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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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제우는 1824년 조선 경상도에서 태어난 인물로,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이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 서학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며 민중의 고통을 경험했고, 1860년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여 인본주의를 강조하며 평등을 주장했지만,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최제우는 1864년 처형되었으며, 사후 최시형이 동학을 이끌었고, 그의 저술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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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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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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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제우 |
원어 이름 | 崔濟愚 |
호 | 수운(水雲) |
본명 | 최복술(崔福述) → 최제선(崔濟宣) → 최제우(崔濟愚) |
자 | 성묵(性默) |
출생일 | 1824년 12월 18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 |
사망일 | 1864년 4월 15일 |
사망지 | 조선 경상도 대구 |
사망 원인 | 사형 집행 |
활동 기간 | 1860년 5월 25일 ~ 1864년 1월 18일 |
교파 | 동학 |
수행 성직 | 동학 |
칭호 | 동학 초대 교조 |
칭호 기간 | 1860년 5월 25일 ~ 1864년 1월 18일 |
거주지 | 조선 경상도 경주 |
국적 | 조선 |
민족 | 한민족(경주 최씨) |
배우자 | 밀양 박씨 부인 |
부모 | 최옥(부), 곡산 한씨 부인(모) |
자녀 | 2남 4녀 (장남 최세정, 차남 최세청, 차녀 최완) |
친척 | 최종하(친조부), 신안 주씨 부인(장모), 최경우(친증조부), 최시형(원척 족질) |
웹사이트 | 두피디아 최제우 |
로마자 표기 | |
로마자 표기 | Choe Je-u |
로마자 표기 (호) | Su-un |
기타 | |
후임자 | 최시형 |
2. 생애
최제우는 1824년 경상도 경주(현 경상북도 경주시)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6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0년 가까이 전국을 방랑하며 구도의 길을 걸었다. 31세(1854)까지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 《정감록》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또한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32세(1855)에 《을묘천서》라는 책을 통해 신비 체험을 하고, 천성산에서 49일 기도를 했다. 36세(1859)에 고향 용담정으로 돌아와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음력 4월 5일, '천사문답'이라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을 통해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했다.[3]
당시 조선은 제2차 아편 전쟁의 여파로 서구 열강의 침투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에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 기존 사상을 융합하여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근본으로, 인본주의를 강조하고 성실과 신의로 새 세상을 만들자는 사상이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최제우는 신(하늘)으로부터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3년간 전도 활동을 했다. 동학은 한국 무속, 도교, 불교, 주자학을 결합한 것이었다. 동학의 유일신(천주/상제) 개념은 천주교와 유사했지만, 무상성과 임재성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동학은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이었으며, 이는 조선 정부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1863년 12월, 최제우는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左道亂正之律)'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3][4] 1864년 4월 15일(음력 3월 10일) 대구 경상감영 관덕정 뜰 앞에서 처형당했다.[3][4]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 때 최제우의 죄가 풀렸다. 저서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최제우 사후 동학의 2대 교주는 최시형이 이어받았다.
2. 1. 출생과 가계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 조선 경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5대조 최국진(崔國鎭)이 음보로 통덕랑 품계를 받은 후 벼슬이 없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인 근암 최옥(崔鋈)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나 다름없는 신분(재가녀의 자)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2] 경주 최부자집과는 친가 방척 친족관계에 있었다.최수운은 신라의 옛 수도이자 현재 경상도 남동부에 있는 도시인 경주 근처의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신라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 왕조였으며, 강한 학문적 및 불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조상 중 한 명은 중국 당나라 황실에서 일한 유명한 학자로 신라로 돌아왔다. 그의 동시대인 중 한 명은 그를 "한국의 공자"라고 불렀으며, 그는 한반도 도교의 창시자로 여겨졌다.
아버지 최옥은 학자였으나 당시 권력자들의 총애를 받지 못해 관직을 얻지 못했다. 60세가 되도록 두 번 결혼하고 과부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해 가계를 잇기 위해 조카를 입양한 후 한씨 과부와 결혼하였다. 최수운은 이 마지막 결합의 결과였지만, 성리학 체계에서는 사생자로 간주되었다. 재혼한 과부의 자녀는 사회적 계층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했고, 관리가 되는 데 필요한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교육을 받았다. 최옥은 아들에게 성리학과 도교와 같은 다른 교리 전통에 대한 탄탄한 교육을 제공했다.
