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말리 쿠데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2012년 말리 쿠데타는 2012년 3월 21일 말리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이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의 무능함과 북부 반군 대응 실패에 대한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헌법을 정지하고 국가 기관을 해체했으며, 아마두 사노고 대위가 권력을 장악했다. 국제 사회의 제재와 압박으로 인해 쿠데타 세력은 실권을 디옹쿤다 트라오레 국회의장에게 이양했고, 투레는 사임하여 쿠데타 발생 22일 만에 민정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북부 지역에서 투아레그 반군의 세력이 확장되었고, 아자와드는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국은 불안정하게 지속되었다.

2012년 말리 쿠데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말리 대통령 아마두 투마니 투레는 2012년 3월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분쟁2012년 말리 쿠데타
일부말리 전쟁
날짜2012년 3월 21일 – 2012년 4월 8일
결과쿠데타 성공
반군 병사들이 대통령 궁, 국영 언론 및 기타 건물을 장악하고 투레 대통령을 은신처로 몰아넣음
반군 병사들이 쿠데타 성공을 주장하며 전국적인 통행 금지를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킴
투아레그 반군이 말리 북부를 장악하고 독립 국가 아자와드를 선포함
2012년 12월 셰이크 모디보 디아라 총리와 그의 정부 축출
교전 세력
교전국 1 말리 정부
교전 부대 133 공수 연대
대통령 경호대
교전국 2 민주주의 및 국가 회복을 위한 국가 위원회 (CNRDR)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 아마두 투마니 투레 (말리 대통령)
사디오 가사마 (준장 및 말리 국방 장관)
지휘관 2 아마두 사노고 (대위 및 CNRDR 지도자)
아마두 코나레 (CNRDR 대변인)
병력 규모
병력 1알 수 없음
병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사망 34명
부상 28명
사상자 2사망 1명
부상 2명
기타 사상자부상자 40명 (미상)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말리의 쿠데타 - 2020년 말리 쿠데타
    2020년 말리 쿠데타는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대통령에 대한 불만, 선거 부정 의혹, 반정부 시위 등을 배경으로 군인들이 대통령과 총리를 체포하고 케이타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발생했으며, 국민구제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과도 정부를 구성한 사건이다.
  • 2012년 말리 - 안사르 디네
    안사르 디네는 이야드 아그 갈리가 이끄는 알 카에다 연계 이슬람 무장 단체로, 2012년 말리 북부 투아레그 반란에 참여하여 말리 전역에 샤리아법을 강요하고 신정 국가 수립을 목표로 활동하며, 팀북투에서 샤리아 법 시행과 유네스코 세계 유산 파괴 등의 논란을 일으켜 2013년 테러 조직으로 지정되었다.
  • 2012년 말리 - 말리 전쟁
    2012년부터 말리에서 투아레그족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말리 정부군, 국제 군대의 개입으로 복잡하게 진행 중인 말리 전쟁은 투아레그족 독립 요구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개입, 국제 사회의 군사 개입, 그리고 현재는 말리 정부군의 반격 강화로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 2012년 분쟁 -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2021년)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과 동맹국이 탈레반 정권을 응징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되어, 탈레반 축출과 미군 철수, 탈레반의 재장악으로 종결되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와 사회적 영향을 남겼다.
  • 2012년 분쟁 - 예멘 알카에다 반란
    예멘 알카에다 반란은 알카에다 아랍반도 지부(AQAP)의 테러 활동과 예멘 정부 및 국제 사회의 대응을 의미하며, AQAP은 2000년대 초부터 외국인 공격을 포함한 여러 테러를 감행하고 이슬람 토후국 선포를 시도하며 예멘 정부와 충돌했다.

2. 배경

말리는 1960년 독립 이후 유목민 투아레그족의 반정부 투쟁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부터 아자와드 해방 민족 운동(MNLA)과 그 전신 단체들이 분쟁을 벌여온 국가 북부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투아레그족은 2011년 리비아 내전에 참여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으며, 고성능 무기를 말리로 가져와 군사력을 강화했다. 무아마르 카다피를 위해 싸웠던 잘 훈련되고 무장한 병사들의 유입으로 강화되었다.

