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7TP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7TP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폴란드가 개발한 전차로, 영국 비커스 6톤 전차를 기반으로 폴란드식 개량을 거쳐 탄생했다. 1930년대에 개발되어 디젤 엔진, 37mm 대전차포, 강화된 장갑을 갖춘 단포탑형 7TP가 주력으로 생산되었다. 7TP는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의 주력 전차였으나, 제한적인 생산량과 열악한 장갑으로 인해 전쟁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7TP는 쌍포탑형과 단포탑형, 그리고 파생형인 C7P 견인차와 9TP가 존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2차 세계 대전의 폴란드 기갑 전투 차량 - 쿠부시
    쿠부시는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폴란드 국내군이 나치 독일군에 맞서 자체 제작한 장갑차로, 쉐보레 트럭 섀시 기반에 강철판을 부착하여 제작되었으며, 바르샤바 대학교 공격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작전 성공에는 기여하지 못했고, 폴란드 국내군의 사기 진작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폴란드의 전차 - PL-01
    폴란드에서 개발이 계획되었으나 양산되지 못한 PL-01은 CV90 섀시 기반에 모듈식 복합 장갑, 스텔스 기능, 현대적인 주력 전차 레이아웃, 무인 포탑, 105mm 또는 120mm 주포, 능동 방어 시스템 등을 특징으로 하는 경량 전차이다.
  • 폴란드의 전차 - PT-91
    PT-91은 1990년대 초 폴란드가 T-72M1 전차의 성능 개선을 위해 개발한 주력 전차이며, ERAWA 반응 장갑, 사격 통제 시스템, 엔진 등을 개선하여 기동성, 방호력, 화력을 향상시켰고, 폴란드, 말레이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운용 중이다.
  • 경전차 - 피아트 M14/41
    피아트 M14/41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이 사용한 중형전차로, M13/40 전차의 개선 버전이며 디젤 엔진을 탑재했지만 신뢰성 문제와 화재에 취약했고, 약 800대가 생산되어 북아프리카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노획된 차량은 연합군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고, 세모벤테 da 90/53 구축전차의 기반이 되었다.
  • 경전차 - 피아트 M11/39
    피아트 M11/39는 제2차 세계 대전 초 이탈리아 육군이 운용한 중형 전차로, 돌파 전차로서 개발되었으나 고정된 주포 배치와 리벳 접합식 장갑 등의 결함으로 제한적인 성능을 보이며 M13/40 전차로 대체되었다.
7TP
7TP 전차 정보
단일 포탑 7TP
단일 포탑 7TP
개요
원산지폴란드 제2공화국
사용 국가폴란드 제2공화국
나치 독일 (노획)
종류경전차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생산 기간1935년-1939년
생산량149대 (+13대 9TP 시제품)
파생형쌍포탑 7TP
단포탑 7TP
9TP (시제품만)
제원
무게9.9톤
길이4.6m
2.4m
높이2.27m
승무원3명 (전차장, 포수, 운전수)
장갑최대 17mm
주무장37mm 보포스 wz. 37 포
부무장7.92mm Ckm wz.30 기관총 1정
엔진PZInż.235(Saurer VBLDd) 액체 냉각 직렬 6기통 4행정 직접 분사 디젤 엔진
엔진 출력110 마력 (80 kW)
마력 대 중량비11 마력/톤
현가 장치판 스프링 보기
지상고0.38m
작전 거리150km
속도37km/h

2.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을 되찾은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에 직면하여 군사력 강화, 특히 기갑 전력 구축에 힘을 쏟았다.[14] 1920년대 말, 폴란드는 구식화된 르노 FT-17 경전차를 대체할 신형 전차 도입을 추진했다.[8]

1931년, 폴란드는 영국의 비커스 6톤 경전차(Mk.E) 50대 구매 계약과 함께 라이선스 생산권을 획득했다.[9] 이 50대 중 38대는 쌍포탑형 Type A였으나, 나중에 부품 추가 구매로 22대가 단포탑 Type B 사양으로 개수되었다. 폴란드 설계자들은 늦어도 1936년까지 비커스E를 개량하고자 했다.

