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T. 바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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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 T. 바넘은 1810년에 태어나 1891년에 사망한 미국의 흥행사이자 사업가이다. 그는 바넘 아메리카 박물관을 운영하며 피지 인어, 톰 섬 장군 등 이색적인 전시물을 선보였고, 스웨덴의 소프라노 제니 린드의 미국 투어를 기획하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펼쳤다. 1870년에는 서커스 사업에 진출하여 "지상 최대의 쇼"를 설립했고, 제임스 앤서니 베일리와 합병하여 바넘 앤 베일리 서커스를 만들었다. 그는 정치에도 참여하여 코네티컷 주 의회 의원과 브리지포트 시장을 역임했으며,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과장된 광고와 이색적인 인물 활용 등으로 논란을 낳았지만, 대중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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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T. 바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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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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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 |
출생일 | 1810년 7월 5일 |
출생지 | 미국코네티컷주베델 |
사망일 | 1891년 4월 7일 |
사망지 | 미국코네티컷주브리지포트 |
안장 장소 | 마운틴 그로브 묘지 |
직업 | 쇼맨 기업가 (엔터테인먼트 창업자 및 프로모터) 정치인 작가 출판업자 자선가 |
주요 활동 | 바넘 & 베일리 서커스 설립 |
서명 | PT Barnum Signature.svg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민주당 (1824–1854) 공화당 (1854–1891) |
임기 시작 | 1875년 |
임기 종료 | 1876년 |
선거구 | 페어필드 |
임기 시작 | 1866년 |
임기 종료 | 1869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채러티 할렛 (1829년 결혼, 1873년 사망) 낸시 피시 (1874년 결혼) |
자녀 | 4명 |
2. 생애
P. T. 바넘은 1810년 코네티컷주 베설에서 태어나 상인, 신문 발행인, 흥행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20대 초반 신문사를 운영하다 1834년 뉴욕으로 이주, 조지 워싱턴의 유모였다고 주장하는 흑인 노예 여성 조이스 헤스를 전시하며 흥행사로 데뷔했다.[3]
이후 '바넘의 미국 박물관'을 인수하여 '피지 인어', '톰 섬 장군' 등 기이한 전시물로 인기를 얻었다.[14] 제니 린드의 미국 순회공연을 성공시키며 큰돈을 벌기도 했다.[27]
1871년에는 서커스 사업에 진출, '지상 최대의 쇼'를 설립하여 점보라는 코끼리를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30] 1865년에는 코네티컷 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노예제 폐지를 옹호했다.[34] 1875년에는 브리지포트 시장으로 선출되어 도시 기반 시설 개선에 힘썼다.[39]
바넘은 1891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산악묘지(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 안장되었다.[6]
2. 1. 초기 생애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은 1810년 7월 5일 코네티컷주 베설에서 여관주인이자 재단사인 아버지 필로 바넘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이리네 테일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바넘의 외할아버지 피니어스 테일러는 휘그당 소속 입법 의원이자 지주, 사법 판사였으며 복권 사기꾼이기도 했는데, 바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바넘은 어린 시절 상점에서 일하며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고, 독창적인 상상력을 지녔다. 20대 초반에는 댄버리에서 주간 신문 「더 헤럴드 오브 프리덤(The Herald of Freedom)」을 창간했으나, 명예훼손 소송과 기소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2] 1834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1835년 조지 워싱턴의 전 유모로 알려진 160세가 넘은 흑인 노예 여성 조이스 헤스(Joice Heth)를 사들여 흥행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3]
2. 2. 초기 경력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은 1810년 7월 5일 코네티컷주 베설에서 여관주인이자 재단사인 아버지와 그의 두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인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어릴 적부터 상점에서 일하며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창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나중에 그의 서커스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20대 초반에 신문사를 운영하다가 1834년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뉴욕의 다양한 극단에서 활동하며 엔터테인먼트 경력을 쌓았다. 1831년에 코네티컷주 베델(베델)에서 ''자유의 전령''이라는 주간 신문을 창간했다.[7] 그가 지역 교회 장로들에 대한 사설을 썼던 것이 명예훼손 소송과 기소로 이어졌고, 그는 두 달 동안 투옥되었다. 투옥 중에 바넘은 하트퍼드의 ''복음 증인''의 발행인인 L.F.W. 앤드루스(앤드루스 목사)의 도움을 요청했다. 바넘과 앤드루스는 그 후 ''자유의 전령과 복음 증인''이라는 합동 신문을 발행했다.[8] 그들은 1년 후인 1833년 10월에 파트너십을 해소했다.[9] 바넘은 그 후 신문 발행지를 코네티컷주 댄버리(댄버리)로 옮겼다.[10]
1834년 11월, ''자유의 전령'' 160호를 발행한 후, 바넘은 신문의 운영권을 그의 처남인 존 W. 아머먼에게 넘겼고, 아머먼은 코네티컷주 노워크(노워크)에서 1년 동안 신문을 발행했다. 아머먼이 조지 테일러 씨에게 신문을 매각하면서 바넘 가족과 ''자유의 전령''의 관계는 끝났다.[11] 바넘은 1834년에 자신의 가게를 매각했다.
