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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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기문은 일제강점기인 1944년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주 인도 대사관 부영사, 외무부 미주국장, 외교통상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는 반기문센터를 설립하고, 엘더스, 보아오포럼 이사장, 그린 뉴딜 지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했으나, 불출마를 선언했다.

반기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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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2016년)
이름반기문
출생일1944년 6월 13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국적대한민국
배우자유순택 (1971년 결혼)
자녀3명
서명Ban Ki Moon Signature.svg
학력서울대학교 (학사)
하버드 대학교 (행정학 석사)
{"caption":"반기문이 만국우편연합에서 연설하는 모습 (2015년 4월 13일 녹음)","sound_file":"Ban_Ki-moon_voice.ogg"}
한국 이름
한글반기문
한자潘基文
로마자 표기Ban Gimun
매큔-라이샤워 표기Pan Kimun
한국어 발음[panɡimun]
직책
유엔 사무총장제8대 국제연합 사무총장
유엔 사무총장 임기 시작2007년 1월 1일
유엔 사무총장 임기 종료2016년 12월 31일
유엔 사무차장아샤로즈 미기로
얀 엘리아손
유엔 사무총장 전임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후임안토니우 구테흐스
외교통상부 장관대한민국 외교부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 임기 시작2004년 1월 17일
외교통상부 장관 임기 종료2006년 12월 1일
외교통상부 장관 재임 시 대통령노무현
외교통상부 장관 전임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후임송민순
기타 정보
정당무소속
종교비공개
군 복무대한민국 육군 병장
복무 기간: 1965년 4월 22일 ~ 1967년 10월 7일
수상 내역
서울 평화상2012년 (한국인 최초)
주요 활동
기후 변화기후 변화 회담에 적극적으로 참여
다푸르 문제다푸르 지역에 유엔군 파병을 허용
그린 뉴딜그린 뉴딜 지지
적응 행동 의제 2030기후변화 적응 정상 회의에서 적응 행동 의제 2030 발표
글로벌 적응 위원회글로벌 적응 위원회 위원
국제올림픽위원회 윤리위원회국제올림픽위원회 윤리위원회 위원장
연세대학교연세대학교에서 재직 시작
정치 활동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출마 시도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출마 포기
순위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32위 (2013년)
순위
외교 정책 선정 글로벌 사상가100인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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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초기

반기문은 1944년 6월 13일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행치(현 대한민국 충청북도 음성군)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광주 반씨로, 가족은 인근 충주시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창고 사업을 했지만 도산하여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여섯 살 때, 한국 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외딴 산골로 피신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충주로 돌아와 미군 병사들을 만났다.

충주고등학교 재학 중, 지역 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했고, 특히 영어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1962년, 적십자사 후원 작문 대회에서 우승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몇 달간 여행했다. 이 때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고,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1970년 서울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학사 학위를, 1985년 하버드 대학교 존 F.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조지프 나이 교수는 "분석적 명료성, 겸손, 끈기라는 희귀한 조합"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반기문은 한국어 외에 영어프랑스어를 구사한다. 다만, 은퇴한 UN 관계자에 따르면, 영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여 미국 등 다른 나라 청중을 사로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2.1. 출생과 성장

1953~54년 충주교현국민학교 2~3학년 재직 중 동생들과 찍은 사진(뒷줄 가운데)
1953~54년 충주교현국민학교 2~3학년 재직 중 동생들과 찍은 사진(뒷줄 가운데)