폴란드에서의 생산형은 "PZInż.235"[10] 디젤 엔진으로 환장하여 기관실 높이가 높아지고, 차체 장갑 두께가 증가(전면 13mm에서 17mm)하고, 서스펜션이 강화되는 등 독자적인 개량이 이루어졌다.[11] 이 폴란드 국산 개량형은 "폴란드군 7톤 전차"를 의미하는 7TP로 명명되었다.[14]

1934년부터 생산된 초기 형식은 wz.30 기관총(7.92mm)을 장비한 쌍포탑형이었다. 1937년 말 또는 1938년부터 주 양산형인 보포스 wz.37 전차포를 탑재한 단포탑형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외에 군트라흐 전차 잠망경, 다른 공기 조절 시스템, 무전기(개량형)가 추가되었다.[14]

기동 연습 도중 사진.


단포탑형 7TP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폴란드가 보유한 가장 유력한 전투 차량이었으나, 생산량은 130~140대에 불과하여 실전에서의 활약은 제한적이었다.

250px


비커스 6톤 경전차(Mk.E) 면허 생산권을 획득한 폴란드는 독자적인 개량을 통해 성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1934년부터 7TP의 생산이 시작되었다.[11] 주요 개량점은 디젤 엔진 채용, 37mm 대전차포 탑재, 차량 장갑 강화였다. 원래 비커스E에 장착된 암스트롱-시들리 엔진 대신 스위스제 사우어 디젤 엔진을 면허 생산하여 교체했고,[14] 차체 전면 장갑은 13mm에서 17mm로 두꺼워졌다. 그 외에 군트라흐 전차 잠망경과 다른 공기 조절 시스템, 무전기 등이 추가되었다.[14]

7TP는 2가지 파생형이 생산되었는데, 2개의 포탑에 Ckm wz.30 기관총 2정을 장착한 형과 1개 포탑에 37mm 보포스 wz.37 전차포를 탑재한 형이었다. 초기 시험 후 다포탑형은 화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명확해져 단일 포탑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14] 2포탑형 7TP는 1934년에 개발되어 1935년 봄에 양산 승인을 받았으며, 임시 방편으로 24대만 생산되었다. 초기 생산분은 비커스 전차에서 떼어낸 포탑 22개를 장착했다.[14]

뮌헨 협정 이후 1938년 10월 트란스-올자를 점령한 7TP의 쌍포탑형


단포탑형은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탑재하기로 결정되었고, 1937년 말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1938년 말부터 생산된 개량형은 2N/C 무전기를 탑재했다.[14]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2포탑형 대부분은 단일 포탑형으로 개조되었고, 24대만이 훈련용으로 운용되다 바르샤바 공방전에 투입되었다.[14]

모든 7TP 전차들은 1939년 독일침공에 맞섰다. 7TP는 당시 독일 경전차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수가 적어 전쟁 결과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포스 wz.37는 4호 전차를 포함하여 당시 모든 독일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지만, 7TP 자체는 장갑이 얇아 폭격에 취약했다.

7TP는 "7톤, 폴란드"를 의미했지만, 실제로는 초기 시제품 이후 무게가 9톤으로 증가했다. 7TP가 종종 세계 최초의 (생산된) 디젤 엔진 전차로 여겨지지만, 이 명칭은 1934년부터 디젤 엔진으로 생산된 일본 89식 B형 이-고(乙)에게 돌아간다.[1]

1938년 파스테보 자클라디 인지니에리는 7TP의 장갑 강화 버전인 9TP의 시제품 13대를 제작했다.[2][3] 9TP는 생산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시제품은 1939년 9월 바르샤바 공방전에 사용되었다.[4]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노획한 7TP를 "Pz.kpfw.7TP(p)"로 하여 점령지 경비 등에 사용했다.