최제우는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십 대에 울산 박씨(朴氏)와 결혼했다.
2. 2. 유년 시절
1824년 12월 18일 조선 경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최옥(崔鋈)과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제우는 재가(再嫁)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자와 다름없는 신분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울 수 있었다.[2] 경주 최부잣집과는 친가 방척 친족 관계였다.최제우는 6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3] 십 대에 울산(蔚山) 박씨(朴氏)와 결혼하였다.
2. 3. 수행과 깨달음
31세(1854)까지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 《정감록》과 같은 비기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동시에,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3]32세(1855년)에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일종의 신비 체험을 한 끝에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 근처에 있는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도 생활을 했다. 생계를 꾸려가기도 힘든 지경에 처한 가족을 처가에 맡긴 채 구도 생활을 계속하던 수운은 36세(1859)가 되던 해에 오랜 유랑 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했다.[3]
1860년 음력 4월 5일,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에 수운은 이른바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창명)하게 된다.[3]
1860년 5월 25일(음력 4월 5일), 경주 북서쪽 수킬로미터 지점 구미산의 아버지 소유 용담정에서 최초의 계시, 즉 ‘개벽’을 경험했다. 이는 하늘의 주인인 ‘상제’와의 직접적인 만남이었다. 이 만남에서 수운은 부적(영부)과 주문 두 가지를 받았다. 부적은 종이에 그린 상징으로 태워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이었고, 주문은 반복해서 염송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례를 따르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Beirne에 따르면, 영부를 명상하며 그리고 마시는 행위는 “하늘의 주인과 수행자 사이의 밀접한 결합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표징이자 축하 행위이며, 그 효과는 몸과 마음 모두를 활기 넘치게 한다”고 한다.
주문 의례의 사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다. 초기에는 육체적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나, 후기 주문 변형에서는 정신적 깨달음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정신적 깨달음과 관련하여, 주문을 염송하는 목적은 신자 내부에 매 순간 하늘의 주인을 현현시키거나, 수행, 반복, 정신 수련을 통해 하늘의 주인이 내재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에는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운은 신(하늘)으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3년간 전도 활동에 헌신했다.
2. 4. 동학 창시와 포교 활동
최제우는 32세(1855)에 《을묘천서》라는 책을 통해 신비 체험을 하고, 천성산에서 49일 기도를 했다. 36세(1859)에 고향 용담정으로 돌아와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년 음력 4월 5일, '천사문답'이라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을 통해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했다.[3]당시 조선은 제2차 아편 전쟁의 여파로 서구 열강의 침투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서학(천주교)의 전래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에 최제우는 유교, 불교, 선교 등 기존 사상을 융합하여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했다.[3] 동학은 훗날 천도교로 발전했다.[3]
최제우는 1860년 5월 25일(음력 4월 5일)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서 상제와의 만남을 통해 최초의 계시를 경험했다. 이 만남에서 영부와 주문을 받았는데, 영부는 태워 물에 섞어 마시고 주문은 반복해서 염송하는 것으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 회복에 효험이 있다고 했다. 초기에는 육체적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나, 후기에는 정신적 깨달음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최제우는 신(하늘)으로부터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3년간 전도 활동을 했다. 초기 저술은 구어체 한국어로 쓰여 암기하기 쉬운 가사 형식이었으며, 1년간의 명상 후에는 고전 중국어로 사상을 설명하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평민과 여성들을 위해 구어체 한국어로 계속 글을 썼고, 자신의 교리를 천주교의 ‘서학’과 구분하기 위해 ‘동학’이라 불렀다.[3]
동학은 한국 무속, 도교, 불교, 주자학을 결합한 것이었다. 동학의 유일신(천주/상제) 개념은 천주교와 유사했지만, 무상성과 임재성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 동학은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이었으며, 이는 조선 정부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근본으로, 인본주의를 강조하고 성실과 신의로 새 세상을 만들자는 사상이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주장은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최제우는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左道亂正之律)’는 죄로 대구 경상감영 관덕정 뜰 앞에서 처형당했다.[4]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죄가 풀렸다. 저서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최제우 사후 동학의 2대 교주는 최시형이 이어받았다.
