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경고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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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국경고번역은 1272년 원나라의 일본 침략에 대비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규슈 지역 방어를 위해 부과한 군역이다. 처음에는 규슈 지역 고케닌에게 부과되었으나, 1281년 고안의 역 이후 비고케닌에게도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규슈에 정착하는 고케닌이 생기는 등 사회적 변화가 발생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시도가 중단된 후에도 이 군역은 지속되었으며,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하카타 경고번역으로 이어졌다. 후쿠오카시의 게고 정은 이 군역에서 유래했다.
1272년 조양필(趙良弼)이 이끄는 원나라 사신단이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입국을 거부당하고 고려로 돌아간 사건은 가마쿠라 막부가 이국경고번역을 설치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막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규슈 지역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2]
1272년(분에이 9년) 일본의 초유를 위해 파견되었던 원의 사신 조양필이 다자이후에서 입국이 막힌 채 고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개월 뒤, 막부는 규슈 연안에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했다.
2. 설치 배경
막부는 분에이(文永) 9년(1272년) 2월부터 규슈 연안에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하고, 규슈에 영지를 가진 도고쿠 무사들에게 규슈로 올 것을 명해서 지쿠젠(筑前) · 히젠(備前) 연안 방비에 나섰다.
2. 1. 원나라의 일본 원정과 고려의 역할
1272년 원나라의 사신 조양필이 다자이후에서 입국이 막힌 채 고려로 돌아갔다. 이후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으나, 태풍(가미카제, 神風)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원나라의 일본 원정 논의는 완전히 사라졌다.[2]
원나라의 일본 원정 실패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규슈를 중심으로 이국경고번역이라는 군역이 지속되었다. 규슈 고토 열도의 나카도오리지마 사람 우시로이오 고카쿠는 1280년부터 1302년까지 12차례나 이국경고번역에 참가하였다. 이처럼 규슈와 여타 지역 무사들은 계속해서 군역을 졌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는 1276년부터 원나라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에 쌓았던 원구방루를 보수하는 것이었다.[2]
2. 2. 가마쿠라 막부의 대응
1272년 조양필(趙良弼)이 이끄는 원나라 사신단이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입국을 거부당하고 고려로 돌아간 것을 계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규슈 지역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 막부는 규슈 지역 고케닌들에게 이국경고번역을 부과하고, 원나라의 침입 예상 지역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였다.[2]
이국경고번역은 슈고(守護)를 따라 일정 기간(4개 번으로 편성되어 3개월씩 순번제로 근무) 하카타 만(博多湾) 등 원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안을 경비하는 군역이었다. 본래 규슈에 영지를 가진 고케닌들이 담당했으나, 1281년 원의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을 거치면서 도고쿠(東国) ・ 사이고쿠(西国)를 불문하고 공령(公領)이나 지샤(寺社)의 본소령(本所領) 장관(荘官) 등 가마쿠라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지지 않은 비고케닌들에게도 부과되었다.
이국경고번역은 교토(京都)나 가마쿠라(鎌倉)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를 면제받았지만, 고케닌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이국경고번역이 장기화되면서 규슈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되 본거지는 규슈 바깥 지방에 있는 고케닌 가운데는 이국경고번역을 맡아서 왔다가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아, 본국 또는 규슈에 있던 서류(庶流)가 독립하거나 본국측과 규슈측으로 집안이 분열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즈사 지바 씨(下総千葉氏)와 규슈 지바 씨(九州千葉氏)가 그러한 예이다.[2]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원의 일본 원정 논의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규슈 고토 열도의 나카도오리지마(中通島) 사람 우시로이오 고카쿠(白魚行覺)가 1280년부터 1302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이국경고번역에 참가하는 등 규슈와 여타 지역 무사들은 지속적으로 이국경고번역이라는 군역을 졌다. 