분쟁으로 특징지어졌다. AAmF는 칠레 축구 연맹으로부터 칠레에서 대회를 개최하라는 초청을 받았다. 보카 주니어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축구의 빅 5''가 AAmF에 가입했으며, AAmF는 자체 챔피언십에 20개 팀이 참가했다. AAmF가 초청을 수락한 후, 마누엘 세오아네, 움베르토 레카나티니, 루이스 셀리코, 칸디도 가르시아, 알베리코 자발레타 등 저명한 선수들이 칠레로 갔다. 이 초청은 AFA에 의해 도발로 받아들여졌고, AFA는 남미 축구 연맹(CSF)에 칠레 축구 연맹의 처벌을 요청했다.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칠레 축구 연맹은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팀을 철수시켰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르헨티나와 유사한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파울리스타'' 선수를 포함하지 않았다(오직 ''카리오카스''만).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로사리오를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뉴웰스 올드 보이스와 티로 페데랄과의 친선 경기를 치렀다. 파라과이 선박은 에르네스토 첼리, 가비노 소사, 훌리오 리보나티 (아르헨티나 대표로 소집) 등 로사리오 선수들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데려왔다.
9월 29일, 칠레 사건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아르헨티나 외무부 장관인 오노리오 푸에이레돈이 회의를 주재했으며, 파라과이 대표는 데뷔 전에 훈련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대회를 시작하기로 합의한 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 논의에 따라 칠레 대표는 AAmF에 보낸 초청을 "아르헨티나 축구 재통합을 위한 한 걸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우루과이 대표는 칠레가 처벌을 받을 경우 대회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다른 대표들이 그 주장을 지지한 후, 아르헨티나는 그 조건을 수용해야 했고 칠레에 대한 처벌 없이 대회가 열렸다.
AAmF는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와 같은 시기에 프리메라 디비시온 챔피언십을 진행하면서 대회를 무시했다. 실제로, 35라운드는 10월 30일, 즉 아르헨티나가 챔피언으로 등극한 결승전과 같은 날로 예정되었다.
3. 경기장
이번 대회 경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스포르티보 바라카스에서 열렸으며,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3. 1. [[부에노스아이레스]]
경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스포르티보 바라카스에서 열렸으며,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4. 참가 선수 명단
참가 선수단 전체 목록은 1921년 남미 선수권 대회 선수 명단을 참조하십시오.
5. 대회 진행
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었으며, 흥행과 언론 보도 등 여러 면에서 성공적인 대회였다. 아르헨티나는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골키퍼의 활약과 훌리오 리보나티의 득점력을 앞세워 모든 경기에서 무실점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6][7]
5. 1. 흥행과 관중 동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개막전에는 에스타디오 스포르티보 바라카스의 최대 수용 인원(22,000명)을 넘는 3만 명의 관중이 참석했다. 이는 티켓이 원래 가격의 두 배 이상으로 되팔렸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에피타시오 페소아 대통령의 '제안'으로 흑인 선수 출전이 금지되어,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와 같은 흑인 스타 선수 없이 경기에 나섰다.[5]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결승전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리가 로사리나 데 푸트볼의 세바스티안 가르시아 회장은 로사리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저렴한 티켓을 제공하여, 약 3,000명의 로사리오 사람들이 훌리오 리보나티, 블라스 사루포, 아돌포 첼리, 플로린도 베아르조티를 응원하기 위해 여행했다. 이들은 오전 6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경기를 관람한 후 오후 6시에 로사리오로 돌아왔다.[3]
아르헨티나 임원들은 선수들의 압박감을 덜어주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티그레의 훈련 캠프로 데려가 보체, 낚시, 음악 등의 활동을 하게 했다.[3]

결승전 전 금요일, 우루과이 선수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비센테 로페스의 캠프에서 농구를 하는 동안, 아르헨티나 임원들은 선수들을 티그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호텔로 이동시켜 엄격하게 통제했다. 카를로스 가르델과 호세 라짜노 듀오가 호텔 근처 테아트로 에스메랄다에서 공연했지만, 선수들은 호텔을 떠날 수 없었다.[3]

이 챔피언십은 언론의 광범위한 보도를 받았으며, 특히 나탈리오 보타나가 창립하고 운영한 신문 '크리타'는 판매량이 크게 늘어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다. 보타나는 1926년에 잠시 AFA를 맡기도 했다. '크리타'는 AAmF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때로는 "백치"라는 가혹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5]
결승전에는 약 4만 명의 관중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경기장에 있었다.
