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세계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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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3년 세계 박람회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성공 개최 이후 대한민국이 유치하여 대전에서 개최된 국제 행사이다. '새로운 도약에의 길'을 주제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를 목표로 했다. 마스코트는 외계인 '꿈돌이'였으며, 108개국과 33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첨단 기술 전시와 국제관 운영을 통해 정보화 엑스포의 모델을 제시했으나, 태풍과 폭우로 인한 피해, 편의시설 부족, 일부 국제관의 미흡한 준비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 박람회 이후 부지는 엑스포 과학공원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현재는 대전 한밭수목원 등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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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세계 박람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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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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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한국어) | 1993년 세계 박람회 대전 엑스포 '93 |
정식 명칭 (한자) | 1993年 世界 博覽會 大田엑스포 '93 |
정식 명칭 (로마자 표기) | 1993-nyeon Segye Bangnamhoe Daejeon Ekseupo '93 |
다른 이름 (한국어) | 대전 세계 박람회 대전 엑스포 |
영문 명칭 | Daejeon Expo '93 |
박람회 종류 | 인정 박람회 (Specialized Expo) |
주제 | 새로운 도약의 길 |
개최 국가 | 대한민국 |
개최 도시 | 대전 |
개최 장소 | 엑스포과학공원 |
기간 | 1993년 8월 7일 ~ 1993년 11월 7일 |
면적 | 90.1 헥타르 |
마스코트 | 꿈돌이 |
상징물 | 한빛탑 |
참가 규모 | 국가: 108개국 국제 기구: 33개 |
방문객 수 | 14,005,808명 |
이전 박람회 | 제노바 국제 선박 및 해양 박람회 |
이전 박람회 개최 도시 | 제노바 |
다음 박람회 | 리스본 국제 박람회 |
다음 박람회 개최 도시 | 리스본 |
이전 (종합 박람회) | 세비야 만국 박람회 |
이전 (종합 박람회) 개최 도시 | 세비야 |
다음 (종합 박람회) | 하노버 만국 박람회 |
다음 (종합 박람회) 개최 도시 | 하노버 |
유사 박람회 (원예) | 슈투트가르트 국제 원예 박람회 |
공식 웹사이트 | 대전 엑스포 '93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적 배경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행사 개최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박람회 유치를 추진하였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은 세계 박람회 개최 의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을 받기 위한 교섭 활동을 시작했다.[8]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어 국제적인 행사인 대전 엑스포를 개최했다. 당초 1991년 "국제 무역 산업 박람회" 개최를 목표로 했으나, 준비 기간 부족과 재정 부담 문제로 1993년으로 연기되었다. 국제 박람회 기구(BIE)는 1988년 5월 총회에서 1995~2000년 국제 박람회 신청을 동결하는 조약을 채택했는데, 한국은 이 조약의 "인정 박람회" 요소를 반영하여 개최 기간을 3개월로 조정했다. 당시에는 조약 비준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대전 엑스포는 개정 전의 "특별 박람회"로 분류되었다.[8]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1990년 BIE 총회에서 대전 세계박람회 개최가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대전 엑스포는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이 처음 참가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개최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10]
3. 개최 과정
1989년 2월 14일, 한국 정부는 박람회 개최를 최종 결정하고, 3월 6일에 재단법인 국제무역산업박람회 조직위원회(후에 "대전 세계 박람회 조직위원회"로 개칭)를 설립했다. 같은 해 9월 19일, BIE에 개최 신청을 했고, 1990년 6월 14일 BIE 제107차 총회에서 개최 등록이 승인되었다. 1991년 4월 12일에는 행사장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8]
대전 세계 박람회 조직 위원장을 맡은 오명한국어은 체신부 차관(1981~87년)과 장관(1987~88년)을 역임하며 통신 분야 개혁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보도 시스템 구축을 이끈 인물이다. 오명은 대전 엑스포를 통해 첨단 기술 개발 및 습득의 장을 마련하고, 젊은이들에게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다. 또한, 한국 산업 기술의 도약과 경제 활로 개척을 기대했다.[9]
한국은 1893년 시카고 엑스포에 처음 참가한 지 100년 만에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다.[10] 행사장은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위치했는데[11], 이곳은 1974년부터 정비되어 국립 과학 기술 연구 기관, 기업 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12] 한국 정부는 서울 수도권의 과밀화를 해소하고 과학 기술 개발 거점을 마련하고자 대덕연구개발특구를 조성했으며, 국제 과학 기술 박람회와 쓰쿠바 연구 학원 도시를 참고했다.[13]
대전 엑스포에는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한국의 15개 시·도, 8개 공공기관, 18개 한국 기업이 참가했다.[14] 총 입장객 수는 1400만 5808명으로 목표를 크게 초과했으며,[15] 254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16] 대전시 주변 도로, 교통, 통신망 등도 정비되어 약 10년 치의 도시 개발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17]
당시 국제 박람회 조약 개정안 비준 절차가 진행 중이었는데, 대전 엑스포 주최측은 개정 후의 "인정 박람회" 기준에 따라 행사장 면적을 25ha로 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제 전시 구역(24.9ha)과 상설 전시 구역(25.1ha)을 합쳐 50ha였고, 지원 시설 구역(40.1ha)까지 포함하면 총 90ha에 달했다. 일본관 종합 프로듀서였던 히라노 시게토미는 이에 대해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참가국당 전시 면적 상한을 1000㎡로 제한한 것은 인정 엑스포의 원칙을 따른 것이었다. 히라노는 상설 전시 구역에 대형 파빌리온을 출품한 국내 기업들이 박람회 종료 후에도 상설 전시관으로 남게 된 점을 언급하며, 이들이 테마와 관련 없는 대중적인 쇼를 펼쳤다고 평가했다.[18]
행사장 부지는 엑스포 과학공원이 되었다.
