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엔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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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엔유 천황은 1371년 황태자에 책봉된 후 아버지 고코곤 천황의 양위로 북조의 천황이 되었다. 즉위례는 가스가 신목 입락 사건으로 인해 2년이나 연기된 후 거행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고엔유 천황은 니조 요시모토, 아시카가 요시미쓰 등 신하들과 잦은 갈등을 겪었으며, 특히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조정 내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다. 1382년 아들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으나, 요시미쓰와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1393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엔유 천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무능함과 고립된 모습을 지적하는 반면, 요시미쓰에게 저항하려 했던 인간적인 면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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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엔유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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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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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엔유 천황 |
일본어 | 고엔유 덴노(後円融天皇) |
추증 묘호 | 고엔유인(後円融院) 또는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 |
휘 | 오히토(緒仁) |
법명 | 광정(光浄) |
통치 정보 | |
재위 기간 | 1371년 4월 9일 ~ 1382년 5월 24일 |
일본식 재위 기간 | 오안 4년 3월 23일 ~ 에이토쿠 2년 4월 11일 |
즉위례 | 1375년 1월 30일 |
대례 | 1375년 12월 16일 |
연호 | 오안(応安) 에이와(永和) 고랴쿠(康暦) 에이토쿠(永徳) |
수도 | 교토 |
거처 | 쓰치미카도히가시노토인도노 (현재의 교토 어소) |
선대 천황 | 고코곤 천황 |
후대 천황 | 고코마쓰 천황 |
인물 정보 | |
출생 | 1359년 1월 11일 |
사망 | 1393년 6월 6일 |
능묘 | 후카쿠사 북릉 |
아버지 | 고코곤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주시 |
배우자 | 산조 다카코(이즈코) |
자녀 | 고코마쓰 천황 게이시 내친왕 도초 친왕 그 외 (후비/황자녀 항목 참조) |
정치적 배경 | |
정치 체제 | 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시대 |
관백 | 니조 모로요시 → 구조 다다모토 → 니조 모로쓰구 |
쇼군 | 아시카가 요시미쓰 |
2. 생애
1371년 황실 포고에 의해 고엔유는 친왕의 직위를 받고 황태자에 봉해졌다. 직후 그는 아버지 고코곤 천황의 양위로 천황이 되었다. 고코곤 천황과 스코 천황 사이에 황태자에 대한 의견 상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막부를 조정하였던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지지로 고엔유 천황은 북조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1374년까지는 고코곤 천황이 상황으로서 정무를 보았다.[6]
고엔유 천황의 즉위례는 12월 19일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행 직전인 12월 2일, 興福寺(흥복사)의 승려들이 春日神木(카스가 신목)을 봉안하고 입락하여, 아소(嗷訴)를 일으켰다. 고코곤 천황은 처음에는 신속하게 대응했지만, 즉위례를 연내에 거행하고 싶었던 고코곤은 신목을 로쿠토(洛外)로 옮기려 했다. 이것이 승려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고코곤의 측근들이 잇따라 방씨(放氏)의 처벌을 받았다. 고광엄원정은 사실상 손발이 묶인 꼴이 되었다.
승려들과의 협상은 난항을 겪으며 지지부진했고, 결국 즉위례는 전례 없는 즉위 후 2년 후로 연기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응안(応安) 6년(1373년) 7월에는 고코곤이 직접 협상에 나섰지만, 승려들의 하층부에 해당하는 육방중(六方衆)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그 와중에 고코곤은 천연두(疱瘡)에 걸려 응안 7년(1374년) 1월 29일에 병사하였다.
결국 고엔유의 즉위례는 신목이 제자리로 돌아온 직후인 12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즉위 후 4년 가까이 지나서야 거행된 것이었다.
오안 3년(1370년) 8월, 고코곤 천황은 둘째 황자에게 양위(譲位)할 의향을 밝히고 막부 관령(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사자를 파견했다. 고코곤은 太閤 니조 요리모토(二条良基)에게도 상담했고, 이쪽도 "기뻐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고코곤은 막부와 공경들의 지지를 얻어, 오안 4년 3월 21일, 둘째 황자는 오니(緒仁)라는 이름으로 친왕 선하를 받았고, 23일에는 원복(元服)과 양위가 이루어졌다.(이후, 고엔유 천황) 동시에 고코곤 상황(後光厳上皇)에 의한 인정(院政)이 시작되었다.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의 급서로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지만,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은 17세로 후견인이 필요했다. 이에 막부는 궁중의 모든 정무를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가 처리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고엔유 천황은 아버지의 중음(中陰)이 끝난 직후인 1374년 4월 7일에 奏事始를 행하고, 같은 날 의정중(議定衆)과 전주(伝奏)를 지명했다. 이때 요시모토는 방씨(放氏)라는 이유로 지명되지 않았는데, 이 무렵부터 이미 고엔유 천황은 요시모토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고 小川剛生는 지적한다. 고엔유 천황이 잡소(雑訴)를 친재(親裁)하기 시작하자, 요시모토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엔유 천황은 그 주장을 거절했다. 즉위례에서도 고엔유 천황은 니조가(二条家)가 해야 할 즉위관정(即位灌頂)을 요시모토가 아닌 존도법친왕(尊道法親王)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받았다.