그는 25세였던 1835년에, 피라델피아에서 지인이 조지 워싱턴의 161세 전 간호사라고 선전하고 다니던 조이스 헤스라는 시각 장애를 가진 거의 완전히 마비된 흑인 여성 노예를 구입하여 전시하면서 쇼맨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노예제는 이미 뉴욕에서 폐지되었지만, 바넘은 헤스를 1년 동안 1000USD에 임대할 수 있는 허점을 이용하여 500USD를 빌려 매입을 완료했다. 바넘은 그녀를 하루 10~12시간 일하게 강요했고, 그녀는 1836년 2월 80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사망했다. 바넘은 관객들에게 50USD씩 받고 뉴욕의 한 술집에서 헤스의 시신을 공개 해부하여 그녀의 실제 나이를 보여주었다.[12][13]
2. 3. 바넘의 미국 박물관
바넘은 그의 첫 번째 버라이어티 공연단인 '바넘의 그랜드 과학 음악 극장'으로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고, 1837년 공황으로 3년간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841년, 그는 맨해튼의 브로드웨이와 앤 스트리트에 위치한 스커더의 미국 박물관을 인수했다. 그는 이 박물관의 이름을 '바넘의 미국 박물관'으로 바꾸고 건물을 개조하고 전시물을 추가하여 박물관을 개선했다.바넘의 미국 박물관은 인기 있는 전시장이 되었다. 그는 브로드웨이를 따라 등대 램프를 추가하여 주목을 끌었고, 낮에는 지붕 가장자리에 깃발을 달았으며, 위쪽 창문 사이에는 거대한 동물 그림을 걸어 보행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붕은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산책 정원으로 꾸며졌고, 바넘은 매일 열기구를 타는 이벤트를 열었다. 박제된 동물, 알비노, 거인, 난쟁이, 저글링하는 사람들, 마술사, 이국적인 여성들, 도시와 유명한 전투의 정교한 모형, 그리고 동물원 등 다양한 살아있는 공연과 흥미로운 것들이 전시물에 추가되었다.

1842년, 바넘은 그의 첫 번째 주요 사기극을 선보였는데, 원숭이의 몸통과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피지" 인어라는 생물이었다. 그는 보스턴의 동료 박물관 소유주이자 그의 친구이자 측근이자 공동 작업자인 모세스 킴벌로부터 이 인어를 임대했다.[14][15] 바넘은 자신의 사기극을 박물관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한 광고라고 정당화했다. 그는 "나는 대중을 속이는 것을 믿지 않지만, 먼저 그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16]
그는 인어 공연에 이어 4살짜리 배우 찰스 스트래튼을 11살짜리 톰 섬 장군으로 홍보하며 전시했다. 스트래튼은 헤라클레스와 나폴레옹과 같은 유명 인물들을 흉내내도록 훈련받았다.
