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1. 개요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대, 왕정 복고 시기를 거치며 활약한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나 혁명기에 주교직을 사임하고, 삼부회에서 개혁을 주도하며 교회 재산 국유화 등을 주장했다. 이후 영국과 미국으로 망명 생활을 거쳐 총재 정부에서 외무상으로 임명되었고,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지지하며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루이 18세를 옹립하고 빈 회의에서 프랑스의 국익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배신의 천재"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뛰어난 외교 능력으로 높이 평가받으며, 19세기와 20세기 양국의 협조와 동맹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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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
|---|---|
| 존칭 접미사 | 탈레랑 공 |
| 존칭 접두사 | 각하 |
| 출생일 | 1754년 2월 2일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일 | 1838년 5월 17일 (84세)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 정당 | 무소속 (1789–1799) 보나파르트주의자 (1799–1814) 왕당파 (1814–1815) 독트리네르 (1815–1830) |
| 학력 | 파리 대학교 |
| 교육 | 생쉴피스 신학교 |
| 직업 | 성직자, 정치인, 외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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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교회 | 로마 가톨릭교회 |
|---|---|
| 서품 | 1779년 12월 19일 (사제) 1789년 1월 4일 (주교) |
| 환속 | 1802년 6월 29일 |
| 역임 직책 | 프랑스 성직자 대표 (1780–1788) 오툉 주교 (1788–1791) |
| 주영국 프랑스 대사 | 임명: 루이 필리프 1세 임기 시작: 1830년 9월 6일 임기 종료: 1834년 11월 13일 이전: 피에르 드 몽메르시라발 이후: 오라스 세바스티아니 드 라 포르타 |
|---|---|
| 프랑스 총리 | 군주: 루이 18세 임기 시작: 1815년 7월 9일 임기 종료: 1815년 9월 26일 이전: 직책 신설 이후: 아르망에마뉘엘 드 비녜로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공작 |
| 외무부 장관 | 군주: 루이 18세 임기 시작: 1814년 5월 13일 임기 종료: 1815년 3월 19일 이전: 앙투안 드 라포레 이후: 루이 드 콜랭쿠르 |
|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99–1804) 군주: 나폴레옹 1세 (1804–1807) 임기 시작: 1799년 11월 22일 임기 종료: 1807년 8월 9일 이전: 샤를프레데리크 라인하르트 이후: 장바티스트 드 놈페르 드 샹파니 | |
| 국가 원수: 총재 정부 임기 시작: 1797년 7월 15일 임기 종료: 1799년 7월 20일 이전: 샤를프랑수아 들라크루아 이후: 샤를프레데리크 라인하르트 | |
| 제헌 국민의회 의원 | 임기 시작: 1789년 7월 9일 임기 종료: 1791년 9월 30일 선거구: 오툉 |
| 삼부회 대의원 (제1신분) | 임기 시작: 1789년 4월 12일 임기 종료: 1789년 7월 9일 선거구: 오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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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혁명 관련자 -
빌럼 1세
빌럼 1세는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의 통치자였으며, 나폴레옹 몰락 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경제 발전을 추진했으나 벨기에 독립을 인정하고 퇴위 후 사망했다. -
벨기에 혁명 관련자 -
빌럼 2세 (네덜란드)
빌럼 2세는 네덜란드의 왕세자 빌럼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국 육군에서 복무하고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으며, 1840년 네덜란드 국왕이 되어 184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동성애적 성향 논란 속에 1849년 사망했다. -
프랑스 대시종관 -
르네 2세 드 로렌 공작
르네 2세 드 로렌 공작은 1473년 로렌 공작이 되어 낭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부르고뉴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보데몽 백작과 바르 공작 작위를 상속받고 가문을 번성시킨 인물이다. -
프랑스 대시종관 -
장 드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백작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사생아로, 백년 전쟁과 프랑스 내전에서 활약했으며,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와 함께 영국군을 물리치고, 프라게리 반란과 공익 동맹에 참여했다가 1468년에 사망했다. -
1838년 사망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 출신의 시인이자 식물학자이며, 프로이센 군 복무와 세계 일주 탐험을 거쳐 소설 《페터 슐레미흘의 기이한 이야기》를 대표작으로 남겼고, 식물학 연구와 시 창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
1838년 사망 -
심상규
심상규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순조 시대에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규장각 직각, 승지 등 요직을 거쳐 순조 사후 헌종을 보필하고 남한산성 광주유수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2. 성직 활동 시기
1770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1775년 10월 국왕에 의해 랭스의 생드니 수도원장에 임명되었다. 1778년 3월, 소르본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779년 사제 서품을 받고, 랭스 대주교인 삼촌 알렉상드르가 도와 주교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탈레랑은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명망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선천적인 구족병으로 인해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갈 수 없었고, 교회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의 삼촌 알렉산드르 앙젤리크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고 부유한 교구 중 하나였던 랭스 대주교였다.
