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1878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 초콜릿 제조업자 협회, 작센 제조업자 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1903년 국민자유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 제국의회 의원을 거쳐 당 대표를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팽창주의를 지지했으나, 전쟁 패배 후 독일 인민당을 창당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총리, 외무장관을 지내며 베르사유 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했다. 로카르노 조약 체결, 국제 연맹 가입 등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1929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독일의 경제 회복과 국제적 위상 제고에 기여했으나, 국내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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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1878년베를린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정치 경제학을 공부한 후 정치에 입문했다. 초기에는 국민자유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팽창주의적 목표를 지지하는 등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나, 전쟁 패배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이후 현실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여 공화국 체제 안에서 독일의 국익을 실현하고자 했다.
1918년 말, 그는 기존 국민자유당 세력을 기반으로 독일 인민당(DVP)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1923년에는 극심한 초인플레이션과 루르 점령 위기 속에서 총리로 임명되어, 렌텐마르크 도입 등 통화 개혁을 단행하고 경제 안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총리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이후 여러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
외무장관으로서 슈트레제만은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의 부담을 완화하고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는 1925년로카르노 조약 체결로, 이를 통해 독일은 서부 국경을 인정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로로 1926년 프랑스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1926년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을 성사시켜 독일의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그의 화해 정책은 국내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폴란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는 등 그의 정책은 현실주의적 측면과 함께 영토 회복 등 수정주의적 목표도 포함하고 있었다. 말년에는 건강 악화와 더불어 국내 정치의 불안정 심화 속에서 1929년 10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안정과 국제 협력 시대에 큰 손실로 여겨졌다.
2. 1. 유년기와 청년기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1878년 5월 10일 베를린 남동부 쾨페니커 슈트라세 66번지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아버지는 여인숙 주인이자 맥주를 병에 담아 유통하는 사업을 했고, 집에서 작은 술집도 운영했다. 7남매 중 막내였으며, 5형제 중에서는 유일하게 김나지움과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가족은 중하층 계급이었지만 비교적 부유하여 슈트레제만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며, 학생 시절에는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 공부에서는 역사, 특히 근대사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 그중에서도 나폴레옹과 괴테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 두 인물은 평생 동안 그의 사상과 문학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6세에 안드레아스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그의 역사 교사는 그가 "역사에 대한 거의 병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895년 12월부터는 Dresdener Volks-Zeitung|드레스덴 국민신문de에 '베를린 편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며 정치 현안에 대해 논하고 프로이센 보수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1897년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문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그러나 직업적인 전망을 고려하여 실용적인 학문인 정치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대학 시절 그는 학생 조합 운동인 부르셴샤프트 활동에 참여했으며,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1898년 4월에는 부르셴샤프트 내 자유주의 그룹을 이끌던 콘라트 쿠스터가 운영하는 신문 Allgemeine Deutsche Universitäts-Zeitungde의 편집자를 맡아 정치적인 사설을 쓰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글에서는 자유주의와 강한 민족주의를 결합한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그의 정치적 견해를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1898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옮겨 역사, 국제법, 문학, 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경제학자 카를 뷔허의 지도를 받았다. 1901년 1월, 〈베를린 병맥주 산업의 성장〉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아버지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대기업과의 경쟁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소기업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의 출신 배경과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이 논문은 나중에 정치적 반대파로부터 그의 배경을 문제 삼아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1][2]
슈트레제만은 자유주의적인 프로이센 프로테스탄트로서, 당시 독일 제국에 널리 퍼져 있던 열광적인 애국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 제국의 정신적, 군사적, 경제적 우월성을 믿었으며, 1848년 혁명의 영웅적 자유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열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곤 했다.