1843년, 바넘은 그가 선보일 많은 원주민 중 첫 번째인 원주민 무용수 도-험-미를 고용했다. 1844년에서 1845년 사이에 그는 톰 섬 장군과 함께 유럽을 순회하며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는데, 여왕은 스트래튼에게 즐거워했지만[17] 슬퍼했고, 이 사건은 대대적인 홍보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유럽 전역의 왕족들과의 만남, 러시아 황제를 포함한 만남의 문을 열어주었고, 바넘이 자동 인형과 기타 기계적 경이로움을 포함한 많은 새로운 볼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예술가 렘브란트 페일의 필라델피아 박물관(미국 최초의 주요 박물관)[18]과 볼티모어 박물관 및 미술관을 포함한 다른 박물관들을 인수했다.[19] 1846년 말까지 바넘의 미국 박물관은 연간 40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였다.[4]
2. 4. 유럽 순회공연과 제니 린드
바넘은 톰 섬과 함께 유럽 순회공연을 하던 중 유럽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의 인기를 알게 되었다. 바넘은 자신이 음악에 문외한임을 인정했고[20] 린드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에게 미국에서 밤당 1000USD에 150일간의 공연을 제안했고, 모든 경비는 자신이 부담하기로 했다.[21]린드는 선불을 요구했고, 바넘은 동의했다. 그녀는 이 돈을 자선 사업에 사용하여 주로 스웨덴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부했다.[22] 바넘은 린드에게 지불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저택과 박물관을 담보로 많은 돈을 빌렸다.[26] 그래도 자금이 부족했기에, 그는 린드가 미국의 도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필라델피아의 목사를 설득하여 그에게 마지막 6000USD를 빌렸다. 계약에는 린드가 60회 또는 100회 공연 후 투어에서 철수할 수 있는 옵션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럴 경우 바넘에게 50000USD를 지불해야 했다.[26]
린드와 그녀의 소규모 공연단은 1850년 9월 미국으로 항해했다. 바넘의 수개월간의 준비 덕분에 그녀는 미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유명인사였다. 부두에서는 약 4만 명, 호텔에서는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맞이했고, 상품도 판매되었다.[23] 린드는 투어를 통해 벌 수 있는 돈의 규모를 깨닫고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고, 바넘은 1850년 9월 3일에 이에 서명했다. 이 계약에 따라 린드는 원래의 수수료와 바넘의 5500USD 관리 수수료를 제외한 각 공연 수익의 나머지를 받게 되었다. 린드는 자선 사업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모으고자 했다.[26]

순회공연은 1850년 9월 11일 캐슬 가든에서 열린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이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어 바넘은 투자액의 네 배를 회수했다. 워싱턴 어빙은 "그녀는 세상이 여성들의 대회라는 큰 위협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악을 스스로 상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제니 린드를 구하소서!"라고 선언했다.[26] 일부 공연 티켓은 수요가 워낙 많아 바넘은 경매로 판매했고, 대중의 열기는 매우 뜨거워 언론에서는 "린드 열풍"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24] 바넘의 티켓 경매의 노골적인 상업주의는 린드를 당황하게 했고,[24] 그녀는 그에게 상당수의 티켓을 할인된 가격으로 예약하도록 설득했다.[25]
투어에서 바넘의 홍보는 항상 린드의 도착에 앞서 이루어졌고 열기를 고조시켰는데, 그는 최대 26명의 기자를 고용했다.[26] 뉴욕 공연 이후, 공연단은 동부 해안을 순회하며 계속 성공을 거두었고, 나중에는 남부 주와 쿠바를 순회했다. 1851년 초, 린드는 바넘의 끊임없는 투어 마케팅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계약상 권리를 행사했다. 그들은 우호적으로 헤어졌고, 그녀는 1년 가까이 자신의 매니지먼트 하에 투어를 계속했다.[20] 린드는 바넘을 위해 미국에서 93회의 공연을 했고, 약 350000USD를 벌었으며, 바넘은 최소 500000USD를 순이익으로 얻었다.[27]
2. 5. 서커스 사업


바넘은 60세가 되어서야 서커스 사업에 진출했다. 1870년 윌리엄 캐머런 쿠프와 함께 위스콘신주 딜러번에서 "P. T. 바넘의 그랜드 여행 박물관, 동물원, 캐러밴 & 히포드롬"을 설립했다. 이것은 여행 서커스이자 "기형아"들의 박물관이었으며,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1881년 제임스 베일리와 제임스 L. 허친슨과의 합병 후에는 "P. T. 바넘의 지구상 최고의 쇼, 그리고 그레이트 런던 서커스, 샌거의 로열 브리티시 메나제리 그리고 그랜드 인터내셔널 연합 쇼 유나이티드"로 불렸고, 이후 간단히 "바넘 & 베일리"로 줄였다. 이는 최초로 세 개의 링을 선보인 서커스였다.[30]
쇼의 첫 번째 주요 명물은 바넘이 1882년 런던 동물원에서 구입한 아프리카코끼리 점보였다.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는 곡예사, 기형 쇼, 그리고 톰 섬 장군 등 그의 여행 메나제리와 유사한 공연을 선보였다. 바넘은 화재, 열차 사고 등 여러 setbacks에도 불구하고 서커스를 키우는 데 끈기를 보였으며, 일상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서커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와 베일리는 1885년에 헤어졌지만, 1888년에 "바넘 & 베일리 지구상 최고의 쇼"로 재결합하여 나중에 바넘 & 베일리 서커스가 되어 전 세계를 순회했다.
