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노 요시히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의 중세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학자이다. 1928년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했다. 그는 중세 장인, 기예인 등 농민이 아닌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여, 일본 천황 중심의 획일적인 국가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일본 사학에 민속학적 접근과 학제간 연구를 도입했다. 주요 저서로는 《중세 장원의 양상》, 《무연·공계·락》 등이 있으며, 2004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나가와 대학 교수 - 미노베 료키치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인 미노베 료키치는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를 바탕으로 도쿄도지사를 3선 역임하며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으나, 재정 적자와 친북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다. - 가나가와 대학 교수 - 후지시마 아키라
후지시마 아키라는 '혼다-후지시마 효과'를 발견하여 일본 국제상을 수상하고 도쿄 이과대학 학장과 광촉매 국제 연구 센터 센터장을 역임한 일본의 화학자이자 교육자이다. - 민족학 - 민족 형성
민족 형성은 공통된 문화, 역사, 언어, 종교 등을 공유하는 집단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되거나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며, 민족주의 운동, 정치·경제적 요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 민족학 - 중화민족
중화민족은 중국에서 민족 통합과 결속을 위한 이념적 기반으로 활용되지만, 역사 왜곡 및 소수 민족 문제와 관련된 논쟁을 야기하는 개념이다. - 나고야 대학 교수 - 마스카와 도시히데
마스카와 도시히데는 쿼크의 약한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로 200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물리학자이다. - 나고야 대학 교수 - 아카사키 이사무
아카사키 이사무는 고휘도 청색 질화갈륨(GaN) p-n 접합 발광 다이오드를 발명하고, 질화물 반도체 연구를 통해 광전자공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아미노 요시히코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아미노 요시히코 (網野 善彦) |
| 출생일 | 1928년 1월 22일 |
| 출생지 | 일본 야마나시현 |
| 사망일 | 2004년 2월 27일 |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 직업 | 일본 역사학, 민속학 |
| 학력 및 경력 | |
| 출신 학교 | 도쿄대학 |
| 연구 기관 | 나고야대학 가나가와대학 일본상민문화연구소 |
| 개인 정보 | |
| 배우자 | 나카자와 마치코 |
| 자녀 | 아미노 테츠야 아미노 후사코 아미노 아키라 |
| 연구 분야 및 사상 | |
| 연구 분야 | 역사학 (일본 중세사) |
| 주요 개념 | 무연, 이에적 사회-무라적 사회 |
| 영향을 받은 인물 | 이시모다 쇼 미야모토 츠네이치 |
| 영향을 준 인물 | 이토 마사토시 류 케이이치로 미야자키 하야오 |
| 기타 | |
2. 생애
아미노 요시히코는 1928년 야마나시현 히가시야쓰시로 군(지금의 후에후키시)에서 에도 시대부터 지주였던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6] 증조부 아미노젠에몬(網野善右衛門)은 야마나시 중앙은행의 전신인 아미노 은행의 창업자였다.[6] 아버지 아미노 가쓰마루(網野勝丸)는 고후시 시오야마의 히로세 히사마사(広瀬久政)의 차남으로 아미노 가에 양자로 들어왔다.[6]
어릴 적 도쿄시 아자부구 사쿠라다초(현재 도쿄도 미나토구 니시아자부)로 이사했다. 미나토구립 시라카네 소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구제 도쿄고등학교(현 도쿄대학교 교육학부 부속 중등교육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7] 이 무렵 우지에 이치로, 시로즈카 노보루, 마스다 요시로 등과 친구였다.
1947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에 입학, 이시모다 마사시에게 사사했다. 이즈음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산촌작업대의 지휘와 계급투쟁에 의한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 참여했다. 민주주의학생동맹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이 되었으나, 이후 운동에서 떨어져 나왔다.
1950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8] 경제인이자 민속학자인 시부사와 게이조가 주재하는 일본상민문화연구소 쓰키시마 분실에서 근무했다.[9] 1954년 수산청의 예산 삭감 결정으로 동 연구소를 사직하고,[6] 1955년 나가하라 게이지의 주선으로 도쿄 도립 기타조노 고등학교의 비상근 강사(일본사)로 근무했다. 같은 해 5월 일본상민문화연구소 동료였던 나카자와 마치코와 결혼했다.[10] 약혼반지를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하여 커튼 링을 선물했다는 일화가 있다.
1956년 정식 교사가 되어 일본사 수업 외에 사회과학연구회와 부라쿠 해방 연구회 등의 고문을 맡았다. 근무와 병행하여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에 다니며 고문서를 필사했고, 1966년 《중세 장원의 양상》(中世荘園の様相)을 펴냈다.
1967년 나고야 대학 문학부 조교수가 되어 나고야시로 이주했다. 1973년 중세사연구회 발족에 참가했다.
1979년 가나가와 대학이 일본상민문화연구소를 유치하기로 결정하자, 나고야 대학을 사임하고 1980년 가나가와 대학 단기대학부 교수가 되었다. 1993년 가나가와 대학 대학원 역사민속자료학연구과를 설립하고, 1995년부터 동 대학교 경제학부 특임교수가 되어, 1998년 정년퇴직했다.
2000년 미야타 노보루의 장례위원장을 맡았지만, 그 다음 달에 자신이 폐암이라는 것을 알고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2004년 도쿄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 유해는 본인의 유지를 따라 헌체되었다.[6] 사망 당시 르몽드(Le Monde)지에도 기사가 게재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아미노 요시히코는 1928년 야마나시현 히가시야쓰시로 군(지금의 후에후키시)에서 에도 시대부터 지주였던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6] 증조부는 야마나시 중앙은행의 전신인 아미노 은행의 창업자였다.[6] 유년 시절 도쿄시 아자부 구(지금의 도쿄도 미나토구)로 이사하여, 미나토구립 시라카네 소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에 구제 도쿄고등학교(현 도쿄대학교 교육학부 부속 중등교육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7]1947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에 입학하여, 이즈음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민주주의학생동맹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이 되기도 했으나, 이후 운동에서 떨어져 나왔다.