7TP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기갑 부대의 주력 전차로 활약했다.[16] 2개의 경전차 대대(1경전차대대 및 2경전차대대)에 배치되었으며, 이 경전차 대대는 폴란드군 자동차화 여단의 일부로 편성되었다.[16]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1대를 포함하여 나머지 전차들은 바르샤바 방위전 당시 급조된 전차 부대에 보내져 전투를 치렀다.[16]

37mm 주포 탑재형 49대로 편성된 1경전차대대는 폴란드 육군의 전략 예비 일부로서 프루시군(Prusy Army)에 배속되어 싸웠다.[16] 1939년 9월 4일 전투에 투입되어 다양한 역할로 구분되어 싸웠는데, 대부분은 후퇴를 엄호하기 위한 기동 예비 역할이었다.[16] 프제드부즈(Przedbórz)전투, 술레유프(Sulejów) 전투, 이노부즈(Inowłódz) 전투, 오드지부(Odrzywół) 전투와 드제비차(Drzewica) 전투 등에 참가했다.[16] 9월 8일, 폴란드군 주력부대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다음 날 주력부대가 분산되어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다.[16] 대대 일부는 그워바추프(Głowaczów) 전투에서 괴멸됐고, 그 사이 9월 13일에 잔여 전차들이 비스툴라강 다른 쪽을 통해 돌파하는 데 성공하여 루블린부대(Armia Lublin)에 합류하여 스테판 로베츠키(Stefan Rowecki) 대령의 바르샤바 기갑자동차화여단에 배속되었다.[16] 여단의 일부로서, 대대는 유제푸프(Józefów) 전투에 참가했으며, 르부프(Lwów)와 루마니아 교두보로 탈출을 시도하는 폴란드군 선봉대의 일부를 이루었다.[16] 9월 21일 토마슈프(Tomaszów Lubelski) 루벨스키 전투 이후, 남은 전차를 파괴한 뒤 독일군에게 투항했다.[16]

37mm 주포 탑재형 49대로 편성된 2경전차대대는 루치 군의 피오트르쿠프 작전 그룹(Operational Group)에 배속되었다.[16] 9월 4일, 베우하투프(Bełchatów) 프루드카 강(Prudka) 근처 전투에 투입되었다.[16] 다음 날, 대대는 피오트루쿠프 에서 반격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일부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독일의 포격으로 인해 실패했다. 대대는 전차 2대를 잃었으며 6대 이상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24대만 사용할 수 있었다.[16] 대대는 바르샤바로 집결했고, 제 60 폴란드 보병사단이 수비중인 브제시치로 철수했다.[16] 9월 15일, 이틀 간 길게 계속된 브워다바(Włodawa) 전투에 참가했으나, 독일 공군의 폭격에 피해를 입고 남서쪽으로 철수했다.[16] 살아남은 전차들은 기름 부족으로 전차병들이 파괴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과 연합하여 폴란드를 침공한 9월 17일에 전차병들과 부대 지휘부는 루마니아 로 망명했다.[16]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7TP 전차.


바르샤바에 남은 전차들은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에 1경전차중대 및 2경전차중대로 편성되었다.[16] 1중대는 이전에는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다포탑형 11대로 편성되었다.[16] 바르샤바 공방전 시작 단계에서 1중대는 중요한 공항이있는 바르샤바 교외 오켄치에(Okęcie) 전투에 참가했다.[16] 대전차 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1중대 소속 전차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9월 12일에 후방으로 물러나 잔여 병력 및 전차들은 2중대에 합류했다.[16]

