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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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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서당은 신라 시대에 조직된 군사 조직으로,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 보덕인, 말갈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가 각 민족을 통합하고 신라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정책의 일환으로, 신라의 민족 융합 정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는다. 9서당은 녹금서당, 백금서당, 자금서당, 황금서당, 흑금서당, 벽금서당, 적금서당, 청금서당, 비금서당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서당은 구성원, 설치 연도, 옷깃 색깔에 차이를 보인다.

2. 역사

서당의 '서(誓)'는 '맹세하다'는 의미이며 '당(幢)'은 군대를 가리킨다. 9서당은 옷깃 색깔로 각 부대를 구별했는데, 녹금서당(綠衿誓幢)은 녹자(綠紫)색, 자금서당(紫衿誓幢)은 자록(紫綠)색,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백청(白靑)색, 황금서당(黃衿誓幢)은 황적(黃赤)색, 흑금서당(黑衿誓幢)은 흑적(黑赤)색, 벽금서당(碧衿誓幢)은 벽황(碧黃)색, 적금서당(赤衿誓幢)은 적흑(赤黑)색, 청금서당(靑衿誓幢)은 청백(靑白)색 옷깃을 착용했다. 다만 비금서당(緋衿誓幢)의 옷깃 색은 전해지지 않는다.[1] 9서당은 보병과 기병의 혼합부대로, 사령관인 장군 이하 다수의 군관들이 배치되었다.

9서당은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 말갈인을 받아들여 부대를 구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신라인 3개 부대, 고구려인과 보덕국인 3개 부대, 백제인 2개 부대, 동예(東濊) 세력으로 추정되는 말갈인 1개 부대로 구성되어 피정복민을 포용하고 민족 융합에 기여했다. 이후 시위부(侍衛府)가 왕궁 수비를, 9서당이 수도 방어와 치안을 맡으며 신라 최전성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2. 1. 초기 서당 설치 (진평왕)

신라의 군사 체계인 서당(誓幢)은 진평왕(眞平大王) 5년(583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기존의 육정(六停)과는 달리 귀족 출신 무장들의 모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1] 진평왕 35년(613년)에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2. 2. 9서당 체제 완성 (문무왕 ~ 효소왕)

문무왕 대에 백금서당(白衿誓幢), 자금서당(紫衿誓幢), 장창당(長槍幢)이 설치되었다. 신문왕 대에는 황금서당(黃衿誓幢), 흑금서당(黑衿誓幢), 벽금서당(碧衿誓幢), 적금서당(赤衿誓幢), 청금서당(靑衿誓幢)이 설치되었다. 특히 684년 보덕국 멸망 이후 보덕인으로 구성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 설치는 신라의 포용 정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1] 효소왕 2년(693년) 장창당이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개칭되면서 9서당 체제가 완성되었다.[1]

3. 구성

서당의 '서(誓)'는 '맹세하다'는 의미이며, '당(幢)'은 군대를 뜻한다. 신라의 군사 조직인 서당진평왕 5년(583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귀족 출신 무장들의 모병적 성격을 띠었다.[1] 613년(진평왕 35년)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693년(신라 효소왕 2년)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고치면서 9서당이 완성되었다. 이후 신라의 시위부(侍衛府)가 왕궁 수비를 맡고, 9서당이 수도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면서 신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9서당은 삼국통일로 새로 편입된 고구려, 백제, 말갈인을 받아들여 부대를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인 외에도 고구려인과 보덕국인, 백제인, 말갈인 등으로 구성하여 피정복민을 포용하고 민족 융합에 기여했다.[1]

3. 1. 부대별 특징

9서당은 옷깃 색깔로 각 부대를 구별했으며, 신라인으로 구성된 3개 부대(녹금서당, 자금서당, 비금서당) 외에도 고구려인, 백제인, 보덕국인, 말갈인 등으로 구성된 6개 부대를 포함했다. 이는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피정복민을 포용하고 민족 융합을 이루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1]

서당 이름구성원설치 연도옷깃 색깔참고
녹금서당(綠衿誓幢)신라인진평왕 35년(613년)녹자색(綠紫色)진평왕 5년(583년)에 설치된 서당을 개칭함.
자금서당(紫衿誓幢)신라인문무왕 17년(677년)자록색(紫綠色)진평왕 47년(625년)에 설치되었던 낭당(郎幢)을 개칭.
비금서당(緋衿誓幢)신라인효소왕 2년(693년)미상[1]문무왕 12년(672년)에 설치되었던 장창당(長槍幢)을 개칭.
황금서당(黃衿誓幢)고구려신문왕 3년(683년)황적색(黃赤色)
흑금서당(黑衿誓幢)말갈신문왕 3년(683년)흑적색(黑赤色)
벽금서당(碧衿誓幢)보덕국신문왕 6년(686년)벽황색(碧黃色)보덕국 멸망(684년) 2년 뒤에 편성.
적금서당(赤衿誓幢)보덕국신문왕 6년(686년)적흑색(赤黑色)보덕국 멸망(684년) 2년 뒤에 편성.
백금서당(白衿誓幢)백제문무왕 12년(672년)백청색(白靑色)
청금서당(靑衿誓幢)백제신문왕 7년(687년)청백색(靑白色)


3. 2. 군사적 특징

9서당은 보병과 기병을 혼합한 부대로, 사령관인 장군과 다수의 군관들이 배치되었다.[1] 이들은 신라 수도의 방어와 치안을 맡아 신라 최전성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9서당에 소속된 군대는 옷깃 색깔로 구분했다. 녹금서당(綠衿誓幢)은 녹자(綠紫)색, 자금서당(紫衿誓幢)은 자록(紫綠)색,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백청(白靑)색, 황금서당(黃衿誓幢)은 황적(黃赤)색, 흑금서당(黑衿誓幢)은 흑적(黑赤)색, 벽금서당(碧衿誓幢)은 벽황(碧黃)색, 적금서당(赤衿誓幢)은 적흑(赤黑)색, 청금서당(靑衿誓幢)은 청백(靑白)색 옷깃을 착용했다. 다만 비금서당(緋衿誓幢)의 옷깃 색은 전해지지 않는다.[1]

4. 의의와 영향

9서당은 신라 군사 체계의 핵심으로, 진평왕 때 처음 설치되어 효소왕 때 완성되었다. 9서당은 옷깃 색깔로 구분되는 9개의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보병과 기병이 혼합된 형태였다.[1] 특히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 말갈인을 포용하여 부대를 구성함으로써 민족 융합에 기여했다. 이는 신라삼국통일 이후 최전성기를 누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 1. 민족 융합 정책의 상징

9서당은 신라삼국통일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고구려, 백제, 말갈인을 받아들여 부대를 구성했다는 특징을 가진다. 신라인으로 구성된 3개 부대 외에도, 고구려인과 보덕국인 3개 부대, 백제인 2개 부대, 말갈인 1개 부대가 편성되었다.[1] 이처럼 국왕 직속부대인 9서당의 상당수를 피정복민으로 구성한 것은 고구려백제 피정복민을 포용하고, 당시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 융합에 기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 2. 신라 최전성기의 원동력

신라의 군사 조직인 서당진평왕 5년(583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693년(신라 효소왕 2년)에 9서당으로 완성되었다. 9서당은 수도 방어와 치안 유지를 담당하며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최전성기를 누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9서당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고구려, 백제, 동예(東濊) 세력으로 추정되는 말갈인들을 받아들여 부대를 구성했다. 국왕 직속부대인 9서당 중 6개를 피정복민으로 구성한 것은 고구려백제 피정복민을 포용하고, 당시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 융합에 기여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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