반정부 조직인 MNLA로 조직된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중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고, 정부군과의 분쟁(2012년 투아레그 반란)이 발발했다. 2월 6일, 투아레그 반군은 말리 북부 도시 키달을 점령하기 위해 말리 보안군과 군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2월 8일, MNLA는 말리 병사들이 알제리로 건너가면서 말리-알제리 국경 도시 틴자우아텐을 점령했다. 이슬람주의 안사르 딘은 말리 북부에 이슬람법 시행을 요구했고, 세속적인 투아레그 민족주의 MNLA는 완전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자치 지역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는 무기와 자재가 부족하다는 불만이 생겼고, 많은 정부군 병사가 사망하거나 투아레그족 세력에 억류된 것으로 보여 정부의 대응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군인들은 반군에 대한 작전을 위해 더 많은 무기와 자원을 요구했고, 정부가 군대를 지원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일부 군인들은 충분한 식량 없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은 4월 2012년 말리 대통령 선거 이후 임기가 만료되면 퇴임할 예정이었다. 쿠데타 시도는 정부가 북부에서 유목민이 주도하는 반란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수 주간의 시위 이후에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투레의 인기는 "새로운 최저점"으로 떨어졌다.

쿠데타를 야기한 요인은 다음과 같다:
* 바마코는 1960년대부터 MNLA와 그 전신 단체들이 분쟁을 벌여온 국가 북부를 통제하는 데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
* 말리는 알 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AQIM) 회원들이 알제리 및 기타 주변 국가에서 유입되면서 안보 위기를 겪고 있었다.
* 말리는 가혹한 식량 위기를 겪고 있었고, 이로 인해 실향민, 난민 캠프, 굶주린 여성과 어린이가 발생했다.

2.1. 투아레그족 문제와 북부 말리 분쟁

말리는 1960년 독립 이후 유목민 투아레그족의 반정부 투쟁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부터 아자와드 해방 민족 운동(MNLA)과 그 전신 단체들이 분쟁을 벌여온 국가 북부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투아레그족은 2011년 리비아 내전에 참여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으며, 고성능 무기를 말리로 가져와 군사력을 강화했다. 무아마르 카다피를 위해 싸웠던 잘 훈련되고 무장한 병사들의 유입으로 강화되었다.

반정부 조직인 MNLA로 조직된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중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고, 정부군과의 분쟁(2012년 투아레그 반란)이 발발했다. 2월 6일, 투아레그 반군은 말리 북부 도시 키달을 점령하기 위해 말리 보안군과 군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2월 8일, MNLA는 말리 병사들이 알제리로 건너가면서 말리-알제리 국경 도시 틴자우아텐을 점령했다. 이슬람주의 안사르 딘은 말리 북부에 이슬람법 시행을 요구했고, 세속적인 투아레그 민족주의 MNLA는 완전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자치 지역을 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는 무기와 자재가 부족하다는 불만이 생겼고, 많은 정부군 병사가 사망하거나 투아레그족 세력에 억류된 것으로 보여 정부의 대응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군인들은 반군에 대한 작전을 위해 더 많은 무기와 자원을 요구했고, 정부가 군대를 지원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일부 군인들은 충분한 식량 없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2.2. 군부의 불만과 취약한 안보 상황

2011년 리비아 내전에 참여했던 투아레그족은 전투 경험과 고성능 무기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들은 아자와드 해방 민족 운동(MNLA)으로 조직되어 2012년 1월 중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 2012년 투아레그 반란을 일으켰다. 2월 6일, 투아레그 반군은 말리 북부 도시 키달을 점령하기 위해 공세를 시작했고, 2월 8일에는 말리-알제리 국경 도시 틴자우아텐을 점령했다.

