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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YZ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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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XYZ 사건은 1790년대 후반 미국과 프랑스 간에 발생한 외교적 위기를 말한다.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한 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이 미국 특사들에게 뇌물을 요구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었고, 양국은 유사전쟁을 겪었으며, 결국 몰트퐁텐 조약으로 분쟁이 종결되었으나 동맹은 파기되었다. XYZ 사건은 미국의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외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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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사전쟁 - 제이 조약
    제이 조약은 미국 독립 전쟁 후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고 미영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1794년 미국과 영국이 체결한 조약으로, 미국 내에서 논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XYZ 사건
주요 정보
XYZ 사건
XYZ 사건에 대한 미국 정치 만화
사건 개요
유형외교적 사건
장소프랑스
시기1797년 ~ 1798년
관련 국가미국, 프랑스
원인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 악화
결과준전쟁
미국 해군부 창설
관련 인물
미국 대통령존 애덤스
프랑스 외무장관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프랑스 대리인 (X, Y, Z)장콩라드 오트발 (X)
피에르벨라미 (Y)
루시앙 오트발 (Z)
사건 배경
배경제1차 프랑스 공화국과 미국 간의 복잡한 관계
제이 조약에 대한 프랑스의 불만
프랑스 해군의 미국 상선 공격
협상 과정
미국 대표단찰스 코츠워스 핑크니
존 마셜
엘브리지 게리
프랑스 요구 조건미국이 프랑스에 막대한 금액의 뇌물 지불 요구
미국이 프랑스에 국채를 제공 요구
미국이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사과 요구
미국 반응프랑스의 요구에 대한 격렬한 분노
"백만 달러는 안 되지만, 한 푼도 안 돼(Millions for defense, but not one cent for tribute)" 구호
미국 내에서 반프랑스 감정 고조
사건 결과 및 영향
군사적 충돌준전쟁 발생
미국 해군의 창설 및 강화
정치적 결과미국 내에서 연방당 지지 증가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영향
반프랑스 감정 확산
외교적 결과미국과 프랑스 관계 악화
1800년 모르트퐁텐 조약 체결로 갈등 종결
기타
관련 용어"XYZ"는 프랑스 대리인들의 익명을 나타내는 코드

2. 배경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프랑스-미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 관계를 구축했지만, 1795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3] 이 조약은 영국과의 오랜 현안이었던 영토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결되었지만, 미국이 프랑스 동맹의 대척점이 되었던 영국에 접근하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는 이 조약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보복 조치로 미국 선박에 대하여 프랑스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사략선을 나포함과 동시에, 주 프랑스 공사로 취임한 찰스 핑크니의 임명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미국 대통령에 갓 취임한 존 애덤스는 이 문제를 수습하고, 프랑스와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핑크니, 마샬, 게리 3명을 특사로 임명하여 프랑스에 파견했다.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그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아들였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일부러 지연하고, 대리인 3명을 각각 특사에게 보냈다. 이 대리인들은 특사에게 협상 수용의 대가로 250000USD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하였다. 이에 격노한 특사는 요구를 거절하고 귀국했다.[4]

애덤스는 3명의 대리인을 각각 X, Y, Z로 가칭하여 특사로부터 받은 서한을 의회에 제출했다. 프랑스 측이 저지른 뇌물 요구 행각을 폭로하자, 미국 국내 여론은 일거에 악화되었고 연방당은 프랑스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훗날 ‘X, Y, Z’라고 한 3명의 대리인은 장 콘래드 옷팅거(Jean Conrad Hottinguer), 피에르 벨라미(Pierre Bellamy), 뤼시엥 오테발(Lucien Hauteval)이었음이 밝혀졌다.

2. 1.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중립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과 미국 연방 정부 간의 관계는 초기에는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악화되었다. 1792년, 프랑스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전쟁에 돌입했고, 이 전쟁에서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중립을 선언했다.[1] 그러나 전쟁에서 주요 해군 강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 모두 적국과 무역하는 중립국(미국 포함)의 선박을 나포했다.

1795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3] 이 조약은 영국과의 오랜 영토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프랑스는 미국이 프랑스의 동맹국에 대항하는 영국에 접근하는 것을 우려하여 강력하게 반발했다. 프랑스는 보복 조치로 미국 선박의 프랑스 출입을 금지하거나 사략선을 나포하고, 주 프랑스 공사로 취임한 찰스 핑크니의 임명을 거부했다.