1375년 2월 21일에 귀간의정시(鬼間議定始)가 이루어지고, 3월 18일에는 어전의정시(御前議定始)와 기록소(記録所)시가 거행됨으로써, 고엔유 천황의 친정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엔유 친정(後円融親政) 시대에는 고코곤 친정(後光厳親政)과 마찬가지로 매달 6일, 16일, 26일에 잡소사태(雑訴沙汰)가 열렸다. 국정 심의의 장인 의정(議定)도 개최되었다.
하지만 고코곤 친정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다른 날에 열리는 기록소(記録所) 정중(庭中)도 잡소사태와 같은 날 개최된 것으로 보이며, 참시인(参仕人)의 태만도 눈에 띄었다. 모리 시게아키(森茂暁)는 잡소사태에 대해서도 "활발한 기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기록소에 관해서도, 1379년까지는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후로 급격히 쇠퇴하여, 후화원 천황(後花園天皇)이 재위하던 1444년에는 "기록소 어사태 구중절(記録所御沙汰久中絶)"이라는 상태가 되었다.
또한, 고엔유 친정기부터 조정(朝廷)이 가지고 있던 일국평균역부과권(一国平均役賦課権)과 교토(京都)의 경찰권(警察権) 등이 막부(幕府)로 넘어가고, 교토 시정권은 조정에서 막부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은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와 같은 신하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엔유 천황과 니조 요시모토는 일찍부터 대립의 조짐이 보였는데, 1377년 정월에는 준삼후(准三后)가 된 니조 요시모토가 연작(年爵) 신청을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시의(侍医)였던 사카시부쓰(坂士仏)를 법인(法印)에 서임하는 건을 고엔유 천황이 니조 요시모토에게 상의했을 때, 니조 요시모토가 막부의 요리노부(頼之)에게 상의한 것이 고엔유 천황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381년 8월에는 배우자인 산조 겐시(三条厳子)의 아버지 산조 기미타다(三条公忠)과의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였다. 12일, 기미타다는 요시미쓰에게 교토의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교토 땅의 일은 공가의 계산이다(京都の地の事、公家御計なり)"라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미쓰는 당황하여 결국 추천이라는 형태로 무가 집주(武家執奏)를 하였다. 자신의 권한이 침해된 형태가 된 고엔유 천황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以外(もってのほか)に御腹立)"라며 며칠 동안 답변을 미룬 후 기미타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고엔유 천황은 돌연 요구를 받아들여 륜지(綸旨)를 발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입도 섞지 않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며 겐시를 추방해 버렸다고 한다.
또한 같은 달 9월에는 고엔유 천황의 칙재 연기로 인해 요시미쓰가 격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근청두(右近庁頭)에 나카하라 노리토미(中原職富)를 보충하도록 요시미쓰가 무가 집주(武家執奏)를 하였으나, 고엔유 천황의 답변이 크게 늦어졌기 때문에 요시미쓰가 격노하였고, 그것을 들은 고엔유 천황은 허둥지둥 칙재를 내렸다.
공무 관계를 둘러싸고 신하들과 충돌하는 고엔유 천황의 모습은 막부가 조정의 권한을 흡수했다는 "권한 흡수론"이 뿌리깊었던 시대에, "왕조 권력을 흡수하려는 무가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보이며 고독하게 싸우는 군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0년 현재의 연구에서는 요시미쓰의 "공가화(公家化)"가 진행되는 가운데 고엔유 천황이 정신적으로 몰려갔다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또한, 충돌의 원인을 고엔유 천황의 개인적인 성격에 귀착시키는 의견도 있으며, 오가와 쓰구오(小川剛生)는 고엔유 천황을 "심술궂은 사람"으로, 이시하라 히이로(石原比伊呂)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못하며, 게다가 금방 삐친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엔유 천황 친정 시대에는 공가 정권이 해왔던 소송 제도 정비나 상공업자에 대한 과세와 같은 실질적인 정무가 급속히 쇠퇴했다. 더욱이, 어제회(御斎会)·여서위(女叙位)·답가절회(踏歌節会)·석청수임시제(石清水臨時祭)·관불회(灌仏会)·최승강(最勝講)·구교전(乞巧奠)·예폐(例幣)·신금식(神今食)·경관조목(京官除目)이 이 기간에 폐지되는등 조의(朝儀)의 폐지도 현저하였다.
사찰로부터의 아소(嗷訴)도 빈번히 발생하여, 북조는 정무·조의의 정체에 빠졌다. 이러한 북조의 위기에 대응하여, 요키(良基)는 의만(義満)에게 기대를 걸고, 조의의 작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의만은 조정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영화(永和) 4년(1378년) 8월에는 권대납언(権大納言)과, 공가 사회에서는 경쟁의 대상이었던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강력(康暦) 원년(1379년) 7월에는, 무가로서는 처음으로 배가(拝賀)를 행했다.
더 나아가, 남도북령(南都北嶺)으로부터의 아소(嗷訴), 외궁(外宮)의 천궁(遷宮), 히에 신여(日吉神輿) 조개(造替)와 같은 공가 사회의 여러 과제도, 의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했다. 의만은, 그 이전의 쇼군과는 달리, 공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북조를 지탱하게 된다.
강력(康暦) 원년(1379년) 8월 14일, 다시 한번 가스가 신목(春日神木)이 입락(入洛)했지만, 신목의 귀좌(歸座)를 기다리지 않고, 의만이 10만 疋의 헌금을 행하여, 후광엄(後光嚴) 천황 7회 기의 법요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신목 재락(在洛) 중, 藤原氏가 아닌 공경인 의만을 중심으로 몇몇 조의가 재흥되어, 의만을 방씨(放氏)할 수 없게 되어, 이미 신목 재락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그리고, 의만이 우대장(右大将)으로서 명춘(明春)의 절회(節會)에 출사(出仕)하는 것을 결정하고 최후 통첩을 보내자, 공경이나 전상인(殿上人)의 공봉(供奉)도 없이, 신목은 귀좌하게 되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가스가 신목의 입락은 행해지지 않게 된다.