이국경고번역으로 동원되는 무사들에게 주어진 임무 가운데 하나는 1276년부터 원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에 쌓았던 원구방루(元寇防壘)를 규슈 북부 해안뿐만 아니라 도서 지역의 섬으로까지 연장, 또는 기존의 석축을 부분적으로 수리하는 것이었다.[2]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뒤 무로마치 막부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 아래서 하카타 경고번역(博多警固番役)이 설치되어 1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는데, 이를 이국경고번역의 개칭으로 보는 설과 남조 세력에 대한 대책으로 신설되었다는 설로 나뉜다.[3][1]
후쿠오카시(福岡市) 주오구의 게고 정(警固町)은 이국경고번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3. 전개 과정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원정은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였고 1294년(에이닌 2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원에서 일본 원정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규슈 고토 열도의 나카도오리지마(中通島) 사람 우시로이오 고카쿠가 1280년(고안 3년)부터 1302년(쇼안 4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서 이국경고번역에 참가하는 등 규슈와 여타 지역 무사들은 지속적으로 이국경고번역이라는 군역을 졌다. 이국경고번역으로 동원되는 무사들에게 주어진 임무 가운데 하나는 1276년(겐지 2년) 3월부터 원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에 쌓았던 이른바 원구방루를 규슈 북부 해안뿐만 아니라 도서 지역의 섬으로까지 연장하거나, 기존의 석축을 부분적으로 수리하는 것이었다.[2]
한편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난 뒤에 무로마치 막부의 진제이 단다이 아래 하카타 경고번역(博多警固番役)이 설치되어 중국 대륙에서 원이 북쪽으로 쫓겨난 뒤인 1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는데, 이를 이국경고번역의 개칭(원 ・ 고려에 대비한 것)으로 보는 설과 남조 세력에 대한 대책으로 신설되었다는 설로 양분된다.[3]
일본 후쿠오카시 주오구의 게고 정(警固町)은 이국경고번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3. 1. 초기 이국경고번역
1272년(분에이 9년) 2월부터 막부는 규슈 연안에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하고, 규슈에 영지를 가진 도고쿠 무사들에게 규슈로 올 것을 명해서 지쿠젠(筑前) · 히젠(備前) 연안 방비에 나섰다. 이국경고번역은 슈고(守護)를 따라 일정 기간(4개 번으로 편성되어 3개월씩 순번제로 근무) 하카타 만(博多湾) 등 원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안을 경비하는 군역이었다.[2]
본래는 규슈에 영지를 가진 고케닌들이 그 임무를 맡는 성질의 것이었는데, 훗날 1281년에 있었던 원의 제2차 일본 원정인 고안의 역(弘安の役) 등을 거치면서 도고쿠(東国) ・ 사이고쿠(西国)를 불문하고 공령(公領)이나 지샤(寺社)의 본소령(本所領)의 장관(荘官) 등 가마쿠라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지지 않은 비고케닌들에 대해서도 부과되었다. 1275년(겐지 원년) 원의 사신 두세충 등이 고려를 거쳐서 4월에 일본의 나가토에 도착했을 때 막부는 그들을 간토로 호송한 뒤에 다쓰노구치에서 참수하고 5월에 '이국경고번역'을 하달해 스오와 아키의 고케닌들을 나가토로 집결하게 하였다(나가토경고번역).[2]
이국경고번역은 교토(京都)나 가마쿠라(鎌倉)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를 면제받았지만, 고케닌들에게 있어서 부담의 과중함은 변하지 않았다. 또한 가즈사 지바 씨(下総千葉氏)와 규슈 지바 씨(九州千葉氏)의 경우처럼 이국경고번역의 장기화에 수반하여 규슈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되 본거지는 규슈 바깥 지방에 있는 고케닌 가운데는 이국경고번역을 맡아서 왔다가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아서 본국 또는 규슈에 있던 서류(庶流)의 독립이나 본국측과 규슈측으로 집안이 분열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2]
3. 2. 이국경고번역의 확대
1281년 원나라의 제2차 일본 원정인 고안의 역(弘安の役) 이후, 이국경고번역은 도고쿠(東国)와 사이고쿠(西国)를 가리지 않고 공령(公領)이나 지샤(寺社) 본소령(本所領)의 장관(荘官) 등 가마쿠라 막부와 주종 관계가 없던 비고케닌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교토(京都)나 가마쿠라(鎌倉)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는 면제받았지만, 이국경고번역 자체는 여전히 큰 부담이었다.[2]
3. 3. 장기화와 부작용
이국경고번역이 장기화되면서 여러 부작용이 나타났다. 본거지가 규슈 외부에 있던 고케닌 중 일부는 규슈에 정착하거나, 본국과 규슈의 가문이 분열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바 씨(千葉氏) 가문이 가즈사 지바 씨(下総千葉氏)와 규슈 지바 씨(九州千葉氏)로 분열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2]