1950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8] 경제인이자 민속학자인 시부사와 게이조의 일본상민문화연구소 츠키시마 분실에 들어갔다.[9] 여기서 나카자와 마치코를 만나 1955년 결혼했다.[10]
1955년 연구소를 나와 나가하라 게이지의 도움으로 도쿄 도립 기타조노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고,[6] 1966년까지 근무했다. 학교에서는 부라쿠 해방 연구회 고문을 맡으면서,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에 다니며 고문서를 필사해 1966년 《중세 장원의 양상》(中世荘園の様相)을 펴냈다.
1967년 도쿄 대학 선배들의 도움으로 나고야 대학 문학부 조교수에 취임했고, 1980년 가나가와 대학 단기대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경제학부 특임교수가 된다. 2004년 도쿄 도의 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2. 2. 학문적 경력
아미노 요시히코는 1928년 야마나시현 히가시야쓰시로 군(지금의 후에후키시)에서 에도 시대부터 지주였던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야마나시 중앙은행의 전신인 아미노 은행의 창업자였다.[6] 어릴 적 도쿄시 아자부 구(지금의 도쿄도 미나토구)로 이사했다.[7] 1947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에 입학하여, 이즈음 일본공산당에 입당, 민주주의학생동맹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나, 이후 운동에서 이탈했다.[8]1950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8] 경제인이자 민속학자인 시부사와 게이조의 일본상민문화연구소 츠키시마 분실에 들어갔다.[9] 1955년 연구소를 나와 나가하라 게이지의 도움으로 도쿄 도립 기타조노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1966년까지 근무했다. 학교에서는 부라쿠 해방 연구회 고문을 맡으며, 도쿄 대학 사료 편찬소에 다니며 고문서를 필사해 1966년 《중세 장원의 양상》(中世荘園の様相)을 펴냈다.
1967년 도쿄 대학 선배들의 도움으로 나고야 대학 문학부 조교수에 취임했고,[6] 1980년 가나가와 대학 단기대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경제학부 특임교수가 되었다. 1998년 정년퇴직했다.[6] 2004년 도쿄 도의 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6]
그는 전후 초기, 도쿄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이시모다 쇼의 지도 아래 마르크스주의 역사서술과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 졸업 후 몇 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56년 나고야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어 대학교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1980년에는 국립대학교의 더욱 명망 있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연구와 출판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가나가와대학교 전문학교 교수 겸 가나가와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2년 설립된 일본 민속 연구소에서 인류학자 미야타 노보루와 함께 학제 간 세미나를 운영했다.
그는 외딴 마을 주민과 도시화되지 않은 일본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엄격한 사료 조사를 통해 학계와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구성한 "일본인"의 이미지와 거의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비농업 농촌 공동체의 관점을 재구성했다. 그는 중세 일본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통합된 단일 국가가 아니라, 예를 들어 일본 천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러 독립적인 사회들의 모자이크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초기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특히 생애 후 30년 동안 메이지 시대 이후 학계와 국민들에게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해 온 일본 역사와 일본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정설을 광범위하게 재검토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니혼진론의 전제와 신화를 해체한 위대한 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2. 3. 말년과 사망
아미노 요시히코는 1928년 야마나시현에서 에도 시대부터 지주였던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6] 증조부는 야마나시 중앙은행의 전신인 아미노 은행의 창업자였다.[6] 유년 시절 도쿄시 미나토구로 이주하여 성장했다.[7] 1947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에 입학하여 일본공산당에 입당, 민주주의학생동맹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을 맡기도 했으나 이후 운동에서 이탈했다.1950년 도쿄 대학 문학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시부사와 게이조의 일본상민문화연구소 분실에 들어갔다.[9] 1955년 연구소를 나와 나가하라 게이지의 도움으로 도쿄 도립 기타조노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6] 1966년까지 근무했다. 1967년 나고야 대학 문학부 조교수를 거쳐, 1980년 가나가와 대학 단기대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경제학부 특임교수가 되었다. 1998년 정년퇴직했다.
2000년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6] 2004년 도쿄도의 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6] 향년 76세. 유해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헌체되었다.[6] 사망 당시 르몽드(Le Monde)지에도 기사가 게재되었다.[6]
3. 주요 연구 및 업적
중세의 장인이나 기예인 등, 농민을 제외한 비정주인(非定住人)의 세계를 밝히고,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농경 국민의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의 모습에 의문과 함께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친 역사에서 백성의 신분에 속한 사람이 반드시 농민 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설에는 비판이 많지만, 일본 사학에 민속학으로의 접근을 시도했다는 사실과, 학제간 연구를 도입한 공적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2007년 5월부터는 《아미노 요시히코 저작집》(網野善彦著作集, 전 18권, 별권 1권)이 이와나미 쇼텐에서 간행이 시작되었다.
전후 역사학을 주도하고 새로운 일본 역사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1]
중세의 장인이나 연예인 등 농민 이외의 비정주민인 유랑민의 세계를 밝히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농민 중심의 균질적인 국가로 여겨져 왔던 종래의 일본상에 의문을 제기하여 일본 중세사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세에서 근세에 걸친 역사적인 농민 신분에 속한 자들이 결코 농민만이 아니라 상업이나 수공업 등 다양한 생업 종사자였다고 주장했다. 그 학설에는 비판도 있다(안라성 성소 등).
일본사학에 민속학적 접근을 시도하여 학제적인 연구방법을 도입했다.