2중대는 37mm 단포탑형 11대 뿐만 아니라 숫자 미상의 기갑 차량을 운용했다.[16] 2중대는 독일군 보병 및 기갑 차량에 맞서서 볼라(Wola) 지구에서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렀으며, 바브지세프(Wawrzyszew) 마을에서 반격 및 독일의 공세 저지를 수행했다.[16] 9월 15일, 중대는 브주라(Bzura )전투 후 바르샤바 북쪽 캄피노스 숲을 지나 후퇴하고 있던 포즈난 부대(Armia Poznań)와 합류하기 위해 공격 작전의 선봉 부대 편성 명령을 받았다.[16] 루프트바페의 공중 폭격으로 병력과 전차에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미세한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16] 남은 7TP 전차들은 9월 27일에 바르샤바가 함락할 때까지 전선을 오가며 전투를 치루다, 바르샤바가 함락된 뒤 전차를 파괴했으며 같은 시기 소련의 폴란드 침공동안 1대의 7TP가 노획되었다.[16]

7TP에 탑재된 보포스 wz.37는 4호 전차를 포함하여 당시의 모든 독일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전을 통해 밝혀졌다.[16] 한편으론 7TP는 장갑이 얇아 폭격에 속수무책이었다.[16]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노획한 7TP를 "Pz.kpfw.7TP(p)"로 하여, 점령지의 경비 등에 사용했다.[11]

2. 1. 개발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을 되찾은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에 직면하여 군사력 강화, 특히 기갑 전력 구축에 힘을 쏟았다.[14] 1920년대 말, 폴란드는 구식화된 르노 FT-17 경전차를 대체할 신형 전차 도입을 추진했다.[8]

1931년, 폴란드는 영국의 비커스 6톤 경전차(Mk.E) 50대 구매 계약과 함께 라이선스 생산권을 획득했다.[9] 이 50대 중 38대는 쌍포탑형 Type A였으나, 나중에 부품 추가 구매로 22대가 단포탑 Type B 사양으로 개수되었다. 폴란드 설계자들은 늦어도 1936년까지 비커스E를 개량하고자 했다.

폴란드에서의 생산형은 "PZInż.235"[10] 디젤 엔진으로 환장하여 기관실 높이가 높아지고, 차체 장갑 두께가 증가(전면 13mm에서 17mm)하고, 서스펜션이 강화되는 등 독자적인 개량이 이루어졌다.[11] 이 폴란드 국산 개량형은 "폴란드군 7톤 전차"를 의미하는 7TP로 명명되었다.[14]

1934년부터 생산된 초기 형식은 wz.30 기관총(7.92mm)을 장비한 쌍포탑형이었다. 1937년 말 또는 1938년부터 주 양산형인 보포스 wz.37 전차포를 탑재한 단포탑형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외에 군트라흐 전차 잠망경, 다른 공기 조절 시스템, 무전기(개량형)가 추가되었다.[14]

단포탑형 7TP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폴란드가 보유한 가장 유력한 전투 차량이었으나, 생산량은 130~140대에 불과하여 실전에서의 활약은 제한적이었다.

2. 2. 폴란드식 개량

비커스 6톤 경전차(Mk.E) 면허 생산권을 획득한 폴란드는 독자적인 개량을 통해 성능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1934년부터 7TP의 생산이 시작되었다.[11] 주요 개량점은 디젤 엔진 채용, 37mm 대전차포 탑재, 차량 장갑 강화였다. 원래 비커스E에 장착된 암스트롱-시들리 엔진 대신 스위스제 사우어 디젤 엔진을 면허 생산하여 교체했고,[14] 차체 전면 장갑은 13mm에서 17mm로 두꺼워졌다. 그 외에 군트라흐 전차 잠망경과 다른 공기 조절 시스템, 무전기 등이 추가되었다.[14]

7TP는 2가지 파생형이 생산되었는데, 2개의 포탑에 Ckm wz.30 기관총 2정을 장착한 형과 1개 포탑에 37mm 보포스 wz.37 전차포를 탑재한 형이었다. 초기 시험 후 다포탑형은 화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명확해져 단일 포탑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14] 2포탑형 7TP는 1934년에 개발되어 1935년 봄에 양산 승인을 받았으며, 임시 방편으로 24대만 생산되었다. 초기 생산분은 비커스 전차에서 떼어낸 포탑 22개를 장착했다.[14]

단포탑형은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탑재하기로 결정되었고, 1937년 말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1938년 말부터 생산된 개량형은 2N/C 무전기를 탑재했다.[14]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2포탑형 대부분은 단일 포탑형으로 개조되었고, 24대만이 훈련용으로 운용되다 바르샤바 공방전에 투입되었다.[14]

모든 7TP 전차들은 1939년 독일침공에 맞섰다. 7TP는 당시 독일 경전차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수가 적어 전쟁 결과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포스 wz.37는 4호 전차를 포함한 당시 모든 독일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지만, 7TP 자체는 장갑이 얇아 폭격에 취약했다.

