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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팔레스타인인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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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7년 팔레스타인인 탈출은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 골란 고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발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이주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최대 24만 5천 명이 요르단으로, 1만 1천 명이 이집트로, 11만 6천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시리아인이 시리아로 피난했으며, 많은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되고 난민촌이 비워졌다. 유엔은 이스라엘의 정책이 점령지 주민의 귀환을 막고 강제 이주를 유발한다고 결론 내렸으며, 팔레스타인에서는 이 사건을 좌절의 날(욤 안나크사)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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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팔레스타인인 탈출

2. 역사

1967년 탈출한 난민 중 14만 5천 명 가량은 제1차 중동 전쟁 난민이었다.[8] 1967년 12월 기준, 24만 5천 명이 서안 지구가자 지구에서 요르단으로, 1만 1천 명이 가자 지구에서 이집트로, 11만 6천 명과 시리아인 일부가 골란고원에서 시리아로 탈출하였다.[8]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인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영토 내에 살았지만, 이후에는 절반 이상이 위임통치령 바깥에서 살게 되었다.[8]

탈출 기간 동안 임와스, 얄로, 바이트누바 등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는 마을 다수가 불태워졌으며, 아카바트 자베르와 에인 아스술탄 난민촌이 '비워지기'도 하였다.

유엔 특별 위원회는 아랍 마을 400개 이상이 파괴되었다는 주장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인권 침해를 저지르고 있다는 확증은 찾지 못했다. 1971년 유엔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 조사 이전 또는 도중에 얻은 증언에 따라, 특별 위원회는 이스라엘 정부가 점령지를 합병하고 점령지에 정착하려는 궁극적인 목표 하에, 추방 등 직접적인 방법이나 사기 저하시키기, 제안, 또는 다른 유도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서, 점령지 주민의 귀환을 막고 점령지 내 집에 거주하는 사람을 강제로 떠나게끔 하는 정책을 고의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특별 위원회는 이러한 정책을 조장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행위가 위원회의 주목을 끈 제일 심각한 인권 침해라고 본다. 이러한 증거는 1970년의 마지막 특별 위원회 임무 이후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칼킬리야에서는 심리전 부대가 활동하여 거주민 대부분이 집을 떠났으며, 이후 유엔 대리 닐스-괴란 구싱은 마을 주택 2,000채 중 850채가 철거되었다고 기록하였다.

2. 1. 배경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구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78% 지역을 장악했고, 나머지 22%는 요르단이집트가 통치했다.[5]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을 상대로 벌인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불과 6일 만에 나머지 22%의 팔레스타인 지역, 즉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 지구가자 지구,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 고원과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장악했다.[5]

같은 해 12월까지 24만 5천 명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요르단으로 피난했고, 1만 1천 명이 가자 지구에서 이집트로 피난했으며, 11만 6천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Syrians|시리아인영어이 골란 고원에서 시리아로 피난했다.[6] 1967년 이전에는 전체 팔레스타인인의 약 절반이 구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경계 내에 살았지만, 1967년 이후 대다수가 이 지역 밖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6]

1967년 팔레스타인 난민 중 약 14만 5천 명은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 당시의 난민이었다.[6][2]

2. 2. 1967년 팔레스타인인의 탈출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의 결과로 대규모 팔레스타인인 난민이 발생하였다. 1967년 12월 기준, 24만 5천 명이 서안 지구가자 지구에서 요르단으로, 1만 1천 명이 가자 지구에서 이집트로, 11만 6천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일부 시리아인골란고원에서 시리아로 탈출하였다.[8] 이들 중 약 14만 5천 명은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이었다.[8]

1967년 전쟁 이전에는 팔레스타인인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해당하는 영토 내에서 거주하였으나, 전쟁 이후에는 절반 이상이 위임통치령 바깥에서 살게 되었다.[8]

이동 경로난민 수
팔레스타인인서안 지구가자 지구요르단24만 5천 명
가자 지구이집트1만 1천 명
골란고원시리아11만 6천 명



탈출 과정에서 임와스, 얄로, 바이트누바 등 팔레스타인인 거주 마을 다수가 파괴되었고, 난민촌이 비워지기도 하였다. 유엔 특별 위원회는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을 들었으나, 확증을 찾지는 못했다.[8] 그러나 1971년 유엔 위원회는 이스라엘 정부가 점령지 주민의 귀환을 막고, 거주민을 강제로 떠나게 하는 정책을 고의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8]

칼킬리야에서는 심리전 부대의 활동으로 주민 대부분이 집을 떠났고, 마을 주택 2,000채 중 850채가 철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

2. 3.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과 인권 침해 논란

제1차 중동 전쟁 난민 약 14만 5천 명을 포함하여,[8] 1967년 12월 기준 24만 5천 명이 서안 지구가자 지구에서 요르단으로, 1만 1천 명이 가자 지구에서 이집트로, 11만 6천 명과 시리아인 일부가 골란고원에서 시리아로 탈출하였다.[8]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인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영토 내에 살았지만, 이후에는 절반 이상이 위임통치령 바깥에서 살게 되었다.[8]

탈출이 진행되는 동안 임와스, 얄로, 바이트누바, 수리트, 베이트아와, 베이트미르셈, 슈유크, 알지프리크, 아가리스, 후세이라트 등 팔레스타인 마을 다수가 불에 타 파괴되었으며, 아카바트 자베르와 에인 아스술탄 난민촌도 '비워졌다'.

유엔 특별 위원회는 아랍 마을 400개 이상이 파괴되었다는 주장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인권 침해를 저지르고 있다는 확증은 찾지 못했다. 1971년 유엔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 조사 이전 또는 도중에 얻은 증언에 따라, 특별 위원회는 이스라엘 정부가 점령지를 합병하고 점령지에 정착하려는 궁극적인 목표 하에, 추방 등 직접적인 방법이나 사기 저하시키기, 제안, 또는 다른 유도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서, 점령지 주민의 귀환을 막고 점령지 내 집에 거주하는 사람을 강제로 떠나게끔 하는 정책을 고의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특별 위원회는 이러한 정책을 조장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행위가 위원회의 주목을 끈 제일 심각한 인권 침해라고 본다. 이러한 증거는 1970년의 마지막 특별 위원회 임무 이후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칼킬리야에서는 심리전 부대가 활동하여 거주민 대부분이 집을 떠났으며, 이후 유엔 대리 닐스-괴란 구싱은 마을 주택 2,000채 중 850채가 철거되었다고 기록하였다.

3. 기념

팔레스타인에서는 좌절의 날(يوم النكسة|욤 안나크사ar)[9][10]이라고 부르는 기념일을 통해, 1967년 탈출을 매년 추모하고 있다. 나크사 날은 매년 6월 5일에 기념되며, 1967년 강제 이주의 사건을 되새기는 날이다.[7]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ガザ:「ナクサの日」に誓う占領への抵抗 https://mainichi.jp/[...] 2024-06-03
[3] 웹사이트 イスラエル・パレスチナにおける注意喚起、安全対策5/24 https://www.israel.e[...] 외무성 2024-06-03
[4] 서적
[5] 웹사이트 51 years on: How Israel devoured the rest of Palestine https://www.aljazeer[...] 알ジャジーラ 2024-06-02
[6] 서적
[7] 뉴스 Army may prevent June 5 protesters reaching border fence https://web.archive.[...] 2011-05-31
[8] 서적
[9] 웹인용 팔레스타인 좌절의 날(Naksa Day) 소요사태 https://www.mofa.go.[...] 2023-11-11
[10] 뉴스 Army may prevent June 5 protesters reaching border fence https://web.archive.[...] 201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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