그러나 말리군은 투아레그 반군에 대응할 무기와 장비가 부족했고, 정부의 지원마저 부족하여 군 내부의 불만이 커져갔다., 일부 군인들은 충분한 식량 없이 전선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부터 지속된 투아레그족과의 분쟁, 알 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AQIM)의 활동 증가, 그리고 가혹한 식량 위기는 말리의 안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2.3. 정치적 불안정과 투레 정부의 무능

2012년 2012년 말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말리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 정부는 북부 분쟁과 경제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말리 공화국은 1960년 독립 이후, 유목민 투아레그족의 반정부 투쟁이 계속되었다. 투아레그족은 2011년 리비아 내전에 참여하여 전투 경험을 쌓았으며, 고성능 무기를 말리로 가져와 군사력을 강화했다. 아자와드 해방 민족 운동(MNLA)으로 조직된 투아레그족은 2012년 1월 중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고, 정부군과의 분쟁(2012년 투아레그 반란)이 발발했다.

쿠데타 시도는 정부가 북부에서 유목민이 주도하는 반란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수 주간의 시위 이후에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투레의 인기는 "새로운 최저점"으로 떨어졌다. 군인들은 반군에 대한 작전을 위해 더 많은 무기와 자원을 요구했고, 정부가 군대를 지원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일부 군인들은 충분한 식량 없이 전선으로 보내졌다.

3. 전개 과정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2012년, 새로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사디오 가사마가 불만을 품은 병사들을 위해 3월 21일, 바마코 교외의 쿨리코 주 카치의 군사 캠프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병사들은 탄약 등 무기 충실 등을 요구했지만, 가사마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분노한 병사들은 공포탄을 쏘는 등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바마코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에는 국영 방송국을 점거했다. 대통령궁도 공격하여 경비대와 총격전을 벌였다. 스메일 부베이에 마이가 외무 장관, 내무 장관 등 여러 명의 각료가 구속되었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은 총격전 시작 후 대통령궁을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통령궁에 머물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3월 23일, 아프리카 연합장 핑 위원회 위원장은 투레 대통령이 무사하다고 발표했다. 일련의 소란으로 38명이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3월 22일 새벽, 반정부 세력은 스스로를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전국 위원회영어(CNRDR)라고 칭하며,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권력 장악과 헌법 정지, 그리고 국가 기관 해체를 선언했다.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로, 투레 정권의 "무능함"과 북부 반군에 대한 대응 실패, 그리고 무기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또한 국내가 다시 통일되고 영토가 보전되는 즉시 민정으로 이양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말리 국내에는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고, 바마코에서는 반란 병사들에 의한 폭행과 휘발유 등 약탈 행위가 잇따랐다.
국영 방송에서는 쿠데타를 지도하는 아마두 사노고영어 대위가 투레 대통령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아자와드 민족해방운동(MNLA)은 북부 지역에서 공세를 강화했고, 4월 6일에는 아자와드의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졌고, 특히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며 반군을 압박했다. 결국 반군은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디옹쿤다 트라오레영어 국회의장에게 실권을 이양하는 데 합의했다. 정권에서 물러난 투레는 4월 8일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직 사임을 표명했고, 트라오레는 4월 12일에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로써 말리 공화국은 쿠데타 발생 22일 만에 민정으로 복귀했다.

3.1. 3월 21일: 쿠데타 발발

2012년 3월 21일, 사디오 가사마 국방부 장관 준장이 카티 군사 기지를 방문했을 때, 군인들은 투아레그 반란에 대한 정부의 미흡한 대응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가사마 준장은 야유를 받았고, 그의 차에 돌이 던져졌으며, 경호원들은 경고 사격을 했다. 이후 병사들은 기지의 무기고를 습격했다.

같은 날 늦게, 장갑차가 대통령궁을 봉쇄하고, 말리 국영 방송 본부 근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방송은 중단되었고, 병사들은 건물로 가는 길을 막았다. AP통신은 한 병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 경호원들이 저항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반란군은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을 찾기 위해 주변을 수색했지만, 체포에는 실패했다.

저녁에 말리 국영 방송 ORTM은 "잠시 후 군의 성명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방송을 재개했다. 가오 인근 군사 기지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상급 지휘관들이 인질로 잡혔다.

