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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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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방이다. 호남 지방의 '호'가 벽골제를 가리키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대에 벽골제의 축조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증축 및 수축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는 대부분 경지화되었다. 제방은 3.3km에 달하며, 댐 형식은 흙댐이고 관개 면적은 10,000ha로 추정된다. 벽골제는 5개의 수문이 있었으며,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 두 곳의 수문이 남아있다. 벽골제의 기능에 대해 저수지였는지 방조제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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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이름김제 벽골제
영문 이름Byeokgolje Reservoir, Gimje
유형사적
지정 번호111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주소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번지
시대삼국시대
면적187,473m2

2. 역사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 지방(湖南地方)의 '호(湖)'는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 「삼국사기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는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되었다.[1]

고려 인종 때 수축하였다가 인종 24년(1146년)에 왕의 이 벽골제 수축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로 일부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15년(1415년)에는 국가적인 대규모 수축공사를 벌였다.[1]

임진왜란 때 관리와 유지가 전혀 되지 않아 농민들이 경작하면서 지금은 거의 경지화되었다. 이때의 석조수문과 기념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1]

제방은 포교마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약 3.3km에 달하며, 제방 높이는 5.6m이다. 댐 형식은 흙댐(필댐)이다. 관개면적은 10000ha로 추정된다.[1]

2. 1. 초기 축조 및 증축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처음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 지방(湖南地方)의 호(湖)는 바로 벽골제를 가리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는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하였다.[1]

고려 인종 때 수축하였다가 인종 24년(1146년)에 왕의 이 벽골제 수축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로 일부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태종 15년(1415년)에는 국가적인 대규모 수축공사를 벌여, 군정 만 명이 2개월 동안 주위 7만 7,406보, 높이 17척의 제방을 수축하여 몽리 수전은 충청도, 전라도에 걸친 방대한 지역으로 9,800결에 달했다고 한다.[1]

임진왜란 때 관리와 유지가 전혀 되지 않아 농민들이 경작하면서 지금은 거의 경지화되었다. 이때의 석조수문과 기념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1]

제방은 포교마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약 3.3km에 달하며, 제방 높이는 5.6m이다. 댐 형식은 흙댐(필댐)이다. 관개면적은 10000ha로 추정된다.[1]

2. 2. 조선 시대

태종 15년(1415년) 조선에서 국가적인 대규모 수축공사를 일으켰다. 군정 만 명이 2개월 동안 주위 7만 7,406보, 높이 17척의 제방을 수축하여 몽리 수전은 충청도, 전라도에 걸친 방대한 지역으로 9,800결에 달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아 농민들이 경작하면서 지금은 거의 경지화되었다. 이때의 석조수문과 기념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3. 구조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저수지이다. 제방은 포교마을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약 3.3km에 달하며, 높이는 5.6m이다. 댐 형식은 흙댐(필댐)이며, 관개면적은 10,000ha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에 벽골제 제방의 길이가 약 548.64m였다는 기록이 있고, 790년(원성왕 6년)에 증축한 사실이 있다. 고려 인종 때 수축하였다가 인종 24년(1146년)에 왕의 병이 벽골제 수축 때문이라는 무당의 말로 일부를 파괴하기도 했다. 태종 15년(1415년)에는 국가적인 대규모 수축공사를 일으켜, 군정 만 명이 2개월 동안 주위 약 23593.35m, 높이 약 5.18m의 제방을 수축하여 몽리 수전은 충청도, 전라도에 걸친 방대한 지역으로 9,800결에 달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관리, 유지가 전폐된 이래 농민의 모경으로 지금은 거의 경지화되고 말았다. 이때의 석조수문과 기념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3. 1. 수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있는 수문은 두 곳으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대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1]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의 기록에는 제방의 단면과 수문 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1]

: 둑의 아래 넓이는 약 21.34m이고, 위의 넓이는 약 9.14m이며, 높이가 약 5.18m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九壟)처럼 보였다. ···또 (수문) 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약 3.96m이고, 돌기둥의 높이는 약 4.57m이며, 땅속으로 약 1.52m나 들어가 있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 13년(명의 연호 태종 15년, 서기 1415년)이다.

