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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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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월 소동은 1272년 가마쿠라 막부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몽골의 침략 위협 속에서 호조 도키무네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일어났다. 나고에 도키아키와 노리토키 형제가 살해되고, 전 쇼군 무네타카 친왕 측근이 연금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나고에 가문이 소유했던 슈고직이 아다치 야스모리 등에게 넘어갔다. 2월 소동은 도키무네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몽골에 대한 강경 노선을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사건의 진상과 관련하여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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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소동
사건 개요
발생 시기1936년 2월 26일 ~ 2월 29일
발생 장소일본 도쿄도
원인군부의 정치적 불만, 쇼와 천황 중심의 국가 혁신 시도
주도 세력황도파 청년 장교
주요 관련 인물시모다케 다케지
이소베 아사이치
무토 아키라
쇼와 천황
결과황도파 숙청,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 중일 전쟁 발발의 간접적 원인
배경
정치적 배경만주사변 이후 군부의 정치적 입김 강화
황도파와 통제파 간의 갈등 심화
경제적 배경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인한 사회 불안
전개 과정
2월 26일황도파 장교들이 병력을 이끌고 거사, 주요 정치인 암살 시도, 총리 관저 점거
2월 27일정부는 계엄령 선포, 진압군 투입 결정
2월 28일쇼와 천황의 강경 진압 명령 하달, 투항 권고
2월 29일주모자 대부분 자수, 사건 종결
주요 사건
암살 시도 대상사이토 마코토 (사망)
다카하시 고레키요 (사망)
와타나베 조타로 (사망)
스즈키 간타로 (중상)
결과 및 영향
정치적 결과황도파 숙청 및 통제파의 주도권 강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더욱 확대
쇼와 천황의 권위 강화
사회적 영향군국주의 강화, 국민들의 불안감 증폭
역사적 평가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 중일 전쟁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됨

2. 배경

1268년(분에이 5년) 정월, 고려 사절단이 다자이후(大宰府)에 도착하여 몽골() 쿠빌라이 칸의 국서를 전달했다. 이 국서는 일본에 몽골과의 수교(사실상 복속)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몽골의 일본 침공 위협으로 이어졌다. 같은 해 3월, 가마쿠라 막부는 권력 일원화를 위해 호조 도키무네를 18세의 나이로 8대 싯켄에 임명했다. 도키무네의 이복형 호조 도키스케(北条時輔)는 교토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의 남방(南方)으로 있었는데, 도키스케의 상관이자 도쿠소케(得宗家) 지지자인 호조 도키시게(北条時茂)가 1270년 사망한 후 영향력이 커졌다. 나고에 씨(名越氏)는 호조 씨 일문 내에서 규슈(九州) 지역에 많은 슈고(守護)직을 가진 유력 가문으로, 도쿠소케 다음가는 세력을 갖고 있었고, 특히 나고에 노리토키(名越教時)는 반(反)도쿠소케 성향을 보였다.

3. 경과

1272년(분에이 9년) 2월 7일, 가마쿠라에서 소동이 발생했다. 2월 11일, 나고에 도키아키와 노리토키 형제가 도쿠소의 가신(미우치비토, 御内人)들에게 주살당하고, 전임 쇼군 무네타카 친왕의 측근이 연금되었다. 2월 15일, 교토에서 호조 요시무네가 호조 도키스케를 공격했다.[4]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고, 사건에 연루된 고케닌(御家人)들의 영지가 몰수되었다. 시부카와 요시하루와 세라다 요리우지가 사도로 유배되었으며, 무네타카 친왕은 출가했다.[4]

나고에 도키아키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 도키아키를 죽인 미우치비토 5인은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은 영지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노리토키를 죽인 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4]

이 사건은 싯켄 도키무네와 렌쇼 호조 마사무라의 명으로 "모반"을 일으킨 나고에 형제를 토벌한 것으로 기록되었다.[4]

4. 결과

2월 소동으로 막부 내부의 도쿠소 권력은 강화되었고, 대몽골 강경 정책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다. 몽골의 첩장에 대한 무반첩이라는 막부의 노선은 더욱 굳어졌다.[7]

나고에 가문이 소유했던 규슈 지쿠고, 오스미, 히고의 슈고직은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와 오토모 요리야스(大友頼泰)에게 넘어갔다. 이는 규슈 지역에서 도키무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몽골 침공이 현실화되자 규슈에서 현지 고케닌의 지휘를 맡아 가마쿠라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도 있었던 나고에 가문이 배제되고, 도키무네에 의한 규슈 지역의 이국경고 태세가 강화되었다.