1382년 고엔유 천왕은 아들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섭정을 시작했으나 요시미쓰의 개입으로 실권은 없었다. 이후 그는 후궁 산죠 이쓰코와 요시미쓰의 간통을 의심하였고 또다른 후궁도 요시미쓰와의 사이를 의심해 출가시켰다. 이후에도 요시미쓰가 자신을 유배시키려 한다고 의심해 할복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1381년 겨울, 고엔유는 요시미쓰에게 황자 간닌(幹仁)에게 양위할 의향을 밝혔다. 11월 30일, 참내한 요시미쓰에게 고광엄과 스미요시의 인연을 설명한 후 “짐의 거취도 잘 알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요시미쓰는 즉답을 피했지만, 12월 24일, 본명인 간닌 외에도 고엔유의 아우의 존재를 언급하며 “적임자(황위 계승자)는 진실로 무가의 뜻이어야 하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러자 요시미쓰는 “형제는 사적으로도 항상 불편한 습관이고, 괜히 또 어린 황자가 있다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라고 말하며 간닌에 대한 양위를 지지했다. 더 나아가 요시미쓰는 고엔유가 스미요시 상황 일가의 동향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비록 누가 옹호한다 해도, 이렇게 제가 있는 한은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고엔유는 여러 번 요시미쓰의 진의를 확인했다. 모모사키 유이치로는 요시미쓰의 발언은 고엔유와의 비밀 회담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고엔유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명확히 해주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이듬해 1382년 윤1월 11일, 요시미쓰는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하는 고엔유에게 짜증을 내며 “지금은 외척으로부터 받들고, 확실한 소식이 있어야 할 뿐이다 (중략) 섭정 등에게도 알려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비밀스러운 말씀은 더 이상 필요 없고, 요시토모를 통해 공적인 경로로 알려주면 된다고 했다.
1382년 4월 7일, 간닌 친왕의 착모의 의식이 무로마치 저(요시미쓰 저택)에서 거행되었고, 11일, 나카조노 저(도인 공정 저택)에서 고엔유의 양위가, 도고몬 동도인전(土御門東洞院殿)에서 간닌(고코마쓰 천황)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고엔유 상황은 원정을 베풀었고, 집사 별당에는 요시미쓰가, 원집권에는 우라마쓰 스케야스가 임명되었지만, 원평정(院評定)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고코마쓰의 즉위식 준비는 섭정 요시토모와 좌대신 요시미쓰가 협력하여 진행했지만,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상황에 고엔유는 분노하여 즉위식 준비를 포기하게 되었다. 10월 27일 밤 요시미쓰가 고엔유의 센도 고쇼(仙洞御所)에 가서 즉위식을 지휘하도록 奏上했지만, 고엔유는 침묵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요시미쓰는 분노하여 퇴장했다고 한다. 이치죠 쓰구쓰구는 자신의 일기(『아라레키』)에 “황명이 매우 불안하다”고 기록했고, 공충(公忠)도 일기(『고구메이키』)에서 “센도의 뜻이 매사가 평범하지 않다” 와 “무가와 멀어져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결국 즉위식은 요시토모와 요시미쓰의 주도로 진행되어 12월 28일에 무사히 거행되었지만, 고엔유는 즉위식에 불참했다. 상황이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한 예로는, 고묘 천황의 즉위식에서 치텐노군이었던 형 광엄 상황이 회창문 밖에 우차를 세워 구경한 예가 있다.[7]
에이토쿠 3년(1383년), 고엔유 천황 주변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고엔유 천황은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바친 정월 의례 비용을 돌려보내고 센도 고쇼에서의 행사는 모두 중단되었다. 『아라레키(荒暦)』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신인(新院)御薬 및 배례 이하, 원삼(元三)의 의식 일체를 중단하였다. 희대의 진기한 일이다. 작년부터 자세한 사정이 있어 이와 같다.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중략) 억지로 신인(新院)과 무가(武家) 사이는 이례적이다. 지난 겨울 29일 공마(貢馬) 및 원삼(元三) 요금 이하를 상주하였으나, 어긋남을 이유로 삼아 모두 돌려보냈다. 결국 평생 한 길로 생각하고 정한 바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무가(武家)는 강하게 놀라지 않았다. 그래서 공마(貢馬)를 금리(禁裏)로 끌고 들어갔다. 요금 이하를 거듭해서 바칠 수 없었다. 따라서 원중(院中) 격자를 내리고 문을 닫았다. 이궁(離宮)과 같다고 한다. 센도 지정(仙洞治政)의 시작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일은 선례가 없는가. 대체로 언사가 미치는 곳이 아닐 뿐이다.
더욱이, 1월 29일에 거행된 고코곤 천황의 공양 불사에서는 사람들이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두려워한 나머지, “료켄 소죠(良憲僧正)·인시(院司) 한두 명 외에는 참석한 사람이 없다”는 상황이 되었다.