이에 1797년 존 애덤스 대통령은 핑크니, 존 마셜, 엘브리지 게리 3명을 특사로 임명하여 프랑스에 파견했다.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그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이했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지연시키고 대리인 3명을 보내 협상 수용 대가로 25만 달러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요구했다.[4] 격노한 특사들은 요구를 거절하고 귀국했다.

애덤스는 3명의 대리인을 각각 X, Y, Z로 가칭하여 특사로부터 받은 서한을 의회에 제출하고 프랑스 측의 뇌물 요구를 폭로했다. 이는 미국 국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1798년부터 1800년까지 '''유사전쟁'''(Quasi-War)이 발발했다.

이후 1800년 9월 몰트퐁텐 조약으로 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파기되었다. 훗날 ‘X, Y, Z’로 불린 3명의 대리인은 장 콘래드 옷팅거(Jean Conrad Hottinguer), 피에르 벨라미(Pierre Bellamy), 뤼시엥 오테발(Lucien Hauteval)이었음이 밝혀졌다.

2. 2. 제이 조약과 프랑스의 반발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프랑스-미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1795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와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다.[3] 미국이 프랑스의 동맹에 대항하는 영국에 접근하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는 이 조약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프랑스는 보복 조치로 미국 선박의 프랑스 출입을 금지하거나 사략선을 이용하여 나포했고, 주 프랑스 공사로 취임한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의 임명을 거부했다. 새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존 애덤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프랑스와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핑크니, 마샬, 게리 3명을 특사로 프랑스에 파견했다.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특사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이했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의도적으로 늦추고 대리인 3명을 각각 특사에게 보냈다. 이 대리인들은 협상 수용의 대가로 250000USD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요구했다. 이에 격분한 특사들은 요구를 거절하고 귀국했다.[4]

2. 3. 애덤스 행정부의 대응

1795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하자[3]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미국은 1778년 프랑스와 프랑스-미국 동맹조약을 체결하여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프랑스 동맹의 대척점이 되었던 영국에 접근하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는 이 조약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프랑스는 보복 조치로 미국 선박의 프랑스 출입을 금지하거나, 사략선을 나포함과 동시에, 주 프랑스 공사로 취임한 찰스 핑크니의 임명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미국 대통령에 갓 취임한 존 애덤스는 이 문제를 수습하고, 프랑스와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핑크니, 마샬, 게리 3명을 특사로 임명하여 프랑스에 파견했다.[4]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아들였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일부러 지연하고, 대리인 3명을 각각 특사에게 보냈다. 이 대리인들은 특사에게 협상 수용 대가로 250000USD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하였다. 이에 격노한 특사는 요구를 거절하고 귀국했다.[4]

애덤스는 3명의 대리인을 각각 X, Y, Z로 가칭하여 특사로부터 받은 서한을 의회에 제출하고, 프랑스 측이 저지른 뇌물 요구 행각을 폭로했다. 이는 미국 국내 여론을 일거에 악화시켰고, 이 일로 연방당은 프랑스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군성을 설치하고,[5] 치안단속법을 잇따라 제정하였다.

이후 ‘X, Y, Z’라고 한 3명의 대리인은 장 콘래드 옷팅거(Jean Conrad Hottinguer), 피에르 벨라미(Pierre Bellamy), 뤼시엥 오테발(Lucien Hauteval)이었음이 훗날 밝혀졌다.

3. XYZ 사건의 전개

1778년 프랑스와 미국-프랑스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 관계를 구축했지만, 1795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하면서[3]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조약은 영국과의 오랜 현안이었던 영토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미국이 프랑스 동맹의 대척점이었던 영국에 접근하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보복 조치로 미국 선박의 프랑스 출입을 금지하거나 사략선을 나포하고, 주프랑스 공사로 취임한 찰스 핑크니의 임명을 거부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


이에 존 애덤스 미국 대통령은 이 문제를 수습하고 프랑스와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핑크니, 존 마셜, 엘브리지 게리 3명을 특사로 임명하여 프랑스에 파견했다. 1797년 5월 말, 애덤스는 프랑스에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내각과 회의를 가졌다. 애덤스는 처음에 존 마셜엘브리지 게리가 핑크니와 함께 위원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내각은 게리가 강력한 연방주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프랜시스 다나가 게리 대신 선택되었지만 봉직을 거절했고, 애덤스는 내각과 상의하지 않고 다나 대신 게리의 이름을 미국 상원에 제출했다.