2. 5. 체포와 처형
1863년(철종 14년) 12월, 최제우는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左道亂正之律)'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3][4] 조선 정부는 동학을 서학(천주교)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다. 체포 전 그의 추종자는 수백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렀고, 한반도 전역에서 유명해져 최소 12개의 마을과 도시에 집회를 설립했는데 주로 조선 남동부에 위치했다.1864년 4월 5일, 최제우는 유죄 판결을 받고, 4월 15일(음력 3월 10일)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했다.[3][4]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의 동상이 처형 장소에 세워져 있으며, 묘는 울산 북쪽 수킬로미터 지점 유곡동의 공원에 있다.
최제우의 처형은 동학이 가진 사상이 당시 조선 사회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주자학) 사상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3] 조선 당국은 동학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여, "이른바 동학이라는 것은 서학의 모든 방법을 계승하면서 이름만 바꾸어 무지한 백성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1907년 대한제국 순종 때 최제우의 죄가 풀렸다.
3. 사상
최제우는 1860년 5월 25일(음력 4월 5일)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서 '상제'와의 만남을 통해 최초의 계시인 '개벽'을 경험하고 부적(영부)과 주문을 받았다. 이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초기에는 육체적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나, 점차 정신적 깨달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발전했다.[1]
최제우는 신의 명령을 받고 3년간 전도 활동을 하면서, 초기에는 가족을 위해 구어체 한국어로 4음보 가사 형식의 글을 썼다. 1년간 명상 후에는 고전 중국어로 사상을 설명하기도 했지만, 평민과 여성들을 위해 구어체 한국어로 계속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의 교리를 서학(천주교)과 구분하기 위해 '동학'이라 불렀다.[5]
동학은 한국 무속, 도교, 불교, 주자학을 결합한 것이었다.[4] 그의 유일신(천주/상제) 개념은 천주교와 유사했지만, 무상성과 임재성에 대한 생각은 달랐다.[2] 동학은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이었는데, 이는 당시 집권 세력인 주자학자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신이나 신/하늘을 믿는 사람들이 왕의 요구보다 신의 요구를 우선시하고, 왕국의 조화를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학의 집단 의례는 정부 통제를 벗어났기에 탄압의 원인이 되었다.[6]
3. 1. 인내천(人乃天)
최제우는 모든 사람 안에 하늘의 주인(상제)이 내재되어 있다는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그는 초기에는 육체적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나, 점차 수행, 반복, 정신 수련을 통해 하늘의 주인이 사람 안에 내재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정신적 깨달음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1]최제우의 유일신 사상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무상성과 임재성에 대한 생각에서는 차이를 보였다.[2] 또한, 동학은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2]
3. 2. 후천개벽(後天開闢)
1860년 5월 25일(음력 4월 5일), 최제우는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하늘의 주인인 ‘상제’와 만나 최초의 계시인 ‘개벽’을 경험했다. 이 만남에서 최제우는 부적(영부)과 주문 두 가지를 받았다. 부적은 종이에 그린 상징으로 태워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이었고, 주문은 반복해서 외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례를 따르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부를 명상하며 그리고 마시는 행위는 “하늘의 주인과 수행자 사이의 밀접한 결합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표징이자 축하 행위이며, 그 효과는 몸과 마음 모두를 활기 넘치게 한다”고 한다.[1]주문 의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했다. 초기에는 육체적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으나, 후기에는 정신적 깨달음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2] 정신적 깨달음과 관련하여, 주문을 외는 목적은 신자 내부에 매 순간 하늘의 주인을 현현시키거나, 수행, 반복, 정신 수련을 통해 하늘의 주인이 내재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3]
3. 3. 기타 사상
최제우는 한국의 무속 신앙, 도교, 불교, 주자학 등 다양한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4] 특히 주자학의 영향은 최제우 사상에서 중기 이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4] 동학은 단순한 혼합주의가 아니라 독창적인 사상 체계라는 평가도 있다.[4]최제우의 유일신 사상은 천주교와 유사해 보이지만, 신의 무상성과 임재성에 대한 관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4] 동학은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4] 이러한 특징은 당시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주자학자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동학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4]