아날학파의 대표적 역사가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프랑스어의 저서와 관련된 『바다에서 본 역사―브로델 「지중해」를 읽는다』를 일본에서 아날학파를 소개한 이인인 니노미야 히로유키(二宮宏之) 등과 함께 저술했다. 단, 아베 킨야(阿部謹也)는 아마노의 방법론과 학설 형성에 아날학파의 영향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평하고 있다.[12]
와타나베 교지(渡辺京二)는 『일본 근세의 기원 전국 난세에서 도쿠가와의 평화로』[13]에서 아마노가 중세사의 사건인 "무연"을 "자유"로 해석할 때 "전후 좌익의 애절한 몽상"이 보인다고 하며, 아마노의 이론 구성 자체도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14]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나 후쿠다 카즈야(福田和也)도 저서에서 아마노의 사론을 비판하고 있으며, 오타니노 아츠시(小谷野敦)는 『일본 매춘사』에서 아마노의 "유녀"상을 비판하고 있다.
마루시마 카즈히로(丸島和洋)는 아마노의 연구에 대해 "전혀 주류가 아니며, 거의 모두 '과장'이라고 부정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15] 아마노의 연구는 아마노의 균형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무비판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하고 있다.[16]
말년에는 야마나시현사 편찬이나 야마나시현립박물관의 구상에도 참여하여 야마나시현사 연구에서는 고대 호족인 미에지(三枝氏)나 군내 지방에서 세력을 가진 가토씨(加藤氏)를 예로 들어, 카이겐지(甲斐源氏)나 다케다씨(武田氏) 중심의 연구에 이의를 제기하고 다케다씨 이외의 씨족 연구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또한 가마쿠라 시대 중기에는 니카이도씨(二階堂氏)가 카이(甲斐) 수호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기존의 다케다씨 평가의 재검토를 시도하고 있다.
3. 1. 중세 사회의 다양성 재조명
중세의 장인, 기예인 등 농민을 제외한 비정주인(非定住人)의 세계를 밝혀,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농경 국민의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백성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 반드시 농민뿐만 아니라 상업, 수공업 종사자였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설에는 비판이 많지만, 일본 사학에 민속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학제간 연구를 도입한 공적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2007년 5월부터 《아미노 요시히코 저작집》(網野善彦著作集, 전 18권, 별권 1권)이 이와나미 쇼텐에서 간행되기 시작했다.
3. 2. '무연(無縁)' 개념과 중세 사회
아미노 요시히코는 중세의 장인이나 기예인 등 농민을 제외한 비정주인(非定住人)의 세계를 밝히고,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농경 국민의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친 역사에서 백성 신분에 속한 사람이 반드시 농민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설에는 비판이 많지만, 일본 사학에 민속학으로의 접근을 시도했다는 사실과, 학제간 연구를 도입한 공적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2007년 5월부터는 《아미노 요시히코 저작집》(網野善彦著作集, 전 18권, 별권 1권)이 이와나미 쇼텐에서 간행이 시작되었다.
3. 3. 민속학과 학제간 연구 도입
아미노 요시히코는 중세의 장인이나 기예인 등 농민을 제외한 비정주인의 세계를 밝히고,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농경 국민의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며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친 역사에서 백성의 신분에 속한 사람이 반드시 농민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실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설에는 비판이 많지만, 일본 사학에 민속학으로의 접근을 시도했다는 사실과, 학제간 연구를 도입한 공적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2007년 5월부터는 《아미노 요시히코 저작집》(網野善彦著作集, 전 18권, 별권 1권)이 이와나미 쇼텐에서 간행이 시작되었다.
3. 4.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
아미노 요시히코는 중세의 장인, 기예인 등 비정주민의 세계를 조명하고,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농경 국민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며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백성의 신분에 속한 사람이 반드시 농민뿐만 아니라 상업, 수공업 종사자였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이러한 연구는 일본 사학에 민속학적 접근과 학제간 연구를 도입한 공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2007년부터는 《아미노 요시히코 저작집》(전 18권, 별권 1권)이 이와나미 쇼텐에서 간행되기 시작했다.
저서 『「日本」とは何か』에서 아미노는 일반적인 일본인의 "고립된 섬나라"라는 일본상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본은 "열도"이자 "아시아 대륙 동쪽 끝의 다리"로서 주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과 물건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이라는 국호가 옛날부터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는 견해를 재검토해야 하며, 실제로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 말, 689년에 시행된 아스카 정원령에 의해 정해졌고, 그때부터 "일본"이 비로소 지구상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일본 국호의 성립 시기는 다른 설도 있다).
아미노는 "일본인"이란 단지 "일본국의 국제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일본 국가의 출발점 이전에는 일본도 일본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즉, 현재 일본국이 지배하는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일본인"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국명과 관련된 서술이 없고, 반대로 "죠몬 시대의 일본", "야요이 시대의 일본인" 등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 각 시대에는 일본도 일본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구석기 시대에 일본인이 있었다"는 신문 기사도 "신대"부터 일본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전전의 사관과 가깝다고 한다.
