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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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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장왕은 신라의 제41대 왕으로,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김언승의 섭정을 받았다. 종묘 제도 개정, 탐라국의 조공 수납, 사면령 반포 등을 시행했으며, 805년에는 친정을 시작하고 지방 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으나, 809년 숙부 김언승, 육촌 동생 김제옹, 김수종 등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능묘는 전해지지 않으며, 민애왕릉이 실제 애장왕의 능묘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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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라 군주 (37-44)
신라 군주 (37-44)
이름김중희 (金重熙)
원래 이름애장왕
본명김청명(金淸明) → 김중희(金重熙)
시호애장(哀莊)
출생788년 (음력)
사망809년 9월 6일 (양력)
칭호국왕
재위800년 음력 6월 ~ 809년 9월 6일 (양력)
대수제40대 신라 국왕
시대신라 (통일 신라)
묘호없음
능묘알려지지 않음
왕실
가문김씨
아버지소성왕
어머니계화부인 김씨
배우자왕비 박씨
즉위 관련
즉위 전신라국 왕태자
재위 시작800년 6월 (음력)
이전태자 준옹 (소성왕)
이후태자 수종 (흥덕왕)
통치 기간
즉위 년도800년
퇴위 년도809년 9월 2일
이전 국왕소성왕
다음 국왕헌덕왕

2. 생애

801년 신라는 종묘 제도를 개정하여, 김씨 왕통의 시조인 미추 이사금과 태종 무열왕, 문무왕 외 왕의 조부, 부친을 모시던 오묘를 시조대왕, 고조, 증조부, 조부, 부친으로 하는 형식으로 변경하였다.[4] 805년 1월에는 왕모와 왕비를 책봉하고, 8월에는 율령의 시행 세칙인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는 등 율령 체제 정비를 추진하였다.[5] 하지만 같은 해 예작부(영선 관장)와 선부(항해 관장)의 관리를 감축하여 귀족 연합 체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도 보여, 율령 체제의 쇠퇴가 시작되고 있었다.[5]

805년 당나라에서 덕종이 죽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애장왕은 새로운 책봉을 받아 관작이 올랐다. 이때 왕모와 왕비의 책봉도 함께 받았으나, 성씨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6] 이후 애장왕은 당나라에 조공과 책봉에 대한 사은사를 파견하였다.

801년 10월에는 탐라(제주도)에서 조공을 받았다. 탐라국은 679년 문무왕 19년에 신라에 예속되었으나, 이후 독립했던 것으로 보인다.[4]

803년에는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803년부터 808년까지 4차례의 교류 기록이 있으나, 일본후기에는 804년의 기록만이 전해진다.[7]

문화적으로는 802년 가야산해인사를 창건하게 하였다. 804년에는 안압지 옆의 임해전을 수리하고 동궁에 만수방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806년에는 불사 창건을 금지하고 수선만 허락하는 교서를 내렸으며, 불사에 금수 사용 및 금은 기구 제작을 금지하는 포고도 시행하였다.

809년 7월, 섭정이었던 김언승(후의 헌덕왕)이 이찬 제옹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은 왕제 체명시위와 함께 살해되었다.[4] 삼국유사 왕력에는 원화 4년 7월 19일(809년 9월 2일)에 왕의 숙부인 헌덕, 흥덕 2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덕왕 즉위 후 애장왕으로 시호되었으나, 왕릉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1. 즉위 초 섭정

애장왕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이 섭정을 하였다.[8] 801년, 종묘 제도를 개정하여 시조, 고조(명덕왕), 증조(원성왕), 조부(혜충), 선고(소성왕)를 오묘로 삼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별묘를 세웠다.[8] 같은 해, 탐라국의 조공을 받고,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섭정 김언승을 어룡성사신(御龍省私臣)에 임명했다가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8]

2. 2. 내정 개혁

802년, 애장왕은 신궁(神宮)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9] 803년에는 남쪽 교외로 나가 보리 농사를 살폈다.[9] 804년, 이찬(伊飡) 김수승(金秀昇, 훗날 흥덕왕)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하고, 알천(閼川)에서 군사 훈련(열병)을 실시했다. 또한, 기존에 동궁(東宮)으로 사용하던 임해전을 수리하고 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을 새로 건설했다.

805년, 어머니 김씨를 대왕후(大王后)로, 왕비 박씨를 왕후(王后)로 책봉했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공식(公式) 20여 조를 발표했고, 808년에는 12도에 사신을 보내 군(郡)과 읍(邑)의 경계를 정하는 등 지방 제도 개혁을 실시했다.

806년, 백성들의 과도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절을 짓는 것을 금지하고 수리만 허락하게 했으며, 불사(佛事)에 수놓은 비단을 사용하거나 금, 은으로 기물을 만드는 것을 금지시켰다.

2. 3. 대외 관계

801년 탐라(제주도)에서 조공을 받았다. 탐라국은 679년 문무왕 19년에 신라에 예속되었으나, 이후 독립했던 것으로 보인다.[4]

당나라일본과의 관계는 하위 섹션을 참고.