일제강점기인 1944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행치마을)에서 아버지 반명환과 어머니 신현순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잦은 이사를 했는데, 3세 때 청주로, 8세 때 충주시로 이사하여 충주시 문화동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충주교현초등학교 6학년 때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헝가리 혁명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소련군헝가리를 무력으로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반기문은 당시 "헝가리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유엔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반기문의 시조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셋째아들인 계손(季孫)으로, 현재에도 중국 허난(河南)성 싱양(滎陽)현의 가오산(高山)진 판야오(潘窯)촌에 판씨 집성촌이 있으며, '세계 판씨 종보(宗譜)'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시조 판계손의 62세손으로 남당때 태사(太師)를 지낸 판여우(潘佑)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 전쟁포로로 잡힌 후, 고려사신의 중재를 거쳐 거제도로 이주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하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반석평(潘碩枰)이 반기문의 선조이기도 하다. 석평은 본래 서자 출신으로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노비 신분으로 서울의 이 참판 집에서 종노릇을 했다. 그런데 이참판은 석평의 영특함을 아껴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아들이 없는 친척 양반집에 양자로 보내서 과거준비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석평은 150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 병조참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형조참판,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형조판서(현 법무부 장관)를 지낸 인물이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창고 사업을 했지만 도산하여 중산층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반기문이 여섯 살이었을 때, 그의 가족은 한국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외딴 산골로 피신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가족은 충주로 돌아왔다. 반기문은 이때 미군 병사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충주고등학교 재학 중, 그는 지역 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했고, 특히 영어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범생이었다. 1962년, 그는 적십자사가 후원하는 작문 대회에서 우승하여 미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고, 몇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이 여행의 일환으로 반기문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회의에서 한 기자가 반기문에게 장래 희망을 묻자, 그는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반기문은 1970년 서울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5년 하버드 대학교 존 F.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는 조지프 나이 교수의 지도를 받았는데, 나이 교수는 반기문이 "분석적 명료성, 겸손, 끈기라는 희귀한 조합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반기문은 한국어 외에 영어프랑스어를 구사한다.

2.2. 학창시절과 군 복무

충주중학교 시절 학업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었으며 특히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충주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영어 공부에 더욱 매진하였는데, 당시 한국 최초로 설립된 대규모 화학비료공장인 충주비료공장에 근무하는 미국인 기술자들에게 부탁하여 원어민의 영어발음을 녹음하여 공부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 분위기는 불교였으나 가까운 성당에 출석하여 미국인 선교사나 신부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미국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이때 주어진 부상으로 '외국 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했다. 한 달간 미국 연수 및 봉사활동을 하였고 이 기간중에 백악관을 견학한 후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를 계기로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1962년 적십자 비스타 프로그램으로 미국 워싱턴 방문을 한 반기문.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
1962년 적십자 비스타 프로그램으로 미국 워싱턴 방문을 한 반기문.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


고교은사인 김성태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1965년 4월부터 약 2년 6개월 간 육군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1970년 2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 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 수석을 차지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소통이 가능하다.
군 복무 중인 반기문. 1965년에서 1967년 사이.
군 복무 중인 반기문. 1965년에서 1967년 사이.

3. 대한민국 외교관

반기문은 1970년 외무부 여권과를 시작으로, 인도 대사관 부영사(1972년)와 2등 서기관(1974년)을 거쳐 주로 국제 조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80년에는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이 되었다.

1985년에는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팰로우(Fellow) 신분으로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위한 재미 학계 인사들의 연명 서한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실이 외교부에 전달되기도 했다.

이후 노신영 국무총리의 의전비서관(1985년), 주미대사관 총영사(1987년), 외무부 미주국장(1990년),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1992년), 주미 공사(1992년)를 역임했다.

1970년 5월 외교부에 들어간 반기문은 인도 뉴델리에서 부영사로 근무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1974년에는 유엔에 처음 파견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에는 유엔과의 협력국 부서장을 맡았다.

1980년 서울에 본부를 둔 유엔 국제기구 및 조약국 부서장이 되었고, 워싱턴 D.C.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에 두 번 파견되었다. 1992년에는 남북공동핵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주미대사 대리를 지냈고, 1995년 정책기획 및 국제기구 차관, 1996년에는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998년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대사로 임명되었고, 1년 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PrepCom) 준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1년 미국이 탄도탄방어조약 폐기를 결정한 직후, 반기문은 공개 서한에 이 조약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을 포함시켜 김대중 대통령에게 해임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유엔총회 의장 한승수의 비서실장(2001년)을 거쳐,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 정책 자문관으로 임명되었다.