또한, 성립 당시의 일본 국가는 현재 일본 열도나 일본국의 영역과 같았던 것은 아니며, 자연스럽게 국경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국"이라는 국가는 "침략"과 "정복"으로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누 민족이나 류큐인뿐만 아니라, 일본 국가의 지배자에게 에조도 침략당했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힘에 의한 압복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한편, 심인안(베이징대학교 교수)은 아미노의 주장에 대해, "왜"와 "왜인"이 일본 및 일본인의 고대 호칭이라는 것은 중국 학계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아미노의 논거와 사료 근거가 부족하고 논증 방법에 문제가 많다고 비판했다. 특히, 왜구 문제에 있어 아미노가 왜구를 국가를 초월한 존재로 보고 "왜인"과 "일본인"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왜구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간과하고 구체적인 문제 분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심인안은 전기 왜구의 주력이 일본인이라는 점, 왜구의 기원과 활동 초기가 일본인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왜구"라는 명칭 자체가 이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 문헌의 "왜"는 지명, 종족명, 국가명을 포괄하는 표현이며, "왜국"은 열도가 기본적으로 통일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아미노가 "왜인"의 세력 범위를 좁게 해석하고 조선반도 남부의 왜인 존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심인안은 고대 조선반도 남부에 거주한 것은 한인이며, 열도의 왜인이 철을 얻기 위해 교류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후루타 타케히코는 아미노가 "왜국"과 "일본국"의 국명 변화에 대한 선행 연구를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과의 차이를 논하지 않은 것은 학문적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4. 비판과 논쟁
4. 1. 역사 해석에 대한 비판
4. 2. '일본인' 개념에 대한 논쟁
아미노 요시히코는 저서 『「日本」とは何か』에서 일반적인 일본인의 "고립된 섬나라"라는 일본상(日本像)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일본(日本)은 "열도(列島)"이며 "아시아 대륙 동쪽 끝의 다리"로서 주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과 물건이 끊임없이 열도를 드나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가 옛날부터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는 견해도 재검토해야 하며, 실제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는 7세기 말, 689년에 시행된 아스카 정원령(飛鳥浄御原令)에 의해 정해졌고, 그때부터 "일본(日本)"이 비로소 지구상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일본 국호의 성립 시기는 다른 설도 있다).아미노는 일본인(日本人)이란 단지 "일본국(日本國)의 국제(國制)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일본 국가의 출발점 이전에는 일본도 일본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즉, 현재 일본국이 지배하는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일본인"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국명과 관련된 서술이 없고, 반대로 "죠몬 시대의 일본", "야요이 시대의 일본인" 등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 각 시대에는 일본도 일본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구석기 시대에 일본인이 있었다"는 신문 기사도 나타나 있지만, 이것들은 "신대(神代)"부터 일본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전전(戦前)의 사관(史觀)과 가깝다고 한다.
또한, 성립 당시의 일본 국가, 즉 7세기 말부터 일본 국가가 지배하는 지역이 현재 일본 열도나 일본국의 영역과 같았던 것은 아니며, 자연스럽게 국경(國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국(日本國)"이라는 국가는 "침략(侵略)"과 "정복(征服)"으로 영역을 넓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누 민족(アイヌ民族)이나 류큐인(琉球人)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 국가의 지배자에게 에조(蝦夷)도 침략당했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힘에 의한 압복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베이징 대학(北京大學) 교수 심인안(沈仁安)은 아미노의 주장을 비판한다. 심인안은 "『왜(倭)』『왜인(倭人)』이 일본, 일본인의 고대의 호칭(呼稱)이라는 것은 중국 학계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며, 아미노가 "왜인은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논거가 부족하고, 논증 방법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왜구(倭寇)에 대한 아미노의 해석이 역사적 과정을 감추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심인안은 전기(前期) 왜구의 주력은 일본인(영주·무사·상인)이라는 것은 틀림없고, 후기(後期) 왜구에 다른 나라 사람이 가담해도 주력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왜구의 기원과 활동 초기는 일본인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본 고대의 호칭인 『왜(倭)』寇(구) 명명(命名)"했다고 설명한다.
심인안은 중국 문헌의 "왜(倭)"는 다른 표현이며, "왜(倭)"는 지명, "왜인(倭人)", "왜종(倭種)"은 종족명, "왜국(倭國)"은 지명 및 정치적 실태를 가리키지만, 정치적 실태 "국(國)"은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따라 변화하며, "왜국(倭國)"이라고 불렸던 것은 열도가 기본적으로 통일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미노가 "왜(倭)"의 의미를 지배 영역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는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원래의 "왜인(倭人)"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심인안은 고대 조선반도(朝鮮半島)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한인(韓人)이며, 열도의 왜인은 철을 입수하기 위해 변한(弁韓)을 침범하거나 교류했기 때문에 변한(弁韓)에 왜인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열도의 왜인이 이주했을 뿐이며, 이 경우 "『일본인(日本人)』과 동일시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는 아미노가 "광의(廣義)의 왜인론(倭人論)"의 사료 근거(史료根拠)를 확실한 분석 없이 결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경솔하다고 비판한다.
심인안은 아미노가 "『일본(日本)』의 국호(國號)의 성립 이전의 열도인(列島人)은 모두 일본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성덕태자(聖德太子), 고토쿠 천황(孝徳天皇), 덴지 천황(天智天皇)은 일본인이 아니며, 심한 사례로는 덴무 천황(天武天皇)은 반은 왜인(倭人)·반은 일본인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다고 비판한다. 그는 "역사는 연속성과 계승성이 있으며, 역사가가 주관적 의도에 따라 임의로 역사를 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심인안은 아미노가 방한(訪韓) 시에, 한국인이 "왜구(倭寇)·임진왜란(文禄・慶長の役|壬辰倭乱)·일제 36년(日帝36年)"을 들어 "일본인의 『폭압(暴虐)』"을 비판한 것을 언급하며, 아미노의 견해로 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인이며, 왜인(倭人)이 아니다"가 되며, "『왜(倭)』란"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지만, 아미노는 "임진『왜(倭)』란(壬辰『倭』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는 아미노가 "왜국(倭國)"은 7세기 말까지, "일본국(日本國)"은 8세기 초 이후라는 기본적인 인식에 대해, 7세기 이전에 관련하여 실체적인 역사 인식이 나타나 있지 않고, 결과적으로 "단순한 『명칭 논쟁(名議論)』, 『국명의 바꿔 말하기 논쟁(國名の言い換え論)』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5. 영향과 유산
아미노 요시히코는 신문 및 잡지 인터뷰와 기사, 서평, 대담, 원탁토론 및 기타 출판물부터 수백 편의 독창적인 논문과 20권이 넘는 단행본 또는 에세이 모음집, 역사 및 민족지학적 주제에 대한 여러 권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최소 486편의 저서를 남긴 다작의 역사가였다. 웨슬리언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윌리엄 존스턴은 "아미노의 모든 작품을 소개하려면 아마도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라고 적었다.