최제우는 천주교와의 연관성 때문에 체포를 피해 전라도 남원의 불교 사찰에서 은신하며 주요 경전들을 저술하기도 했다.[4]
4. 연대기
-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 경주군 현곡면에서 출생하였다.[1]
- 1834년(10세) 모친이 별세하였다.[1]
- 1837년(13세) 울산 밀양박씨와 결혼하였다.[1]
- 1840년(17세) 부친이 별세하였다.[1]
- 1844년(21세) 장삿길에 나서 이후 10년간 전국을 주유하였다.[1]
- 1854년(31세)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경주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을 시작하였고, 음력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로 이사하였다.[1]
- 1856년(33세) 양산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 49일간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세로 47일 만에 중단하였다.[1]
- 1857년(34세) 다시 천성산 적멸굴로 가 49일 입산기도를 하였고, 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광업을 경영하였다.[1]
- 1858년(35세) 용광업을 그만두었다.[1]
- 1859년(36세) 울산을 떠나 경주 용담으로 귀향하였다.[1]
- 1860년(37세) 5월 25일(음력 4월 5일)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을 하였다.[1]
- 1861년(38세) 음력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교리체계를 세웠다.[1]
- 1861년 음력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포덕(布德)을 시작하였고, 음력 7월에 <포덕문>을 지었다.[1]
- 1861년 음력 8월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하자, <안심가>를 지었다.[1]
- 1861년 음력 11월 경주 관아에서 수운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수운은 용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갔으며, 음력 12월에 남원에 당도하여 이후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하였다.[1]
- 1862년(39세) 음력 7월 경주로 돌아가 박대여 집에 은신하였고, 음력 8월 측근들에게 포덕에 나서라고 권유하였다.[1]
- 1862년 11월 20일(음력 9월 29일) 경주진영에서 수운을 체포하였고, 음력 10월 5일 석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왔으며, 음력 11월 9일 흥해 매산리로 피신하였고, 음력 12월에 최초로 접주들을 임명하였다.[1]
- 1863년(40세) 음력 3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왔고, 음력 5월 하순부터 적극적으로 교화활동을 하였으며, 음력 7월에 최경상(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하였다.[1]
- 1863년 음력 12월 10일(양력 1864년 1월 18일) 조선 왕조의 관군에게 체포되었다.[1]
- 1864년(41세) 4월 15일(음력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斬刑)당했다.[1]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7대조 | 최진흥(崔震興) | 군자감 봉사 |
작은7대조 | 최진립 | |
현조부 | 최국진(崔國鎭) | 음보로 통덕랑 품계 |
고조부 | 최수기(崔壽基) | |
증조부 | 최경우(崔慶雨) | |
조부 | 최종하(崔宗夏) | |
부 | 최옥(崔鋈) | 1762~1840 |
모 | 한씨(韓氏) | |
배우자 | 박씨(朴氏) | 울산 박씨 |
장남 | 최세정(崔世貞) | 1847~1872 |
차남 | 최세청(崔世淸) | 1855~1875 |
장녀 | 최씨(崔氏) | 1856~미상 |
차녀 | 최완(崔婉) | 1857~1926 |
3녀 | 최씨(崔氏) | 생몰년 미상 |
4녀 | 최씨(崔氏) | 1865~미상 |
양녀 | 주씨(朱氏) | 1844~미상 |
최제우는 5대조 최국진(崔國鎭)이 음보로 통덕랑 품계를 받았으나 이후 벼슬이 없어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아버지인 최옥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서자나 다름없는 신분(재가녀의 자)으로 태어났다.[1] 재혼한 과부의 자녀는 사회적 계층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했고, 관리가 되는 데 필요한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다. 경주 최부잣집과는 친가 방척 친족 관계에 있었다.[1]
6. 평가
일부 동학 학자들은 동학이 민족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했지만, 수잔 신(Susan Shin)은 "[최제우]는 한국을 국제 질서에 통합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의 비전은 종교적이었고, 그의 사명은 동포들에게 전통적 가치의 부흥에 힘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1] 동학의 목표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애국적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민족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최제우의 종교적 견해와 의례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네트워크였다. 20세기 초의 후대 지도자들은 주로 교육을 통해 현대적인 한국 국가를 열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은 결국 일본 당국과의 격렬한 충돌로 이어졌다.[2][3]
