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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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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부 민란은 1894년 전라북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다. 탐관오리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이 전봉준의 지휘 아래 관아를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만석보 건설로 인한 수세 징수, 부당한 벌금 부과, 썩은 쌀 강매 등 조병갑의 악행에 저항하며 관아를 점령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중앙 정부의 안핵사 파견 이후에도 농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봉준은 무장 기포를 통해 본격적인 동학 농민 혁명을 이끌었다. 고부 민란은 단순히 지역적 사건을 넘어, 부패한 사회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과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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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민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말목 장터에 모인 농민들
말목 장터에 모인 농민들이 봉기를 준비하는 모습.
발생일1894년 1월 11일
장소전라도 고부
원인탐관오리 조병갑의 폭정
결과봉기군 승리
관련 항목동학 농민 혁명
교전 세력
교전 1동학 농민군
교전 2조선
지휘관
농민군전봉준
조선군조병갑
병력 규모
농민군1,000명
조선군알 수 없음
관련 전투
주요 전투고부
황토현
황룡강
전주
한국어 명칭
한글고부 민란
한자古阜民亂
로마자 표기Gobu Minnan

2. 배경

조선 후기, 농촌은 지배 계급의 약탈적인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인해 중앙 정부의 재정 의존도가 높아,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이 더욱 심했다.[3]

고부는 동진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쌀 생산량이 많았고, 여러 항구를 통해 쌀이 수출되는 요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부는 다른 지역보다 수탈의 대상이 되기 쉬웠으며, 실제로 고부 군수 조병갑, 둔전사 김창석, 운송사 조비룡 등의 가혹한 착취가 자행되었다.[3]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고 뇌물을 받는 등 부패 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만석보 건설을 빌미로 농민들에게 과도한 물세를 징수하여 큰 반발을 샀다.[3] 전운사 김창석 또한 황무지 개간을 약속하며 농민들을 유인한 뒤, 실제로는 세금을 징수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운송사 조비룡 역시 곡물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비용을 농민들에게 전가하고, 저항하는 농민들을 탄압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3]

이러한 상황에서 전봉준은 "세상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목표 아래, 오랫동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고부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전봉준은 이를 봉기의 기회로 삼아 민란을 주도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원한을 넘어, "백성"과 "세상"을 구하려는 더 넓은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7]

2. 1. 조선 후기 사회상

조선 말 지방 행정은 삼정의 문란을 비롯한 학정이 일반적으로 행해졌고, 이 때문에 1862년 진주 민란과 같은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9] 조선 후기 농촌 지역은 지배 계급의 약탈적 시스템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정치적 부패, 광범위한 뇌물 수수, 관리들의 극심한 부정부패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처럼 모순된 상황에서 적절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어느 지역이든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3]

한국 남부 지역에서 전라 지역은 가장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중앙 정부는 재정을 전라 지역에 크게 의존했으며, 왕족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많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한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세금 부과와 착취, 과도한 징수와 수탈은 다른 지역보다 전라 지역에서 더욱 심해 농민들에게 두 배, 세 배의 어려움을 안겨주었다.[3]

고부는 쌀의 곡창 지대로 알려진 전라 지역에서 가장 번영한 마을 중 하나였다. 동진강을 따라 위치해 있고 김제와 만경의 비옥한 평야를 연결하는 고부는 주변 28개 마을을 포괄하는 곡창 지대였다. 또한 고부 근처에는 줄포, 염소, 동진, 사포 등 4개의 항구가 있어 상당량의 쌀이 각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특히 고부 서쪽에 약 20km 떨어진 줄포는 부평의 부성포와 함께 조세 징수 및 쌀 운송의 중심지였다. 그 결과 고부군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착취당할 가능성이 높았고, 지배 계급의 실제 약탈은 심각했다.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 둔전사 김창석, 운송사 조비병의 약탈은 비할 데가 없었다.[3]

2. 2. 조병갑의 학정

조선 말 지방 행정은 삼정의 문란을 비롯한 학정이 일반적으로 행해졌고, 이 때문에 1862년 진주 민란과 같은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9]

1892년 새로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부패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3] 그는 이듬해인 1893년 고부읍 근처를 흐르는 동진강 상류에 있던 저수지인 만석보의 신축을 시작하였다. 만석보는 당시 아무런 문제 없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조병갑은 저수지의 신축을 빌미로 지역 농민들을 수탈하고자 한 것이다. 신축된 만석보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논 한 마지기당 소출이 좋은 상답은 2 씩, 소출이 좋지 않은 하답은 1 말씩 책정하였다. 이는 당시 농업 생산량을 생각할 때 과도한 수탈이었다.[10]

전봉준이 체포되었을 때 조병갑의 악행에 대해 자세히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2]