존스턴은 동시에 아미노의 방대한 업적과 일본에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은 소수만 영어로 번역되었고, 책은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록 출판되지 않은 책이라도) 그 이유로 아미노의 작품 상당 부분이 중세 일본에 대해 매우 전문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과, 그의 작품이 읽히는 맥락을 언급하였다. 그의 많은 에세이와 단행본은 토지 소유 형태, 조세 형태, 지역 권력 관계, 법전의 변화, 문서의 해독 및 해석과 같은 전문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일본에서조차 전문가만이 그것을 흥미롭게 읽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기 작품 상당수는 일본 독자층의 상당 부분에게 매력적이지만, 일본 외의 일반 독자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특히 일본 민족 기원, 천황, 쌀 재배와 소비, 지리 등에 관한 그의 작품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존스턴은 그의 작품 상당수는 일본 외의 일본 역사 학생과 학자들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번역 부족은 여전히 장애물이라고 언급하였다.
중세사학자 이토 마사토시(伊藤正敏)는 아마노의 "무연" 개념을 발전시켜 중세의 대사찰(사찰 세력)이 조정이나 무가 정권에 대항한 거대한 피난처적 공간이었으며, 또한 "사찰 세력 개념"에 의해 "농업 중심 사관"이 더욱 해체된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시대 소설 분야 일부에도 영향을 미쳐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등은 무대 설정 등에서 아마노의 학설을 폭넓게 도입한 창작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도 「모노노케히메(もののけ姫)」에서 농업 이외를 생업으로 하는 서민을 그리는 데 있어 아마노 사관에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아마노 자신도 "상당히 공부한 뒤에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17] 후에 대담도 나누었고, 작품 속 오류도 지적했다.[18]
5. 1. 학문적 영향
아미노 요시히코는 신문 및 잡지 인터뷰와 기사, 서평, 대담, 원탁토론 및 기타 출판물부터 수백 편의 독창적인 논문과 20권이 넘는 단행본 또는 에세이 모음집, 역사 및 민족지학적 주제에 대한 여러 권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최소 486편의 저서를 남긴 다작의 역사가였다. 웨슬리언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윌리엄 존스턴은 "아미노의 모든 작품을 소개하려면 아마도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라고 적었다.존스턴은 아미노의 방대한 업적과 일본에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은 소수만 영어로 번역되었고, 책은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아미노의 작품 상당 부분이 중세 일본에 대해 매우 전문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과, 그의 작품이 읽히는 맥락을 언급하였다. 그의 많은 에세이와 단행본은 토지 소유 형태, 조세 형태, 지역 권력 관계, 법전의 변화, 문서의 해독 및 해석과 같은 전문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일본에서조차 전문가만이 그것을 흥미롭게 읽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기 작품 상당수는 일본 독자층의 상당 부분에게 매력적이지만, 일본 외의 일반 독자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특히 일본 민족 기원, 천황, 쌀 재배와 소비, 지리 등에 관한 그의 작품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존스턴은 그의 작품 상당수는 일본 외의 일본 역사 학생과 학자들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번역 부족은 여전히 장애물이라고 언급하였다.
중세사학자 이토 마사토시(伊藤正敏)는 아마노의 "무연" 개념을 발전시켜 중세의 대사찰(사찰 세력)이 조정이나 무가 정권에 대항한 거대한 피난처적 공간이었으며, 또한 "사찰 세력 개념"에 의해 "농업 중심 사관"이 더욱 해체된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시대 소설 분야 일부에도 영향을 미쳐 류케이이치로(隆慶一郎) 등은 무대 설정 등에서 아마노의 학설을 폭넓게 도입한 창작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도 「모노노케히메(もののけ姫)」에서 농업 이외를 생업으로 하는 서민을 그리는 데 있어 아마노 사관에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아마노 자신도 "상당히 공부한 뒤에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17] 후에 대담도 나누었고, 작품 속 오류도 지적했다.[18]
5. 2. 대중적 영향
아미노 요시히코는 다작의 역사가로, 신문 및 잡지 인터뷰, 기사, 서평, 대담, 원탁토론, 출판물, 독창적인 논문, 20권이 넘는 단행본 및 에세이 모음집, 역사 및 민족지학적 주제에 대한 여러 권의 시리즈 등 최소 486편의 저서를 남겼다. 웨슬리언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윌리엄 존스턴은 "아미노의 모든 작품을 소개하려면 아마도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존스턴은 아미노의 방대한 업적과 일본 내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은 소수만 영어로 번역되었고, 책은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미노의 작품이 중세 일본에 대해 매우 전문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고, 토지 소유 형태, 조세 형태, 지역 권력 관계, 법전의 변화, 문서의 해독 및 해석과 같은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일본에서조차 전문가만이 흥미롭게 읽는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본 민족 기원, 천황, 쌀 재배와 소비, 지리 등에 관한 후기 작품은 일본 독자층에게는 매력적이지만, 일본 외 일반 독자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의 주요 연구 결과 중 일부는 영어로도 제공된다. 중세사학자 이토 마사토시는 아마노의 "무연" 개념을 발전시켜 중세의 대사찰(사찰 세력)이 조정이나 무가 정권에 대항한 거대한 피난처적 공간이었으며, "사찰 세력 개념"에 의해 "농업 중심 사관"이 더욱 해체된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시대 소설 분야에서 류케이이치로 등은 무대 설정 등에서 아마노의 학설을 폭넓게 도입한 창작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노노케히메에서 농업 이외를 생업으로 하는 서민을 그리는 데 있어 아마노 사관에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미노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 "상당히 공부한 뒤에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17] 이후 대담을 나누었고, 작품 속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18]
6. 수상 경력