탈레랑은 여덟 살 때, 아르쿠르 대학과 생술피스 신학교에 다녔고, 21세가 될 때까지 소르본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여가 시간에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등 구체제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부제로서 그는 1775년 랭스에서 루이 16세의 대관식을 목격했다.
1779년 12월 19일, 25세의 나이에 가톨릭 사제로 서임되었다. 1780년에는 교회의 대리인이라는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올랐고, 1785년 프랑스 교회 재산의 일반 목록 작성을 촉진하고 "교회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옹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후자의 입장은 나중에 부인했다. 1788년 탈레랑의 아버지와 가족의 영향력으로 왕의 반감을 극복하고 연봉 22,000 리브르의 오통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1789년 1월 4일 루이-앙드레 드 그리말디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에 따라 자유사상가였지만, 외견상으로는 종교 의식을 존중했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냉소주의를 드러내고 모든 정통 가톨릭 관행을 버렸다. 그는 1791년 4월 13일 주교직을 사임했다. 1802년 6월 29일, 교황 비오 7세는 탈레랑을 속인으로 만들었다. 이는 당시 교회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3. 프랑스 혁명기
1789년 소집된 삼부회에서 탈레랑은 신분별 분리 회의 대신 국민의회 구성을 주장하여 주목받았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후, 교회 재산 국유화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다. 1790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1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여 "혁명의 주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교황은 그를 파문했지만, 탈레랑은 파리 주 행정관으로 취임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탈레랑은 인권과 시민의 권리 선언 작성에 참여하고, 1789년 국가에 귀속된 성직자 재산에 관한 법령과 성직자 민법을 제안하여 교회를 국유화했다. 1791년 교황 비오 6세에게 파문당한 후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했음에도, 최초의 헌법 주교 네 명의 선서를 집례했다. 계몽주의 정신에 따라 216페이지에 달하는 공교육 보고서를 작성하여 공교육을 촉진했으며, 이는 지역, 지구, 부서 학교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를 제안했다. 탈레랑은 5개월간의 삼부회 재직 동안 파리 경찰 규정 작성, 유대인의 선거권 제안, 십일조 금지 지지, 차관 확보 방안 고안 등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새로운 법령에 복종한 주교는 거의 없었고, 프랑스 성직자 대부분은 그를 분열주의자로 여겼다.
1792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에 프로이센과 영국이 가담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탈레랑은 런던에 파견되어 영국의 중립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피트 수상과 접견하여 상호 불가침을 제안했지만, 영국의 확답을 얻지 못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고 왕당파 죄수들이 학살되자, 군주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화해는 어려워졌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탈레랑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공회의 맹비난과 영국 내 반혁명 세력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좁았다. 1794년 1월, 영국에서 추방된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탈레랑은 은행 대리인으로 일하며 상품 거래와 부동산 투기에 참여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뉴욕의 아론 버의 집에 머물렀고, 필라델피아의 테오필 카제노브(Theophile Cazenove)와 협력했다. 1794년 5월 19일 필라델피아 시장 매슈 클락슨(Matthew Clarkson)에게 "미합중국에 충실하고 진실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4. 교육 개혁
탈레랑은 1791년 9월에 제헌의회 헌법위원회의 이름으로 〈공공교육 보고서와 법안〉이라는 교육 개혁안을 발표했다.