3.1. 김영삼 정부

반기문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로서 한미 간 대북정책 조율 실무를 총괄했고, 같은 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에 기여했다. 1995년 2월에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역임했고, 1996년 11월에는 외교안보수석을 맡았다. 1997년 2월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여 제3국인 필리핀을 경유해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담판을 지은 밀사로 활약하였다.

1992년 2월 외교부 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7월 주미 공사를 거쳐 1995년 2월 외교부 차관을 지냈으며, 1996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외교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되었다.

3.2. 김대중 정부

2000년 1월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내다가 2001년에 물러났다. 이후 2001년 9월 제56차 유엔총회 의장 비서실장,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9·11 테러 발생 후에는 유엔 차원의 테러 대응 조치 및 이견 조율 업무를 수행하며 국제 경험을 쌓았다.

1998년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대사로 임명되었고, 1년 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PrepCom) 준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협상 중, 반기문은 2001년 미국이 탄도탄방어조약 폐기를 결정한 직후 공개 서한에 이 조약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을 포함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반기문을 해임하고, 그의 발언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

이 일로 반기문은 경력에서 유일하게 실직 상태가 되었고, 외딴 곳의 중요하지 않은 대사관에 근무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01년 제56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순환 의장국을 맡게 되면서, 반기문은 한승수 총회 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선출되는 기회를 얻었다.

3.3. 노무현 정부

2003년 2월 11일, 미국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북한 행동 및 국제사회의 대응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이유로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그 이유는 노무현이 "반미"적이라는 것이었다. 2003년 3월 9일, 참여정부는 반기문을 포함한 3인의 대표단을 무디스, 피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등 신용평가기관에 파견했다. 반기문은 인터뷰에서 대표단이 뉴욕의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본사, 홍콩의 피치 사무국을 방문해 한국의 신용등급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읍소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무디스는 신용등급 전망만 낮춘 채 실질적인 신용등급 하향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2003년, 새로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을 외교 정책 자문관으로 임명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직속으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기문은 대통령과 외국 정부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햇볕정책 진전에 힘썼지만, 자신의 발언 며칠 후 그 발언과 상반되는 내용의 대통령 발언이 나오는 등의 일도 있었다.

3.4.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

노무현 참여정부 시기인 2004년 1월, 반기문은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취임 초, 반기문은 2004년 6월 김선일 씨 피살 사건과 2004년 12월 인도양 지진 해일로 인한 한국인 사망자 발생 등 두 가지 큰 위기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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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은 북한과의 관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2005년 9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6자 회담 4차 회의에서 북핵 문제 해결에 관한 공동성명 채택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반기문은 한국의 무역 및 원조 정책을 감독했다. 이 업무를 통해 반기문은 여러 무역 협정에 서명하고, 이후 UN 사무총장 후보 지명에 영향을 미칠 외교관들에게 외국 원조를 제공하는 위치에 있었다. 일례로, 반기문은 1960년 독립 이후 최초로 콩고 공화국을 방문한 한국 고위급 장관이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및 참여정부의 대북 유화정책과는 달리, 반기문은 보수적인 대북관을 견지하여 잦은 의견 충돌을 겪었다.

3.4.1. 김선일씨 피살 사건

2004년 5월 31일, 업무차 이라크를 방문했던 가나무역 통역사 김선일이 이라크 무장단체 '유일신과 성전'에 납치되었다. 이 단체는 김선일의 석방 조건으로 한국군과 가나 무역의 이라크 즉각 철수 및 한국군 추가 파병 중단을 요구했다.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던 반기문은 석방팀을 직접 지휘했으며, 6월 22일 알자지라 방송에 출연하여 김선일의 석방을 호소했다.

그러나 반기문이 알자지라 방송에 출연한 바로 그 날, 김선일은 팔루자 인근 도로변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야당은 반기문 장관 경질론을 제기했고, 반기문은 6월 24일 국회 본회의 청문회에서 사과했다. 반기문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시기가 외교관 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3.4.2.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 관련 입장

반기문 장관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1909년 청나라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 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밝혔다.

