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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제2차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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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 제2차 만세 운동은 1930년 1월 허정숙의 지도 하에, 각 학교 학생대표회의 계획에 따라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려던 운동이다. 이화여고보 등 13개교에서 여학생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34명이 구속되고 55명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구속된 허정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운동은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 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929년 12월 중순경, 허정숙은 최복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29년 12월 13일에는 신간회의 민중대회 계획이 누설되어 20명이 체포된 민중대회사건(허헌 사건)이 발생했고, 허헌도 수감되었다.[2]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허정숙은 굴하지 않고, 1930년 1월 여성 주도의 항일 투쟁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 근우회 서무부장이었던 허정숙은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 전개했다.[2]

3. 계획과 전개 과정

허정숙이 고문으로 지도했던 이 만세시위 운동은 각 학교 학생대표회가 학생 시위 계획을 사전에 수립, 1월 15일 제3학기가 시작되는 아침에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시가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잡히더라도 일체 이름을 밝히지 말 것과 유치될 경우에는 단식을 행하자는 3개 항의 결의를 했다고 한다.[3] 동아일보 1930년 2월 16일 자 기사에 따르면 허정숙은 허정자로 표기되기도 했으며, 학생대표 준비모임에는 남학생 대표도 다수 참가하였다.[3]

4. 여학생 만세운동

1930년 1월, 허정숙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함께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제2차 학생 시위를 주도하였다.[2] 이때 정칠성, 박차정 등도 함께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2]

허정숙은 다시 연락망을 구성하여 1월 중순 만세운동 거사 날짜를 확정하고 유인물과 태극기를 등사하여 살포하였다. 이화여고보를 비롯한 시내 공사립 여자고등보통학교와 그밖에 중등학교 등 13개교가 일제히 만세를 부른 여학생 만세운동 결과, 구속자 34명, 불구속자 55명이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이들 모두 여학생이었다는 점이 당시 사회의 큰 관심거리로 주목받았다.[3]

5. 구속 및 재판

1929년 12월 중순, 허정숙은 최복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2] 1930년 1월, 근우회가 주도한 제2차 학생 시위는 허정숙이 이화여고보의 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등 여학생들과 경성학생시위운동을 계획, 전개한 것이다.[2] 정칠성, 박차정 등도 검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2]

허정숙은 다시 연락망을 구성하여 1월 중순 만세운동 거사 날짜를 잡고 유인물과 태극기를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이화여고보를 비롯한 시내 공사립 여자고등보통학교와 중등학교 등 13개교가 일제히 만세를 부른 여학생 만세운동 결과, 구속자 34명, 불구속자 55명이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며, 이들 모두 여학생이었다는 점이 당시 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다.[3]

이 사건의 주모자인 허정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산고로 일시 형집행정지를 받았다가, 다시 부친 허헌과 함께 복역, 1932년 3월 18일에 만기 출옥하였다.[3]

구속된 인원은 다음과 같다.[3]

학교구속 인원
근우회허정숙, 박차정
이화전문이순옥
이화여고보최복순, 최윤숙, 김진현, 함덕훈, 임경애, 윤옥분, 김복림, 최현수, 안임순, 이옥련, 양원숙
동덕여고보홍옥인, 고옥경, 박선숙, 한정희, 허복록
숙명여고보박선봉, 조금옥, 조종옥
경성여자상업학교송계월, 김귀임
실천여학교김경숙
정신여학교하운학
근화여학교김귀인복, 김순례, 최성반, 김금남, 김연복, 이충신
태화여학교정태이
여자미술학교박계월



동아일보 1930년 2월 20일, 3월 19일, 23, 24, 26일 자에 재판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최복순 외 7명은 징역 7~8개월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여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비교적 가볍게 처벌받았다.[3]

6. 결과 및 영향

이 사건 이후, 1930년~1931년에 걸쳐 백여 건의 동맹휴학이 발생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계속되었다.[1] 그러나 1932년부터 동맹휴학은 급속히 감소하였고, 학생운동은 소수 정예의 사회주의적 비밀 결사 운동으로 이어졌다.[1]

참조

[1] 서적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소명출판 2008
[2] 논문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 역사학회 1996
[3] 논문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 역사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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