  • 이미 존재하던 만경강 하류의 벽골제 (현재의 예당저수지) 아래에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건설하고 농민들에게 물세를 징수했는데, 상류 저수지 사용료로 벼 두 섬, 하류 저수지 사용료로 벼 한 섬을 받았다. 총 700 섬의 쌀을 수확했다.
  •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농민들에게 5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1893년 가을에 세금을 강제로 징수했다.
  • '부정', '불화', '간통', '쓸데없는 재능' 등 애매한 죄목으로 부유한 농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여 2만 냥(1.4억달러에 해당)[5]을 징수했다.
  •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 조후견을 위한 비석을 세우기 위해 1천 냥(70만달러 상당)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 정부에 보낼 쌀을 위해 썩은 쌀만 서울로 보내고, 썩지 않은 쌀은 자신이 챙겼다.
  • 저수지를 건설하는 동안 수백 년 된 나무들을 함부로 베어 내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 중 만석보 저수지 건설이 가장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예당 저수지가 건설된 이후 배들평야는 기근을 겪지 않았지만, 새로운 저수지 건설로 인해 이 지역의 개울이 막히면서 홍수로 인한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4]

이에 더해 주민들에게 불효자, 음행자 등의 죄목을 자의적으로 씌워 2만여 냥을 착복하였고, 이후 공덕비를 세운다며 다시 수탈하는 등 조병갑은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모습을 보였다.[10]

2. 3. 동학의 성장

최제우를 시조로 하는 동학은 자신들의 사상을 서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내세우며 동시에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 역시 그 운이 다하였다고 주장하여 조선 당국으로부터 사문난적의 평가를 받아 탄압받고 있었다.[11] 19세기 후반 지방에서 학정과 수탈이 여전한 가운데 열강과 불평등한 조약으로 무역 구조에서 마저 약탈적인 피해를 입게 되자 사람들 속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1880년대에 들어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북접과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접을 세우는 등 조직 정비가 이루어져 있었다.[12]

동학은 최소 단위 조직을 접(接)으로 그 위 단위를 포(包)로 나누어 조직을 꾸렸다.[13] 전봉준은 고부의 접주였다.[14]

3. 전개

고부 민란은 전봉준 등의 지도자들이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했다는 시각이 있지만, 민란 자체는 다른 조선 후기 봉기처럼 자연 발생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학통(學通)》에 따르면, 고부 지방 백성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난을 일으킨" 것이 민란의 원인이다. 황현(黃玹)의 《우하 기분(寓霞記聞)》에도 "백성들이 참지 못하고 수천 명을 모아 진정을 하려 했으나, 전봉준은 전주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복용(李福龍)의 《남행록(南行錄)》에는 "처음에 고부 농민들이 관아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처음에는 몇 명 없었지만, 소문이 퍼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었다. 전봉준이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선동하여 민란으로 발전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7]

그러나 고부 민란이 다른 봉기와 구별되는 점은 자연 발생적인 봉기에 전봉준이라는 지도자가 개입했다는 것이다. 조병갑에 대한 고부 농민들의 원한이 자연스럽게 민란으로 이어졌고, 모여든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사살통문(辭殺通文)》에서 볼 수 있듯이, 기회를 엿보던 전봉준은 준비가 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불안을 이용하여 반란을 선동하기로 결정했다. 전봉준은 법정에서 백성들이 자신의 지식을 인정했기 때문에 봉기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진술했지만, 수동적으로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사살통문》이라는 계획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조병갑에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왜 봉기를 선동했냐는 질문에 "세상의 일이 썩어 누군가가 세상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밝혀, 조병갑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봉준이 이미 지도자로서 "백성"과 "세상"에 대한 더 폭넓은 의식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고부 민란은 과거의 다른 봉기와는 달리 농민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7]

1894년 1월 11일 이른 아침, 1,000명이 넘는 봉기 농민들이 말목장에 모여 전봉준을 지도자로 선포했다.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고부 읍내의 세 개 문을 돌파하고 고부 관아로 진격했다. 한 그룹은 영원 운학동을, 다른 그룹은 천치재를 넘어 별 어려움 없이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당시 상황은 "진영은 조용하고 명령은 명확했는데, 이는 전형적인 '돌팔매 군'(일본에서 돌을 무기로 사용하는 농민들의 봉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용어)과는 달랐다."고 묘사된다. 봉기 농민들은 일주일 동안 이청의 관리들을 처벌하고, 창고를 파괴하여 곡물을 분배하고, 진전이 징수한 약 1400석의 곡물을 압수하고, 세금과 벌금으로 징수했던 재산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만석보 아래에 건설된 저수지를 철거했다. 이들은 요구 사항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해산되지 않고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지속되었다.[7]

