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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지세포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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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제 지세포진성은 조선 시대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된 군사 시설이다. 1419년 대마도 정벌 이후 지세포에 군사가 주둔하기 시작했으며, 1490년에 성곽이 완성되어 왜구 방어의 최전방 기지 역할을 했다. 지세포진성은 대마도와 가까워 일본과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으며,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로도 활용되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나, 이후 만호진이 재설치되었고, 1895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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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지세포진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이름거제 지세포진성
한자 표기巨濟 知世浦鎭城
위치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235-4번지
지정 종류경상남도 기념물
지정 번호203호
지정일1998년 11월 13일
면적32,996m²

2. 역사

1419년(세종 원년) 6월,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병선 227척, 1만 7300명의 대군이 견내량에 집결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원정군은 대마도에서 129척의 선박과 19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22년(세종 4년), 왜구의 약탈로 거창지역으로 이주했던 거제도민들이 거제 땅으로 돌아왔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조선 조정은 영등포(현 장목면),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에 군사를 주둔시켰다.(1425년 경상도지리지 관방 편 기록)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했고,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설치되었다. 1490년(성종 21년) 9월, 둘레 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되면서,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로 급부상하였다.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 다시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 포곡식(包谷式) 산성은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산성을 말한다.

대마도와 불과 49km 떨어진 지세포진은 왜구 방어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도 수행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 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현재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 역할을 했다.

특히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주 경로는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것이었지만, 각종 역사 문헌에 통신사의 귀국 경로에서 지세포를 통해 귀국했다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지세포진성은 전쟁 초반 1년을 제외한 나머지 6년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초기 지세포 만호 한백록이순신 장군 등과 함께 옥포 해전한산도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한산도 대첩에서 입은 상처로 전사했다. 이후 지세포 만호 강지욱(姜志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 패해 성을 함락당하고, 1604년(선조 37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40여 년이 지난 1651년(효종 2년)에 지세포에 만호진이 다시 설치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지세포진이 폐진되었다. 폐진 전까지 주요 건물은 객사, 아사, 군기고, 군관청, 이청, 사령청, 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었다. 이 건물은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점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2. 1. 축성 이전

1419년(세종 원년) 6월, 이종무 장군이 지휘하는 병선 227척, 1만 7300명의 대규모 원정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견내량에 집결했다. 원정군은 대마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여 129척의 선박과 19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하는 대승을 거뒀다. 3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왜구의 약탈 등으로 현재 거창 지역에 이주했던 거제도민들은 비로소 거제 땅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조선 조정은 1425년경 영등포(현 장목),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포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후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로 급부상했다.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했다.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설치되었고, 1490년(성종 21년) 9월에는 둘레 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되었다. 이후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해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

지세포진은 대마도와 불과 49km 떨어진 위치에서 왜구 방어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대외관계 창구 기능도 수행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출입국 관리사무소 역할을 했다.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에도 지세포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역사문헌에 남아있다.

2. 1. 1. [[대마도 정벌]] (1419년)

1419년(세종 원년) 6월, 이종무 장군이 지휘하는 병선 227척, 1만 7300명의 대규모 원정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견내량에 집결했다. 원정군은 대마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여 129척의 선박과 19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하는 대승을 거뒀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조선 조정은 1425년경 영등포(현 장목),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포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후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로 급부상했다.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했다.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설치되었고, 1490년(성종 21년) 9월에는 둘레 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되었다. 이후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해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

지세포진은 대마도와 불과 49km 떨어진 위치에서 왜구 방어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대외관계 창구 기능도 수행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출입국 관리사무소 역할을 했다.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에도 지세포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역사문헌에 남아있다.