7TP는 "7톤, 폴란드"를 의미했지만, 실제로는 초기 시제품 이후 무게가 9톤으로 증가했다. 7TP가 종종 세계 최초의 (생산된) 디젤 엔진 전차로 여겨지지만, 이 명칭은 1934년부터 디젤 엔진으로 생산된 일본 89식 B형 이-고(乙)에게 돌아간다.[1]

1938년 파스테보 자클라디 인지니에리는 7TP의 장갑 강화 버전인 9TP의 시제품 13대를 제작했다.[2][3] 9TP는 생산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시제품은 1939년 9월 바르샤바 공방전에 사용되었다.[4]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노획한 7TP를 "Pz.kpfw.7TP(p)"로 하여 점령지 경비 등에 사용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7TP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기갑 부대의 주력 전차로 활약했다.[16] 2개의 경전차 대대(1경전차대대 및 2경전차대대)에 배치되었으며, 이 경전차 대대는 폴란드군 자동차화 여단의 일부로 편성되었다.[16]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1대를 포함하여 나머지 전차들은 바르샤바 방위전 당시 급조된 전차 부대에 보내져 전투를 치렀다.[16]

37mm 주포 탑재형 49대로 편성된 1경전차대대는 폴란드 육군의 전략 예비 일부로서 프루시군(Prusy Army)에 배속되어 싸웠다.[16] 1939년 9월 4일 전투에 투입되어 다양한 역할로 구분되어 싸웠는데, 대부분은 후퇴를 엄호하기 위한 기동 예비 역할이었다.[16] 프제드부즈(Przedbórz)전투, 술레유프(Sulejów) 전투, 이노부즈(Inowłódz) 전투, 오드지부(Odrzywół) 전투와 드제비차(Drzewica) 전투 등에 참가했다.[16] 9월 8일, 폴란드군 주력부대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다음 날 주력부대가 분산되어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다.[16] 대대 일부는 그워바추프(Głowaczów) 전투에서 괴멸됐고, 그 사이 9월 13일에 잔여 전차들이 비스툴라강 다른 쪽을 통해 돌파하는 데 성공하여 루블린부대(Armia Lublin)에 합류하여 스테판 로베츠키(Stefan Rowecki) 대령의 바르샤바 기갑자동차화여단에 배속되었다.[16] 여단의 일부로서, 대대는 유제푸프(Józefów) 전투에 참가했으며, 르부프(Lwów)와 루마니아 교두보로 탈출을 시도하는 폴란드군 선봉대의 일부를 이루었다.[16] 9월 21일 토마슈프(Tomaszów Lubelski) 루벨스키 전투 이후, 남은 전차를 파괴한 뒤 독일군에게 투항했다.[16]

37mm 주포 탑재형 49대로 편성된 2경전차대대는 루치 군의 피오트르쿠프 작전 그룹(Operational Group)에 배속되었다.[16] 9월 4일, 베우하투프(Bełchatów) 프루드카 강(Prudka) 근처 전투에 투입되었다.[16] 다음 날, 대대는 피오트루쿠프 에서 반격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고 일부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독일의 포격으로 인해 실패했다. 대대는 전차 2대를 잃었으며 6대 이상이 사용할 수 없게 되어 24대만 사용할 수 있었다.[16] 대대는 바르샤바로 집결했고, 제 60 폴란드 보병사단이 수비중인 브제시치로 철수했다.[16] 9월 15일, 이틀 간 길게 계속된 브워다바(Włodawa) 전투에 참가했으나, 독일 공군의 폭격에 피해를 입고 남서쪽으로 철수했다.[16] 살아남은 전차들은 기름 부족으로 전차병들이 파괴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과 연합하여 폴란드를 침공한 9월 17일에 전차병들과 부대 지휘부는 루마니아 로 망명했다.[16]

