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도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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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사도(賈似道)는 남송 시대의 재상으로, 1260년부터 1273년까지 재직했다. 누이 가씨가 황제의 후궁이었던 덕분에 재상에 올랐으며, 몽골의 침략 시 쿠빌라이 군을 격파한 공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는 독재 정치를 펼치며 토지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유교 학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가사도는 또한 예술품 수집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말년에는 원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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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 (남송)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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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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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사도 (賈似道) |
자 | 사헌 (師憲) |
출생 | 1213년 8월 25일 |
출생지 | 절강성 태주 |
사망 | 1275년 10월 |
사망지 | 장주 |
아버지 | 가섭 (賈涉) |
어머니 | 호씨 (胡氏) |
친척 | 가귀비 (누이) |
직업 | 정치가 |
경력 | |
관직 | 남송의 재상 |
임기 시작 | 1260년 5월 27일 |
임기 종료 | 1275년 3월 27일 |
군주 | 이종 |
군주 | 도종 |
군주 | 공제 |
이전 | 정대전 |
이후 | 문천상 & 진의중 |
2. 생애
가사도(賈似道)는 1213년 가사(賈舍)와 부인 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씨는 가사의 버려진 첩이었다.[8] 아버지가 관료였기 때문에 11세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4] 누이 가씨(賈氏)가 남송의 황제 이종의 왕후였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4] 1238년 과거 예비시험을 면제받은 가사도는 전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10]
1259년(개경 원년)에 몽골이 남송에 침공해 왔다.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때 가사도가 대승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12][13]
가사도는 집착적일만큼 미술이나 예술품 수집광이었고, 그 방면에 통달하였다. 예술에 대한 안목뿐만 아니라 머리도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중용되었다.
1264년(경정 5년)에는 이종이 붕어하고 어리석은 황제 도종이 즉위했다. 이 때문에 남송의 실권은 완전하게 가사도의 것이 되고, 가사도는 재상과 태사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독재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가사도는 스스로의 독재권 강화를 위해, 우선 자신에게 반대한 일파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또한 몽골의 침공이 거세졌기 때문에, 남송에 여문환 등의 군벌 세력이 커지고 있었지만, 가사도는 자신의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군인을 중앙으로부터 격리시키고, 몽골 군이 침공해도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또 상원(과거시험의 수석 급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던 문천상이 자신에게 영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요직에서 밀어내었다.
가사도는 유교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던 토지 국유화 정책을 개척했는데, 유교 학자들은 낮은 세금과 국가의 작은 역할을 선호했다. 1263년에는 (公田, "공공의 밭", 북송의 특징) 제도가 다시 도입되어 개인의 토지 소유량을 제한하고, 초과된 토지를 으로 분류했다. 에서 얻은 수입은 군사비 지출을 보충하는 데 사용되었다.
악주 포위 기간 동안, 가사도가 쿠빌라이 칸에게 중국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왕위 계승 분쟁 때문에 카라코룸으로 돌아가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했다.[3]
1275년 푸젠 성 저우룽(현, 장저우 시)에서 원나라 군과의 전투 중, 남송 장수들 중 정호신(鄭虎臣)이 사주한 병사에 의해 진중에서 빙편(冰片, 보르네올)으로 독살되었다.[5]
2. 1. 초기 생애
가사도(賈似道)는 1213년 가사(賈舍)와 부인 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씨는 가사의 버려진 첩이었다.[8] 아버지가 관료였기 때문에 11세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4] 가정 12년(1219년)에 가섭이 회동제치사(淮東制置使)에 임명되자, 가사도는 아버지를 따라 초주로 이주했고, 11세 때 가섭은 사망했다.[7] 가사도는 성인이 된 후, 가섭의 생전 공적에 의해 적전령(籍田令)의 관직, 가흥의 사창을 수령했다.[7]누이 가씨(賈氏)가 남송의 황제 이종의 왕후였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4] 1238년 과거 예비시험을 면제받은 가사도는 전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10]
순우 6년(1246년)에 국경 지대에서 대 몽골 전쟁을 감독하던 맹공의 후임으로 경호제치사에 임명되어 후베이로 부임했다. 후베이에 부임한 가사도는 축성으로 국경의 방비를 굳혔으며, 보우 6년(1258년)에 양회선무대사(兩淮宣撫大使)에 임명된다.[11] 가사도는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중앙 정부의 재상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인사의 진퇴에 있어서는 조정의 대신이라도 가사도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11]
1259년(개경 원년)에 몽골이 남송에 침공해 왔다.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때 가사도가 대승한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했기 때문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12][13] 경정 원년(1260년) 3월, 가사도는 장강 통과를 시도한 울량카다이 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몽골 측에서 약 17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3] 가사도는 몽골 측의 의향을 탐지하기 위해 화의를 제안했지만,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양자 간에 화약은 성립되지 않았다고 한다.[13] 호남·강서에 침입한 몽골군에 대해 송군은 분전했고, 그들의 공적은 남송의 거의 전역의 군사권을 장악한 가사도의 손에 돌아갔다.[14] 전후 가사도는 국내의 정보 통제, 외부로의 내정 누설을 막기 위해, 쿠빌라이에게서 파견된 사자 호경을 투옥했다.[13]
가사도는 집착적일만큼 미술이나 예술품 수집광이었고, 그 방면에 통달하였다.