바마코 교외의 쿨리코 주 카치의 군사 캠프에서 시작된 병사들의 불만은, 국영 방송국 점거와 대통령궁 공격으로 이어졌다. 스메일 부베이에 마이가 외무 장관 등 여러 각료가 구속되었고, 투레 대통령은 총격전 이후 대통령궁을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3월 23일, 아프리카 연합장 핑 위원장은 투레 대통령이 무사하다고 밝혔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3.2. 3월 22일: CNRDR 등장과 헌정 중단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2012년 3월 22일 새벽, 쿠데타 세력은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국가 민주주의 및 국가 복원 위원회(CNRDR)'를 자칭하며 권력 장악을 선언했다. CNRDR은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가 기관을 해체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로, 투레 정권이 "무능한 정부"이며, 이를 끝냄으로써 책임을 지기로 결정한 것과 무기 부족을 들었다. 또한 국내가 다시 통일되고 영토 보전이 확보되는 즉시 민정으로 이양할 것을 표명했다.

아마두 코나레는 CNRDR의 대변인으로서 '아마두 투마니 투레의 무능한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고 선언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될 새로운 정부에 권력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아마두 사노고 대위가 CNRDR의 의장으로 등장하여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해 질 녘부터 새벽까지 통행금지를 선포하고, 침착함과 약탈 행위 중단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말리의 육상 및 항공 국경을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폐쇄한다고 선언했다.

쿠데타 당일, 수메일루 부베예 마이가 외무 장관을 포함한 여러 장관들이 체포되었고, 국제앰네스티는 시세 마리암 카이다마 시디베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구금된 장관들이 카티의 군사 기지에 억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반군 군인들은 수도의 충성파 군사 기지를 공격할 의향을 밝혔고, 대통령 궁을 약탈하여 TV와 기타 물품을 빼앗았다. 이들의 지도자는 수도에서 최소 20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축포 사격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3.3. 3월 23일 ~ 4월 5일: 국제사회의 압력과 제재

아프리카 연합은 "헌정 질서가 지체 없이 효과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말리를 중단시켰다. 축출된 말리 대통령 아마두 투마니 투레는 바마코 외곽의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그에게 충성하는 병력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알려졌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서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ECOWAS)의 공동 외교 사절단이 군사 정부 대표와 만났으며, 쿠데타를 "후퇴"라고 비난하는 성명에는 이 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를 포함한 유명한 말리 정치인 그룹이 참여했다. 쿠데타를 비난한 정당으로는 말리 민주주의 동맹, 공화국과 민주주의 연합 등이 있다.

군부가 권력을 포기하라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의 시한을 지키지 못하자 말리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시작되었다. 서아프리카 국가 중앙 은행에 있는 말리 계좌가 동결되었고, 말리의 육상 국경이 폐쇄되었다. 말리는 석유의 대부분을 코트디부아르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이는 말리 일부 지역에서 연료가 "며칠 안에"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3.4. 4월 6일: 민정 복귀 합의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와의 협상 결과, 쿠데타 세력은 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디옹쿤다 트라오레 국회의장에게 실권을 이양하는 데 합의했다. 2012년 4월 8일,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저는 제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합니다."라고 밝히며 ECOWAS 중재인들에게 대통령직 사임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아마두 사노고는 그 직후 사임했다. 이로써 말리 공화국은 쿠데타 발생 22일 만에 민정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아마두 투마니 투레(2011년)

4. 국내외 반응

3월 쿠데타 이후 며칠 동안, 국제 사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규탄"했다. 세계 은행과 아프리카 개발 은행아프리카 연합(AU)과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의 쿠데타에 대한 대응을 지원하기 위해 개발 원조 기금을 중단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쿠데타가 "인권의 불확실한 시기"를 예고한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산고의 군대에 구금된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촉구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민주주의 회복과 국가 재건을 위한 국가위원회(CNRDR)가 "기본적인 인권 보호를 회복"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권력을 반환하기 위한 확고한 일정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 유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쿠데타를 비난하고 사법부 회복을 요구했다.
* 아프리카 연합: 반란군을 비난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3월 23일에는 말리 공화국의 가맹 자격을 정지했다.
*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반란군을 비난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 유럽 연합: 쿠데타를 규탄하며 가능한 빨리 헌법 권력의 복원을 요구했다. 개발 활동 또한 중단되었다.
* 국제 의회 연맹: 말리가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 미국: en 백악관 대변인은 반란군에 의한 정권 전복을 강력히 비난했다. 투레 정권 지지를 표명하고 헌법에 의한 통치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 중국: 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은 사태를 주시하는 동시에 조속한 수습을 희망한다고 표명했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 반란군을 비난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다국적 기업인 랜드골드 리소스(Randgold Resources)의 주가는 쿠데타 이후 13% 하락했는데, 이는 말리에 3개의 금광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로, 군코토의 광산 운영과 모릴라에서의 합작 사업은 중단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골드 필즈(Gold Fields)는 말리에서의 운영을 중단했다.