2. 3. 1. 당과의 관계

805년, 에서 덕종이 죽고 순종이 즉위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 애장왕을 책봉하였다.[10] 애장왕은 당에 조공하고 책봉에 대한 사은사를 파견하였다.[6] 808년 김력기(金力奇)를 당에 보내어, 앞서 소성왕에게 전달되지 못한 당 덕종의 책봉 문서를 수령할 것을 요청하였고, 당에서는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김언승 및 중공(仲恭) 등에게 문극(門戟)을 하사하였다.[10]

2. 3. 2. 일본과의 관계

803년 가을 7월,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우호를 맺었다.[10] 802년 김균정대아찬 관등을 주어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일본에 보내려 하였으나, 균정이 사양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804년 여름 5월 일본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을 바쳤으며, 806년808년 9월에 일본에서 온 사신을 조원전(朝元殿)에서 접견하였다.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는 애장왕 때의 대일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첫째, 양국 정부 간 이루어진 공적 교류가 아니다. 둘째, 신라는 대일 교역을 재개하고자, 일본은 자국의 견당사 파견을 위해 당나라 소식을 듣고자 교류하였다. 셋째, 신라는 일본이 요구한 조공 외교 형식을 수용하여 가왕자 파견을 시도하였다.[10]

이에 대해 애장왕 대의 대일 외교는 공적인 교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11] 박남수는 《일본후기》에 이 시기 양국 관계 기사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고,[12] 채미하는 신라가 당 중심의 국제 질서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13]

일본 측 기록에는 애장왕 대의 대일 외교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10]

2. 4. 죽음

809년 숙부 김언승과 육촌 동생 김제옹, 김수종 등이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했다.[4] 애장왕은 대궐에서 동생 체명과 함께 죽임을 당했으며,[4] 당에는 병사한 것으로 통보되었다.[4]삼국유사』 왕력에 의하면, 원화 4년 7월 19일 (809년 9월 2일)에 왕의 숙부 헌덕, 흥덕 2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3. 능묘

애장왕의 능은 전해지지 않는다.

경주대학교 이근직 교수는 민애왕릉이 실제로는 애장왕의 능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1]

4. 가계

관계이름
부왕소성왕
모후계화부인 김씨
왕후왕후 박씨 (김주벽의 딸)


참조

[1] 서적 The East http://dx.doi.org/10[...] 2015-10-23
[2] 뉴스 https://www.idaegu.c[...] 2023-06-19
[3] 문서 『三国遺事』王暦・昭聖王条では、哀荘王の母すなわち昭聖王妃は夙明公の娘の桂花王后とする。叔明と夙明とは同音({{lang|ko|숙명}})。
[4] 문서 新羅の五廟制度の推移については、[[神文王]]、[[恵恭王]]、[[宣徳王]]、[[元聖王]]も参照。王家の祖廟を五廟としたことについては『[[礼記]]』王制篇「天子七廟諸侯五廟」に基づく。
[5] 문서 井上1972 pp.222,234-235.
[6] 문서 哀荘王の王母、王妃はいずれも金氏であったが、唐の[[同姓不婚]]の風習を考慮して別姓を名乗ることとなった。王母についてはその父の名の叔明から借りて叔氏としたことが『三国史記』新羅本紀の[[分注]]にも記されている。また、[[昭聖王]]の王母については父の名の神述から申氏、[[憲徳王]]妃については礼英[[骨品制#表|角干]](1等官)の娘であるが、兄弟の[[輩行字]]の影響か、貞氏としている。初めは王妃の個々人によって諸々の姓を用いていたが、哀荘王以降で朴氏とすることが定形化したものと見られている。→井上1972 p.235
[7] 문서 '[{{NDLDC|991093/27}} 『日本後紀』巻十二 延暦二十三年九月己丑条]'
[8] 문서 안주홍은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불훼묘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왕계가 삼한(三韓)이라는 천하를 일통(一統)한 '천자'의 후손임을 표방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안주홍, 「신라 太宗 廟號와 일통삼한 의식」 《嶺南學》82, 2022, 87쪽).
[9] 문서 이를 《예기》 제통(祭統)편에 "천자는 몸소 남쪽 교외에서 경작하며 제성(齊盛)에 이바지한다"고 언급한 것과 연관지어 천자로써의 농경 의식 거행으로 그 의의를 해석한 견해가 있다(안주홍 「신라 애장왕대의 假王子 파견 시도와 交聘結好의 의미 」 《지역과 역사》51호, 2022.10, 231~232쪽)
[10] 문서 濱田耕策, 「中代·下代の內政と對日本外交」 《學習院史學》 21, 1983 ; 「下代初期における王權の確立過程とその性格」 《朝鮮學報》 176·177, 2000 ; 《新羅國史の硏究》, 吉川弘文館, 2002, 265~267쪽, 345~347쪽.
[11] 문서 박남수, 「통일신라의 대일교역과 애장왕대 ‘교빙결호’」 《사학연구》88, 2007 ; 《한국 고대의 동아시아 교역사》, 주류성, 2011. 강은영, 「779년 신라의 遣日本使 파견과 ‘彼國 上宰’에 관한 검토」 《일본역사연구》34, 2011. 채미하, 「애장왕·헌강 왕대의 대일외교와 그 활용」 《신라사학보》44, 2018.
[12] 문서 위의 책, 2011, 223~224쪽
[13] 문서 채미하 「신라의 책봉의례와 그 기능」《사학연구》127, 2017.9, 76~90 ; 「애장왕·헌강왕대의 대일외교와 그 활용」《신라사학보》44, 2018.12, 15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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