- 1989년, 제36회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 미술상 (그림책 『하천변에 생긴 중세의 마을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임』(아미노 요시히코 글, 츠카사 오사무(司修) 그림,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 1989년, 제43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그림책 『박과 용과 뱀 지금은 옛날 옛날은 지금』(아미노 요시히코+오니시 히로시(大西廣)+사타케 아키히로(佐竹昭広)=편집위원, 후쿠인칸 쇼텐(福音館書店)))
- 1992년, 제46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 (비디오북 『대계 일본 역사와 예능 전14권』(아미노 요시히코+오자와 쇼이치(小沢昭一)+하토리 유키오(服部幸雄)+미야타 노보루(宮田登)+오스미 카즈오(大隅和雄)+야마지 코우조(山路興造)=편집위원, 헤이본샤(平凡社)+일본 빅터(日本ビクター)))
7. 저작
7. 1. 단독 저서
아미노 요시히코의 단독 저서는 다음과 같다.- 『중세 장원(荘園)의 양상』(하나와서방(塙書房), 1966년/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 2023년 12월)
- 『일본의 역사 제10권 몽고 습래(蒙古襲来)』(쇼가쿠칸(小学館), 1974년/쇼가쿠칸 라이브러리(小学館ライブラリー)(상·하), 1992년/쇼가쿠칸 문고(小学館文庫), 2001년)
- 『중세 동사(東寺)와 동사령장원(東寺領荘園)』(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1978년)
- 『무연(無縁)·공계(公界)·락(楽)――일본 중세의 자유와 평화』(헤이본샤(平凡社) 선서(選書), 1978년, 증보판 1987년/헤이본샤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1996년)
- 『일본 중세의 민중상――평민과 직인(平民と職人)』(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 황판(黄版), 1980년)
- 『동과 서가 말하는 일본의 역사』(소시에테(そしえて), 1982년/고단샤 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 1998년)
- 『일본 중세의 비농업민과 천황(天皇)』(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4년/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상하), 2024년 2·3월)
- 『중세 재고――열도(列島)의 지역과 사회』(일본에디터스쿨출판부(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 1986년/고단샤 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 2000년)
- 『이형의 왕권(異形の王権)』(헤이본샤(平凡社), 1986년/헤이본샤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1993년)
- 『일본 사회와 천황제(天皇制)』(이와나미 북릿트(岩波ブックレット), 1988년)
- 『일본론의 시좌(視座)――열도(列島)의 사회와 국가』(쇼가쿠칸(小学館), 1990년/쇼가쿠칸 라이브러리(小学館ライブラリー), 1993년)
- 『일본의 역사를 다시 읽는다』(치쿠마쇼보(筑摩書房)(치쿠마 프리머 북스(ちくまプリマーブックス) 정·속), 1991-96년, 단행본(전1권), 2017년/치쿠마가쿠게이문고(ちくま学芸文庫)(전1권), 2005년)
- 『일본 중세 토지 제도사의 연구(日本中世土地制度史の研究)』(하나와서방(塙書房), 1991년)
- 『바다와 열도(列島)의 중세』(일본에디터스쿨출판부(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 1992년/고단샤 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 2003년)
- 『직인가합(職人歌合)』(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92년/헤이본샤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12년)
- 『바다에서 본 일본 역사상――오쿠노토지역(奥能登地域)과 시국가(時國家)를 중심으로』(카와이 북릿트(河合ブックレット), 1994년)
- 『일본 사회 재고――해민(海民)과 열도(列島) 문화』(쇼가쿠칸(小学館), 1994년/치쿠마가쿠게이문고(ちくま学芸文庫), 2017년)
- 『중세의 비인(非人)과 유녀(遊女)』(아키시키쇼텐(明石書店), 1994년/고단샤 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 2005년)
- 『악당(悪党)과 해적(海賊)――일본 중세의 사회와 정치』(호세이다이가쿠슈판쿄쿠(法政大学出版局), 1995년)
- 『일본 중세 도시의 세계(日本中世都市の世界)』(치쿠마쇼보(筑摩書房), 1996년/치쿠마가쿠게이문고(ちくま学芸文庫), 2001년/고단샤 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 2013년)
- 『일본 중세 사료학의 과제――계도(系図)·위문서(偽文書)·문서(文書)』(고분도(弘文堂), 1996년)
- 『중세 세계란 무엇인가』(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아사히선서(朝日選書)], 1996년/아사히문고(朝日文庫), 2014년)
- 『일본 중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도시와 종교와 「자본주의(資本主義)」』(일본에디터스쿨출판부(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 1997년/요센샤(洋泉社) MC신서(MC新書), 2006년, 동·역사신서(歴史新書), 2012년/각가와소피아문고(角川ソフィア文庫), 2017년)
- 『바다의 나라 중세(海の国の中世)』(헤이본샤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1997년)
- 『일본 사회의 역사(日本社会の歴史)』(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 신적판(新赤版)(전3권), 1997년)
- 『일본 중세의 백성과 직능민(百姓と職能民)』(헤이본샤 선서(平凡社選書), 1998년/헤이본샤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3년)
- 『해민(海民)과 일본 사회』(신진물왕래사(新人物往来社), 1998년/신진물문고(新人物文庫), 2009년)
- 『고문서 반환의 여행――전후 사학사의 한 장면(戦後史学史の一齣)』(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츄코신쇼(中公新書)], 1999년)
- 『「일본(日本)」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역사 00(日本の歴史00)』(고단샤(講談社), 2000년/고단샤 학술문고(講談社学術文庫), 2008년)
- 『역사로서의 전후 사학(歴史としての戦後史学)』(일본에디터스쿨출판부(日本エディタースクール出版部), 2000년/요센샤(洋泉社) MC신서(MC新書), 2007년/각가와소피아문고(角川ソフィア文庫), 2018년)
- 『역사와 만난다(歴史と出会う)』(요센샤(洋泉社) 신쇼y(新書y), 2000년)
- 『역사를 생각하는 힌트(歴史を考えるヒント)』(신초샤(新潮社)[신초선서(新潮選書)], 2001년/신초문고(新潮文庫), 2012년)
- 『중세 민중의 생업과 기술(中世民衆の生業と技術)』(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2001년)
- 『미야모토 조이치(宮本常一) 「잊혀진 일본인(忘れられた日本人)」을 읽는다』(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이와나미 세미나 북스(岩波セミナーブックス)], 2003년/이와나미 겐다이문고(岩波現代文庫), 2013년)
- 『카이(甲斐)의 역사를 다시 읽는다』(야마나시닛닛신문샤(山梨日日新聞社), 2003년)
- 『시골의 나라 중세――히타치(常陸)·키타시모츠사(北下総)의 역사 세계』(헤이본샤 라이브러리(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4년)
- 『열도(列島)의 역사를 말한다』(혼노모리(本の森), 2005년/치쿠마가쿠게이문고(ちくま学芸文庫), 2014년), 후지사와·아미노 씨를 둘러싼 모임 편(藤沢・網野さんを囲む会編)
아미노 요시히코는 또한 다음과 같은 학술 논문을 단독 저서로 발표했다.