2. 1. 2. 거제도민 귀환 (1422년)

1419년 대마도 정벌 3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왜구의 약탈 등으로 현재 거창 지역에 이주했던 거제도민들은 비로소 거제 땅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2. 2. 축성 및 운영

1419년(세종 원년) 6월,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병선 227척, 1만 7300명의 대군이 견내량에 집결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원정군은 대마도에서 129척의 선박과 19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22년(세종 4년), 왜구의 약탈로 거창지역으로 이주했던 거제도민들이 거제 땅으로 돌아왔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조선 조정은 영등포(현 장목면),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에 군사를 주둔시켰다.(1425년 경상도지리지 관방 편 기록)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했고,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설치되었다. 1490년(성종 21년) 9월, 둘레 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되면서,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로 급부상하였다.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 다시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 포곡식(包谷式) 산성은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산성을 말한다.

대마도와 불과 49km 떨어진 지세포진은 왜구 방어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도 수행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 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현재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 역할을 했다.

특히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주 경로는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것이었지만, 각종 역사 문헌에 통신사의 귀국 경로에서 지세포를 통해 귀국했다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지세포진성은 전쟁 초반 1년을 제외한 나머지 6년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초기 지세포 만호 한백록이순신 장군 등과 함께 옥포 해전한산도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한산도 대첩에서 입은 상처로 전사했다. 이후 지세포 만호 강지욱(姜志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 패해 성을 함락당하고, 1604년(선조 37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지세포에 만호진이 다시 세워진 시기는 1651년(효종 2년)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40여 년이 지나서였다. 일운면지에 따르면 지세포진이 폐진된 것은 1895년 갑오개혁 때로, 폐진 전까지 주요 건물은 객사, 아사, 군기고, 군관청, 이청, 사령청, 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었다. 이 건물은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점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2. 2. 1. 초기 축성 (1490년)

1419년(세종 원년) 6월,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병선 227척, 1만 7300명의 대군이 견내량에 집결하여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원정군은 대마도에서 129척의 선박과 19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22년(세종 4년), 왜구의 약탈로 거창지역으로 이주했던 거제도민들이 거제 땅으로 돌아왔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조선 조정은 영등포(현 장목면),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에 군사를 주둔시켰다.(1425년 경상도지리지 관방 편 기록)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했고,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설치되었다. 1490년(성종 21년) 9월, 둘레 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되면서,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로 부상하였다.

2. 2. 2. 포곡식 산성으로 재축성 (1545년)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 다시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 포곡식(包谷式) 산성은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산성을 말한다.

2. 2. 3. 대외 관계 창구 역할

대마도 정벌 이후 축성된 지세포진성은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을 수행했으며,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로도 사용되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 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현재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주 경로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것이었지만, 여러 역사 문헌에 따르면 통신사가 귀국할 때 지세포를 거쳐 귀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지세포진이 단순한 군사적 요충지를 넘어,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창구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2. 2. 4. [[조선통신사]] 귀국 경로

조선통신사는 주로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경로를 이용했지만, 귀국 시에는 지세포를 통해 귀국했다는 기록이 여러 역사 문헌에 남아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 체결 이후, 지세포진은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을 수행했다.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 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현재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는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3. [[임진왜란]] (1592-1598)

대마도 정벌 이후 축성된 지세포진은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 및 조선통신사 귀국길로 사용되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출입국 관리사무소 역할을 했다.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로도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역사문헌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초기 지세포 만호 한백록은 이순신 장군 등과 함께 옥포 해전한산도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이후 한산도 대첩에서 입은 상처로 전사했다. 이후 지세포 만호 강지욱(姜志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 패해 성을 함락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인 1604년(선조 37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2. 3. 1. 지세포왜성

대마도 정벌 이후 축성된 지세포진은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 및 조선통신사 귀국길로 사용되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 체결 이후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활동을 하는 왜인들에게 어업활동 증명서를 발급하는 등 출입국 관리사무소 역할을 했다.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의 귀국 경로로도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역사문헌에 남아있다.