2. 2. 정치 입문
대학교 졸업 후 슈트레제만은 동업조합에서 일하며 전문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특히 경제 분야에서의 빠른 성공은 훗날 정치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독일 초콜릿 제조업자 협회'의 행정보좌역이자 로비스트로 활동하며 노련한 조직가 및 협상가로서 명성을 얻었다.[1][2] 1902년에는 '작센 제조업자 협회'를 직접 결성하여 1911년까지 법률 대표를 맡는 등, 25세에 이미 경제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1][2]
1903년, 슈트레제만은 베를린의 실업가 아돌프 클레펠트의 딸이자 동료의 누이인 케테 클레펠트(Käthe Kleefeld)와 결혼했다.[1][2] 유대인 혈통이었던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한 모습으로 1920년대 베를린 사교계에서 유명했으며,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다.[1] 같은 해, 슈트레제만은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사회개혁가 프리드리히 나우만의 사상에 공감하여 그의 '국가사회연맹'에 협력한 뒤, 우익 성향의 국민자유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2]
당시 작센의 주요 정당이었던 국민자유당은 슈트레제만에게 정치적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1] 그는 1906년 당 대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같은 해 드레스덴 시의원(1906년~1912년)에 당선되었다.[1][2] 또한 드레스덴의 잡지 '제히지셰 인두스트리'(Sächsische Industrie)의 편집자로 활동하며 경제 문제에 관한 유명한 논객이자 시정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렸다.[1] 그는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자신의 목표 달성에 적극 활용했다.[1]
1907년, 슈트레제만은 작센 금광 지역인 아나베르크에서 국민자유당 소속으로 제국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전국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1][2] 28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제국의회 의원이 된 그는 국민자유당 당수 에른스트 바서만의 지원 아래 정치 경력을 쌓으며 곧 그의 '황태자'로 여겨졌다.[1]
의원으로서 슈트레제만은 주로 경제 정책에 관심을 기울이며 중산층의 이익을 옹호했지만, 동시에 사회보장법 확대를 주장하여 중공업계를 대변하는 당내 우파 세력과 갈등을 겪었다.[1][2] 이러한 갈등의 여파로 그는 1912년 국민자유당 집행위원회 재선에 실패했으며, 같은 해 열린 제국의회 선거에서도 낙선했다.[1][2] 낙선 후 슈트레제만은 기업가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경제 상황을 연구했고, 이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독일 경제계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1]
그는 자신이 직접 제안하여 창설된 '독일·미국 경제협회'를 비롯한 여러 경제 단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으며 경제적 자립도 이루었다.[1] 사람들을 조직하고 이끄는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스스로도 자신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1] 한편, 슈트레제만은 '독일식민협회' 회원이자 강력한 해군 건설 계획의 주창자로서,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국해군부 장관과 뷜로 후작 총리가 주도한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1]
2. 3.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정책
당시 애국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부분의 독일 국민과 마찬가지로 슈트레제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독일은 순수한 방어전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건강이 나빠서 군복무는 면제받았으나 1914년 12월 보궐선거에 제국의회 의원으로 다시 뽑히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전쟁 전 슈트레제만은 국민자유당의 좌파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그가 세계 경제 강국이라고 믿었던 대영 제국, 미국, 그리고 독일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영독 해군 군비 경쟁을 지지했는데, 이는 독일 제국 해군의 확장이 독일의 국제 무역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점차 우익으로 이동하여 호엔촐레른 왕가와 독일의 팽창주의적 목표를 지지했다. 그는 범게르만주의를 열렬히 주창했으며 독일이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러시아 영토,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까지 팽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래에 미국과 경제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독일이 벨기에, 북동 프랑스 일부, 동유럽의 "광대한" 영토, 그리고 모로코의 프랑스 보호령을 병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군사업무와 병으로 오랫동안 베를린을 떠나 있던 에른스트 바서만의 뒤를 이어 사실상 제국의회 내 국민자유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때 점차 우익으로 기울었다. 1916년부터 파울 폰 힌덴부르크 육군원수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최고사령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의회에서 대변했다. '무제한 유보트(U-boat) 전투'를 지지한 그는 온건노선을 주장하며 팽창주의적인 전쟁목표에 말려들지 않으려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총리의 정책에 반대했다.
슈트레제만은 1917년 7월 홀베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자신이 존경하던 뷜로 전(前)총리에게 권력을 안겨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달 바서만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원내(院內) 국민자유당 지도자가 되었고, 같은 해 말에는 원내와 원외를 모두 이끄는 전체 국민자유당 당수가 되었다.
국민자유당 내의 심각한 계급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민의 투표권을 재산가치에 따라 평가하는 '프로이센 3계급 참정권제도'를 둘러싼 국민자유당의 프로이센 의회 내 보수파와 제국의회 의원 사이의 분열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 복지 프로그램의 확대를 선호했으며, 제한적인 프로이센 삼계급 선거권의 종식 또한 지지했다. 또 군주제의 강화를 위해 선거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1916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정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레제만은 터키의 요구에 동의하여 독일 대사 파울 볼프 메테르니히를 소환하고, 그가 아르메니아인에게 너무 동정적이라고 비난했다.[3] 한편 그는 1918년 9월말 최고사령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독일 제국과 그 동맹국의 심각한 군사상황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와 1918년~1919년 독일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의 붕괴는 슈트레제만을 정신적, 육체적 쇠약으로 몰아넣었고, 이는 그를 충격에 빠뜨려 이전의 군국주의와 병합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게 했다.