2월 1일 밤, 고엔유 상황이 겐시(厳子)를 어탕전(御湯殿, 목욕탕)으로 불렀다. 1월 12일, 산후 불과 20일 밖에 되지 않은 겐시는 고엔유의 부름에 따라 친정에서 돌아왔다. 겐시는 목욕을 돕는 데 필요한 탕권(湯巻)과 하카마(袴)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엔유는 겐시의 방에 난입하여, 칼등으로 겐시를 마구 때렸다. 겐시는 과다 출혈로 중상을 입었고, 여러 번 의식을 잃었다.
소식을 들은 산조가(三条家)에서는 공충(公忠)의 아내가 맨발로 달려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공충은 일기에 "설령 딸에게 죄가 있다 해도, 상황(上皇)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전대미문이다"라며 격렬한 분노를 적었다.
이튿날 2일, 겨우 겐시의 출혈이 멈췄고, 같은 날 고엔유의 생모인 나카코(仲子)가 센토고쇼(仙洞御所)(중원제(中園第))로 달려가 고엔유를 술로 달래면서, 은밀히 겐시를 탈출시켰다. 이 사건을 들은 요시미츠(義満)는 의사를 파견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사건 8일 후인 9일, 고엔유가 다나바(丹波)국 산코쿠쇼(山国荘)로 몰락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요시미쓰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카고가 다시 센도 고쇼로 달려가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요시미쓰는 센도 고쇼와 무로마치다이(室町第)가 불과 몇 정(町)(단위)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나카고를 통해 기타야마(北山)(교토시) 행궁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엔유는 이궁으로 옮겨진 후 유배되었던 고토바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사례를 떠올렸는지, 자신이 유배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포에 떨었다. 경위를 들은 이치조 츠구시게(一条経嗣)는 “성운의 지극하니라”(천황・왕가의 운명은 이미 다했다)고 한탄했다.
더 나아가 11일에는 총애하던 안찰국(按察局)과 요시미쓰의 밀통을 의심하여 안찰국을 출가시킨 뒤 추방했다.
그리고 14일, 요시미쓰가 고엔유를 유배시켜 교토에서 추방한다는 소문이 고엔유의 귀에 들어오자, 센도 고쇼를 방문한 요시미쓰의 사자를 유배를 알리는 사자로 오인하고, 지불당(持仏堂)에 틀어박혀 할복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이때도 나카고의 중재로 진정되었고, 16일 밤, 나카고와 함께 고엔유는 기타야마의 우메마치덴(梅町殿)(우메마츠덴(梅松殿))으로 옮겼다.
1393년 6월 6일 고엔유 천황이 사망하였다. 고엔유 천황은 자신의 생전에 1371년 4월 9일부터 1382년 5월 24일까지 국화의 자리에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다른 천황들과 함께 교토 후시미구(京都伏見区)에 있는 후카쿠사 북릉(深草北陵)이라는 황릉에 합사되었다.
그 후 고엔유 천황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사료가 적다는 사정도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동향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조 합일 후인 1393년 4월 26일, 선동 어소의 소하전에서 36세로 승하하였다.
2. 1. 황위 계승 문제와 즉위
1371년 황실 포고에 의해 고엔유는 친왕의 직위를 받고 황태자에 봉해졌다. 직후 그는 아버지 고코곤 천황의 양위로 천황이 되었다. 고코곤 천황과 스코 천황 사이에 황태자에 대한 의견 상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막부를 조정하였던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지지로 고엔유 천황은 북조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1374년까지는 고코곤 천황이 상황으로서 정무를 보았다.[6]고엔유 천황의 즉위례는 12월 19일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행 직전인 12월 2일, 興福寺(흥복사)의 승려들이 春日神木(카스가 신목)을 봉안하고 입락하여, 아소(嗷訴)를 일으켰다. 고코곤 천황은 처음에는 신속하게 대응했지만, 즉위례를 연내에 거행하고 싶었던 고코곤은 신목을 로쿠토(洛外)로 옮기려 했다. 이것이 승려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고코곤의 측근들이 잇따라 방씨(放氏)의 처벌을 받았다. 고광엄원정은 사실상 손발이 묶인 꼴이 되었다.
승려들과의 협상은 난항을 겪으며 지지부진했고, 결국 즉위례는 전례 없는 즉위 후 2년 후로 연기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응안(応安) 6년(1373년) 7월에는 고코곤이 직접 협상에 나섰지만, 승려들의 하층부에 해당하는 육방중(六方衆)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그 와중에 고코곤은 천연두(疱瘡)에 걸려 응안 7년(1374년) 1월 29일에 병사하였다.
결국 고엔유의 즉위례는 신목이 제자리로 돌아온 직후인 12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즉위 후 4년 가까이 지나서야 거행된 것이었다.
오안 3년(1370년) 8월, 고코곤 천황은 둘째 황자에게 양위(譲位)할 의향을 밝히고 막부 관령(管領)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사자를 파견했다. 고코곤은 太閤 니조 요리모토(二条良基)에게도 상담했고, 이쪽도 "기뻐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고코곤은 막부와 공경들의 지지를 얻어, 오안 4년 3월 21일, 둘째 황자는 오니(緒仁)라는 이름으로 친왕 선하를 받았고, 23일에는 원복(元服)과 양위가 이루어졌다.(이후, 고엔유 천황) 동시에 고코곤 상황(後光厳上皇)에 의한 인정(院政)이 시작되었다.