애덤스는 의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가의 중립성을 강력히 방어하고 미국 해군을 확장할 것을 촉구하는 다소 호전적인 연설을 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 선포는 중단했다. 의회는 위원들의 선택을 승인했고, 애덤스는 그들에게 제이 조약에서 영국에 부여된 것과 유사한 조건을 협상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위원들은 대출을 거부하되 재정 문제에 대한 지불 조건 조정에는 유연성을 가지라는 지시를 받았다.

존 마셜은 7월 중순에 유럽으로 떠나 핑크니와 합류했고, 게리는 몇 주 후에 뒤따랐다. 마셜과 핑크니는 연방주의자로 프랑스를 불신했지만, 게리는 프랑스와 거래하는 데 있어 유연하고 서두르지 않을 의향이 있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의 절정기에 수립된 프랑스 공화국은 1797년까지 양원제 입법 의회와 5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프랑스 디렉토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1797년 상반기에 장관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7월에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이 외무장관으로 선출되었다. 탈레랑은 미국과 영국 간의 긴밀한 관계 수립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했고, 내부 쿠데타 이후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다. 토머스 제퍼슨의 조언을 바탕으로 탈레랑은 협상에 신중하고 느린 속도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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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원회는 10월 초 파리에 도착하여 탈레랑과의 회의를 요청했다. 초기 회의 후, 일주일 뒤에 더 긴 회의가 열렸다. 탈레랑은 위원들에게 5월에 애덤스가 한 연설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는데, 이는 디렉토리 회원들을 화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동기는 위원들이 협상에 대해 얼마나 호의적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후 몇 달 동안, 탈레랑은 비공식 협상가들을 파견하여 위원들과 만나 영향을 미쳤다. 일부 비공식 경로는 폐쇄되었고, 탈레랑은 1797년 11월 만찬에 나타나 뇌물 요구에 응하지 않은 미국인들을 질책했다. 11월 말, 탈레랑은 게리를 다른 위원들과 분리하기 위해 "사교적인" 만찬 초대를 했고, 게리는 소통을 유지하기 위해 참석했다. 이는 마셜과 핑크니의 게리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게리는 탈레랑과 실질적인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를 대신할 때까지 머물겠다고만 동의했다. 탈레랑은 헤이그에 대표를 파견하여 윌리엄 반스 머레이(William Vans Murray)와 협상을 재개했고, 게리는 1798년 10월 귀국했다.

3. 1. 탈레랑의 뇌물 요구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이했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일부러 지연시키고, 대리인 3명을 각각 특사에게 보냈다.[4] 이 대리인들은 협상 수용의 대가로 250000USD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하였다.[4]

이후 공식 외교 채널을 벗어난 일련의 회담이 이어졌다. 10월 17일, 미국인들이 이용하는 네덜란드 은행에서 일하던 영국인 니콜라스 허버드는 핑크니에게 오팅거 남작이 핀크니와 만나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핀크니는 이에 동의했고, 다음 날 저녁 두 사람은 만났다. 오팅거(나중에 "X"로 확인됨)는 프랑스 정부에 대한 대규모 차관과 탈레랑에게 50000GBP의 뇌물 지급을 포함한 일련의 프랑스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핀크니는 이러한 요구 사항을 다른 위원들에게 전달했고, 오팅거는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탈레랑과 거래하기 위해 뇌물을 지불한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회 전체에 이를 반복했으며, 위원회는 무뚝뚝하게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오팅거는 위원회에 피에르 벨라미("Y")를 소개했는데, 그는 벨라미를 탈레랑의 측근이라고 소개했다. 벨라미는 "당신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탈레랑의 기대를 포함하여 탈레랑의 요구 사항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심지어 그러한 돈을 비밀리에 교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풀려진 가격으로) 통화를 일련의 구매 제안까지 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이 진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탈레랑은 뤼시앵 오트발("Z")을 보내 게리와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1792년 보스턴에서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 있었다. 오트발은 게리에게 평화를 추구하는 탈레랑의 진심을 보장하고 비공식적인 협상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차관과 뇌물에 대한 요구를 반복했다.