2. 4.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 정벌 이후 축성된 지세포성은 일본과 대외 관계 창구 기능 및 조선통신사 귀국길로 사용되었다. 1419년(세종 원년) 6월,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병선 227척, 1만 7300명의 대군은 대마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여 129척의 선박과 1940여 채의 가옥을 소각하고 114명의 왜구를 참수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22년(세종 4년)에는 왜구의 약탈 등으로 거창 지역에 이주했던 거제도민들이 거제 땅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은 계속되었고, 조선 조정은 영등포(현 장목), 옥포, 탑곡(현 남부면 탑포), 지세에 군사를 주둔시켰다.(1425년 경상도지리지 관방 편 기록) 이후 지세포는 왜구 방어의 최전방 전초기지로 급부상한다. 1441년(세종 23년)에는 지세포에 만호를 두고 전선을 배치하였고, 1485년(성종 16년)에는 지세포에 보(堡)가, 1490년(성종 21년) 9월에는 둘레 1605척(486.363m)의 지세포성이 완성되었다.

이후 지세포성은 1545년(인종 원년)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영남 지역의 6개 군에서 2만 50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해 다시 포곡식 산성을 완성하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 성루를 완성했다.(포곡식(包谷式) 산성 -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산성) 거제시에 따르면 선창마을 동쪽의 비탈진 산기슭에 180도 회전한 ‘ㄷ’자 모양으로 성벽이 남아 있는 지세포성의 둘레는 1096m, 높이는 3m(최대 폭 4.5m)다. 지세포진성은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고 그 사이 사이에 망루를 둔 것으로 보이며 동쪽 입구에는 성곽을 세웠던 주춧돌이 나란히 일렬로 남아있다.

대마도와 불과 49km 떨어진 지세포진은 왜구의 방어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대외 관계 창구 기능도 했다. 1441년(세종 23년) 계해약조(조어금약)를 체결한 조선 조정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주로 지세포 인근에서 어업활동을 벌이는 왜인들에게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증명서 발급 등 현재 출입국 관리사무소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지세포진은 조선통신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주경로는 부산에서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것이었지만, 각종 역사문헌에 통신사의 귀국 경로에서 지세포를 통해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지세포진성은 전쟁 초반 1년을 제외한 나머지 6년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초기 지세포 만호 한백록이순신 장군 등과 함께 옥포 해전한산도 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이후 한산도 대첩에서 입은 상처로 전사했다. 이후 지세포 만호 강지욱(姜志昱)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싸우다 패해 성을 함락당하고, 전쟁이 끝난 후인 1604년(선조 37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에 속하게 된다.

==== 만호진 재설치 (1651년) ====

임진왜란이 끝난 뒤 40여 년이 지난 1651년(효종 2년)에 지세포에 만호진이 다시 설치되었다.

==== 폐진 (1895년) ====

1895년 갑오개혁 때 지세포진이 폐진되었다. 폐진 전까지 주요 건물은 객사, 아사, 군기고, 군관청, 이청, 사령청, 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었다. 이 건물은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점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2. 4. 1. 만호진 재설치 (165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40여 년이 지난 1651년(효종 2년)에 지세포에 만호진이 다시 설치되었다.

2. 4. 2. 폐진 (1895년)

1895년 갑오개혁 때 지세포진이 폐진되었다. 폐진 전까지 주요 건물은 객사, 아사, 군기고, 군관청, 이청, 사령청, 화약고 등 기와 35칸, 초가 11칸이었다. 이 건물은 신식 군대인 통영수비대에 이관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점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3. 구조

참조

[1] 간행물 경상남도 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 명칭변경 고시 http://210.104.249.3[...] 경상남도지사 2018-12-20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3] 문서 망을 보기 위하여 성문이나 성벽 위에 높이 세운 건물
[4] 웹인용 임진왜란의 잔상 거제의 왜성 새거제신문 https://web.archive.[...] 2020-07-15
[5] 보고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85번지 일원 내 梁山 架山里遺蹟 Ⅴ. 고찰 https://www.cha.go.k[...] 2015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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