2. 1. 1. 가스가 신목 입락 사건
고엔유 천황의 즉위례는 12월 19일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행 직전인 12월 2일, 興福寺(흥복사)의 승려들이 春日神木(카스가 신목)을 봉안하고 입락하여, 아소(嗷訴)를 일으켰다. 고광엄은 처음에는 신속하게 대응했지만, 즉위례를 연내에 거행하고 싶었던 고광엄은 신목을 로쿠토(洛外)로 옮기려 했다. 이것이 승려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고광엄의 측근들이 잇따라 방씨(放氏)의 처벌을 받았다. 고광엄원정은 사실상 손발이 묶인 꼴이 되었다.
승려들과의 협상은 난항을 겪으며 지지부진했고, 결국 즉위례는 전례 없는 즉위 후 2년 후로 연기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응안(応安) 6년(1373년) 7월에는 고광엄이 직접 협상에 나섰지만, 승려들의 하층부에 해당하는 육방중(六方衆)과 격렬하게 대립했고, 그 와중에 고광엄은 천연두(疱瘡)에 걸려 응안 7년(1374년) 1월 29일에 병사하였다.
결국 고엔유의 즉위례는 신목이 제자리로 돌아온 직후인 12월 28일에 거행되었다. 즉위 후 4년 가까이 지나서야 거행된 것이었다.
2. 2. 친정
고코곤 천황(後光厳天皇)의 급서로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지만,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은 17세로 후견인이 필요했다. 이에 막부는 궁중의 모든 정무를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가 처리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고엔유 천황은 아버지의 중음(中陰)이 끝난 직후인 1374년 4월 7일에 奏事始를 행하고, 같은 날 의정중(議定衆)과 전주(伝奏)를 지명했다. 이때 요시모토는 방씨(放氏)라는 이유로 지명되지 않았는데, 이 무렵부터 이미 고엔유 천황은 요시모토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고 小川剛生는 지적한다. 고엔유 천황이 잡소(雑訴)를 친재(親裁)하기 시작하자, 요시모토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엔유 천황은 그 주장을 거절했다. 즉위례에서도 고엔유 천황은 니조가(二条家)가 해야 할 즉위관정(即位灌頂)을 요시모토가 아닌 존도법친왕(尊道法親王)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받았다.1375년 2월 21일에 귀간의정시(鬼間議定始)가 이루어지고, 3월 18일에는 어전의정시(御前議定始)와 기록소(記録所)시가 거행됨으로써, 고엔유 천황의 친정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엔유 친정(後円融親政) 시대에는 고코곤 친정(後光厳親政)과 마찬가지로 매달 6일, 16일, 26일에 잡소사태(雑訴沙汰)가 열렸다. 국정 심의의 장인 의정(議定)도 개최되었다.
하지만 고코곤 친정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다른 날에 열리는 기록소(記録所) 정중(庭中)도 잡소사태와 같은 날 개최된 것으로 보이며, 참시인(参仕人)의 태만도 눈에 띄었다. 모리 시게아키(森茂暁)는 잡소사태에 대해서도 "활발한 기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기록소에 관해서도, 1379년까지는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후로 급격히 쇠퇴하여, 후화원 천황(後花園天皇)이 재위하던 1444년에는 "기록소 어사태 구중절(記録所御沙汰久中絶)"이라는 상태가 되었다.
또한, 고엔유 친정기부터 조정(朝廷)이 가지고 있던 일국평균역부과권(一国平均役賦課権)과 교토(京都)의 경찰권(警察権) 등이 막부(幕府)로 넘어가고, 교토 시정권은 조정에서 막부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은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와 같은 신하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엔유 천황과 니조 요시모토는 일찍부터 대립의 조짐이 보였는데, 1377년 정월에는 준삼후(准三后)가 된 니조 요시모토가 연작(年爵) 신청을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시의(侍医)였던 사카시부쓰(坂士仏)를 법인(法印)에 서임하는 건을 고엔유 천황이 니조 요시모토에게 상의했을 때, 니조 요시모토가 막부의 요리노부(頼之)에게 상의한 것이 고엔유 천황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381년 8월에는 배우자인 산조 겐시(三条厳子)의 아버지 산조 기미타다(三条公忠)과의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였다. 12일, 기미타다는 요시미쓰에게 교토의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교토 땅의 일은 공가의 계산이다(京都の地の事、公家御計なり)"라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미쓰는 당황하여 결국 추천이라는 형태로 무가 집주(武家執奏)를 하였다. 자신의 권한이 침해된 형태가 된 고엔유 천황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以外(もってのほか)に御腹立)"라며 며칠 동안 답변을 미룬 후 기미타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고엔유 천황은 돌연 요구를 받아들여 륜지(綸旨)를 발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입도 섞지 않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며 겐시를 추방해 버렸다고 한다.
또한 같은 달 9월에는 고엔유 천황의 칙재 연기로 인해 요시미쓰가 격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근청두(右近庁頭)에 나카하라 노리토미(中原職富)를 보충하도록 요시미쓰가 무가 집주(武家執奏)를 하였으나, 고엔유 천황의 답변이 크게 늦어졌기 때문에 요시미쓰가 격노하였고, 그것을 들은 고엔유 천황은 허둥지둥 칙재를 내렸다.
공무 관계를 둘러싸고 신하들과 충돌하는 고엔유 천황의 모습은 막부가 조정의 권한을 흡수했다는 "권한 흡수론"이 뿌리깊었던 시대에, "왕조 권력을 흡수하려는 무가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보이며 고독하게 싸우는 군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0년 현재의 연구에서는 요시미쓰의 "공가화(公家化)"가 진행되는 가운데 고엔유 천황이 정신적으로 몰려갔다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또한, 충돌의 원인을 고엔유 천황의 개인적인 성격에 귀착시키는 의견도 있으며, 오가와 쓰구오(小川剛生)는 고엔유 천황을 "심술궂은 사람"으로, 이시하라 히이로(石原比伊呂)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못하며, 게다가 금방 삐친다)"고 평가하고 있다.