일주일 후, 오팅거와 벨라미는 다시 위원회와 만나 원래 요구 사항을 반복했고, 프랑스가 유럽에서 적어도 일시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재적인 전쟁의 위협을 동반했다. 핀크니의 대답은 "아니오, 아니오, 식스펜스 하나도 아니오!"였다. 위원들은 11월 1일에 비공식 채널을 통한 추가 협상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훗날 ‘X, Y, Z’라고 한 3명의 대리인은 장 콘래드 오팅거(Jean Conrad Hottinguer), 피에르 벨라미(Pierre Bellamy), 뤼시엥 오테발(Lucien Hauteval)였음이 밝혀졌다.

3. 2. 미국 특사들의 대응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이했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일부러 지연시키고 대리인 3명을 각각 특사에게 보냈다. 이 대리인들은 특사에게 협상 수용의 대가로 250000USD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하였다. 이에 격노한 특사들은 요구를 거절하고, 게리를 제외하고 귀국했다.[4]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가 미국 위원회를 이끌었다.


마셜핑크니는 연방주의자로 프랑스를 불신했지만, 게리는 프랑스와 거래하는 데 있어 유연하고 서두르지 않을 의향이 있었다.

1797년 10월 14일, 위원들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탈레랑의 예상되는 요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존 애덤스의 연설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공식 외교 채널을 벗어난 일련의 회담이 이어졌다.

10월 17일, 미국인들이 이용하는 네덜란드 은행에서 일하던 영국인 니콜라스 허버드가 핑크니에게 오팅거 남작이 핑크니와 만나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핑크니는 이에 동의했고, 다음 날 저녁 두 사람은 만났다. 오팅거(나중에 "X"로 확인됨)는 프랑스 정부에 대한 대규모 차관과 탈레랑에게 50000GBP의 뇌물 지급을 포함한 일련의 프랑스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엘브리지 게리


그러자 오팅거는 위원회에 피에르 벨라미("Y")를 소개했는데, 그는 벨라미를 탈레랑의 측근이라고 소개했다. 벨라미는 "당신은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탈레랑의 기대를 포함하여 탈레랑의 요구 사항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이 진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탈레랑은 뤼시앵 오트발("Z")을 보내 게리와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1792년 보스턴에서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 있었다. 오트발은 게리에게 평화를 추구하는 탈레랑의 진심을 보장하고 비공식적인 협상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차관과 뇌물에 대한 요구를 반복했다.

위원들은 결국 비공식 협상을 계속할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렸는데, 연방주의자인 마셜핑크니는 반대하고 게리는 찬성했다. 이러한 분열은 결국 탈레랑에게도 명확해졌고, 그는 1798년 1월 게리에게 더 이상 핑크니와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 마셜


세 위원 모두 3월에 탈레랑과 비공식적으로 만났지만, 당사자들이 교착 상태에 있음은 분명했다. 마셜핑크니는 4월에 프랑스를 떠났다.

3. 3. 협상의 결렬과 유사전쟁

1797년 10월 4일,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미국 특사들을 비공식적으로 맞이했지만, 공식 회담 개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대리인 3명을 보냈다. 이들은 특사들에게 협상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25만 달러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 내 여론을 격앙시켰고, 연방당은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4]

존 애덤스 대통령은 프랑스 측 대리인 3명을 각각 X, Y, Z로 가칭하고, 특사들에게서 받은 서한을 의회에 제출하여 프랑스 측의 뇌물 요구를 폭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해군성을 설치하고,[5] 치안단속법을 제정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결국 1798년부터 1800년까지 양국은 '''유사전쟁'''(Quasi-War)이라 불리는 선전포고 없는 해전에 돌입했다. 존 애덤스 대통령은 전쟁을 주장하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의견을 무시하고 대표단을 다시 프랑스에 파견했고, 새롭게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과의 교섭을 통해 분쟁 위기를 해소할 수 있었다.

1800년 9월 몰트퐁텐 조약으로 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파기되었다. 프랑스는 나포한 미국 선박에 대한 위자료 2000만달러 지불을 거부했다.

훗날 ‘X, Y, Z’로 불린 3명의 대리인은 각각 장-콩라드 오팅거(Jean-Conrad Hottinguer), 피에르 벨라미(Pierre Bellamy), 뤼시엥 오테발(Lucien Hauteval)이었음이 밝혀졌다.