2005년에는 독도 문제나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 정치인들에게 한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반 장관은 "독도 문제는 우리 국토와 주권 문제와 관련돼 있고 한일관계보다 상위개념이다. 시마네현 영토 편입조치가 우리가 외교권이 거의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뤄진 불법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3.4.3. 참여정부와의 대북정책 대립

노무현 대통령 및 참여정부는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진 반기문은 이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2004년 7월, 반기문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모여 있던 400여 명의 탈북자들을 공개적으로 한꺼번에 한국으로 입국시켜 대북 관계를 경색시키고 대통령과 대립하였다.

2005년 3월, 미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자는 주장을 검토하여 대한민국 측에 제안했으나, 반기문은 이를 유엔사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기만전술로 판단, 노무현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노무현은 반기문을 크게 질책하였다.

반기문은 참여정부의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 구상에 계속 반대하였다. 2005년 8월 미국 워싱턴에서 '선 6자회담, 후 평화협정' 방침을 강조하여, 정동영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부터 냉전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청와대는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이 타결될 때, 반기문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부에 박선원 당시 행정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포동 2호 발사 및 1차 핵실험으로 9.19 공동성명은 파기되었다.

4. 유엔 사무총장

2006년 2월 14일,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모든 국가를 순방하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 당시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하였으나, 1차 예비투표에서 15개국 중 13개국의 찬성을 얻어 1위에 올랐고, 이후 투표에서도 계속 높은 지지를 받았다. 10월 2일 최종 비공식 설문조사까지 일본은 기권표를 던졌다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찬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2006년 10월 14일,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2007년 1월 1일부터 5년간 사무총장직을 수행했다.

2007년 7월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난 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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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모스크바 승전절 퍼레이드에서 러시아, 중국,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베트남, 이집트 지도자들과 함께한 반기문, 2015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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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항저우, 중국, 2016년 9월 3일)
반기문,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항저우, 중국, 2016년 9월 3일)


2004년, 반기문은 노무현 대통령 하에서 윤영관 외교부 장관 사임 후 외교부 장관직을 맡았다. 취임 초 김선일 씨 피살 사건과 인도양 지진 해일로 인한 한국인 사망 등 여러 위기에 직면했으나, 북한과의 대화 재개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2005년 9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6자 회담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성명 채택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한국의 무역 및 원조 정책을 감독하면서, 1960년 독립 이후 최초로 콩고 공화국을 방문하는 등 여러 외교 활동을 펼쳤다.

2011년 6월 17일, 안전보장이사회의 만장일치 추천을 받았고, 6월 21일,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연임이 확정되었다. 두 번째 임기는 2012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31일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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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유엔 가입 문제에 대해서는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 (하나의 중국 원칙)"라는 견해를 밝혔다. 2013년 9월에는 시리아 내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계획하는 미국을 견제하며, 군사력 사용은 유엔헌장 51조에 따른 자위 또는 유엔 안보리 승인이 있을 때만 합법이라고 강조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도, 반기문은 일본 외무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협력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하는 등 일본 정부와 상충되는 입장도 보였다.

2019년 10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통일교)으로부터 선학평화상 창설자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이후에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관련 조직과 관계를 맺었다. 2020년 9월에는 핵무기금지조약 지지 서한을 발표했다.

4.1. 첫 번째 임기 (2007–2011)

2007년 1월 1일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문제, 다르푸르 분쟁의 유혈사태, 끊임없는 중동의 분쟁, 환경 재앙, 급증하는 국제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에이즈의 만연, 그리고 유엔 내부의 개혁 필요성을 당면 과제로 언급하였다. 반기문은 탄자니아의 외무장관 아샤로즈 미기로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지명하고 유엔 사무국 내각(Senior Management Group)을 구성하였다.