2. 2. 1.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조정 진출
고엔유 천황 친정 시대에는 공가 정권이 해왔던 소송 제도 정비나 상공업자에 대한 과세와 같은 실질적인 정무가 급속히 쇠퇴했다. 더욱이, 어제회(御斎会)·여서위(女叙位)·답가절회(踏歌節会)·석청수임시제(石清水臨時祭)·관불회(灌仏会)·최승강(最勝講)·구교전(乞巧奠)·예폐(例幣)·신금식(神今食)·경관조목(京官除目)이 이 기간에 폐지되는등 조의(朝儀)의 폐지도 현저하였다.사찰로부터의 아소(嗷訴)도 빈번히 발생하여, 북조는 정무·조의의 정체에 빠졌다. 이러한 북조의 위기에 대응하여, 요키(良基)는 의만(義満)에게 기대를 걸고, 조의의 작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의만은 조정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영화(永和) 4년(1378년) 8월에는 권대납언(権大納言)과, 공가 사회에서는 경쟁의 대상이었던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강력(康暦) 원년(1379년) 7월에는, 무가로서는 처음으로 배가(拝賀)를 행했다.
더 나아가, 남도북령(南都北嶺)으로부터의 아소(嗷訴), 외궁(外宮)의 천궁(遷宮), 히에 신여(日吉神輿) 조개(造替)와 같은 공가 사회의 여러 과제도, 의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했다. 의만은, 그 이전의 쇼군과는 달리, 공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북조를 지탱하게 된다.
강력(康暦) 원년(1379년) 8월 14일, 다시 한번 가스가 신목(春日神木)이 입락(入洛)했지만, 신목의 귀좌(歸座)를 기다리지 않고, 의만이 10만 疋의 헌금을 행하여, 후광엄(後光嚴) 천황 7회 기의 법요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신목 재락(在洛) 중, 藤原氏가 아닌 공경인 의만을 중심으로 몇몇 조의가 재흥되어, 의만을 방씨(放氏)할 수 없게 되어, 이미 신목 재락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그리고, 의만이 우대장(右大将)으로서 명춘(明春)의 절회(節會)에 출사(出仕)하는 것을 결정하고 최후 통첩을 보내자, 공경이나 전상인(殿上人)의 공봉(供奉)도 없이, 신목은 귀좌하게 되었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가스가 신목의 입락은 행해지지 않게 된다.
2. 2. 2. 신하들과의 충돌
이러한 가운데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은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와 같은 신하들과 자주 충돌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엔유 천황과 니조 요시모토는 일찍부터 대립의 조짐이 보였는데, 1377년 정월에는 준삼후(准三后)가 된 니조 요시모토가 연작(年爵) 신청을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이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시의(侍医)였던 사카시부쓰(坂士仏)를 법인(法印)에 서임하는 건을 고엔유 천황이 니조 요시모토에게 상의했을 때, 니조 요시모토가 막부의 요리노부(頼之)에게 상의한 것이 고엔유 천황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381년 8월에는 배우자인 산조 겐시(三条厳子)의 아버지 산조 기미타다(三条公忠)과의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였다. 12일, 기미타다는 요시미쓰에게 교토의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교토 땅의 일은 공가의 계산이다(京都の地の事、公家御計なり)"라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요시미쓰는 당황하여 결국 추천이라는 형태로 무가 집주(武家執奏)를 하였다. 자신의 권한이 침해된 형태가 된 고엔유 천황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以外(もってのほか)に御腹立)"라며 며칠 동안 답변을 미룬 후 기미타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고엔유 천황은 돌연 요구를 받아들여 륜지(綸旨)를 발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입도 섞지 않고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며 겐시를 추방해 버렸다고 한다.
또한 같은 달 9월에는 고엔유 천황의 칙재 연기로 인해 요시미쓰가 격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근청두(右近庁頭)에 나카하라 노리토미(中原職富)를 보충하도록 요시미쓰가 무가 집주(武家執奏)를 하였으나, 고엔유 천황의 답변이 크게 늦어졌기 때문에 요시미쓰가 격노하였고, 그것을 들은 고엔유 천황은 허둥지둥 칙재를 내렸다.
공무 관계를 둘러싸고 신하들과 충돌하는 고엔유 천황의 모습은 막부가 조정의 권한을 흡수했다는 "권한 흡수론"이 뿌리깊었던 시대에, "왕조 권력을 흡수하려는 무가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보이며 고독하게 싸우는 군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0년 현재의 연구에서는 요시미쓰의 "공가화(公家化)"가 진행되는 가운데 고엔유 천황이 정신적으로 몰려갔다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또한, 충돌의 원인을 고엔유 천황의 개인적인 성격에 귀착시키는 의견도 있으며, 오가와 쓰구오(小川剛生)는 고엔유 천황을 "심술궂은 사람"으로, 이시하라 히이로(石原比伊呂)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못하며, 게다가 금방 삐친다)"고 평가하고 있다.