4. XYZ 사건의 결과와 영향

XYZ 사건은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국제 정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1798년부터 1800년까지 이어진 유사전쟁은 미국과 프랑스 간의 선전포고 없는 해상전이었다. 이 전쟁은 몰트퐁텐 조약으로 종결되었지만, 1778년에 체결된 프랑스-미국 동맹조약은 결국 파기되었다. 프랑스는 미국의 약점을 틈타 프랑스 해군이 나포한 미국 선박에 대한 위자료 2000만달러 지불을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 노선을 강화했으며, 이후 국제 분쟁에서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4. 1. 미국의 국내 정치 변화

윌리엄 밴스 머레이(William Vans Murray)


존 애덤스 대통령은 미국 외교관들이 유럽에 있는 동안 위원회 실패에 대비한 방안을 고려했다. 그의 내각은 군사력 강화를 촉구했고, 의회 민주공화당 지도자들은 매파 연방주의자들과 연합하여 위원들의 보고서 공개를 요구했다. 1798년 3월, 애덤스는 프랑스 인물들의 이름을 W, X, Y, Z라는 문자로 바꾸어 보고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이 사건은 "XYZ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

보고서 공개는 연방주의자들의 전쟁 요구를 불러일으켰고, 민주공화당은 효과적인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애덤스는 공식적인 선전포고 요청을 거부했지만, 의회는 군사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예산을 책정했다.[4] 1798년 7월 7일, 의회는 1778년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틀 후 프랑스 군함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다.[5]

연방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이용해 친프랑스 성향 민주공화당원들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태도는 외국인 및 반역죄 법(Alien and Sedition Acts) 통과에 기여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전쟁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고, 민주공화당원들은 매파 연방주의자들을 군사적 수단으로 공화정을 훼손하려는 호전적인 자들로 묘사했다.

엘브리지 게리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연방주의자들은 그가 협상 결렬에 가담했다고 비난했고, 이러한 비난은 게리가 연방주의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1800년에 민주공화당원들과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4. 2. 프랑스와의 관계 변화

1795년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1778년 프랑스와 맺은 프랑스-미국 동맹조약으로 구축된 양국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3] 이 조약은 영국과의 오랜 영토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프랑스는 미국이 자국 동맹의 대척점에 있던 영국에 접근하는 것을 우려하여 강력하게 반발했다. 프랑스는 보복 조치로 미국 선박의 프랑스 출입을 금지하고 사략선을 나포했으며, 주 프랑스 공사로 취임한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의 임명을 거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 애덤스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핑크니, 존 마셜, 엘브리지 게리 3명을 특사로 프랑스에 파견했다.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특사들을 비공식적으로만 접견하고 공식 회담을 지연시키면서, 대리인 3명을 통해 250000USD의 뇌물과 1200만달러의 차관을 요구했다. 특사들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귀국했다.[4]

애덤스 대통령은 프랑스 대리인들을 X, Y, Z로 가칭하여 의회에 서한을 제출하고 뇌물 요구 사실을 폭로했다. 이는 미국 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연방당은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해군성을 설치하고,[5] 치안단속법을 제정하는 등 군사적 대비 태세를 강화했다.

결국 1798년부터 1800년까지 양국은 '''유사전쟁'''(Quasi-War)이라 불리는 선전포고 없는 해전에 돌입했다. 존 애덤스 대통령은 전쟁을 주장하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충고를 무시하고 다시 대표단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나폴레옹은 대표단을 정중하게 맞이했고, 협상을 통해 분쟁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1800년 9월 몰트퐁텐 조약(Treaty of Mortefontaine)으로 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은 파기되었다. 프랑스는 미국 선박 나포에 대한 위자료 2000만달러 지불을 거부했다.

이후 X, Y, Z로 불렸던 프랑스 대리인들은 각각 장 콘래드 옷팅거(Jean Conrad Hottinguer), 피에르 벨라미(Pierre Bellamy), 뤼시엥 오테발(Lucien Hauteval)로 밝혀졌다.

참조

[1] 웹사이트 Extraordinary Sessions of Congress: A Brief History https://www.senate.g[...] Senate Historical Office 2019-04-17
[2] 서적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휴머니스트
[3] 서적 이야기 미국사 청아출판사 2002-02-16
[4] 서적 이야기 미국사 청아출판사 2002-02-16
[5] 서적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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