바르샤바에 남은 전차들은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에 1경전차중대 및 2경전차중대로 편성되었다.[16] 1중대는 이전에는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다포탑형 11대로 편성되었다.[16] 바르샤바 공방전 시작 단계에서 1중대는 중요한 공항이있는 바르샤바 교외 오켄치에(Okęcie) 전투에 참가했다.[16] 대전차 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1중대 소속 전차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9월 12일에 후방으로 물러나 잔여 병력 및 전차들은 2중대에 합류했다.[16]

2중대는 37mm 단포탑형 11대 뿐만 아니라 숫자 미상의 기갑 차량을 운용했다.[16] 2중대는 독일군 보병 및 기갑 차량에 맞서서 볼라(Wola) 지구에서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렀으며, 바브지세프(Wawrzyszew) 마을에서 반격 및 독일의 공세 저지를 수행했다.[16] 9월 15일, 중대는 브주라(Bzura )전투 후 바르샤바 북쪽 캄피노스 숲을 지나 후퇴하고 있던 포즈난 부대(Armia Poznań)와 합류하기 위해 공격 작전의 선봉 부대 편성 명령을 받았다.[16] 루프트바페의 공중 폭격으로 병력과 전차에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미세한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16] 남은 7TP 전차들은 9월 27일에 바르샤바가 함락할 때까지 전선을 오가며 전투를 치루다, 바르샤바가 함락된 뒤 전차를 파괴했으며 같은 시기 소련의 폴란드 침공동안 1대의 7TP가 노획되었다.[16]

7TP에 탑재된 보포스 wz.37는 4호 전차를 포함하여 당시의 모든 독일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전을 통해 밝혀졌다.[16] 한편으론 7TP는 장갑이 얇아 폭격에 속수무책이었다.[16]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노획한 7TP를 "Pz.kpfw.7TP(p)"로 하여, 점령지의 경비 등에 사용했다.[11]

3. 파생형


C7P: 7TP를 기반으로 한 비장갑 포병 견인차/차량 회수차이다. 약 150량이 생산되어 주로 220mm/wz.32 유탄포(榴弾砲) 견인에 사용되었다.[12] 초기 시제품인 C6T는 엔진이 차체 전방에, 궤도 구동륜이 후방, 유도륜이 전방에 위치하는 전차와 반대 레이아웃이었지만, C7P에서는 전차와 동일한 배치로 변경되었다.
9TP: 7TP의 개량형으로, 보다 소형화된 엔진을 탑재하고 장갑 형태를 재검토한 모델이 계획되었다. 사우어 CT1D(Saurer CT1D)(폴란드 라이선스 생산 명칭, PZInż.155) 디젤 엔진 및 PZInż.725 가솔린 엔진 탑재형 2종이 개발되었으나, 양산되지는 않았다.[12] 1대의 7TP(차량 등록 번호 1766)에 자우러 CT1D를 탑재하여 테스트되었다. 1939년 여름, PZInż에서 2대의 시제차가 제작되었고, 9월까지 11량이 생산되었다는 자료도 있지만, 실제로 장갑 형태를 변경한 "강화형 7TP"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12]