2007년 2월 6일 유엔 총회장에서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반기문은 비대해진 유엔 평화 유지 활동국(DPKO)을 업무별로 2개 부서로 분리하고 군축 부서를 사무총장 직속에 두는 내용의 유엔 평화 유지 활동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반기문은 대한민국 외교부 재직 시절 '주사'(행정 직원)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세심함과 행정 능력을 칭찬하는 의미와 카리스마 부족, 상관에게 굽히는 모습을 비판하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한국 언론에서는 질문을 피하는 그의 능력 때문에 "미꾸라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절제된 "유교적 접근 방식"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밝은 미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직에 취임한 후에는 카리스마와 리더십 부족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 "무능한 관찰자", 또는 "무력한 사람" 등으로 풍자되기도 했다.

2018년 행사에서 연설하는 반기문
2018년 행사에서 연설하는 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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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유엔 가입 문제에 대해 반기문은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 (하나의 중국 원칙)"라는 견해를 밝혔다. 2007년 7월 19일 천수이볜 중화민국 총통이 "타이완"으로서의 유엔 가입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으나,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한 "알바니아 결의"를 이유로 이 친서를 반송했다.

2013년 9월 3일, 반기문은 "군사력 사용은 유엔헌장 51조에 따른 자위를 위한 경우, 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경우에만 합법"이라며 시리아 내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인도주의적 개입)을 계획하는 미국을 견제했다.

4.1.1. 지구 온난화

반기문은 임기 초반에 지구 온난화를 주요 문제로 인식하였다. 2007년 3월 1일 온실 가스 감축을 위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과거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우리 세대에는 핵겨울이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지금 인류에 그와 비견될 정도로 위협이 되는 것은 기후 변화이다"라고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였다. 2009년 9월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기후 회의에서 "우리의 발은 가속 페달을 밟고 있고, 우리는 나락을 향해 가고 있다"며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범국가적 협력을 거듭 촉구하였다.

4.1.2. 다르푸르 분쟁

2007년 1월 반기문은 수단의 다르푸르 분쟁 해결을 임기 중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만나 분쟁 지역에 유엔 평화유지군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수단 정부의 지속적인 반대로 지지부진했던 국제사회의 개입이 비로소 성사된 것으로, 다르푸르 분쟁 상황 해결의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 2007년 7월 3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6,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 병력이 아프리카 연합군과 합세해 분쟁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해당 지역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활동은 2007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4.2. 두 번째 임기 (2012–2016)

2011년 6월 21일, 반기문은 인류 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아 유엔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유엔 사무총장에 재선되었다. 이는 15개 상임 및 비상임 이사국과 유엔 전 회원국을 대표하는 5개 지역 그룹 의장의 연임 추천을 받아 이루어진, 사상 이례적인 일이었다. 연임에 성공한 반기문은 스웨덴의 외교관 얀 엘리아손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임명하여 내각을 재구성하였다.

반기문은 두 번째 임기 동안 중동의 평화 문제와 소수자들의 평등과 인권 문제에 대해 강조하였다. 경제적 빈곤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새마을운동을 강조하였다.

2016년 5월 경주에서 열린 유엔 NGO 컨퍼런스에서는 단월드 대표를 만났다. 그는 대통합을 이유로 신천지, 통일교 등을 가까이하여 기독교계로부터 사이비 이단 관련 비판을 받기도 했다.

4.2.1. 중동 문제

반기문은 2012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국왕이 주최하는 카이시드(KAICIID) 국제 종교포럼에 참석해, 아랍의 봄 이후 아랍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며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2016년 1월 26일, 반기문은 안전보장이사회 중동 관련 토론에서 이스라엘요르단강 서안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증오를 부추기고 국제사회를 모욕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억압받는 민족이 점령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이는 증오와 극단주의의 강력한 인큐베이터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 2016년 6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직접 방문하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각각 만나 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를 하였다. 반기문은 양측 모두 이 땅에 역사적, 종교적 연결점이 있음을 강조하며, 유엔이 제시해 온 평화 협상에 기반한 2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4.2.2. 성소수자 권리

2012년 3월 7일 반기문은 유엔 인권 이사회에서 "때가 왔다"는 연설을 통해, 이사회가 호모포비아 반대와 LGBT 권리 증진에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하였다.