3. 1. 유치 노력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직후인 1988년 말부터 박람회 준비를 시작했고,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개최 의지를 발표했다. 국제 박람회 기구(BIE) 공인을 받기 위한 교섭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최 신청 기간(5년)이 촉박했고, 비용 문제로 국제 사회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다. 대한민국 법률 자문 역시 비관적인 의견을 제시했다.[8]
대한민국은 기존 세계 박람회가 부유한 선진국 위주였던 점을 지적하며, 개발도상국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당시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을 위해 교섭 중이었던 점을 내세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BIE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박람회 주제로 채택된 '새로운 도약에의 길'(The Challenge of a New Road to Development|더 챌린지 오브 어 뉴 로드 투 디벨롭먼트영어)은 이러한 점을 반영한 것이다. 1989년 12월 제106차 BIE 총회에서 대한민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조사단 보고서를 토대로 1990년 8월 총회에서 대전 세계박람회 공인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8]
당시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진 대한민국은 전통 문화 파괴, 지역/계층 간 불균형 심화, 환경 오염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한 대전 세계박람회는 자연스럽게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 부제로 채택되었다.
3. 2. 준비 과정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1993년 세계 박람회 개최 의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준비가 시작되었다.[8] 같은 해 3월 6일에는 재단법인 국제무역산업박람회 조직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는 후에 "대전 세계 박람회 조직위원회"로 개칭되었다.[8] 조직위원장은 오명이 맡았는데, 그는 체신부 차관 및 장관을 역임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보도 시스템 구축을 주도한 인물이었다.[9]
1990년 6월 14일,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07차 총회에서 대한민국 대전의 세계 박람회 개최 등록이 승인되었다.[8] 1991년 4월 12일에는 대덕연구개발특구 내에 행사장이 착공되었다.[8]
당시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전통 문화 파괴, 지역 불균형, 환경 오염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전 엑스포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을 부제로 채택하여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대전 엑스포는 당초 "국제 무역 산업 박람회"라는 이름으로 1991년 개최를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짧았고, 재계에서는 재정 부담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었다.[8] 이러한 상황 때문에 개최 연도가 1993년으로 조정되었고, 개최 기간도 3개월로 하는 등, 국제 박람회 조약 개정 후의 "인정 박람회" 요소를 갖춘 계획이 되었다.[8]
4. 주제와 마스코트
1990년 8월 국제 박람회 기구 총회에서 대전 세계박람회를 공인한다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1] 이때 채택된 박람회 주제는 ‘새로운 도약에의 길’(The Challenge of a New Road to Development영어)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의지를 반영했다.[1] 당시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전통 문화가 파괴되고 지역·계층 간 불균형 심화, 환경 오염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2] 대전 세계박람회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하며,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을 목표로 삼았다.[2] 이에 따라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 부제로 채택되었다.[2]
대전 세계 박람회의 공식 마스코트는 외계인을 도안으로 한 꿈돌이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만든 김현이 제작하였다. 꿈돌이는 머리에 파란 별이 달린, 버섯 모양을 한 노란색 외계인 남자아이이다. 원래 팔과 손이 없지만, 홍보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손이 등장한다. TV 애니메이션판 꿈돌이에서는 꿈돌이가 근육질로 변신할 때 팔도 발달한다. 꿈돌이는 알비레오에 있는 가상의 행성 캄피라코별의 캄피라코 왕자이다.[22][23]
꿈돌이의 여자친구는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파란 별이 붙어 있는, 버섯 같은 외형을 한 분홍색 우주 소녀 꿈순이이다. 꿈순이도 본래 팔과 손이 없지만, 홍보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손이 등장한다. 꿈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홍보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24][25][26][27]
MBC 프로덕션(현 MBC C&I)은 1992년 12월 5일부터 1993년 9월 23일까지 대전 엑스포의 공식 마스코트인 꿈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꿈돌이'(Twinkle The Dream Being영어)를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총 26화로 구성되었다. 현재 꿈돌이는 대전광역시의 마스코트이다. 2007년에는 대전광역시의 공식 마스코트인 꿈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 '꿈돌이의 모험'이 제작되었다.