2. 3. 양위
1371년 황실의 포고에 의해 친왕의 직위를 받고 황태자로 봉해졌다. 직후에 그는 아버지 고코곤 천황의 양위로 천황이 되었다. 고코곤 천황과 스코 천황 사이에 황태자에 대한 의견 상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막부를 조정하였던 호소가와 요리유키의 지지로 고엔유 천황은 북조 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1374년까지는 고코곤 천황이 상황으로서 정무를 보았다.1382년 고엔유 천왕은 아들 고코마쓰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섭정을 시작했으나 요시미쓰의 개입으로 실권은 없었다. 이후 그는 후궁 산죠 이쓰코와 요시미쓰의 간통을 의심하였고 또다른 후궁도 요시미쓰와의 사이를 의심해 출가시켰다. 이후에도 요시미쓰가 자신을 유배시키려 한다고 의심해 할복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2. 3. 1. 혼란을 극에 달하는 양위
1381년 겨울, 고엔유는 요시미쓰에게 황자 간닌(幹仁)에게 양위할 의향을 밝혔다. 11월 30일, 참내한 요시미쓰에게 고광엄과 스미요시의 인연을 설명한 후 “짐의 거취도 잘 알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요시미쓰는 즉답을 피했지만, 12월 24일, 본명인 간닌 외에도 고엔유의 아우의 존재를 언급하며 “적임자(황위 계승자)는 진실로 무가의 뜻이어야 하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압박했다. 그러자 요시미쓰는 “형제는 사적으로도 항상 불편한 습관이고, 괜히 또 어린 황자가 있다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라고 말하며 간닌에 대한 양위를 지지했다. 더 나아가 요시미쓰는 고엔유가 스미요시 상황 일가의 동향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비록 누가 옹호한다 해도, 이렇게 제가 있는 한은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했다.그러나 그 후에도 고엔유는 여러 번 요시미쓰의 진의를 확인했다. 모모사키 유이치로는 요시미쓰의 발언은 고엔유와의 비밀 회담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고엔유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명확히 해주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이듬해 1382년 윤1월 11일, 요시미쓰는 여러 번 같은 질문을 하는 고엔유에게 짜증을 내며 “지금은 외척으로부터 받들고, 확실한 소식이 있어야 할 뿐이다 (중략) 섭정 등에게도 알려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비밀스러운 말씀은 더 이상 필요 없고, 요시토모를 통해 공적인 경로로 알려주면 된다고 했다.
1382년 4월 7일, 간닌 친왕의 착모의 의식이 무로마치 저(요시미쓰 저택)에서 거행되었고, 11일, 나카조노 저(도인 공정 저택)에서 고엔유의 양위가, 도고몬 동도인전(土御門東洞院殿)에서 간닌(고코마쓰 천황)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고엔유 상황은 원정을 베풀었고, 집사 별당에는 요시미쓰가, 원집권에는 우라마쓰 스케야스가 임명되었지만, 원평정(院評定)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고코마쓰의 즉위식 준비는 섭정 요시토모와 좌대신 요시미쓰가 협력하여 진행했지만,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상황에 고엔유는 분노하여 즉위식 준비를 포기하게 되었다. 10월 27일 밤 요시미쓰가 고엔유의 센도 고쇼(仙洞御所)에 가서 즉위식을 지휘하도록 奏上했지만, 고엔유는 침묵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요시미쓰는 분노하여 퇴장했다고 한다. 이치죠 쓰구쓰구는 자신의 일기(『아라레키』)에 “황명이 매우 불안하다”고 기록했고, 공충(公忠)도 일기(『고구메이키』)에서 “센도의 뜻이 매사가 평범하지 않다” 와 “무가와 멀어져 어찌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결국 즉위식은 요시토모와 요시미쓰의 주도로 진행되어 12월 28일에 무사히 거행되었지만, 고엔유는 즉위식에 불참했다. 상황이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한 예로는, 고묘 천황의 즉위식에서 치텐노군이었던 형 광엄 상황이 회창문 밖에 우차를 세워 구경한 예가 있다.[7]
2. 3. 2. 요시미쓰와의 관계 악화
에이토쿠 3년(1383년), 고엔유 천황 주변은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고엔유 천황은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바친 정월 의례 비용을 돌려보내고 센도 고쇼에서의 행사는 모두 중단되었다. 『아라레키(荒暦)』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더욱이, 1월 29일에 거행된 고코곤 천황의 공양 불사에서는 사람들이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두려워한 나머지, “료켄 소죠(良憲僧正)·인시(院司) 한두 명 외에는 참석한 사람이 없다”는 상황이 되었다.
2. 3. 3. 상해 사건과 자살 기도
2월 1일 밤, 고엔유 상황이 겐시(厳子)를 어탕전(御湯殿, 목욕탕)으로 불렀다. 1월 12일, 산후 불과 20일 밖에 되지 않은 겐시는 고엔유의 부름에 따라 친정에서 돌아왔다. 겐시는 목욕을 돕는 데 필요한 탕권(湯巻)과 하카마(袴)가 없어서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엔유는 겐시의 방에 난입하여, 칼등으로 겐시를 마구 때렸다. 겐시는 과다 출혈로 중상을 입었고, 여러 번 의식을 잃었다.소식을 들은 산조가(三条家)에서는 공충(公忠)의 아내가 맨발로 달려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공충은 일기에 "설령 딸에게 죄가 있다 해도, 상황(上皇)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전대미문이다"라며 격렬한 분노를 적었다.