1862년 경상도의 농민 반란은 최제우의 활동과 동시대적이었지만, 상황에 대한 자세한 분석 결과 이는 지역 관리들의 부패에 대한 반응이었음이 밝혀졌다. 종교적 영향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반봉건주의적 목표는 배제되었다.[4]
반면, 조선 당국은 동학의 의도를 잘못 해석했다. 정부 성명은 "이른바 동학이라는 것은 서학의 모든 방법을 계승하면서 이름만 바꾸어 무지한 백성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라의 법에 따라 초기 단계에서 처벌하고 진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차츰 황건적이나 백련교와 같은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경고했다.[5] 동학이 창설될 당시 중국에서는 태평천국 운동이 진행 중이었고, 공교롭게도 지도자 홍수전은 최제우 직후인 1864년 6월 1일에 사망했다.[6]
최제우 사후에는 최시형(해월, 1827~1898)이 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최제우의 저술은 『동경대전』(한문, 1880)과 『용담유사』(국문, 1881) 두 권으로 편찬되었다.[7]
1894년 전봉준(1854~1895)이 이끈 격렬하게 진압된 동학농민운동은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8] 해월은 4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다가 1898년 결국 처형되었다. 이러한 재난 이후 손병희(의암, 1861~1922)는 동학을 서구 표준에 맞춰 현대화하여 조직을 쇄신하였다. 그는 일본 망명 생활(가명 사용) 5년 동안 서구 문물을 접한 바 있다.[9] 그러나 그의 측근 중 한 명이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을 주장하자, 의암은 그를 파문하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10] 천도교는 유사 종교로 간주되었지만 일본 당국으로부터 관용을 받았다.[11]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후, 천도교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항의했으며, 1919년 삼일 운동 초기 평화적인 단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일 운동이 실패로 끝났지만, 천도교 신자들은 식민지 시대 내내 많은 사회, 정치, 문화 단체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는 소수의 신자만 남아 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의 명목상 구성 요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숙 수녀와 같은 학자들은 동학의 세계관과 윤리가 21세기에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최제우의 삶은 스탠리 파크 감독의 2011년 영화 '최제우의 열정'(동학, 수운 최제우)의 주제였다.
7. 저서
- 東經大全중국어
- 1880년 7월 15일 인제에서 출판되었다.
- 1883년 2월 천안 동쪽 목천에서 1000부가 재출판되었다.
- 龍潭遺詞한국어
- 1881년 7월 단양에서 출판되었다.
최제우의 저술들은 처형 후 금서로 지정되어 소각되었으나, 최시형에 의해 산문 한 권과 시 한 권, 총 두 권의 정본이 나중에 편찬되어 출판되었다.
8. 최제우를 다룬 작품
2011년 스탠리 파크 감독의 영화 '최제우의 열정'(동학, 수운 최제우)에서 최제우의 삶을 다루었다.
8. 1. TV 드라마
1982년 KBS1 TV 드라마 《풍운》에서 배우 김길호가 최제우 역을 연기했다.[1]참조
[1]
서적
A Handbook of Korea
Korean Overseas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1993-12-00
[2]
웹사이트
경주신문 3·1운동 100주년 특집(3)-정무공 정신 깃든 경주최부자 가문과 동학
http://m.gjnews.com/[...]
2019-03-14
[3]
서적 #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糟谷
2000-00-00 # 연도만 제공
[4]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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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04-05 #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할 수 없습니다. 음력 정보 유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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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2-10 #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할 수 없습니다. 음력 정보 유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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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04-05 #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할 수 없습니다. 음력 정보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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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2-10 #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할 수 없습니다. 음력 정보 유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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