교토에서는 도키스케와 전임 쇼군 무네타카 친왕의 이름을 빌린 반(反)도쿠소 운동이 봉쇄되어 반항 세력이 제거됨으로써, 도쿠소 독재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싯켄 도키무네였고, 도키아키라를 오인 사살한 다섯 명은 고케닌이 아니라 도쿠소가에 피관된 미우치비토들이었다. 요리아이슈(寄合衆) 멤버로 도키무네를 지지하던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와 호조 사네토키(北条実時)의 동향은 명확하지 않지만, 야스모리는 사건 직후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해 초세키(町石)를 고야 산(高野山)에 세웠고, 사네토키의 아들인 호조 아키토키(北条顕時)는 훗날 2월 소동에 대해 "나고에 형제는 실상 아무 죄도 없이 주벌당했다"고 써서 이 사건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키무네와 함께 이 사건의 주체였던 전임 싯켄 마사무라의 의향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렌쇼 마사무라의 이름 아래 나왔던 지시가 싯켄 도키무네에 대해 내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도키무네가 게닌(家人)들의 지지 아래 결단을 행함에 호조 일문의 장로였던 마사무라나 외척인 야스모리 등은 불안감을 품었고, 쇼군가(가마쿠라도노鎌倉殿)의 "분부"(仰せ)를 내세우며 훈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는 이 사건을 "명분 없는 살육에 대한 비판이 일자 당황해서 집안(미우치비토)을 희생시켜서 수습했다"고 보았다. 또한 도키무네는 일문 내부의 숙청으로 정적을 제거했지만, 마사무라, 사네토키, 그리고 동생 무네마사(宗政) 등의 사후에는 일문 내에서 새로운 지지자를 얻지 못하고 몽골 침공이라는 공사다망한 시기에도 고독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정무에 힘썼으며, 그것이 도키무네의 심신을 악화시켜 요절로 이어졌다고 지적하였다.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는 "2월 소동은 이국경고의 인사문제의 막각(幕閣) 불일치로 인해 미우치비토의 주도로 일어났다. 그것이 도키아키라 주살로 해결된 뒤 사태를 역전시키고 미우치비토에게 타격을 입히며 슈고직을 자신을 지지하는 유력 고케닌으로 임명하여 막부 중추 실권을 한층 강화한 것은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로 그 결과 미우치비토와의 대립이 깊어졌다"고 했다.

호소카와 시게오(細川重男)는 2월 소동을 도키무네의 독재정권 확립을 노린 것으로, 이로 인해 도키무네는 자신이 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연출했다고 지적하였다. 무가정권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인 "공포"와 "강제력"이 드러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8]

5. 사건의 진상

이 사건은 싯켄 도키무네가 적극적으로 지휘했으며, 도키아키를 오인 사살한 다섯 명은 고케닌이 아니라 도쿠소가(得宗家)에 소속된 미우치비토들이었다.[1] 요리아이슈(寄合衆)의 일원으로서 도키무네를 지지하던 아다치 야스모리와 호조 사네토키의 동향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와조에 쇼지(川添昭二)는 야스모리가 사건 직후 2월 소동의 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해 고야 산(高野山)에 초세키(町石)를 세웠고, 사네토키의 아들 호조 아키토키는 훗날 2월 소동에 대해 "나고에 형제는 실상 아무 죄도 없이 주벌당했다"라고 기록하여 이 사건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1] 반면, 후쿠시마 긴지(福島金治)는 야스모리가 희생자 위령제에서 올린 공양문에 "한 시대의 현창한 공적"(一代の彰功)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통해 2월 소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2]

도키무네와 함께 이 사건의 주체였던 전임 싯켄 마사무라의 의향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케히 마사히코(筧雅博)는 렌쇼 마사무라의 이름으로 나왔던 "오늘부터 의절된 자에 대해서는 분부를 받은 추토사(追討使)가 이르기 전에 멋대로 나아가는 자에게 중한 죄를 물어 처벌할 것이다. 이 취지를 널리 고케닌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한다"라는 지시가 싯켄(사무라이도코로 벳토) 도키무네에 대해 내려지고 있는 것을 들어, 도키무네가 게닌(家人)들의 지지 아래 결단을 행함에、호조 씨의 장로였던 마사무라나 외척인 야스모리 등은 하나같이 불안감을 품었고 새삼스럽게 쇼군가(가마쿠라도노)의 "분부"(仰せ)를 내세우며 훈계하려 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3]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는 이 사건의 내력을 "명분 없는 살육에 대한 비판이 일자 당황해서 집안(미우치비토)을 희생시켜서 수습했다"고 보고 있다.[4] 또한 도키무네는 일문 내부의 숙청으로 정적을 제거했지만, 마사무라, 사네토키, 동생 무네마사 등의 사후에는 일문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지지자를 얻지 못하고 몽골 침공이라는 공사다망한 시기에도 고독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정무에 힘썼으며 그것이 도키무네의 심신을 악화시켜 그의 요절로 이어졌다고 지적하였다.[4]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는 "2월 소동은 이국경고(異国警固)의 인사 문제를 둘러싼 막부 내의 갈등으로 인해 미우치비토의 주도로 일어났다. 그것이 도키아키 주살로 해결된 뒤 사태를 역전시키고 미우치비토에게 타격을 입히며 슈고직을 자신을 지지하는 유력 고케닌에게 임명하여 막부 중추의 실권을 한층 강화한 것은 아다치 야스모리로, 그 결과 미우치비토와의 대립이 깊어졌다"고 주장했다.[5]