이튿날 2일, 겨우 겐시의 출혈이 멈췄고, 같은 날 고엔유의 생모인 나카코(仲子)가 센토고쇼(仙洞御所)(중원제(中園第))로 달려가 고엔유를 술로 달래면서, 은밀히 겐시를 탈출시켰다. 이 사건을 들은 요시미츠(義満)는 의사를 파견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사건 8일 후인 9일, 고엔유가 다나바(丹波)국 산코쿠쇼(山国荘)로 몰락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요시미쓰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카고가 다시 센도 고쇼로 달려가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요시미쓰는 센도 고쇼와 무로마치다이(室町第)가 불과 몇 정(町)(단위)의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나카고를 통해 기타야마(北山)(교토시) 행궁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엔유는 이궁으로 옮겨진 후 유배되었던 고토바 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의 사례를 떠올렸는지, 자신이 유배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포에 떨었다. 경위를 들은 이치조 츠구시게(一条経嗣)는 “성운의 지극하니라”(천황・왕가의 운명은 이미 다했다)고 한탄했다.
더 나아가 11일에는 총애하던 안찰국(按察局)과 요시미쓰의 밀통을 의심하여 안찰국을 출가시킨 뒤 추방했다.
그리고 14일, 요시미쓰가 고엔유를 유배시켜 교토에서 추방한다는 소문이 고엔유의 귀에 들어오자, 센도 고쇼를 방문한 요시미쓰의 사자를 유배를 알리는 사자로 오인하고, 지불당(持仏堂)에 틀어박혀 할복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이때도 나카고의 중재로 진정되었고, 16일 밤, 나카고와 함께 고엔유는 기타야마의 우메마치덴(梅町殿)(우메마츠덴(梅松殿))으로 옮겼다.
2. 4. 붕어
1393년 6월 6일 고엔유 천황이 사망하였다. 고엔유 천황은 자신의 생전에 1371년 4월 9일부터 1382년 5월 24일까지 국화의 자리에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다른 천황들과 함께 교토 후시미구(京都伏見区)에 있는 후카쿠사 북릉(深草北陵)이라는 황릉에 합사되었다.그 후 고엔유 천황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사료가 적다는 사정도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동향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조 합일 후인 1393년 4월 26일, 선동 어소의 소하전에서 36세로 승하하였다.
3. 가계도
- 아버지: 북조 제4대 고곤 천황
- 어머니: 히로하시 나카코(広橋仲子) (히로하시 카네츠나의 딸)
- 황후: 산죠(후지와라) 이츠코(이즈코)(三条 厳子)[2] (1351-1406) - 산죠 킨타다(三条公忠)의 딸
- * 제1황자 : 모토히토 친왕(幹仁 親王)
- * 제1황녀 : 켄시 내친왕(珪子 内親王) (1381-1399)
- 궁인 : 츠요몬인(通陽門院) 산죠(후지와라) 타카코(이즈코)(三条(藤原) 嚴子) - 산죠 킨타다(三条公忠)의 딸
- 텐지 : 다이텐시노츠보네(大典侍局) 시죠(후지와라) 이마코(킨시)(四条(藤原)今子) - 시죠 타카사토(四条 隆郷)의 딸
- * 제2황자 :토쵸 법친왕(道朝 法親王) (1378-1446)
- 후궁 : 후지와라씨(藤原氏) - 오기마치산죠 사네토시(正親町三条 実音)의 딸
- 후궁 : 안사츠노츠보네(按察局) 타치바나씨(橘氏) - 타치바나 시로시게(橘 知繁)의 딸
- 생모 불명
- * 황녀 : ? (?-1391) - 출가하여 비구니가 됨
- * 황녀 : ? - 다이쇼지 몬제키
- * 황자 : 고츄쿠닌(強中□忍) - 린센지
4. 재위 중의 연호
고엔유 천황(後円融天皇)의 통치 기간은 하나 이상의 일본 연호(年號) 혹은 「네응오」로 구체적으로 구분된다.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
- 정통 조정(明治칙서에 의해 결정됨)에 따른 연호
- * 겐토쿠(建徳) (1370–1372)
- * 벤츄(文中) (1372–1375)
- * 텐쥬(天授) (1375–1381)
- * 코와 (1381–1384)
'''남북조 시대 북조(北朝)'''
5. 평가
고엔유 천황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당시부터 냉담했으며,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혹독한 평가가 존재한다.
이시하라 히이로(石原比伊呂)는 고엔유 천황이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독단하고 싶어했지만, 그 능력이 전무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쇼(笙) 연주를 권유받았을 때 얼버무린 일화를 예로 들며,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모모자키 유이치로(桃崎有一郎)는 고엔유 천황을 그의 손자인 쇼코 천황(称光天皇)과 함께 "천황답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이마야 아키라(今谷明)는 고엔유 천황의 혼란을 언급하면서, 상황 측에 동정해야 할 사정이 많고, 그의 행동이 덧없는 저항이기는 하지만 요시미쓰에게 정면으로 맞서려고 했던 인간적인 행동으로서 감동을 느끼는 부분도 있다고 평가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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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jiwara no Izuko • A History of Japan - 日本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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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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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bank
後円融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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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後円融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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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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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むきが記』人物考証 : 宰相典侍・妹の君・女院の御方・やうせいのことな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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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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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11]
웹사이트
陵墓要覧 昭和9年11月調
https://dl.ndl.go.jp[...]
宮内省諸陵寮
1934
[12]
웹사이트
陵墓要覧 昭和9年11月調
https://dl.ndl.go.jp[...]
宮内省諸陵寮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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