3. 1. 7TP 쌍포탑형



7TP 최초의 양산형으로, 영국 비커스 6톤 마크 E 전차의 쌍포탑형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2개의 포탑을 가지고 있으며, wz.30 기관총 2정을 장비했다.[12] 24대가 생산되었다.[12] 증적된 기관실 외의 차체 기본 구성은 비커스 Mk.E에 준하지만 약간 장갑이 두꺼워졌으며, 점검구가 설치된 차체 전면 상부 장갑판, 소규모 개수된 하부 구조 등 세부적인 차이점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는 대부분 단일 포탑 버전으로 개조되었고, 폴란드군에는 단 24대의 쌍포탑형이 남아 있었다.[12] 자료에 따라 "7TPdw"라고 표기된 경우가 있는데(dw는 폴란드어 dwuwieżowy=쌍포탑의 약자), 이는 전후 서방 측 문헌에서 편의상 사용된 호칭이며, 이 전차가 사용되던 당시에는 특별한 구분 없이 불렸다.[12]

3. 2. 7TP 단포탑형

7TP의 주력 양산형으로, 보포스 37mm 전차포를 탑재한 단일 포탑을 장착했다.[12] 100대 이상이 생산되었으며,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 기갑 전력의 핵심이었다.[12] 프로토타입 포탑은 스웨덴 보포스사에서 설계했으며, 란즈베르크 장갑차, 란즈베르크 L60계 경전차 포탑과 유사한 형태를 지녔다. 양산형에서는 포탑 후방 바스켓, 상면 우측 해치, 군드라흐식 페리스코프가 장착되었다.[12] 초기 생산형은 기관실 후면에 루버와 낮은 위치의 배기 머플러를 가졌지만, 표준형에서는 루버가 없어지고 머플러 위치가 높아졌다. 일부 자료에서는 "7TPjw" (jednowieżowy: 단포탑)로 표기되기도 한다.[12]

7TP 단포탑형

3. 3. 기타 파생형


C7P: 7TP 차체를 기반으로 한 비장갑 포병 견인차/차량 회수차이다. 약 150량이 생산되어 주로 220mm/wz.32 유탄포(榴弾砲) 견인에 사용되었다.[12] 초기 시제품인 C6T는 엔진이 차체 전방에, 궤도 구동륜이 후방, 유도륜이 전방에 위치하는 전차와 반대 레이아웃이었지만, C7P에서는 전차와 동일한 배치로 변경되었다.
9TP: 7TP의 개량형으로, 보다 소형화된 엔진을 탑재하고 장갑 형태를 재검토한 모델이 계획되었다. 사우어 CT1D(Saurer CT1D)(폴란드 라이선스 생산 명칭, PZInż.155) 디젤 엔진 및 PZInż.725 가솔린 엔진 탑재형 2종이 개발되었으나, 양산되지는 않았다.[12] 1대의 7TP(차량 등록 번호 1766)에 자우러 CT1D를 탑재하여 테스트되었다. 1939년 여름, PZInż에서 2대의 시제차가 제작되었고, 9월까지 11량이 생산되었다는 자료도 있지만, 실제로 장갑 형태를 변경한 "강화형 7TP"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12]

4. 운용국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20대의 7TP jw를 노획하였다.
7TP jw 133대, 7TP dw 16대, 9TP (프로토타입) 13대를 운용하였다.

소련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노획한 7TP jw 1대를 노획하였고, 최소 4대를 시험용으로 사용하였다.[7]

5. 평가 및 의의

참조

[1] 서적 Japanese Tanks 1939—1945 Osprey Publishing
[2] 서적 Wrzesień 1939. Pojazdy Wojska Polskiego. Barwa i broń. Wydawnictwa Komunikacji i Łączności
[3] 간행물 Czołg 7TP w dokumentach Centralnego Archiwum wojskowego
[4] 기타 op. cit.
[5] 서적 File din trecutul artileriei române moderne Editura Militară
[6] 서적 7TP vol. II
[7] 서적 Polskij tank TP Strategija KM
[8] 문서
[9] 기타
[10] 문서
[11] 문서
[12] 웹사이트 Polish Armour of 1918 - 1939 / "Polish light tank 7TP" http://derela.republ[...]
[13] 문서
[14] 웹인용 7TP / 7-Tonowy Polski Light Tank http://www.achtungpa[...] Achtungpanzer.com 2007-02-17
[15] 문서
[16] 웹사이트 영어 위키피디어에 https://en.wikipedi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