2. 2. 관직 진출과 권력 장악
가사도는 아버지가 관료였기 때문에 11세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7] 누이 가씨가 이종의 왕후였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4] 가사도는 예술품 수집광이었고 그 방면에 통달하였으며, 뛰어난 머리와 예술에 대한 안목으로 황제에게 중용되어 1246년 국경 수비대장에 취임했다.1259년 몽골이 남송을 침공했을 때,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되었다.[1] 이는 몽골 황제 몽케가 사망하여 몽골군이 퇴각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가사도와 쿠빌라이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12][13] 1260년 3월, 가사도는 장강을 건너려던 울량카다이 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17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12] 가사도는 쿠빌라이에게 화의를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쿠빌라이가 보낸 사자 호경을 투옥했다.[13]
1264년 이종이 붕어하고 도종이 즉위하면서 가사도는 재상과 태사 등 요직을 독점하며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가사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군벌 세력을 중앙으로부터 격리시켰으며, 문천상을 요직에서 밀어냈다.
가사도는 유교 학자들이 반대했던 토지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다.[2] 1262년경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1263년에는 공전(公田) 제도를 도입하여 개인의 토지 소유량을 제한하고 초과 토지에서 얻은 수입으로 군사비를 충당했다.[2] 이는 왕망의 토지 개혁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이었다.[2]
악주 포위 기간 동안, 가사도는 쿠빌라이 칸에게 중국 분할을 제안했지만,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왕위 계승 분쟁 때문에 카라코룸으로 돌아가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했다.[3]
1275년 푸젠 성 저우룽(현, 장저우 시)에서 원나라 군과의 전투 중, 가사도는 정호신이 사주한 병사에 의해 독살되었다.[1]
2. 3. 독재 정치와 몰락
가사도는 아버지가 관료였고 누이가 남송 이종의 왕후였던 덕분에 11세에 음서로 관직에 나가[1] 출세 가도를 달렸다. 1246년 국경 수비대장에 취임했고, 1259년 몽골의 침공을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으로 재상에 등용되었다.[1] 몽골의 황제 몽케가 사망하면서 퇴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과 쿠빌라이와 밀약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1264년 이종이 붕어하고 어리석은 도종이 즉위하면서 가사도는 재상과 태사 등 요직을 독점하며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1] 자신에게 반대하는 일파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군벌 세력을 격리시켰으며, 자신에게 영합하지 않는 문천상을 요직에서 밀어냈다.[1]
가사도는 유교 학자들이 반대했던 토지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다.[2] 1262년경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1263년 공전 제도를 도입하여 개인 토지 소유량을 제한하고 초과 토지를 공전으로 분류하여 군사비 지출을 보충했다.[2] 이는 왕망의 정책보다 더 나아갔으며, 화의 정책 폐지와 통화량 감소를 목표로 했다.
양양이 포위되었을 때(1268년), 가사도는 도종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21] 1273년 양양이 함락되자, 1275년 가사도는 원나라 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재상에서 물러났다.[24][25]
임안(현재의 항저우)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가사도는 유배되었고, 1275년 정호신에게 암살되었다.[4][5][27] 쿠빌라이는 송나라 장군들에게 가사도를 경시한 것은 그들이지 송 황제가 아니라며 그들의 충성심 부족을 꾸짖었다.