4. 1. 주제
1990년 8월 국제 박람회 기구 총회에서 대전 세계박람회를 공인한다는 결정이 만장일치로 내려졌다.[1] 이때 채택된 박람회 주제는 ‘새로운 도약에의 길’(The Challenge of a New Road to Development영어)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의지를 반영했다.[1]당시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전통 문화가 파괴되고 지역·계층 간 불균형 심화, 환경 오염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2] 대전 세계박람회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조화로운 발전을 강조하며,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을 목표로 삼았다.[2] 이에 따라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 부제로 채택되었다.[2]
1993년 대전 엑스포의 주제는 "새로운 발전의 길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지속 가능하고 친환경적인 개발을 중심으로 다양한 하위 주제가 다루어졌다.[7]
- 메인 테마: "새로운 도약의 길(The Challenge of a New Road to Development)"[7]
- 서브 테마:[7]
- *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Traditional and Modern Science and Technology for the Developing World)"
- *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Towards an Improved Use and Recycling of Resources)"
4. 2. 마스코트
대전 세계 박람회의 공식 마스코트는 외계인을 도안으로 한 꿈돌이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만든 김현이 제작하였다. 꿈돌이는 머리에 파란 별이 달린, 버섯 모양을 한 노란색 외계인 남자아이이다. 원래 팔과 손이 없지만, 홍보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손이 등장한다. TV 애니메이션판 꿈돌이에서는 꿈돌이가 근육질로 변신할 때 팔도 발달한다. 꿈돌이는 알비레오에 있는 가상의 행성 캄피라코별의 캄피라코 왕자이다.[22][23]
꿈돌이의 여자친구는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고 파란 별이 붙어 있는, 버섯 같은 외형을 한 분홍색 우주 소녀 꿈순이이다. 꿈순이도 본래 팔과 손이 없지만, 홍보 애니메이션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손이 등장한다.
꿈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홍보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24][25][26][27]
MBC 프로덕션(현 MBC C&I)은 1992년 12월 5일부터 1993년 9월 23일까지 대전 엑스포의 공식 마스코트인 꿈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꿈돌이'(Twinkle The Dream Being영어)를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총 26화로 구성되었다.
현재 꿈돌이는 대전광역시의 마스코트이다. 2007년에는 대전광역시의 공식 마스코트인 꿈돌이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 '꿈돌이의 모험'이 제작되었다.
5. 전시장 구성
대전 세계박람회 전시장은 크게 상설전시구역과 국제전시구역으로 나뉘었다. 상설전시구역은 대한민국 국내 기업들이 건설하여 박람회 폐막 후에도 과학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영구적인 시설물로 계획되었다. 반면 국제전시구역은 박람회 폐막 후 철거되어 컨벤션센터 등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다.[2]
주요 전시관은 다음과 같다.