4. 기능 논쟁: 저수지 vs 방조제

이영훈 전 교수와 허수열 전 충남대 교수는 벽골제의 기능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2007년 이영훈 전 교수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2] 이 전 교수는 벽골제가 방조제라고 주장한 반면, 허 전 교수는 저수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교수는 2013년 논문에서 4세기 초반의 인구와 기술 수준으로는 벽골제 크기의 저수지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하며, 사람들이 벽골제를 저수지로 오해하게 된 것은 충적 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벽골제의 정확한 기능은 고고학, 지리학, 토목공학, 수리공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3]

4. 1. 저수지설

이영훈 전 교수는 2007년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비판하면서 벽골제가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제·만경평야 지대가 1900년대까지 황량한 불모지였으며,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간척사업과 수리사업으로 농업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

이에 대해 허수열 전 충남대 교수는 2012년 자신의 저서에서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과 김제 일대 수리조합·토지개량·하천개수 관련 사료를 제시하며 벽골제가 저수지로 설립되었으나 저수지 기능은 극히 일부 기간이었고, 세종대 이래 일제 초까지 제방 일부가 파괴된 채 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제·만경평야 지대는 일제 개발 이전 이미 농업지대였으며, 벽골제가 큰 규모의 저수지였다고 주장했다.

이 전 교수는 2013년 '경제사학'(53호) 논문에서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벽골제를 저수지로 보면 오늘날 춘천 소양강댐보다 10배는 더 큰 면적이 나오는데, 4세기 초반에 그런 저수지를 만들어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는 4세기 초 한반도 인구는 200만∼300만 명 수준이고, 아직 석기를 사용하고 움집에서 살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규모 농업용 저수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사람들이 벽골제를 저수지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로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토양이 쌓이는 충적 작용을 들었다. 이 전 교수는 벽골제의 정체는 향후 고고학·지리학·토목공학·수리공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며 풀어갈 문제이며, 그럼에도 330년경에 해안을 막고 그 같은 방조제를 만든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3]

4. 2. 방조제설

이영훈 전 교수는 2007년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비판하는 글을 실으면서, 소설의 무대인 김제·만경평야와 벽골제 관련 서술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벽골제는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다"며 "김제·만경평야 지대는 1900년대까지도 대부분 황량한 불모의 땅이었으며, 러·일전쟁 이후 들어온 일제가 간척사업과 수리사업을 전개하면서 농업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2]

4. 3. 절충설

이영훈 전 교수는 2007년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김제·만경평야와 벽골제 관련 서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벽골제가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으며, 김제·만경평야는 1900년대까지 황무지였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간척 및 수리사업을 통해 농업지대로 바꾸었다고 주장했다.[2]

이에 대해 허수열 전 충남대 교수는 2012년 자신의 저서에서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과 김제 일대 수리조합·토지개량·하천개수 관련 사료를 제시하며 반박했다. 그는 벽골제가 저수지로 설립되었으나, 저수지 기능은 극히 일부 기간에 불과했고, 세종대 이후 일제 초까지 제방 일부가 파괴된 채 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제·만경평야는 일제 이전에 이미 농업지대였으며, 일제의 개발로 농업지대로 변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벽골제가 큰 규모의 저수지였다고 주장했다.

이 전 교수는 2013년 '경제사학'에 발표한 논문에서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벽골제를 저수지로 본다면, 오늘날 소양강댐보다 10배는 더 큰 면적이 나오는데, 4세기 초반에 그런 저수지를 만들어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는 4세기 초 한반도 인구가 200만∼300만 명 수준이고, 아직 석기를 사용하고 움집에서 살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규모 농업용 저수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전 교수는 사람들이 벽골제를 저수지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로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토양이 쌓이는 충적 작용을 들며, 벽골제의 정체는 향후 고고학·지리학·토목공학·수리공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며 풀어갈 문제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330년경에 해안을 막고 그 같은 방조제를 만든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3]

참조

[1]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2] 뉴스 김제 벽골제 미스터리…삼국시대 저수지 맞나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3-01-11
[3] 뉴스 김제 벽골제 미스터리…삼국시대 저수지 맞나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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