탈레랑의 이 개혁안은 초등교육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초중고등 교육과정 사이의 연속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가톨릭 사제들의 종교교육을 묵인했다는 점 등으로 개혁파의 비판을 받았다. 이 교육안은 프랑스 혁명 최초의 공식 교육안으로, "자유와 평등의 필수조건인 공공교육은 만인을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제안했다.
| 번호 | 내용 |
|---|---|
| 1 | 교육과정은 초등학교(école primaire), 구학교(école de district), 주학교 (école de département)의 3단계로 구성된다. |
| 2 | 만인에게 공통적인 초등교육은 면(canton) 단위로 설치되는 초등학교에서 실시한다. |
| 3 | 중등교육은 7년 과정의 군학교에서 실시한다. |
| 4 | 도(道)학교에는 성직자학교, 의사학교, 법률학교, 군사학교 네 종류가 있다. |
| 5 | 초등교육은 무상으로 제공되며, 중고등교육에서는 학생이 경비의 일부를 부담하지만, 가난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가 있다. |
| 6 | 초등학교와 군학교 선생은 공무원이고 시험을 거쳐 선발한다. |
| 7 | 초등학교는 일곱 살 이상의 모든 어린이를 받아들이지만, 취학을 강요하지 않는다. |
| 8 | 종교교리를 초등학교와 군학교에서 가르친다. |
| 9 | 누구나 학교를 세울 수 있다. |
탈레랑의 교육개혁안은 학교에서 가톨릭 종교교육을 의무화하고, 성직자 학교를 고등교육 기관의 하나로 인정한 점에서 구체제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5. 총재 정부기
1796년 프랑스로 귀국한 탈레랑은 영국과 미국 전문가로 행세하며 총재정부의 외무상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영국과 미국에 맞서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비롯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하여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후, 탈레랑은 캄포포르미오 조약 체결 과정에서 100만 프랑 이상의 뇌물을 챙겼다. 탈레랑의 주도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실행되었으나, 이는 파국으로 끝났다. 또한 탈레랑은 미국 사절단에 과도한 뇌물을 요구하여 XYZ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미국과의 관계를 전쟁 직전까지 악화시켰다.
6. 프랑스 제1제정기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지지하고 다시 외무상에 올랐다. 1801년 정교협약 체결을 중재하여 국가와 교회의 갈등을 완화했다. 1802년 아미앵 조약 체결에 기여했지만, 나폴레옹의 팽창 정책에 반대하여 1807년 사임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대시종장에 임명되었으나, 나폴레옹은 탈레랑의 제안을 무시했다. 1806년 베네벤토 공작이 되었고, 이 작위는 1815년까지 유지되었다.
7. 왕정복고기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탈레랑은 연합국의 요청을 받아 임시 정부의 대표가 되었다. 이후 루이 18세를 옹립하였고, 복위한 루이 18세는 탈레랑을 다시 외무상으로 임명하였다.
빈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한 탈레랑은 패전국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회의 과정에서 바르샤바 대공국과 작센 분할을 둘러싸고 승전국들이 분열하자, 영국-오스트리아 진영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는 1792년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백일천하 동안 빈에 머무르며 나폴레옹과 거리를 두었던 탈레랑은, 루이 18세의 재복귀 후 외무상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백일천하로 인해 1790년의 국경으로 후퇴해야 했다.
루이 18세의 반동적인 왕정복고 정권 하에서 극단적 왕당파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탈레랑은 영국 망명 시절처럼 이들에게 밀려 사임해야 했다. 1829년부터 자유주의자들과 루이 필리프를 연결시켜 샤를 10세를 제거하는 음모에 가담했다.
8. 평가
탈레랑은 "돈벌이에 열중하지 않을 때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혹평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요구를 관철시킨 점 때문에 뛰어난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한 루이 16세, 총재정부, 나폴레옹 등과의 관계를 버린 것에서 "배신의 천재"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폴레옹과 탈레랑은 서로의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했지만, 반드시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탈레랑의 교활한 정치 수법을 나폴레옹은 "비단 스타킹 속의 똥"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탈레랑은 변절의 정치가로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명 외교관으로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메테르니히와 함께 외교의 천재라고 불리기도 한다. 탈레랑은 오랫동안 대립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지속된 양국의 협력과 동맹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양국의 동맹 관계는 후일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이끈 탈레랑 외교의 유산이었다.
탈레랑이 제안한 미터법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계량의 기준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