전시관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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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관 | 철거, 부지에는 야영장 위치 |
자동차관 | 철거, 부지에는 대전교통문화센터 위치 |
자원활용관 | 현 에너지관, 전기에너지관 건물로 이전 준비 중 |
자기부상열차관 | 철거 |
이매지네이션관 | 현 돔영상관, 철거 |
테크노피아관 | 현 시뮬레이션관, 철거 |
정부관 | 현 첨단과학관 |
번영관 | 대전무역전시관으로 개축 |
한빛탑 | 영구 보존 |
꿈돌이동산 | 현 꿈돌이랜드, 철거 |
전기에너지관 | 운영 중단 |
소재관 | 현 과학문화체험관, 철거 |
대전관, 재활용온실 | 철거, 부지에는 대전교통문화센터 위치 |
도약관, 롯데 환타지월드관, 미래항공관, 시도관, 우주탐험관, 인간과 과학관, 자연생명관, 재생조형관, 조폐문화관, 주거환경관, 지구관, 한국 IBM관, 한국후지쯔관 | 철거 |
국제전시구역은 대부분 조립식 건물이었고, 108개국과 33개 국제기구가 참여했다.[2] 기업 구역은 한국 기업들의 기술력을 선보이는 곳으로, 삼성의 "스타퀘스트", 대우의 3차원 IMAX 프레젠테이션, 대한항공이 후원하고 밥 로저스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360도 9개 스크린 영상 등이 있었다.[3]
꿈돌이를 마스코트로 한 꿈돌이랜드 놀이공원도 있었다. 박람회 중심에는 한국 전통 천문대를 본뜬 93미터 높이의 한빛탑이 있어, 관람객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서 박람회장 전체를 볼 수 있었다.
6. 주요 전시 내용 및 기술
대전 세계박람회는 세계 박람회 사상 가장 뛰어난 정보화 엑스포로 평가받았다. 당시 행사장은 첨단 과학행사에 걸맞게 회장 운영, 전시관 및 행사 안내, 교통 숙박 정보, 입장 관리, 교통 상황 등을 컴퓨터 시스템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조직위원회는 엑스포 전 기간에 걸쳐 이러한 첨단 시스템을 활용해 전시관 예약, 안내에서부터 미아 찾기에 이르기까지 참가자와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엑스포 전산 시스템 '모아드림'은 엑스포의 신경망 역할을 담당했다. 이에 힘입어 대전엑스포는 상황관리 전산 시스템과 유선 텔레비전을 설치해 혼잡한 상황에서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위기 관리를 할 수 있었다.[2]
6. 1. 첨단 과학 기술 전시
대전 세계박람회는 다양한 체험 전시관을 통해 국민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가까운 미래에 사용될 첨단 기술 제품을 미리 경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전시물을 단순히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기기를 다루고 실습하며 원리와 작동법을 이해하도록 했고,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 시스템을 직접 체험하는 등 최첨단 과학교육의 장으로 기능했다.[2]자기부상열차, 전기 자동차, 태양전지 자동차, 태양전지 거북선 등 소음과 공해가 없고 교통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첨단 미래 교통수단은 우리 자체 과학기술로 개발되어 차세대 교통수단의 청사진을 제시했다.[2]
기업 구역은 한국 기업들이 엑스포의 주제에 맞춰 웅장한 건축물과 콘텐츠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의 파빌리온은 영구적인 형태로 지어졌다. 삼성의 "스타퀘스트", 대우가 제공하는 3차원 IMAX 프레젠테이션, 대한항공이 후원한 파빌리온에서는 수상 경력이 있는 경험 디자이너 밥 로저스 (디자이너)와 디자인팀 BRC 이매지네이션 아트 및 아이웍스 엔터테인먼트(심엑스-아이웍스)가 전 세계의 펜팔로부터 마법의 서클비전 엽서를 받는 한국 소녀의 360도 9개 스크린 여행기를 제작했다.[3]
6. 2. 국제관 전시
대전 엑스포에는 108개국과 33개의 국제기구가 참가하여 각국의 문화와 기술을 소개했다.[2] 일본관은 '공생의 시대를 열다 - 사람, 자연, 기술의 공존을 목표로'라는 테마로 전시를 구성했다.7. 의의 및 성과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대한민국은 1993년 대전에서 세계 박람회(EXPO)를 개최하며 개발도상국 최초로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엑스포를 개최하는 기록을 세웠다.[36] 이는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참가한 지 100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였다.[10]
대전 엑스포는 선진국 중심의 엑스포에서 벗어나 개발도상국의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하며 '새로운 도약에의 길'이라는 주제를 통해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의지를 고취하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협력을 증진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대전 엑스포는 중규모 전문 박람회(인정 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 가능성을 제시했다. 전시 기간과 면적을 제한하여 참가국들의 비용 부담을 줄이고, 창의성에 중점을 둔 엑스포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국제박람회기구 의장 테드 앨런은 "한국은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경제 발전 정도가 유사한 국가들 대역에서 앞서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게 됐다"고 평가했다.
대전 엑스포는 과학기술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다양한 체험 전시관을 통해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자기부상열차, 전기 자동차, 태양전지 자동차 등 첨단 기술을 선보이며 미래 사회의 모습을 제시했다.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개최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대전 엑스포는 지방 분산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대전 지역 경제 활성화와 도시 기반 시설 확충에 크게 기여했다.