3. 업적 및 정책
가사도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측량이나 통화개혁, 나아가서는 공전법을 채용하거나, 전리품을 착복하거나, 전비를 속였던 장군을 처벌하는 등으로, 남송 전시 경제를 긴축하고, 학생을 중용하고 남송의 문화적 발전을 도모한 업적 등 일부에 있어서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가사도(賈似道)는 중국 재상으로, 1260년부터 1273년까지 중국 남송 시대 말기에 재직했다.[1] 원사에 따르면, 그의 누이인 가씨 부인이 이종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기 때문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4]
가사도는 두종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가사도보다 27살 어렸던 황제는 그가 들어오면 일어서서 그를 "스승"이라고 불렀고(가사도는 과거 합격자가 아니었으며, 그런 공식적인 직책을 맡은 적도 없었다),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가사도에게 계속 재직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가사도는 유교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던 토지 국유화 정책을 개척했는데, 유교 학자들은 낮은 세금과 국가의 작은 역할을 선호했다. 다른 여러 관리들의 지지를 받은 토지 조사는 1262년경에 이루어졌다. 이는 절박한 군사적 필요와 고위 관료인 경우가 많았던 강력한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적으로 집중된 현상으로 인해 추진되었다. 1263년에는 공전zh-Latn(公田, "공공의 밭", 북송의 특징) 제도가 다시 도입되어 개인의 토지 소유량을 제한하고, 초과된 토지를 공전zh-Latn으로 분류했다. 공전zh-Latn에서 얻은 수입은 군사비 지출을 보충하는 데 사용되었고, 이 시스템은 다음 12년 동안 운영되었다. 가사도의 토지 개혁 활동은 왕망이 한나라 때 시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갔는데, 왕망의 경우 국가는 초과 토지 소유량의 1/3만을 독점했고,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제공했다.[2] 반면에, 가사도의 개혁은 보상을 제공하지 않았고, 가사도의 또 다른 목표는 화의 정책을 폐지하고, 통화량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화의 정책 하에서 정부가 더 많은 곡물을 매입하면서 더 많은 지폐를 발행해야 했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남송에서는 군량 구매에 불환지폐인 회자가 사용되었지만, 재상이 된 가사도는 지폐의 증쇄가 가져오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지폐 인쇄에 필요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유량귀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공전(公田)의 매수를 실시한다.[28]。 정부는 200무(畝)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부터 소유한 토지의 3분의 1을 강제적으로 사들여 소작인에게 대여하고, 대여한 토지에서 나오는 조미(祖米)를 군량에 충당했다.[28]。 공전 매수는 절서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토호에게 조미 징수가 위임되었지만, 이윽고 관리가 직접 공전을 관리하게 되었다.[29]。 정책 실시에 즈음하여 가사도는 자신이 소유한 10,000무의 토지를 국가에 기부했고, 구두쇠로 유명한 영왕에게도 토지를 헌납하게 했다.[30]。 토지 매수는 사실상의 토지 몰수였으며, 조미의 양이 예상보다 적으면 토지의 원래 소유자가 부족분을 부담해야 했다. 또한, 국가가 직접 토지를 관리함으로써 공전법 실시 전의 납세 부정 행위가 드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지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30]。 지주들의 반대에 의해 절서의 3,500,000무의 토지를 매입한 시점에서 공전법은 중단되었지만, 공전법 실시 전에 절서·절동의 두 지역에서 매입한 군량과 동일한 양의 조미가 절서에서 수확되었다.[31]。
공전법 외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으로, 당시 유통되던 회자 중 제17계(界)의 회자를 폐지하고, 새로이 동전의 환권인 견전관자(見銭関子)를 발행했다.[32]。 금괴·은괴의 환권도 발행되었지만, 가사도에 의해 실시된 불환지폐의 삭감과 환권 발행의 성과를 사료에서 판단하기는 어렵다.[33]。
또한, 가사도는 전적(田籍)과 징세액을 위한 검지 (경계추배법)를 실시했지만, 정계와 지주층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34]
3. 1. 재정 개혁