4.1. 국제기구

* 유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뉴욕에서 유엔 대변인을 통해 사태를 "깊이 우려"하며 진정을 촉구하고 불만을 평화적으로, 민주적인 절차 내에서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반 총장은 또한 말리의 헌법 질서에 대한 유엔의 지지를 재확인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또한 "구금된 모든 말리 관료의 석방"과 "헌법 통치 및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즉각적인 복원"을 촉구했다.
* 아프리카 연합: 장 팽 아프리카 연합 집행위원회 의장은 "이 반란 행위는 헌법적 합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말리와 대륙의 진행 중인 민주적 과정에 큰 차질을 초래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아프리카 연합의 입장을 밝혔다. 3월 23일에는 말리 공화국의 가맹 자격을 정지했다.
*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는 반란군을 비난했다.
* 유럽 연합은 쿠데타를 규탄하며 가능한 한 빨리 헌법 권력의 복원을 요구했다. 개발 활동 또한 중단되었다.
* 국제 의회 연맹은 말리가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4.2. 주요 국가

알제리 정부 대변인은 무력 사용과 비헌법적인 변화를 거부하며, 말리의 모든 내부 문제는 국가의 합법적인 기관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앙골라 외무 장관은 무력에 의한 권력 장악에 반대하며, 헌법과 협상을 통해 모든 당사자를 만족시키는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은 말리 국민에게 깊은 연대감을 표하며 인권 존중, 헌법 질서의 즉각적인 회복, 진행 중인 선거 과정의 합법적인 지속을 요청했다.

브라질 외무부는 말리의 상황을 "깊은 우려"를 가지고 주시하고 있으며, "헌법 질서와 민주주의의 즉각적인 회복"을 촉구하고, 당사자들에게 "자제, 평화로운 대화, 무력 사용 거부"를 촉구했다. 캐나다 외무부 장관 존 베어드는 "차이점은 무력이 아닌 대화와 민주적 절차로 해결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다음 달 선거 전에 안정을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캐나다는 말리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지급을 포함하는 모든 원조 프로그램을 중단했지만, 캐나다 국제 개발청의 해당 국가 프로그램은 계속 운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외무 장관 알랭 쥐페는 프랑스가 말리와의 외교 협력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가나는 "말리에서 정당하지 않은 군사력에 의한 권력 장악을 규탄"했다. 인도는 "말리에서의 최근 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해당 국가의 헌법 질서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할 것을 촉구"했다.

쿠데타 당시 바마코에 있었던 케냐 외무 장관 모세스 웨탕굴라는 탈출 후 "이러한 쿠데타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젊고 흥분한 군인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을 몰아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니제르는 쿠데타에 대한 "전적인 반대"를 표명하고 "모든 비헌법적인 변화를 규탄"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말리의 "비헌법적인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쿠데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외무 장관 요나스 가르 스퇴레는 말리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를 규탄하고 군부에 가능한 한 빨리 합법적인 권력에 권력을 반환할 것을 촉구했다.

중국은 "쿠데타를 규탄"했다. 러시아는 쿠데타를 규탄하고 "군사 지도자들에게 헌법 질서를 회복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권력 복귀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세네갈은 쿠데타에 대한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와 아프리카 연합(AU)의 조치를 지지한다고 표명하고, 서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말리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법치주의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쿠데타를 규탄하고 바마코에 있는 대사관을 폐쇄했다.