4.2.3. 파리 기후 협정

2014년 9월 반기문은 뉴욕에서 열린 기후변화행진(People's Climate March)에 참가하여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어서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 변화 회의 준비를 위해 세계 지도자들을 유엔 기후 정상회의(UN Climate Summit)에 불러모았다.

파리 유엔 기후 변화 회의에서 반기문은 주관자로서 역사적인 파리 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미국 등 주요국이 빠지고 연장에 실패한 교토 의정서와 달리, 파리 협정은 2015년 12월 12일 195개국이 채택하여 체결이 성사되었다. 기후 변화 회의의 주최국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랑 파비위스는 "야심차고 균형잡힌" 이 계획은 지구 온난화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반기문은 이 협정을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국제법으로 만들기 위해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55% 이상 책임이 있는 55개국에 활발한 로비 활동을 펼쳤다. 그같은 노력에 힘입어, 미국, 중국, 브라질, 인도, 유럽 연합 등 주요 기후 변화 당사자들이 파리 협정을 비준하였고, 2016년 11월 4일부터 기후 협정으로서는 최초로 포괄적인 구속력이 적용되는 국제법으로서 효력이 발효되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유럽 의회가 비준을 마무리 하여 파리 협정의 국제법 발효가 확정되자,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하며 "지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날로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4.2.4. 우크라이나 분쟁

2016년 6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진 연설에서 반기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분쟁 등 국제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5.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2024년 한-아프리카 미래 파트너십 콘퍼런스에서 연설 중인 반기문.
2024년 한-아프리카 미래 파트너십 콘퍼런스에서 연설 중인 반기문.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2017년 9월 15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IOC는 반기문 위원장이 유엔 사무총장 재직 시절 윤리규정을 도입하여 모든 직원에게 적용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2019년 3월 21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으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적 기구의 장을 맡게 되었다.

2019년 10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통일교)으로부터 선학평화상 창설자 특별상(상금 500)을 수상했으며, 이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갔다.

2020년 9월에는 하토야마 유키오 등과 함께 핵무기금지조약 지지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5.1. 대선 출마 준비 중 사퇴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 재직 시절부터 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곤 하였다. 물론 그의 대선 출마가 부적절하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러나 2016년 후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고, 같은 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자, 반기문은 12월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선 출마 의지를 밝혔다. 이후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2017년 1월 12일 귀국하여 본격적인 대선 출마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언론에서 각종 의혹이 제기되었고, 결국 대선 출마 준비를 시작한 지 20일 만인 2월 1일, 전격적으로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5.2. 그 외 활동

2024년 한-아프리카 미래 파트너십 콘퍼런스에서 연설 중인 반기문.
2024년 한-아프리카 미래 파트너십 콘퍼런스에서 연설 중인 반기문.

2017년 9월 15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IOC는 반기문 위원장이 유엔 사무총장 재직 시절 가장 먼저 한 일이 윤리규정을 도입해 모든 직원에게 적용한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반 위원장은 유엔 사무총장 시절 엄격한 윤리 기준, 진실성, 책임감, 투명성으로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2019년 3월 21일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추천으로 청와대에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적 기구를 맡아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을 수락했다.

2019년 10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으로부터 선학평화상 창설자 특별상(상금 500)을 수상했으며, 이후 2021년 5월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전위조직인 “천주평화연합”(UPF)이 주최하는 “제6회 희망전진대회”에 메시지를 보냈다. 2022년 2월에는 UPF가 주최하는 “월드서밋 2022·한반도 평화서밋”에 공동조직위원장으로 훈센 캄보디아 총리와 함께 이름을 올리는 등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2020년 9월에는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와 타나카 마키코, 스페인의 하비에르 솔라나 등과 함께 핵무기금지조약 지지와 22개국의 현직 정치 지도자들에게 조약 참여를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6. 학력

* 충주교현초등학교 졸업
* 충주중학교 졸업
* 충주고등학교 졸업
* 1970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 1985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 2008년 페어리디킨슨대학교 명예박사
* 2010년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명예박사
* 2010년 난징대학교 명예박사
* 2015년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 명예박사
* 201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 2016년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교 명예박사
* 2016년 메릴랜드대학교(UMCP) 명예박사