- "중세 일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구성: '무엔', '쿠가이', 그리고 '라쿠'"(''국제 아시아 연구 저널'' 4(1): 3–14, 2007)
- "중세의 상업과 금융: ‘자본주의’의 시작"(''Acta Asiatica'' 81: 1–19, 2001)
- "황제, 쌀, 그리고 평민들"(Donald Denoon, Mark Hudson, Gavan McCormack, Tessa Morris-Suzuki 편, ''다문화 일본: 구석기 시대부터 포스트모던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1996: 235–245)
- "Les Japonais et la mer" ("일본인과 바다"). ''Annales'' 50(2): 235–258, 1995. (프랑스어)
- "'일본' 해체하기". ''동아시아 역사'' 3: 121–142, 1992. Gavan McCormack 번역
- "중세 일본 민중 생활사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 ''Acta Asiatica'' 44: 77–97, 1983.
7. 2. 공저
阿部謹也・石井進・樺山紘一와 함께 『중세의 풍경』(중앙공론신서(상·하), 1981년)을 썼다. 阿部謹也와 『중세의 재발견――대담 도시·증여·연회』(평범사, 1982년/평범사 라이브러리, 1994년)를 썼다. 石井進・笠松宏至・勝俣鎭夫와 『중세의 죄와 벌』(도쿄대학출판회, 1983년/고단샤 학술문고, 2019년)을 썼다. 上野千鶴子・宮田登와 『일본왕권론』(춘추사, 1988년)을 썼다. 谷川道雄와 『교감하는 중세――일본과 중국』(유니테, 1988년/요젠샤 신서, 2010년)을 썼다. 川村湊와 『열도와 반도의 사회사――새로운 역사상을 구하여』(작품사, 1988년)를 썼다. 森浩一와 『말·배·상민――동서교류의 일본열도사』(카와이 출판, 1992년/고단샤 학술문고, 1999년)를 썼다. 佐藤進一・笠松宏至와 『일본중세사를 재검토하다』(유시사, 1994년/평범사 라이브러리, 1999년)를 썼다. 鶴見俊輔와 『역사 이야기』(아사히신문사, 1994년)를 썼다. 司馬遼太郎와 『동과 서――대담집』(아사히신문사, 1990년/아사히문고, 1995년)을 썼다. 宮田登와 『역사 속에서 말해지지 않았던 것――여자·아이·노인으로부터의 「일본사」』(요젠샤, 1998년)를 썼고, 요젠샤 신서, 아사히 문고에서 재간되었다. 宮田登와 『신과 자본과 여성――일본열도사의 어둠과 빛』(신서관, 1999년)을 썼다. 笠松宏至와 『중세의 재판을 해독하다』(가쿠세이샤, 2000년/吉川弘文館, 「읽어나가는 일본사」 2023년 ISBN 9784642075213)를 썼다. 伊藤雅俊・斎藤善之와 『「장사」에서 본 일본사――시장경제의 급류를 잡다』(PHP연구소, 2000년)를 썼다. 石井進와 『쌀·농민·천황――일본사의 허상의 향방』(다이와서점, 2000년)을 썼다. 森浩一와 『이 나라의 모습을 역사에 읽다』(다이코샤, 2000년)를 썼고, 『이 나라의 모습과 역사』朝日選書, 2005년)로 개제되었다. 田中優子・樺山紘一・成田龍一・三浦雅士・姜尚中・小熊英二와 『「일본」을 둘러싸고――아미노 요시히코 대담집』(고단샤, 2001년)을 썼다. 横井清와 『도시와 직능민의 활동』(중앙공론신사, 2003년)을 썼다. 吉本隆明・川村湊와 『역사로서의 천황제』(작품사, 2005년)를 썼다. 『아미노 요시히코 대담 셀렉션』(야마모토 고우지 편, 이와나미 현대문고(전2권), 2024년)이 있다. 石井進와 『중세 도시와 상인 직인』(메이초 슈판, 1992년)을 썼다. 木下忠・神野善治와 『바다・강・산의 생산과 신앙』(吉川弘文館, 1993년)을 썼다. 川添昭二와 『중세의 어부와 동아시아――무나카타 심포지엄 2』(우미도리샤, 1994년)을 썼다. 石井進와 『신앙과 자유롭게 살다』(新人物往来社, 1995년)를 썼다. 石井進와 『에조의 세계와 북방 교역』(신진부츠오라이샤, 1995년)을 썼다. 石井進와 『일본해 교통의 전개』(신진부츠오라이샤, 1995년)을 썼다. 石井進와 『내해를 활동하는 바다의 민족』(신진부츠오라이샤, 1995년)을 썼다. イマニュエル・ウォーラーステイン 원저・二宮宏之・川勝平太・榊原英資・山内昌之와 『바다에서 본 역사―브로델『지중해』를 읽다』(藤原書店, 1999년)을 썼다. 後藤宗俊・飯沼賢司와 『인간과 환경과 문화유산――21세기에 무엇을 전달할까』(山川出版社, 2000년)을 썼다. 石井進와 『북쪽에서 재검토하는 일본사――카미노쿠니 캇산칸 흔적과 에조왕 산분묘군에서 보이는 것』(야마토 쇼보, 2001년)을 썼다. 樺山紘一・宮田登・安丸良夫・야마모토 코우지(山本幸司)와 岩波講座 천황과 왕권을 생각하다』(이와나미 쇼텐(전 10권), 2002년-2003년)을 썼다.7. 3. 편저
- 職人と芸能일본어 (요시카와코분칸한국어, 1994년)
- 역사 日本の名随筆일본어 별권 99 (사쿠힌샤한국어, 1999년)
- 2007: "중세 일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구성: '무엔', '쿠가이', 그리고 '라쿠'". ''국제 아시아 연구 저널'' 4(1): 3–14.