대전 엑스포는 정보화 엑스포로서의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첨단 전산 시스템 '모아드림'을 구축하여 전시관 예약, 안내, 미아 찾기 등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상황관리 전산 시스템과 유선 텔레비전을 통해 위기 관리 능력을 향상시켰다.
총 1,4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유치하고 254억 원의 흑자를 달성한 대전 엑스포는[15][16]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36] 괸츠 아르파드 헝가리 대통령 등이 방문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다.
8. 문제점 및 비판
개최 기간 동안 큰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치러졌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 개최 첫날 태풍 로빈의 영향과 대전 및 충남 지역에 내린 폭우로 인해 엑스포 전시관과 사무실 일부가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40]
- 전시장 곳곳에서 침수 사태가 벌어져 관람객들이 피해를 입었다.
- 당시 엑스포 회장 안을 운행하던 모노레일(현재 철거)이 도중에 고장으로 운행이 중단되어 관람객들이 고립되는 사고도 발생했다.
- 박람회장 내에서 하루 평균 50~70톤, 많을 때는 하루 100톤 이상의 쓰레기가 발생했다.[40]
- 엑스포 도우미 및 자원봉사자들이 집단 식중독에 걸려 회장 운영에 공백이 우려되기도 했다.
- 엑스포 회장 내 전산 시스템이 오작동되었다.
- 잦은 미아 발생으로 미아 보호소도 연일 혼잡을 빚었다.
- 관람객 수에 비해 편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여 관람객들의 불만을 샀다.
- 일부 국제관 (콜롬비아, 루마니아 등)은 개장 이후에도 공사가 계속되다가 뒤늦게 개관하는 등 준비가 미흡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 독일관에서는 한 독일인이 독일관 관장과 일부 관람객 및 도우미를 인질로 삼아 인질극을 벌이는 비상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41]
관람객들의 인기 전시관 편중 현상도 문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인기 전시관의 경우 암표상이 극성을 부리고 잦은 사고와 고장 등으로 일부 전시관이 임시 휴장하거나 운영을 중단하는 소동이 끊이지 않아, 인기 전시관과 비인기 전시관 간의 불균형은 엑스포의 오점으로 남았다.
또한 당시 일부 관람객들의 무질서하고 얌체 같은 관람 행태도 문제로 지적되어 엑스포 분위기를 망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차 문제에 있어서도 한때 영수증 발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차를 제한했다가 관람객들의 잦은 항의를 받고 현금 징수로 급하게 변경하여 주차를 허용하기도 했다.[41]
9. 엑스포 이후
1993년 세계 박람회 폐막 후, 국내전시구역은 대교그룹이 대주주인 (주)엑스피아월드에 운영권이 넘어가면서 1994년 8월 엑스포 과학공원으로 재개장했다.[37] 그러나 방문객 수 급감으로 인한 경영난으로 엑스포기념재단과 (주)엑스피아월드는 갈등을 겪었고, 1997년 11월 계약이 해지되었다.[38] 이후 대전광역시가 운영권을 넘겨받아 지방공사 엑스포과학공원을 설립, 운영했으나, 경영난은 계속되었다. 2008년 중앙정부의 청산 명령에 따라 2011년 지방공사 엑스포과학공원은 해산되고, 대전마케팅공사가 기능을 흡수하여 운영했으나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39]
한편, 국제전시구역은 개발이 지지부진하다가 2006년 이후 대전광역시와 기업 컨소시엄을 통해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고, 대전MBC가 신축 이전하였다.
현재 구 엑스포 부지에는 엑스포 과학공원이 있으며, 대전 엑스포 타워에서 부지를 조망하거나 대전 엑스포 기념관, 세계 엑스포 기념품 박물관, 대전 통일관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엑스포 공원 일부는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에 사용되고 있으며, 기초과학연구원 본원이 2018년 이전해왔다.[4]
엑스포 당시 사용되었던 주차장은 387000m2 규모의 대전 한밭수목원으로 조성되어, 한국 최대 인공 수목원이 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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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일의 개최기간 동안, 외국인을 포함하여 모두 1,400여만 명이 관람을 했으니까, 하루 10만여 명 정도 관람한다고 쳤을 때 한 사람당 100그램 씩만 치더라도 그 양이 10톤을 훌쩍 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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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 '20년 뉴스' 1993년 대전엑스포 소식 인용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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