7.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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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경력
1970년 2월제3회 외무고시 합격
1970년 5월외교부 입부
1974년유엔 대한민국 상주관측단(대한민국은 1991년 9월 17일 유엔 회원국이 됨) 일등서기관
1976년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
1979년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유엔과의 협력국 부서장 역임
1980년 11월외무부 국제연합과 과장
1985년 4월국무총리비서실 의전비서관
1987년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
1990년 ~ 1992년외무부 미주국 국장
1992년 2월외무부 장관특별보좌관
1992년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한 후 남북공동핵관리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1993년 ~ 1994년한국의 주미대사 대리 역임
1995년 2월외무부 외교정책기획실장
1995년정책기획 및 국제기구 차관
1996년외무부 제1차관보,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1996년 2월 ~ 11월대통령비서실 의전수석비서관
1998년 5월 ~ 2000년 1월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
1999년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PrepCom) 준비위원회 의장
2000년 1월 ~ 2001년 4월외교통상부 차관
2001년 9월 ~ 2003년제56차 UN총회 의장비서실 실장
2002년외교부 본부대사
2003년 2월 ~ 2004년 1월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2004년 1월 ~ 2006년 11월제33대 외교통상부 장관
2005년 9월외교부 장관으로서 베이징에서 열린 6자 회담 4차 회의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에 관한 공동성명 채택을 위한 외교적 노력에서 주도적인 역할 수행
2007년 1월 ~ 2016년 12월제8대 UN 사무총장
2017년 7월연세대학교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 석좌교수
2017년 9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
2019년 4월 ~ 2021년 4월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
2019년 4월 ~보다나은미래를위한 반기문재단 이사장
기타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고문, 보아오포럼 이사장,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이사회 의장, 사단법인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명예조직위원장
2022년 2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초빙석좌교수,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 명예원장
2022년 7월충청북도 특별명예고문
2023년 5월 ~재단법인 백선엽장군기념재단 고문

8.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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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훈장 및 수상
1975년녹조근정훈장
1986년홍조근정훈장
2001년오스트리아 대훈장
2002년브라질 리오 블랑코 대십자 훈장
2004년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
2006년페루 태양 대십자 훈장, 제6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최고대상, 잡지인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상
2007년제1회 포니정 혁신상
2008년국제로타리 영예의 대상, 필리핀 최고 훈장
2009년델리 지속 가능 개발에 관한 정상회담 지속가능 개발 지도자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0년UCLA 메달
2012년제11회 서울평화상,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 탁월한 국제 지도자상
2014년하버드대학교 올해의 인도주의자상
2015년티퍼래리 국제평화상, 대한적십자사 인도장 금장
2016년네덜란드 사자 기사 대십자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그랑 오피시에) 훈장
2017년국민훈장 무궁화장
2020년선학평화상 특별상
2024년몽골 최고 훈장 (칭기스 칸)

9.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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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유순택 부부와 버락 오바마·미셸 오바마 부부
반기문·유순택 부부와 버락 오바마·미셸 오바마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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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아버지반명환? ~ 2005~6년
삼촌반필환? ~ 2016년, 충주시 부시장
어머니신현순1925년 ~ 2019년
외삼촌신현식1931년 ~, 중앙대학교 건축과 교수
첫째 남동생반기상
둘째 남동생반기호
여동생반정란
여동생반경희
배우자유순택충주고등학교와 충주여자고등학교 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나 1971년 결혼
장녀반선용
장남반우현서울대학교 항공우주학과 학사, 1999년 대한민국 육군 병장 제대, UCLA MBA, 유원석 변호사의 딸 유제영과 결혼
차녀반현희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
조카반영미뉴욕 마스터카드 부사장
조카반주현뉴욕 부동산투자은행 파트너, 전 뉴욕 대학교 겸임교수

10. 평가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 재임 기간과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그의 업적과 논란이 함께 언급된다.