전후 프리드리히 나우만과 사회학자 막스 베버 등이 창당한 좌파 자유주의 성향의 독일 민주당(DDP)에 합류하려 했으나, 당 지도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가 보였던 강경한 병합주의적 입장을 문제 삼아 입당을 거부했다.[4] 이에 슈트레제만은 과거 국민자유당 우파와 일부 진보 세력을 규합하여 독일 인민당(DVP, Deutsche Volkspartei|도이체 폴크스파르타이de)을 직접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독일 인민당은 주로 교육받고 재산을 소유한 중산층 이상의 지지를 받았으며, 초기 강령으로 "세계에서의 독일 위신 회복"을 내걸고 시장 경제를 신봉하며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했다.[5][6] 초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비판적이고 군주제 복귀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5], 슈트레제만 자신도 근본적으로는 군주제 옹호론자였기에 1920년 3월 우파 세력이 일으킨 카프 폭동 당시에는 '상황을 지켜보자'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폭동이 진압된 후, 슈트레제만은 점차 공화주의자들과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는 발터 라테나우 암살과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폭력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지만[7], 무엇보다 공화국 체제 내에서 독일의 국익을 실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변화였다. 그는 독일 인민당이 연립 정부에 참여할 자격이 있음을 역설했으나,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 중앙당으로 구성된 기존의 바이마르 연정은 한동안 그와 독일 인민당을 '국가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간주하며 참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슈트레제만은 바이마르 공화국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바이마르 헌법 제정에 반대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에도 강력히 반발하며 조약 개정을 자신의 핵심 정치 목표로 삼았다. 192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의회 의원이자 독일인민당 당수직을 유지했다.
1923년 총리 시절 언론인들과 함께 있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1923년 독일은 루르 점령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극심한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3년8월 13일, 슈트레제만은 사회민주당, 중앙당, 독일민주당, 독일인민당이 모두 참여하는 '대연정'(Große Koalition|그로세 코알리치온de)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로서 그가 내린 첫 주요 결정은 루르 점령에 대한 소극적 저항 정책을 중단한 것이었다.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는 독일의 전쟁 배상금 지불을 강제하기 위해 1923년 1월 루르 지역을 점령했고, 이에 대한 독일 정부의 소극적 저항은 초인플레이션만 극도로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슈트레제만은 저항 중단이 독일 경제를 안정시키고 연합국과의 협상 테이블로 나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판단했다.
국내 정치 문제에서는 복합적인 대응을 보였다. 튀링겐주와 작센주에서 독일 공산당이 참여한 좌파 주 정부가 수립되자, 슈트레제만은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의거한 대통령 긴급명령과 국가 집행(de, 국가 강제 집행)을 발동하여 군대를 동원해 이들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9] 반면, 1923년11월 9일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바이에른주에서 일으킨 뮌헨 폭동과 같은 극우파의 폭력적인 쿠데타 시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3년 11월, 초인플레이션이 최고조에 달하자 슈트레제만 정부는 한스 루터 재무장관, 히얄마르 샤흐트 국가통화위원 등과 협력하여 기존의 파피어마르크를 대체하는 새로운 통화인 렌텐마르크를 도입하는 과감한 통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조치는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고 극심했던 인플레이션을 종식시켜 독일 경제 회복의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작센과 튀링겐의 좌파 정부에 대한 강경 진압과 바이에른 우파에 대한 상대적 관용은 대연정 내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이러한 차별적 대응에 강하게 반발하며 연정에서 탈퇴했고, 결국 슈트레제만 내각은 1923년11월 23일 의회에서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0] 그는 총리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이후 출범한 빌헬름 마르크스 내각을 비롯한 여러 내각에서 외무장관직을 계속 맡으며 외교 정책을 주도하게 된다.