우간다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은 쿠데타를 규탄하며 말리 군부에 병영으로 복귀하여 "국민들이 미래를 결정하도록 놔두라"고 촉구했다. 영국 아프리카 담당 장관 헨리 벨링햄은 영국 정부가 쿠데타 시도 보고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으며 민주적 통치와 말리 헌법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행동도 규탄한다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 빅토리아 눌런드는 미국이 군사력에 의한 권력 장악을 규탄하며 투레의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함께한다고 말했다. 3월 26일, 말리에 대한 모든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4월 20일, 쿠데타 전에 말리의 군대를 지원했던 미국 군인 3명이 바마코에서 차량 사고로 사망했다. 이들이 왜 말리에 남아 있었는지에 대한 상반된 이유가 제시되었으며, 익명의 소식통에 의해 모로코 매춘부로 확인된 여성 3명도 차량에서 사망했다. 남성 중 한 명은 미국 육군 정보 보안 사령부(INSCOM) 소속이었고, 다른 두 명은 미국 특수 작전 사령부(SOCOM)에 배속되었으며, SOCOM은 특수 작전 부대로 대테러 임무에 활동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정부는 "말리 국민과의 무조건적인 연대"를 표명하면서 "쿠데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거부"를 표명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쿠데타를 비난하고 사법부 회복을 요구했다. 아프리카 연합은 반란군을 비난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3월 23일에는 말리 공화국의 가맹 자격을 정지했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는 반란군을 비난했다. 미국의 en 백악관 대변인은 반란군에 의한 정권 전복을 강력히 비난했다. 투레 정권 지지를 표명하고 헌법에 의한 통치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훙레이 외교부 대변인은 사태를 주시하는 동시에 조속한 수습을 희망한다고 표명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반란군을 비난했다.

5. 쿠데타 이후

5.1. 트라오레 임시 정부 출범과 과도기

말리 헌법 재판소는 회의를 열어 디온쿤다 트라오레가 선거를 조직하기 위해 최대 40일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권력을 트라오레에게 넘겼고, 투레 행정부의 투옥된 장관들과 측근들이 석방되었다. 트라오레는 취임 후 북부 말리 도시들에 대한 투아레그 반군의 지배를 풀지 않으면 그들에게 "전면적이고 끈질긴 전쟁을 벌이겠다"고 다짐했다.

24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새로운 민간 정부가 발표되었으며, 세 명의 장관(국방, 내무, 국내 보안)은 군 출신으로 쿠데타 지도자들과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사노고는 과도기에 군부가 "감독"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5.2. 북부 반군 세력의 확장과 아자와드 독립 선언

5.3. 셰이크 모디보 디아라 총리 체포와 사임

2012년 12월 10일, 인기를 잃고 고위 이슬람 위원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 셰이크 모디보 디아라 총리가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말리 카티의 군 기지로 이송되었다. BBC 뉴스는 체포가 사노고 대위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군인들은 "총리 관저의 문을 부수고 그를 다소 폭력적으로 끌고 갔다."

몇 시간 후, 디아라 총리는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과 정부의 사임을 발표했다. 군 대변인 오우마르 마리코는 디아라가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막으면서 "무기한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새 총리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될 때까지 구금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사임을 "국가의 두 번째 쿠데타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마리코는 이 용어 사용에 반대하며 기자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쿠데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5.4. 통합 정부 구성과 불안정한 정국

셰이크 모디보 디아라가 임시 총리로 임명되면서 민간 통치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24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새 민간 정부가 발표되었으나, 국방, 내무, 국내 보안을 담당하는 세 명의 장관은 군 출신으로 쿠데타 지도자들과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사노고는 과도기에 군부가 "감독"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대통령 및 입법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12개월의 과도 기간을 발표하고 평화로운 전환을 보장하기 위해 말리에 군인을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산고는 이를 거부했다.

2012년 8월 20일, 말리의 안정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민 통합 정부가 구성되었고 임시 대통령 디오쿤다 트라오레에 의해 승인되었다. 임시 정부를 이끌었던 셰이크 모디보 디아라는 총리로 유임되었다. 새 내각은 31명의 장관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5명은 쿠데타 지도자 산고 대위와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새 정부에서 5개의 직책은 군 지도부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선거 조직을 담당했던 내무 장관을 포함하여 이전 과도 정부의 최소 4명의 구성원은 변경되지 않았다. 선출된 장관 중 누구도 축출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