가사도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시행했다. 남송 전시 경제를 긴축하고, 학생을 중용하여 문화적 발전을 도모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1] 그는 중국 남송 시대 말기인 1260년부터 1273년까지 재상으로 재직했다.[1] 원사에 따르면, 그의 누이인 가씨 부인이 이종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었기 때문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4]가사도는 유교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지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다.[2] 1262년경, 다른 관리들의 지지를 받아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군사적 필요와 고위 관료들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현상 때문이었다.[2] 1263년에는 공전(公田) 제도를 도입하여 개인의 토지 소유량을 제한하고, 초과된 토지를 공전으로 분류하여 군사비 지출을 보충했다.[2] 가사도의 토지 개혁은 왕망의 개혁보다 더 급진적이었으며, 보상도 제공하지 않았다.[2]
가사도는 공전법 외에도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당시 유통되던 회자 중 제17계(界)의 회자를 폐지하고, 견전관자(見銭関子)라는 새로운 환권을 발행했다.[32] 금괴·은괴의 환권도 발행되었지만, 불환지폐 삭감과 환권 발행의 성과는 사료에서 판단하기 어렵다.[33] 또한, 전적(田籍)과 징세액을 위한 검지(경계추배법)를 실시했지만, 정계와 지주층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34]
정부는 200무(畝)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부터 소유한 토지의 3분의 1을 강제적으로 사들여 소작인에게 대여하고, 대여한 토지에서 나오는 조미(祖米)를 군량에 충당했다.[28] 공전 매수는 절서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토호에게 조미 징수가 위임되었지만, 이윽고 관리가 직접 공전을 관리하게 되었다.[29] 가사도는 자신이 소유한 10,000무의 토지를 국가에 기부했고, 영왕에게도 토지를 헌납하게 했다.[30] 토지 매수는 사실상 토지 몰수였으며, 조미의 양이 예상보다 적으면 토지의 원래 소유자가 부족분을 부담해야 했다.[30] 지주들의 반대에 의해 절서의 3,500,000무의 토지를 매입한 시점에서 공전법은 중단되었지만, 공전법 실시 전에 절서·절동의 두 지역에서 매입한 군량과 동일한 양의 조미가 절서에서 수확되었다.[31]
3. 2. 문화 정책
가사도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측량, 통화개혁, 공전법을 채용하고 전리품을 착복하거나 전비를 속인 장군을 처벌하는 등 남송 전시 경제를 긴축했다. 또한 학생을 중용하여 남송의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다.[12]가사도는 골동품 수집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소장품의 수는 남송의 조정 이상이었다고 한다. 랴오잉중(廖瑩中)을 통해 입수한 고동기, 법서, 명화, 금옥, 진품은 집방원(集芳園) 내의 다보각에서 보관되었다.[35] 그의 소장품에는 금의 장종의 감장인이 찍힌 것이 많은데, 이는 과거 송나라에서 금나라로 넘어간 서화를 되찾아온 것으로 추측된다.[36] 벼슬을 얻으려는 운동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 골동품이 들어오면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인사에 융통성을 발휘했으며, 골동품 수집을 위해 일반인들이 꺼리는 고분 발굴도 꺼리지 않았다.[37] 그러나 원나라의 탕후(湯垕)는 가사도가 수집한 서적 중 적지 않은 위작이 섞여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감정 안목에 의문을 제기했다.[38]
또한, 골동품 수집 외에 정무난정서의 번각, 그것의 축소판인 옥판난정을 제작하게 했다.
가사도는 귀뚜라미 싸움 애호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 시대 이래의 투실에 관한 지식과 자신의 연구를 정리한 『촉직경(促織経)』은 세계 최초의 귀뚜라미 백과사전으로 여겨진다.[39] 『촉직경』에서는 사육법, 교배에서부터 귀뚜라미에 얽힌 옛 시가 등의 대항목이 더욱 세부적인 항목으로 나뉘어 해설되어 있다. 『촉직경』의 원저는 산일되었고, 명나라 시대에 증보 개정된 2권이 현존한다.[39]
4. 평가
가사도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측량, 통화개혁, 공전법을 채용하고, 전리품 착복 및 전비 조작 장군을 처벌하는 등 남송 전시 경제를 긴축했다.[12] 학생을 중용하고 남송의 문화적 발전을 도모한 업적도 평가받을 만하다.