- 2001: "중세의 상업과 금융: ‘자본주의’의 시작". ''Acta Asiatica'' 81: 1–19.
- 1996: "황제, 쌀, 그리고 평민들". Donald Denoon, Mark Hudson, Gavan McCormack, Tessa Morris-Suzuki 편, ''다문화 일본: 구석기 시대부터 포스트모던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1996: 235–245.
- 1995: "Les Japonais et la mer" ("일본인과 바다"). ''Annales'' 50(2): 235–258. (프랑스어)
- 1992: "'일본' 해체하기". ''동아시아 역사'' 3: 121–142. Gavan McCormack 번역, [http://www.eastasianhistory.net/sites/default/files/article-content/03/EAH03_05.pdf pdf 제공]
- 1983: "중세 일본 민중 생활사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 ''Acta Asiatica'' 44: 77–97.
7. 4. 저작집
아미노 요시히코의 저작은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에서 전18권 및 별권으로 구성된 『아미노 요시히코 저작집』(2007-2009)으로 출판되었다. 편집위원은 이나바 노부미치(稲葉伸道), 사쿠라이 에이지(桜井英治), 모리모토 마사히로(盛本昌広), 야마모토 코우지(山本幸司)이다.저작집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권 | 제목 |
|---|---|
| 1 | 중세 쇼엔의 양상 |
| 2 | 중세 도지(東寺)와 도지령 쇼엔 |
| 3 | 쇼엔 공령제의 구조 |
| 4 | 쇼엔·공령의 지역 전개 |
| 5 | 몽골 침입 |
| 6 | 전환기로서의 가마쿠라 말기·남북조 시대 |
| 7 | 중세의 비농업민과 천황 |
| 8 | 중세의 민중상 |
| 9 | 중세의 생업과 유통 |
| 10 | 해민의 사회 |
| 11 | 예능·신분·여성 |
| 12 | 무연·공계·락 |
| 13 | 중세 도시론 |
| 14 | 중세 사료학의 과제 |
| 15 | 열도 사회의 다양성 |
| 16 | 일본 사회의 역사 |
| 17 | <일본>론 |
| 18 | 역사로서의 전후 사학 |
| 별권 | 색인 외 (2009년 12월) |
이 외에도, 아미노 요시히코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을 발표했다.
- 2007: "중세 일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구성: '무엔', '쿠가이', 그리고 '라쿠'". ''국제 아시아 연구 저널'' 4(1): 3–14.
- 2001: "중세의 상업과 금융: ‘자본주의’의 시작". ''Acta Asiatica'' 81: 1–19.
- 1996: "황제, 쌀, 그리고 평민들". Donald Denoon, Mark Hudson, Gavan McCormack, Tessa Morris-Suzuki 편, ''다문화 일본: 구석기 시대부터 포스트모던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1996: 235–245.
- 1995: "일본인과 바다/Les Japonais et la mer프랑스어". ''Annales'' 50(2): 235–258.
- 1992: "'일본' 해체하기". ''동아시아 역사'' 3: 121–142. Gavan McCormack 번역, [http://www.eastasianhistory.net/sites/default/files/article-content/03/EAH03_05.pdf pdf 제공]
- 1983: "중세 일본 민중 생활사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 ''Acta Asiatica'' 44: 77–97.
참조
[1]
웹사이트
From Feudal Fishing Villagers to an Archipelago's Peoples: The Historiographical Journey of Amino Yoshihiko
http://rijs.fas.harv[...]
2014-06-08
[2]
논문
Foreword to 'Medieval Japanese Constructions of Peace and Liberty: ''Muen'', ''Kugai'', and ''Raku''
2007
[3]
뉴스
Yoshihiko Amino
http://www.lemonde.f[...]
2004-03-04
[4]
서적
Rethinking Japanese History
Center for Japanese Studies, University of Michigan
2012
[5]
harvnb
2004
[6]
harvnb
2009
[7]
간행물
『官報』第3988号
https://dl.ndl.go.jp[...]
1940-04-24
[8]
서적
東京大學卒業生氏名録
東京大學
1950-11-10
[9]
harvnb
2007
[10]
문서
중자와 가문과 아미노의 지적 교류에 관한 설명
[11]
뉴스
「日本」とは何か、問い続けた網野善彦 没後20年に読み直す意義
https://www.asahi.co[...]
2024-04-11
[12]
서적
阿部謹也自伝
新潮社
[13]
서적
弓立社, 洋泉社
2004, 2008
[14]
문서
동 제6장 「중세의 자유란 무엇인가」
[15]
웹사이트
丸島和洋 on Twitter: "いや、逆です。まったく主流ではなく、ほとんどが「いきすぎ」と否定されています。「一世を風靡『した』」と過去形で書いたつもりです。"
https://twitter.com/[...]
2016-11-16
[16]
웹사이트
丸島和洋 on Twitter: "いわゆる「網野史学」が一世を風靡したことは記憶に新しく、僕が大学生の頃は大学生協に専用のコーナーがあったほど。しかしあれは網野さんが若狭太良庄における実証研究の蓄積の末に辿り着いたものだから、網野さんなりのバランスが辛うじてあったもので、それを無批判に継承するのは極めて危険。"
https://twitter.com/[...]
2016-11-17
[17]
서적
「忘れられた日本人」を読む
岩波書店
2003
[18]
문서
『折り返し点』(網野と梅原猛による対談、京都精華大学)
[19]
간행물
『人事興信録』第4版
http://jahis.law.nag[...]
1915-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