3. 1. 사발통문 작성과 봉기 결의

사발통문은 둥근 그릇을 종이 위에 엎고 그 주위를 따라 이름을 써서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하는 격문이다. 이러한 형식의 사발통문은 이미 여러 차례 민란에서 사용되어 왔다. 1893년 11월에 작성된 고부의 사발통문은 고부 관아 점령과 이후의 처리 및 조정에 대한 요구 사항을 담고 있다.[15]

사발통문, 전봉준을 포함한 정읍, 고부, 태인의 반란자 20명이 제작
[3]

3. 2. 고부 관아 점령

1894년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15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16] 농민군은 조병갑을 죽이려 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미 뒷문으로 도망쳐 담을 넘어 입석리의 간판 제작자 진선마의 집에 숨어 있다가 변장을 하고 정읍과 순창을 거쳐 급히 전주 감영으로 도망친 뒤였다.[7]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한 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중앙정부에 전달하였다. 고부 민란은 고부 관아 점령 뒤 절정을 맞아 음력 1월 14일 모인 인파는 1만여 명에 달했다.[17]

3. 3. 안핵사 이용태의 파견과 민란의 확산

중앙 정부는 민란에 경악하여 일단 농민들을 달래고자 안핵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18] 그러나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는 민심을 회유하라는 본연의 임무보다 주모자 체포와 진압에 무게를 두었으며, 농민들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아 오히려 반발을 일으켰다.[19]

봉기에 나섰던 농민들은 조병갑이 파면되자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온건파와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경파로 나뉘었다. 강경파는 대부분 동학 교도로, 전봉준은 이웃 고을들과 연계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이에 동학 교도들은 3월 13일 고부 관아에서 해산하여 무장으로 이동한 뒤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였다.[20]

4. 영향

고부 민란은 동학 농민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전봉준은 전라도의 동학 조직을 납접으로 독립시켜 독자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였다.[21]

4. 1. 무장 기포와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

고부 민란은 3월 13일 해산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무장 기포로 이어지며 동학 농민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전봉준은 전라도의 동학 조직을 납접으로 독립하여 독자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였고 이후 전주성 함락까지 계속적인 봉기를 지휘하게 된다.[21]

4. 2. 동학 농민 혁명의 전개와 좌절

무장 기포로 이어진 고부 민란은 동학 농민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전봉준은 전라도의 동학 조직을 납접으로 독립시켜 독자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였고, 이후 전주성 함락까지 계속 봉기를 지휘하게 된다.[21]

5. 역사적 의의

고부 민란은 조선 봉건 사회의 구조적 모순 해결을 시도한 농민들의 자발적인 저항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외세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민란의 정신은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이어져 반봉건, 반외세 투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Korean History: Discovery of Its Characteristics and Developments https://books.google[...] Hollym 2004
[2] 웹사이트 고부민란 (古阜民亂)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1-10
[3] 웹사이트 (1) 고부민란의 배경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10
[4] 웹사이트 Jeongeub Donghak Peasant Revolution>A Shortened Revolution History>The Misconduct of the Gobu Magistrate http://donghak.jeong[...] 2013-03-29
[5] 뉴스 Shin Byeongju's Finding Roads in History (32)Currency of the Joseon Dynasty http://www.segye.com[...] Segye Daily 2013-03-28
[6]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and History>Gobu Minlan http://terms.naver.c[...] Naver 2013-04-06
[7] 웹사이트 (3) 고부민란의 전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10
[8] 웹사이트 고부민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웹사이트 삼정의 문란 http://contents.hist[...] 교과서 용어해설, 우리역사넷
[10] 웹사이트 고부민란의 배경 http://contents.hist[...] 《신편 한국사》, 우리역사넷
[11] 웹사이트 동학운동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서적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3] 웹사이트 접주(接主) http://dh.aks.ac.kr/[...] 실록위키
[14] 뉴스 정읍시 5월의 역사 인물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선정 https://www.jjan.kr/[...] 전북일보 2022-05-17
[15] 웹사이트 고부의 사발통문 http://contents.hist[...] 《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16] 웹사이트 고부관아터 (古阜官衙址) http://www.heritage.[...] 국가문화유산포털
[17] 논문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 과정에서 백산대회의 위상 https://www.kci.go.k[...] 《동학학보》 2022
[18] 간행물 전라도 관찰사와 안핵사에게 고부의 난민을 효유하도록 명하다 https://sillok.histo[...]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2월 26일, 《조선왕조실록》
[19] 뉴스 안핵사 이용태의 탐학, 농민봉기 부채질 https://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20-01-05
[20] 웹사이트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http://contents.hist[...] 《신편 한국사》, 우리역사넷
[21] 웹사이트 무장기포 http://contents.hist[...] 《신편 한국사》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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