반기문의 친족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2017년 1월, 반기문의 형 반기상과 조카 반주현은 베트남 건물 단지 800 매각 시도와 관련하여 중동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8년 9월, 반주현은 맨해튼 연방 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타이완의 유엔 가입 문제에 대해 반기문은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하나의 중국 원칙)"라는 견해를 밝혔다. 2007년 7월 19일 천수이볜 중화민국 총통이 "타이완"으로서의 유엔 가입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으나,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한 "알바니아 결의"를 이유로 이 친서를 반송했다. 미국일본은 타이완이 국가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고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만, 알바니아 결의에는 타이완의 단독 유엔 가입을 막는 표현은 없다고 항의하고 있다.

2013년 9월 3일, 반기문은 "군사력 사용은 유엔헌장 51조에 따른 자위를 위한 경우, 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경우에만 합법"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시리아 내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인도주의적 개입)을 계획하는 미국을 견제했다.

10.1. 긍정적 평가

2011년 6월, BBC는 반기문이 외교관들 사이에서 근면성실하고 진지한 지도자로 명망을 얻고 있으며, 합의와 조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2016년 9월,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 동안 극빈층 비율과 영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고, 여아 교육 비율이 최고 수준을 경신했으며, 주요 분쟁에서 세계대전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반기문이 이끌어낸 파리 기후 협정은 세계 온실가스 감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2016년 11월,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강하고 인간적인 지도자”이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기에 적합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국제 외교안보 전문가 앤더스 코(Anders Corr)는 ‘적합한 리더로서의 반기문(Ban Ki-moon: Fit To Lead)’이란 기고 글에서 반기문 총장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비판한 사실을 언급하며 “그가 강인한 외교를 펼쳤다”고 밝혔다. 반 총장은 시리아 민간인 보호를 목표로 하는 안보리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통과되지 못하자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겨냥했고, 유엔 총회가 긴급회의를 개최하도록 압박했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예멘 공습을 비판하고,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 정착촌 건설과 이란의 집회 및 언론 탄압을 비난한 것도 그가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갖춘 사례로 제시했다. 또한, 한국의 긴장관계를 고려해도 국제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기문의 나이가 많다는 우려에는 "판단력이 좋고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며 별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를 보였다.

2016년 12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반기문이 파리 기후 협정을 이끌어내고 국제법으로 발효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반기문을 세계 주요 사상가 100인 중 정책결정자 부문에 선정함으로써 그의 국제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였다.

10.2. 부정적 평가

2009년 6월, 보수 언론인 제이콥 하일브룬(Jacob Heilbrunn)은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 기고문에서 반기문이 "아프가니스탄 재건, 핵확산, 난민 문제 등에 개입하지 않아 유엔을 무의미한 조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같은 해 6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반기문의 중간 업무 평가에서 10점 만점 기준으로 주요 강대국에 맞서는 진실성에 3점, 큰 그림을 그리는 데 8점, 평화 유지 임무에 6점, 관리·조정 능력에 2점을 주어 그의 업무 수행을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2016년 5월, 《이코노미스트》는 다시 반기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우둔하며(the dullest), 최악의 총장 중 하나(among the worst)"라고 혹평했다.

2017년 1월, 반기문의 형 반기상 씨와 조카 반주현 씨는 베트남의 건물 단지 800 매각 시도와 관련하여 중동 고위 관리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8년 9월, 반주현 씨는 맨해튼 연방 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타이완의 유엔 가입 문제에 대해 반기문은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하나의 중국 원칙)"라는 견해를 밝혔다. 2007년 7월 19일 천수이볜 중화민국 총통이 "타이완"으로서의 유엔 가입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으나,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한 "알바니아 결의"를 이유로 이 친서를 반송했다. 미국일본은 타이완이 국가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고 유엔 가입에 반대하지만, 알바니아 결의에는 타이완의 단독 유엔 가입을 막는 표현은 없다고 항의하고 있다.

2013년 9월 3일, 반기문은 기자회견에서 "군사력 사용은 유엔헌장 51조에 따른 자위를 위한 경우, 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경우에만 합법"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시리아 내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인도주의적 개입)을 계획하는 미국을 견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