바넘은 베일리와 다른 사업 파트너들의 제안에 따라 그의 서커스를 기차로 이동시킨 최초의 서커스 소유주 중 한 명이었으며, 아마도 자신의 기차를 소유한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그는 혁신적이고 인상적인 아이디어 때문에 "광고의 셰익스피어"로 알려지게 되었다.[31]
2. 6. 정치 활동
바넘은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주로 미국 남북 전쟁 이전 시대의 인종, 노예 제도, 지역 분열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노예 제도를 지지한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에 반대했고, 노예 제도를 옹호한 민주당을 떠나 새로운 반노예제 공화당에 합류했다.[34]바넘은 "정치는 항상 내게 불쾌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지만, 1865년 코네티컷 주 의회에 공화당 소속 페어필드 대표로 선출되었다.[34][35] 그는 뉴욕 & 뉴헤이븐 철도 노선에 대한 내부 정보를 얻기 위해 스파이를 고용하여 요금을 20% 인상하려는 비밀을 폭로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3조 비준 과정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인간의 영혼'은 경솔하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국인, 터키인, 아랍인 또는 호텐토트의 몸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불멸의 영혼입니다."라고 말했다.[34] 그는 남부에 살았을 때 노예를 소유했던 것을 인정하며 "나는 내 노예들을 매질했다. 나 자신도 그 때문에 천 번 매질을 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민주당원이었다. 남부의 원칙을 가진 북부 사람인 '형태를 알 수 없는' 민주당원 중 한 명이었다."라고 말했다.[36]
바넘은 코네티컷 의회 다음 네 회기 동안 선출되었고 상원의원 오리스 S. 페리의 뒤를 이었다. 그는 1879년 "임신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물, 의약품 또는 기구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피임 사용에 가담하는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률의 입법 후원자였다. 이 법은 1965년 미국 대법원의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주 사건'' 판결에 의해 무효화될 때까지 코네티컷에서 효력을 유지했다.[37][38]
바넘은 1867년 미국 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그의 사촌인 윌리엄 헨리 바넘에게 패했다. 1875년에는 브리지포트 시장으로 재직하며 상수도 개선, 가스등 설치, 주류 및 매춘 단속을 추진했다. 그는 1878년 설립된 브리지포트 병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39]
2. 7. 사망
바넘은 1891년 80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35] 그는 자신이 설계한 산악묘지(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 묻혔다.[6]3. 논란
바넘의 활동은 때때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첫째, 바넘은 자신의 서커스를 홍보하기 위해 과장된 광고를 사용했으며, 때로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정보를 전달했다. 이는 대중을 유인하고 자신의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1]
둘째, 바넘은 이색적인 인물과 장애인을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했다. 그의 서커스에는 이색적이거나 비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데 사용되었지만, 이는 그들을 오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또한 이들이 얼마나 자발적으로 그의 서커스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1]
셋째, 바넘의 대중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사업 관행과 인격적인 특성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의 행동은 종종 도덕적인 측면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의 서커스는 인종차별이나 이색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받았다.[1]
마지막으로, 바넘의 논란은 그의 삶과 활동을 다룬 영화와 뮤지컬을 통해 계속되었다. 위대한 쇼맨과 같은 작품은 바넘의 서커스를 화려하게 재현하면서도, 그의 논란적인 면모를 다루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바넘은 칭송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
결론적으로,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은 대중 문화의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의 활동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의 홍보 방식과 이용한 수단은 종종 현대적인 시각에서 비판을 받았다. 바넘이 대중의 관심을 끈 뒤에는 그의 인격과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항상 따랐다.[1]
4. P. T. 바넘을 소재로 한 작품
- '''바넘'''(1980) – 짐 데일 주연의 바넘의 삶을 바탕으로 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다.
- "U.S. 블루스" – 그레이트풀 데드의 음반 《마스 호텔에서(From the Mars Hotel)》에 수록된 노래이다.