호소카와 시게오(細川重男)는 2월 소동을 도키무네의 독재 정권 확립을 위한 것이었으며, 도키무네가 비정한 지도자임을 연출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무가 정권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공포"와 "강제력"이 드러난 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6]

6. 관련 인물

2월 소동에는 여러 인물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 2월 소동을 주도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독재 권력을 확립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 호조 도키스케(北条時輔): 호조 도키무네의 이복형으로, 로쿠하라 단다이 남방이었다. 2월 소동으로 살해당했다.[8]
  • 나고에 도키아키(名越時章) ・ 나고에 노리토키(名越教時) 형제: 호조 도키요리의 아들들로 반(反) 도쿠소케 경향을 보였다. 2월 소동으로 주살되었다.[8]
  • 호조 마사무라(北条政村): 렌쇼(連署)로 2월 소동 당시 토벌 주체 중 한 명이었으나, 호조 도키무네의 독단적 결정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3]
  •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 유력 고케닌(御家人)으로 호조 도키무네를 지지했다. 2월 소동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다.[1]
  • 호조 사네토키(北条実時): 유력 고케닌으로 호조 도키무네를 지지했으나, 2월 소동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1]


이 외에도, 무라이 쇼스케는 2월 소동을 "명분 없는 살육에 대한 비판이 일자 당황해서 집안(미우치비토)을 희생시켜서 수습했다"고 평가했다.[4] 아미노 요시히코는 아다치 야스모리가 2월 소동 이후 미우치비토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고 보았다.[5]

6. 1. 주요 인물


  •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 8대 싯켄(執権)으로 2월 소동을 주도하여 정적을 제거했다.
  • 호조 도키스케(北条時輔): 도키무네의 이복형으로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남방이었다. 2월 소동으로 제거되었다.
  • 나고에 도키아키(名越時章) ・ 나고에 노리토키(名越教時) 형제: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의 아들들로 반(反) 도쿠소케 경향을 보였다. 2월 소동으로 주살되었다.
  • 호조 마사무라(北条政村): 렌쇼(連署)로 2월 소동 당시 토벌 주체 중 한 명이었으나, 도키무네의 독단적 결정에 불안감을 느꼈다.
  •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 유력 고케닌(御家人)으로 도키무네를 지지했다. 2월 소동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다.
  • 호조 사네토키(北条実時): 유력 고케닌으로 도키무네를 지지했으나, 2월 소동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6. 2. 기타 인물


  •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 1268년 18세의 나이로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싯켄이 되었다. 2월 소동을 주도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독재 권력을 확립했다.[8]
  • 호조 도키스케(北条時輔): 도키무네의 이복형으로, 로쿠하라 단다이 남방으로 있었다. 2월 소동으로 살해당했다.[8]
  • 나고에 도키아키(名越時章): 호조 일문으로, 무네타카 친왕의 측근이었다. 2월 소동으로 동생 노리토키와 함께 살해당했다.[8]
  • 나고에 노리토키(名越教時): 호조 일문으로, 도키아키의 동생이다. 2월 소동으로 형과 함께 살해당했다.[8]
  •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 유력 고케닌으로, 도키무네를 지지했다. 2월 소동 이후 미우치비토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8]
  • 호조 마사무라(北条政村): 전임 싯켄이자 렌쇼로, 2월 소동 당시 도키무네에게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3]
  • 호조 사네토키(北条実時): 도키무네를 지지하는 요리아이슈 멤버였으나, 2월 소동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

참조

[1] 서적 北条時宗 吉川弘文館 2001
[2] 서적 安達泰盛と鎌倉幕府 - 霜月騒動とその周辺 有隣新書 2006
[3] 서적 蒙古襲来と徳政令 講談社文庫 2009
[4] 서적 北条時宗と蒙古襲来 NHK出版 2000
[5] 서적 蒙古襲来 小学館文庫 2001
[6] 서적 北条氏と鎌倉幕府 講談社選書メチエ 2011
[7] 논문 몽골의 고려 · 일본 침공과 해안성곽의 성격에 대한 고찰 2017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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