2. 5. 외무장관 시절
1923년 11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슈트레제만은 이후 빌헬름 마르크스가 이끄는 내각을 포함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여러 연립 정부(중도 우파에서 중도 좌파까지)에서 외무장관직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수행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부담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슈트레제만의 주요 목표는 서구 열강, 특히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그는 1922년라팔로 조약을 통해 이미 관계가 개선된 소련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프랑스와의 화해를 통해 라인란트 주둔 프랑스군의 철수와 전쟁 배상금 삭감을 이끌어내려 했다. 이를 통해 독일의 평등한 권리를 확보하고 유럽 내에서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에는 단치히, 폴란드 회랑, 상슐레지엔 등 동부 영토의 회복과 오스트리아와의 합병 같은 수정주의적 측면도 포함되어 있어, 이는 당시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소련 간의 긴장을 이용하는 등 현실주의적이고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외교를 펼쳤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여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도스안 (1924년):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이 계획은 독일의 배상금 지불 부담을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라이히스마르크 도입 등 독일 재정 개혁과 초인플레이션 극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슈트레제만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과 협력하여 히알마르 샤흐트를 국립은행 총재로 임명했고, 샤흐트는 도스안을 성공적으로 시행하며 통화 안정에 기여했다. 이는 독일 경제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며 슈트레제만의 외교 전략에 힘을 실어주었다.
로카르노 조약 (1925년):1925년 로카르노 조약의 독일 대표단. 가운데가 슈트레제만.슈트레제만은 영국 외무장관 오스틴 체임벌린, 프랑스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과 협상하여 이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은 프랑스 및 벨기에와의 서부 국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무력 사용 포기를 약속했으며, 라인란트 비무장화를 재확인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 국경선의 보증국이 되었다. 이는 독일이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중요한 단계였으며, 슈트레제만은 이 공로로 1926년 브리앙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슈트레제만은 폴란드와의 동부 국경에 대해서는 유사한 보장을 거부하며 "동방의 로카르노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신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분쟁 발생 시 중재를 통해 해결한다는 별도의 협정을 맺었다.
국제연맹 가입 (1926년): 로카르노 조약 체결 이후 독일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보했다. 슈트레제만은 이를 통해 독일이 국제 문제에서 발언권을 높이고, 베르사유 조약 개정 등 자국의 이익을 관철할 기회로 삼고자 했다.
베를린 조약 (1926년): 소련과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체결된 이 조약은 기존의 라팔로 조약을 재확인하고, 제3국으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상호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이는 서방과의 화해 정책 속에서도 소련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슈트레제만의 균형 외교를 보여준다.
켈로그-브리앙 조약 (1928년): 전쟁을 국제 분쟁 해결 수단으로 포기할 것을 선언한 이 조약에 독일도 서명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이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라는 인식을 국제 사회에 심어주었다.
영 플랜 (1929년):1929년 헤이그에서 촬영된 슈트레제만(오토크롬 사진)미국과의 긴밀한 경제 관계를 바탕으로 추진된 이 계획은 독일의 배상금 총액을 다시 한번 감축하고 지불 기한을 연장했다. 슈트레제만은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배상금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허버트 후버 당시 미국 상무장관(이후 대통령)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슈트레제만 사후 대공황의 여파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슈트레제만은 외교 무대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국내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의 화해 정책은 보수 및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베르사유 조약 체제를 인정하는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Erfüllungspolitiker|에어퓔룽스폴리티커de("이행 정책가")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특히 자신이 속한 독일 인민당(DVP) 내 우파 세력의 반발에 맞서야 했다. 그는 언론을 활용하여 자신의 정책을 홍보하려 했으나, 때로는 과도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그는 폴란드에 할양된 과거 독일 영토(대 폴란드, 실레지아, 폴란드 회랑)의 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1925년 독일-폴란드 관세 전쟁을 시작하는 등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그는 폴란드의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어 영토 문제에서 양보를 받아낼 수 있기를 기대했으며, 국제 사회의 폴란드 지원 움직임에도 반대했다.
1929년 9월, 사망 직전 카를스바트에서 아내 케테, 아들 볼프강과 함께한 슈트레제만
초기에는 군주제 지지자였으나,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며 점차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Vernunftrepublikaner|페어눈프트레푸블리카너de (이성적 공화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불안정한 공화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말년에는 건강 악화와 더불어 나치당 등 극우 세력의 부상, 자신이 속한 DVP의 우경화, 영 플랜에 대한 국내 불만 등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슈트레제만은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29년 10월 3일, 영 플랜이 의회에서 통과된 지 불과 몇 시간 후, 슈트레제만은 연이은 뇌졸중 발작으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안정과 국제 협력 시대에 큰 손실로 여겨졌다. 그의 묘소는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루이젠슈타트 묘지에 있으며, 조각가 후고 레데러가 제작한 묘비가 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장례 행렬
3. 평가와 비판
6년간의 외무장관 재임 기간 동안 쌓은 국제적 명성을 바탕으로, 슈트레제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유지하고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국내의 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를 진정한 정치가로 예우하여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슈트레제만의 정치 인생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이행하는 시대적 불확실성을 반영하기도 했다. 그는 당내 지도력 유지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정당인 독일 인민당을 바이마르 체제에 완전히 통합시키지 못했으며, 스스로 언급했듯 '옛 독일과 새로운 독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국가 현실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평화주의적 체념 정책'에 반대했던 그는 본질적으로 유럽 통합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다만 베르사유 조약을 수정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실용적인 입장을 취했다.