4. 원구방루 축조
1272년 가마쿠라 막부는 원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하고, 규슈 지역 무사들에게 하카타 만 등 예상 침입 경로를 경비하는 군역을 부과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는 1276년부터 규슈 연안에 쌓기 시작한 원구방루를 축조하고 보수하는 것이었다.[2]
4. 1. 원나라 재침 대비
1276년 막부는 원나라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에 석축 방어 시설인 원구방루(元寇防壘) 축조를 시작하였다. 이국경고번역에 동원된 무사들은 원구방루 축조 및 보수 작업에도 투입되었다.[2]4. 2. 축조 범위 확대
1276년 3월부터 원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에 쌓았던 원구방루는 규슈 북부 해안뿐만 아니라 도서 지역의 섬으로까지 연장되거나, 기존의 석축을 부분적으로 수리하는 것이었다.[2]5. 이국경고번역의 지속과 변화
1272년 2월, 가마쿠라 막부는 규슈 지역의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했다. 이는 슈고를 따라 일정 기간 동안 하카타 만 등 원나라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안을 경비하는 군역이었다. 원래는 규슈에 영지를 가진 고케닌들이 그 임무를 맡았으나, 1281년에 있었던 원의 제2차 일본 원정인 고안 전투 등을 거치면서 도고쿠(東国) ・ 사이고쿠(西国)를 불문하고 비고케닌들에게도 부과되었다.[2]
이국경고번역은 교토나 가마쿠라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를 면제받았지만, 고케닌들에게는 여전히 큰 부담이었다. 이국경고번역이 장기화되면서 규슈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되 본거지는 규슈 바깥 지방에 있는 고케닌 가운데는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거나, 본국 또는 규슈에 있던 서류(庶流)가 독립하거나, 본국 측과 규슈 측으로 집안이 분열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가즈사 지바 씨와 규슈 지바 씨의 경우를 들 수 있다.[2]
1275년 원나라 사신 두세충 · 하문저 등이 나가토에 도착했을 때 막부는 그들을 간토로 호송한 뒤에 다쓰노구치에서 참수하고, 스오와 아키의 고케닌들을 나가토로 집결하게 하였다.( 나가토경고번역 )
5. 1. 원나라 멸망 이후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원나라에서 일본 원정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규슈 고토 열도(五島列島)의 나카도오리지마(中通島) 사람 우시로이오 고카쿠(白魚行覺)가 1280년부터 1302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이국경고번역에 참가하는 등[2] 규슈와 여타 지역 무사들은 지속적으로 이국경고번역이라는 군역을 졌다. 이국경고번역으로 동원되는 무사들에게 주어진 임무 가운데 하나는 1276년부터 원의 재침에 대비하여 규슈 연안에 쌓았던 원구방루를 규슈 북부 해안뿐만 아니라 도서 지역의 섬으로까지 연장하거나, 기존의 석축을 부분적으로 수리하는 것이었다.[2]5. 2. 무로마치 막부 시기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후, 무로마치 막부는 진제이 단다이 산하에 하카타 경고번역(博多警固番役)을 설치하였다. 하카타 경고번역은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난 뒤인 1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는데, 이를 이국경고번역의 개칭(원 ・ 고려에 대한 대비)으로 보는 설과 남조 세력에 대한 대책으로 신설되었다는 설로 양분된다.[3]6. 명칭 유래
7. 역사적 의의와 영향
1272년 분에이 9년,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규슈 연안 방어를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했다. 이는 고려와 원의 침입에 대비한 조치였다. 이국경고번역은 슈고를 따라 일정 기간 동안 하카타 만 등 원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안을 경비하는 군역이었다.[2]
원래는 규슈에 영지를 가진 고케닌들이 그 임무를 맡았으나, 1281년 원의 제2차 일본 원정인 고안의 역 등을 거치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도고쿠 ・ 사이고쿠를 불문하고 공령이나 지샤의 본소령의 장관 등 가마쿠라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지지 않은 비고케닌들에게도 부과되었다.[2]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원정은 모두 태풍으로 실패하였고,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원의 일본 원정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규슈와 여타 지역 무사들은 지속적으로 이국경고번역이라는 군역을 졌으며,[2] 이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원구방루를 보수하고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부담은 고케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장기화되면서 여러가지 사회적 변화를 야기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난 뒤에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진제이 단다이 아래서 하카타 경고번역(博多警固番役)이 설치되어 1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이를 이국경고번역의 개칭으로 보는 설과 남조 세력에 대한 대책으로 신설되었다는 설이 있다.[3]
