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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망덕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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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망덕사지는 신라 시대에 건립된 사찰의 터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가 당나라에 사천왕사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지은 절이다. 망덕사는 당나라 사신의 뇌물 수수와 관련된 일화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당나라의 잦은 풍랑과 안사의 난 발생 시 탑이 흔들리는 현상 등으로 인해 당나라와 관련된 절로 여겨지기도 했다. 망덕사지에서는 동서 목탑, 금당, 강당 등 통일신라 시대의 쌍탑 가람 배치가 확인되었으며, 2013년 시굴 조사를 통해 강당 터와 고려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효소왕과 진신석가, 승려 선율의 《육백반야경》 사경, 박제상 부인의 전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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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망덕사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망덕사 금당터
망덕사 금당터
국가대한민국
유형사적
지정 번호7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시대통일신라
면적24,304m²

2. 역사

2. 1. 건립 배경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망덕사를 짓게 된 것이 신라 국가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외세로부터 수호한다는 사상에서 지어진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당에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1]

앞서 신라를 침공하려는 (唐)의 수군이 670년671년 두 차례에 걸쳐 느닷없는 풍랑으로 바다에서 침몰하고, 신라에서 와 있던 박문준(朴文俊)으로부터 신라에서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며 법회를 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당 고종(唐高宗)은 예부시랑(禮部侍郞)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보내 사실 관계를 확인하게 하였다.

신라문무왕(文武王)은 사천왕사를 당의 사신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사천왕사의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그곳으로 악붕귀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악붕귀는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며 새로운 절에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신라의 관리들이 금 1천 냥을 뇌물로 주었고, 귀국한 악붕귀는 고종에게 "신라는 천왕사(사천왕사)를 짓고 새 절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후 새 절의 이름은 악붕귀의 말에서 딴 '''망덕사'''('''望德寺''')가 되었다고 한다.[1]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 망덕사의 탑이 흔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당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신라 사람들은 "당을 위해 지은 절이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

2. 2.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에는 망덕사를 짓게 된 배경에 대한 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를 침공하려던 의 수군이 670년671년 두 차례에 걸쳐 풍랑으로 침몰하자, 당 고종은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보내 신라에서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는 박문준의 말을 확인하게 했다.[1]

문무왕은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악붕귀를 인도했으나, 악붕귀는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며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 관리들이 뇌물을 주자 악붕귀는 당 고종에게 신라가 천왕사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고 보고했고, 이후 새 절은 '''망덕사'''('''望德寺''')로 불리게 되었다.[1]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4년(755년) 망덕사의 탑이 흔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해에 당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신라 사람들은 "당을 위해 지은 절이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2] 망덕사탑은 이후에도 원성왕 14년(798년), 애장왕 5년(804년), 헌덕왕 8년(816년)에 서로 부딪쳤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2. 3.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경덕왕(景德王) 14년(755년) 망덕사의 탑이 흔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당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신라 사람들은 "당을 위해 지은 절이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 망덕사탑은 이후에도 원성왕(元聖王) 14년(798년), 애장왕(哀莊王) 5년(804년), 헌덕왕(憲德王) 8년(816년)에 서로 부딪쳤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3. 발굴 조사

망덕사터 부지는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어 있으며, 동서 목탑과 금당, 강당, 중문, 회랑, 익랑의 터 및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쌍탑 가람 배치를 보인다. 2013년에는 절터 정비를 위하여 실시한 시굴 조사에서 강당터의 위치를 추가로 확인하였으며, 고려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음도 밝혀졌다.[3]

3. 1. 유구 및 유물

망덕사 터는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지만, 동서 목탑과 금당, 강당, 중문, 회랑, 익랑 터 및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 시대의 쌍탑 가람 배치를 보인다.[3] 2013년 시굴 조사에서 강당 터 위치와 고려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했음이 밝혀졌다.[3]