슈트레제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초기에는 통합 유럽의 선구자로 여겨져 영웅시되었으나, 1950년대 이후 그의 방대한 기록물이 공개되고 분석되면서 비판적인 시각이 대두되었다. 특히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그를 민족주의적 열망과 개인적 야망을 시대 상황에 맞춰 교묘하게 조화시킨 기회주의적 정치가로 묘사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부족, 술책 구사, 변덕스러운 성격, 전통에 대한 집착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그를 독점자본주의의 대변인이자 히틀러의 길을 닦은 인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를 독일의 국부와 권력 회복, 전통적인 사회·경제 질서 유지를 추구하면서도 정치적 수단 선택에는 유연성을 보인 '실용주의적 보수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유럽의 관점에서 그를 독일의 '애국자'로 평가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과거의 적국이었던 영국, 프랑스와의 화해를 이끌어냈지만, 그 기저에는 베르사유 조약 개정, 오스트리아 병합을 포함한 독일 동부 국경 재검토 등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목표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그는 폴란드와의 영토 문제에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으며, 배상금 이행 정책이나 로카르노 조약, 국제 연맹 가입과 같은 협조 외교 역시 궁극적으로는 조약 개정이라는 독일의 국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독일 애국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22]
결론적으로 슈트레제만은 다양한 정치적 면모와 변화를 보였지만, 격동의 시대 속에서 독일의 국익을 추구하며 외교 무대에서 활약한 중요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3. 1. 건강 악화와 죽음
슈트레제만의 장례식 행렬
1928년 독일 연방 선거 이후 SPD의 부상 속에서 슈트레제만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외무 장관직을 유지하며 헤르만 뮐러 총리가 이끄는 대연정 정부 구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이 과정에서 심신이 크게 쇠약해졌다. 외무 장관으로서의 과중한 업무 역시 그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악화시키는 요인이었다. 192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도 그의 건강은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다.
동시에 슈트레제만이 추진했던 대서양주의 외교 정책도 난관에 부딪혔다. 영 플랜은 기대했던 만큼 배상금 부담을 줄이지 못했고, 연합국의 대미 전쟁 부채와 독일의 배상금 지급 사이의 연계를 확립하는 데도 실패했다. 허버트 후버가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허버트 후버 행정부는 스무트-호울리 관세법을 통해 보호 무역 정책을 강화하며 독일로 유입되던 미국의 신용을 감소시켰다.
영 플랜에 대한 국내의 불만은 나치당과 같은 극우 세력의 성장을 부추겼고, 슈트레제만은 자신이 속한 독일 인민당(DVP) 내 우익 세력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악화되는 대서양 관계 속에서 그는 영국 및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으며, 1929년에는 미국에 맞설 정치적, 경제적 균형추로서 유럽 통합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노력을 더 진전시키지 못한 채, 슈트레제만은 1929년 10월 3일 연이은 뇌졸중 발작으로 51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은 독일 의회가 영 플랜을 수용하도록 설득한 지 불과 몇 시간 후였다.
슈트레제만의 죽음은 곧이어 닥친 대공황과 맞물려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시대가 끝나고 혼란의 시대로 접어드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의 묘소는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쥐트슈테른에 위치한 루이젠슈타트 묘지에 있으며, 독일 조각가 후고 레데러가 제작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4. 유산
슈트레제만은 아침 예복 대신 짧은 어두운 색의 라운지 슈트 재킷을 입고 그 외에는 남성용 낮 시간 의상으로 모닝 코트를 착용하는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이 스타일은 슈트레제만과 너무나 동일시되어 그러한 의상을 흔히 "슈트레만"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모닝 코트나 프록 코트 대신 집무복으로 디렉터 수트를 도입하여 만년에는 회담 자리에서도 착용했기 때문에, 대륙 유럽에서는 디렉터 수트를 '슈트레제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아들 볼프강 슈트레제만(1904년 – 1998년)은 법률가가 되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배인을 장기간 역임하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의 전성기를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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