5. 2. 아르헨티나의 우승 과정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개막전에는 3만 명의 관중이 참석했다(비록 에스타디오 스포르티보 바라카스의 최대 수용 인원은 22,000명이었지만). 이는 티켓을 원래 가격의 두 배 이상으로 되팔았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브라질 대통령 에피타시오 페소아의 '제안'으로 흑인 선수들이 금지되면서 흑인 선수 없이 경기에 나섰다. 따라서 브라질 축구의 첫 번째 스타로 여겨지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이 팀의 일원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는 훌리오 리보나티의 골로 1-0으로 승리했다.[5]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결승전에 대한 기대가 컸다. 리가 로사리나 데 푸트볼의 세바스티안 가르시아 회장은 로사리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저렴한 가격으로 티켓을 제공하여 사람들이 경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로사리오에서 온 약 3,000명의 사람들이 훌리오 리보나티, 블라스 사루포, 아돌포 첼리, 플로린도 베아르조티를 응원하기 위해 여행했다. 기차는 오전 6시에 출발하여 오후 6시에 로사리오로 돌아왔다.[3]
선수들의 압박감을 덜어주기 위해 아르헨티나 임원들은 그들을 부에노스아이레스주 티그레의 훈련 캠프로 데려갔다. 보체, 낚시, 음악은 그들이 그곳에서 보낸 시간 동안의 활동 중 일부였다.[3]
결승전 전 금요일, 우루과이 선수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비센테 로페스에 있는 캠프에서 농구를 하는 동안, 아르헨티나 임원들은 선수들을 티그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호텔로 옮겼고, 그곳에서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카를로스 가르델과 호세 라짜노 듀오가 호텔에서 멀지 않은 테아트로 에스메랄다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3]
이 챔피언십은 광범위한 언론 보도를 받았으며, 특히 나탈리오 보타나가 창립하고 운영한 신문 '크리타'는 판매량을 늘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다. 보타나는 1926년에 잠시 AFA를 맡게 된다. 이 신문은 AAmF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때로는 매우 가혹한 표현으로 "백치"라고 부르기도 했다.[5]
결승전에는 약 4만 명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3시간 전에 경기장에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마지막 경기에서 우루과이를 1-0으로 꺾고 가장 많은 점수(3경기 6점)를 얻어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가 끝나자 양 팀의 선수들은 경기장에 들어온 관중들에게 들어 올려져 플로리다와 칸갈로 거리 모퉁이에 있는 아르헨티나가 대회 기간 동안 머물렀던 호텔로 옮겨졌다.
아르헨티나는 골키퍼 아메리코 테소리에레의 뛰어난 활약에 힘입어 모든 경기에서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이었다.[6] 훌리오 리보나티는 경기당 한 골씩 총 3골을 넣었다.[7]
5. 3. 언론의 관심과 상업적 성공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개막전에는 3만 명의 관중이 참석했다(비록 에스타디오 스포르티보 바라카스의 최대 수용 인원은 22,000명이었지만). 이는 티켓을 원래 가격의 두 배 이상으로 되팔았기 때문이다.[5] 브라질은 브라질 대통령 에피타시오 페소아의 '제안'으로 흑인 선수들이 금지되면서 흑인 선수 없이 경기에 나섰다. 따라서 브라질 축구의 첫 번째 스타로 여겨지는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는 이 팀의 일원이 아니었다.[5]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결승전에 대한 기대가 컸다. 리가 로사리나 데 푸트볼의 세바스티안 가르시아 회장은 로사리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저렴한 가격으로 티켓을 제공하여 사람들이 경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로사리오에서 온 약 3,000명의 사람들이 훌리오 리보나티, 블라스 사루포, 아돌포 첼리, 플로린도 베아르조티를 응원하기 위해 여행했다.[3]
이 대회는 언론의 광범위한 보도를 받았으며, 특히 나탈리오 보타나가 창립하고 운영한 신문 '크리타'는 판매량을 늘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 되었다. 보타나는 1926년에 잠시 AFA를 맡게 된다. 이 신문은 AAmF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때로는 매우 가혹한 표현으로 "백치"라고 부르기도 했다.[5]
결승전에는 약 4만 명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3시간 전에 경기장에 있었다.
6. 경기 결과
팀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3 | 3 | 0 | 0 | 5 | 0 | +5 | 6 | |
3 | 1 | 0 | 2 | 4 | 3 | +1 | 2 | |
3 | 1 | 0 | 2 | 3 | 4 | -1 | 2 | |
3 | 1 | 0 | 2 | 2 | 7 | -5 | 2 |
1921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되었다. 총 4개 팀이 참가하였으며, 아르헨티나가 3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1889년 국기), 우루과이, 파라과이(1842년 국기)는 각각 1승 2패를 기록하며 승점 2점으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득실차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었다. 칠레는 기권하였다.
6. 1. 상세 경기 결과
팀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align=left | | 3 | 3 | 0 | 0 | 5 | 0 | +5 | 6 |
align=left | | 3 | 1 | 0 | 2 | 4 | 3 | +1 | 2 |
align=left | | 3 | 1 | 0 | 2 | 3 | 4 | -1 | 2 |
align=left | | 3 | 1 | 0 | 2 | 2 | 7 | -5 | 2 |
- 는 기권하였다.
; 1921년 10월 2일
; 1921년 10월 9일
- 2 : 1
- *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 * 주심: 헤로니모 라포시 (아르헨티나)
- * 득점
- ** 파라과이: Rivas (전반 9분), 로페스 (후반 21분)
- ** 우루과이: 피엔디베네 (후반 38분)
; 1921년 10월 12일
; 1921년 10월 16일
- 3 : 0
- *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 * 주심: 리카르도 바야리노 (우루과이)
- * 득점
- ** 리보나티 (전반 1분)
- ** 사루포 (후반 26분)
- ** 에체베리아 (후반 31분)
; 1921년 10월 23일
- 2 : 1
- * 스포르티보 바라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 * 주심: 빅토르 카바냐스 사기에르 (파라과이)
- * 득점
- ** 로마노 (전반 1분, 전반 8분)
- ** 제제 I (후반 8분)
; 1921년 10월 30일
'''아르헨티나''': 테소리에레, 셀리, 베아르초티, J. 로페스, 델라발레, E. 솔라리, 칼로미노, 리보나티, 사루포, 에체베리아, 곤잘레스[9]
7. 우승
아르헨티나
첫 번째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