- "킬러 클라운스" – 더 디키스의 EP 《우주에서 온 킬러 클라운들(Killer Clowns From Outer Space)》에 수록된 노래는 P.T. 바넘과 그의 동료 제임스 앤서니 베일리를 언급하며, 종종 잘못 인용되는 "바보는 매일 태어난다네"(“There's a sucker born every minute, don't you know?”)라는 말을 인용한다.
- 스티븐 밀하우저의 단편소설집 『바넘 박물관』에는 동명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4. 1. 영화
- 위대한 쇼맨 (2017년): 바넘과 그의 서커스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영화이다. 휴 잭맨이 바넘 역을 맡았다.[57][58]
- 제니 린드 (1932년): 안드레 벌리(André Berley) 출연
- 위대한 바넘 (1934년): 월러스 비어리(Wallace Beery) 재출연
- 쥘 베른의 달나라 로켓 (1967년): 버얼 아이브스(Burl Ives) 출연
- 바넘! (1986년): 마이클 크로포드(Michael Crawford) 출연; 런던에서 촬영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영화화 버전
- 바넘 (1986년): 버트 랭커스터(Burt Lancaster) 출연; TV 영화
- P.T. 바넘 (1999년): 보 브리지스(Beau Bridges) 출연; TV 영화
- 뉴욕의 갱들 (2002년): 로저 애쉬턴-그리피스(Roger Ashton-Griffiths) 출연
- 거기에 있었던 걸 보지 못했어 (2022년): 바넘의 고향인 베델 출신의 장애인 영화 제작자가 기형 쇼의 능력주의적 유산에 대해 숙고하는 내용이다.
- 여성의 도덕 (1930): 월러스 비어리(Wallace Beery) 출연
5. 저서
바넘은 ''P. T. 바넘의 삶''(1855), ''세상의 속임수들''(1865), ''투쟁과 승리''(1869), ''숲과 정글, 또는 세계 곳곳의 스릴 넘치는 모험''[32], ''돈 버는 기술''(1880)[33]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 ''P. T. 바넘의 자서전 (The Life of P. T. Barnum: Written by Himself)'' (1855, 뉴욕: Redfield, 재판본: 2000, 샴페인: 일리노이 대학교 출판부)
- ''투쟁과 승리, 혹은 P. T. 바넘의 40년 회상록 (Struggles and Triumphs, or Forty Years' Recollections of P. T. Barnum)'' (1869, 재판본: 화이트피시, 몬태나: 케싱거, 2003)
- ''돈 버는 기술, 혹은 돈을 버는 황금률 (Art of Money Getting, or, Golden Rules for Making Money)'' (1880, 재판본: 1999, 베드퍼드, 매사추세츠: 애플우드)
- ''세계의 야생 짐승, 새, 파충류: 그들의 포획 이야기 (The Wild Beasts, Birds, and Reptiles of the World: The Story of Their Capture)'' (1888, 시카고: R. S. 필 & 컴퍼니)
- ''내가 유니버셜리스트인 이유 (Why I Am a Universalist)'' (1890, 재판본: 케싱거 출판사)
- ''세계의 속임수꾼들'' (1865)
- ''투쟁과 승리'' (1869)
- 자서전 (초판 1854, 다른 판본 1869)
참조
[1]
웹사이트
Phineas T. Barnum
http://asp6new.alexa[...]
[2]
논문
null
[3]
서적
The Yale Book of Quotations
Yale University Press
[4]
논문
null
[5]
서적
The life of P. T. Barnum
https://archive.org/[...]
The Courier Company
[6]
서적
Stones and Bones of New England: A guide to unusual, historic, and otherwise notable cemeteries
Globe Pequat
[7]
서적
Barnum's Own Story: The Autobiography of P.T. Barnum
Viking Press
[8]
뉴스
Gospel Witness, A Card
https://collections.[...]
1832-10-17
[9]
뉴스
Bad News
https://www.newspape[...]
1883-10-29
[10]
서적
History of Danbury, Conn. 1684–1896
https://books.google[...]
Burr Printing House
[11]
서적
Struggles and Triumphs or Forty Years' Recollections of P.T. Barnum
https://www.gutenber[...]
Warren, Johnson & Co
[12]
웹사이트
P. T. Barnum Isn't the Hero the 'Greatest Showman' Wants You To Th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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