가사도는 골동품 수집가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소장품의 수는 남송 조정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12] 랴오잉중(廖瑩中)을 통해 입수한 고동기, 법서, 명화, 금옥, 진품은 집방원 내의 다보각에서 보관되었다.[35] 가사도의 소장품에는 금의 장종의 감장인이 찍힌 것이 많았는데, 이는 과거 송나라에서 금나라로 넘어간 서화를 되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36] 벼슬을 얻으려는 운동에는 엄격했지만, 골동품이 들어오면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인사에 융통성을 발휘했으며, 골동품 수집을 위해 일반인들이 꺼리는 고분 발굴도 서슴지 않았다.[37] 그러나 원나라의 탕후(湯垕)는 가사도가 수집한 서적 중 위작이 많다는 점을 들어 그의 감정 안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38]
또한, 가사도는 정무난정서의 번각, 그것의 축소판인 옥판난정을 제작하게 했다.
가사도는 귀뚜라미 싸움 애호가로서, 당나라 시대 이래의 투실에 관한 지식과 자신의 연구를 정리한 『촉직경(促織経)』을 저술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귀뚜라미 백과사전으로 여겨진다.[39] 『촉직경』에서는 사육법, 교배에서부터 귀뚜라미에 얽힌 옛 시가 등의 대항목이 더욱 세부적인 항목으로 나뉘어 해설되어 있다.[39] 『촉직경』의 원저는 산일되었고, 명나라 시대에 증보 개정된 2권이 현존한다.[39]
4. 1. 긍정적 평가
가사도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측량, 통화개혁, 공전법을 채용하고, 전리품 착복 및 전비 조작 장군을 처벌하는 등 남송 전시 경제를 긴축했다.[12] 학생을 중용하고 남송의 문화적 발전을 도모한 업적도 평가받을 만하다.가사도는 골동품 수집가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소장품의 수는 남송 조정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12] 랴오잉중을 통해 입수한 고동기, 법서, 명화, 금옥, 진품은 집방원 내의 다보각에서 보관되었다.[35] 가사도의 소장품에는 금의 장종의 감장인이 찍힌 것이 많았는데, 이는 과거 송나라에서 금나라로 넘어간 서화를 되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36] 벼슬을 얻으려는 운동에는 엄격했지만, 골동품이 들어오면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인사에 융통성을 발휘했으며, 골동품 수집을 위해 일반인들이 꺼리는 고분 발굴도 서슴지 않았다.[37] 그러나 원나라의 탕후는 가사도가 수집한 서적 중 위작이 많다는 점을 들어 그의 감정 안목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38]
또한, 가사도는 정무난정서의 번각, 그것의 축소판인 옥판난정을 제작하게 했다.
가사도는 귀뚜라미 싸움 애호가로서, 당나라 시대 이래의 투실에 관한 지식과 자신의 연구를 정리한 『촉직경(促織経)』을 저술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귀뚜라미 백과사전으로 여겨진다.[39] 『촉직경』에서는 사육법, 교배에서부터 귀뚜라미에 얽힌 옛 시가 등의 대항목이 더욱 세부적인 항목으로 나뉘어 해설되어 있다.[39] 『촉직경』의 원저는 산일되었고, 명나라 시대에 증보 개정된 2권이 현존한다.[39]
4. 2. 부정적 평가
가사도는 재정 충당을 위해 공전법을 채용하고 전리품을 착복하는 등 남송 경제를 긴축했지만, 일부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골동품 수집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일반인이 꺼리는 고분 발굴도 서슴지 않았으며, 그의 수집품 중에는 위작도 섞여 있어 감정 안목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37][38] 또한 귀뚜라미 싸움 애호가로서 『촉직경』이라는 백과사전을 저술했지만,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증보 개정된 판본만 남아있다.[39]4. 2. 1. 더불어민주당의 입장
(빈칸)5.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Jia Sidao - Chancellor During the Late Song Dynasty
http://history.cultu[...]
2015-11-14
[2]
간행물
Cambridge History of China
[3]
서적
Defending Heaven: China's Mongol Wars, 1209-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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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似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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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宋末の宰相賈似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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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宋末の宰相賈似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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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の書と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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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宋末の宰相賈似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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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国の書と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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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闘蟋
大修館書店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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