일본 후쿠오카시 주오구의 게고 정(警固町)은 이국경고번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7. 1. 군사 제도 변화
이국경고번역은 본래 슈고(守護)를 따라 일정 기간(4개 번으로 편성되어 3개월씩 순번제로 근무) 하카타 만(博多湾) 등 원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안을 경비하는 군역이었다. 원래는 규슈에 영지를 가진 고케닌들이 그 임무를 맡았다.1281년 원의 제2차 일본 원정인 고안의 역(弘安の役) 등을 거치면서 도고쿠(東国) ・ 사이고쿠(西国)를 불문하고 공령(公領)이나 지샤(寺社)의 본소령(本所領)의 장관(荘官) 등 가마쿠라 막부와 주종관계를 가지지 않은 비고케닌들에게도 부과되었다.[2] 이들은 교토(京都)나 가마쿠라(鎌倉)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는 면제받았지만, 고케닌들에게 부담은 여전했다.[2]
이국경고번역이 장기화되면서 규슈에 영지를 가졌으나 본거지는 규슈 바깥 지방에 있는 고케닌 중에는 이국경고번역을 맡아 왔다가 현지에 그대로 눌러앉아 본국 또는 규슈에 있던 서류(庶流)의 독립이나 본국측과 규슈측으로 집안이 분열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 가즈사 지바 씨와 규슈 지바 씨)[2]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 아래서 하카타 경고번역(博多警固番役)이 설치되어, 중국 대륙에서 원이 북쪽으로 쫓겨난 뒤인 1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는데, 이를 이국경고번역의 개칭(원 ・ 고려에 대비)으로 보는 설과 남조(南朝) 세력에 대한 대책으로 신설되었다는 설로 양분된다.[3][1]
7. 2. 사회 변화
이국경고번역의 장기화는 규슈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본래 규슈에 영지를 가진 고케닌들이 이국경고번역을 맡았으나, 고안의 역 등을 거치면서 도고쿠(東国) ・ 사이고쿠(西国)를 불문하고 비고케닌들에게도 부과되었다.[2] 이들은 교토(京都)나 가마쿠라(鎌倉)에서의 오반야쿠(大番役)는 면제받았지만, 그 부담은 여전히 무거웠다.[1]특히, 규슈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거지는 규슈 바깥 지방에 있던 고케닌 가문들은 이국경고번역을 위해 규슈에 왔다가 현지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본국 또는 규슈에 있던 서류(庶流)가 독립하거나, 본국 측과 규슈 측으로 집안이 분열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가즈사 지바 씨(下総千葉氏)와 규슈 지바 씨(九州千葉氏)처럼 가문이 분열되기도 하였다.[2]
7. 3. 한일 관계에 미친 영향
1272년 분에이 9년, 막부는 규슈 연안 방어를 위해 이국경고번역을 발동, 규슈에 영지를 가진 도고쿠 무사들에게 규슈로 와서 지쿠젠, 히젠 연안을 방비하게 했다. 이국경고번역은 슈고를 따라 일정 기간(4개 번으로 편성, 3개월씩 순번제 근무) 하카타 만 등 원의 침입 예상 지역을 경비하는 군역이었다.[2]원래 규슈 고케닌들이 담당했으나, 1281년 제2차 일본 원정(고안의 역) 등을 거치며 도고쿠, 사이고쿠를 불문하고 공령이나 지샤의 본소령 장관 등 비고케닌에게도 부과되었다. 1275년 원의 사신 두세충 등이 나가토에 도착했을 때, 막부는 이들을 참수하고 이국경고번역을 하달, 스오와 아키 고케닌을 나가토에 집결시켰다(나가토경고번역).[2]
이국경고번역은 교토, 가마쿠라의 오반야쿠를 면제받았지만, 고케닌에게는 여전히 부담이 컸다. 이국경고번역 장기화로 규슈에 영지를 가졌지만 본거지는 규슈 바깥인 고케닌 중에는 현지에 정착하여 본국 또는 규슈 서류의 독립, 집안 분열 등의 사례도 있었다.[2]
두 차례 원의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실패했고, 1294년 쿠빌라이 칸 사망으로 원의 일본 원정 논의는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규슈 고토 열도 나카도오리지마 사람 우시로이오 고카쿠가 1280년부터 1302년까지 12차례 이국경고번역에 참가하는 등 규슈와 여타 지역 무사들은 계속 군역을 졌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는 1276년부터 원의 재침에 대비해 규슈 연안에 쌓았던 원구방루를 규슈 북부 해안뿐 아니라 도서 지역 섬으로 연장하거나 기존 석축을 수리하는 것이었다.[2]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무로마치 막부의 진제이 단다이 아래 하카타 경고번역이 설치되어 1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이를 이국경고번역의 개칭(원, 고려 대비)으로 보는 설과 남조 세력 대책으로 신설되었다는 설로 나뉜다.[3]
일본 후쿠오카시 주오구의 게고 정은 이국경고번역에서 유래했다.
참조
[1]
간행물
南北朝時代の博多警固番役
九州大学
2009
[2]
논문
몽골의 고려 · 일본 침공과 해안 성곽의 성격에 대한 고찰
2017
[3]
간행물
南北朝時代の博多警固番役
九州大学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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