금당 터에는 둥근 모양의 주좌(柱座)를 가진 네모 모양의 주춧돌 12개가 남아 있다.[3] 목탑 터는 훼손 상태가 심각하지만, 기단 석재 등을 통해 복원이 가능하다.[3] 동탑은 북면 길이 123cm, 동면 길이 127cm, 흙으로 쌓은 기단 높이는 120cm 정도이다.[3] 남면과 동면에 돌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북면과 서면에도 돌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3]

망덕사탑에서는 신라 목탑 유구 가운데 유일하게 팔각형 심초석(心礎石)이 확인된다.[3] 동서 심초석 모두 가운데 사리공에 사리함을 봉안한 2단으로 구성된 네모 모양의 구멍이 있다.[3] 팔각형 한 변 길이는 동탑이 60cm, 서탑이 동서남북 60cm에 북동, 북서, 남동, 남서 50cm이며, 사리공의 네모 모양 구멍은 동탑이 가로세로 25cm, 서탑은 23cm이다(서탑 사리공의 경우 사천왕사 목탑과 크기가 비슷).[3] 탑 바닥에는 무늬 없는 전돌을 깔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3]

4. 전설

4. 1. 효소왕과 진신석가

효소왕이 망덕사 낙성 법회에 참석했을 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만났다는 설화가 전해진다.[2] 효소왕은 즉위 후 망덕사를 짓고 당 황실을 위해 복을 빌고자 했으며, 5년 만인 697년에 낙성회를 열고 직접 법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남루한 행색의 승려가 참석을 요청했고, 왕은 그를 말석에 앉게 하였다. 법회가 끝날 무렵 왕이 승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자, 승려는 비파암(琵琶癌)에서 왔다고 답했다. 왕은 "국왕이 몸소 공양하는 법회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나, 승려는 "폐하께서도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는 하늘로 솟아 남쪽으로 날아갔다. 뒤늦게 진신석가의 화신임을 깨달은 왕은 예를 올렸다.[2]

이후 승려가 지팡이와 바리때를 남기고 사라진 남산 삼성곡(대책천원)과, 승려가 스스로 거처라고 밝힌 비파암 아래에 각각 불무사(佛無寺)와 석가사(釋迦寺)가 세워져 승려가 남긴 유물을 모셨다고 한다.[2] 다만 망덕사 건립은 효소왕이 아닌 신문왕 때의 일이다.[4]

4. 2. 선율과 육백반야경

망덕사의 승려 선율(善律)은 《육백반야경》(대품반야경)을 사경하고자 시주를 모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염라대왕은 인간 세상에서 불경을 사경하려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선율을 특별히 돌려보내 주면서 《대품반야경》 사경을 완수하도록 했다. 선율은 저승에서 돌아오는 길에 15년 전에 죽은 여인의 혼령을 만나, 부모가 금강사 소유의 논을 빼돌린 죄로 저승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여인이 숨겨둔 호마기름과 베를 찾아 불경 사경에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율은 죽은 지 열흘 만에 땅에 묻혔다가 사흘 만에 목동에 의해 발견되어 살아났다. 이후 여인의 집을 찾아가 참기름과 베를 찾아 여인의 명복을 빌어주었고, 여인은 꿈에 나타나 감사를 표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선율의 불경 사경 작업을 도왔고, 선율은 마침내 서원을 이룰 수 있었다. 선율이 사경한 《육백반야경》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짓던 당시까지 동도(경주) 승사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돌려 읽으며 재앙을 빌었다.[5]

4. 3. 박제상 부인과 장사

망덕사터 남쪽으로 흐르는 남천 모래밭은 장사(長沙)라고 불리는데, 눌지왕 때 삽량주간 박제상이 왕명으로 왜로 떠날 때 그 부인이 이 모래밭 위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울부짖었던 곳이라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5]

5. 현대적 의의

참조

[1] 서적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 법민
[2] 서적 삼국유사 권5, 감통7, 진신수공
[3] 논문 6~9세기 신라 목탑 형태의 변천에 대한 연구 경기대학교 2006
[4] 서적 삼국사기 신라본기
[5] 서적 삼국유사 권5, 감통제7, 선율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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