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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가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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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지마 가즈오는 일본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1865년 효고현 도요오카시에서 태어나 1952년 사망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잡지 '일본인'의 기자로 활동하며 청일 전쟁 종군 기자를 지냈다. 1911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입헌 국민당, 혁신 구락부, 입헌 정우회를 거치며 이누카이 쓰요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겐요샤의 토야마 미쓰루와 협력하여 쑨원을 지원했으며, 궁중 모 중대 사건에 개입하기도 했다. 1924년 체신 정무 차관을 역임했으며, 1932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전후에는 요시다 시게루의 상담역으로 활동하며 '정계의 지남번'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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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가즈오
인물 정보
이름고지마 가즈오
한자 표기古島 一雄
로마자 표기Kojima Kazuo
고지마 가즈오
고지마 가즈오
출생일1865년 9월 20일
출생지일본 다지마 국 도요오카 (현재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
사망지일본 가나가와현
소속 정당입헌국민당 →
혁신구락부 →
입헌정우회 →
무소속
배우자정보 없음
서명정보 없음
경력
직업귀족원 의원
선출 방식칙선 의원
임기 시작1932년 3월 15일
임기 종료1947년 5월 2일
사임 이유대일본제국 헌법 폐지로 귀족원이 소멸했기 때문
직업 2중의원 의원
선거구 2도쿄시 선거구
당선 횟수 26회
임기 시작 21911년 7월 7일
임기 종료 21928년 1월 21일

2. 생애

게이오 원년 8월 1일(1865년 9월 20일) 효고현 도요오카시에서 옛 도요오카 번 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지마 가문은 간조 봉행을 역임하는 가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879년에 상경하여 하마오 아라타 밑에서 교리츠 학교, 도진샤 등에서 스기우라 주고 등에게 배웠다. 1881년에 고향 도요오카로 잠시 돌아가 한학 사숙 호린 의숙에서 배웠다.

다시 상경하여 1888년 스기우라의 소개로 미야케 세쓰레이가 주재하는 잡지 "일본인"(후에 "일본 및 일본인"으로 개제)의 기자가 되어 저널리즘에 몸을 담았다. 역시 스기우라의 소개로 일본 신문 기자가 되어, 청일 전쟁에서는 동료였던 마사오카 시키와 종군하여 전황을 보도했다. 1898년 겐요샤 계열의 "규슈 닛포" (후쿠료 신보의 후신) 주필을 1년 반 맡은 후, 일본 신문에 복귀했다. 1908년에는 만초호로 옮겼다.

1911년 11월, 제1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보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2] 이후 중의원 의원 6선을 기록했다. 입헌 국민당, 혁신 구락부를 거쳐 입헌 정우회에 소속되어 이누카이 쓰요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와 협력하여 쑨원을 지원, 신해혁명을 측면 지원했다. 1921년 궁중 모 중대 사건에 개입하여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권위 실추에 기여했다. 제2차 호헌 운동에서 이누카이를 보좌하여 호헌 삼파 연합 성립에 기여했다.

1924년 이누카이 체신 대신 아래서 체신정무 차관을 역임했지만, 1928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최초의 보통 선거)에서 낙선했다. 1932년 3월 15일,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어[3] 1947년 5월 2일까지 재직했다.

시데하라 내각이 조각되었을 때 입각을 요청받았지만 사양했다. 1946년 5월에 일본 자유당 총재 하토야마 이치로가 공직 추방되자, 후임 총재 중 한 명으로 거론되어 하토야마 등 자유당 수뇌부에게 취임을 간청받았지만, 이 또한 노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시데하라 내각의 외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를 강력히 추천했다.[3] 이후, 점령기 요시다의 상담역이 되어 "정계의 지남번"으로 불렸다. 1952년 5월 26일, 86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다나카 영원에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언론 활동

게이오 원년 8월 1일(1865년 9월 20일) 효고현 도요오카시에서 옛 도요오카 번 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지마 가문은 간조 봉행을 역임하는 가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879년에 상경하여 하마오 아라타 밑에서 교리츠 학교, 도진샤 등에서 스기우라 주고 등에게 배웠다. 1881년에 고향 도요오카로 잠시 돌아가 한학 사숙 호린 의숙에서 배웠다.

그 후 다시 상경하여 1888년에 스기우라의 소개로 미야케 세쓰레이가 주재하는 잡지 "일본인"(후에 "일본 및 일본인"으로 개제)의 기자가 되어 저널리즘에 몸을 담았다. 역시 스기우라의 소개로 일본 신문의 기자가 되어, 청일 전쟁에서는 동료였던 마사오카 시키와 종군하여 전황을 보도했다. 1898년 겐요샤 계열의 "규슈 닛포" (후쿠료 신보의 후신)의 주필을 1년 반 맡은 후, 일본 신문에 복귀했다. 1908년에는 만초호로 옮겼다.

2. 2. 정치 활동

1911년 11월, 제1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보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2] 이후 중의원 의원 6선을 기록했다. 입헌 국민당, 혁신 구락부를 거쳐 입헌 정우회에 소속되어 이누카이 쓰요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겐요샤의 도야마 미쓰루와 협력하여 쑨원을 지원, 신해혁명을 측면 지원했다. 1921년 궁중 모 중대 사건에 개입하여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권위 실추에 기여했다. 제2차 호헌 운동에서 이누카이를 보좌하여 호헌 삼파 연합 성립에 기여했다. 1924년 이누카이 체신 대신 아래서 체신정무 차관을 역임했지만, 1928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최초의 보통 선거)에서 낙선했다. 1932년 3월 15일,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어[3] 1947년 5월 2일 귀족원 폐지 시까지 재직했다.

2. 3. 전후 활동과 사망

시데하라 내각이 조각되었을 때 입각을 요청받았지만 사양했다. 1946년 5월에 일본 자유당 총재 하토야마 이치로가 공직 추방되자, 후임 총재 중 한 명으로 거론되어 하토야마 등 자유당 수뇌부에게 취임을 간청받았지만, 이 또한 노령을 이유로 사양하고 시데하라 내각의 외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를 강력히 추천했다.[3] 이후, 점령기 요시다의 상담역이 되어 "정계의 지남번"으로 불렸다. 1952년 5월 26일, 86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다나카 영원에 있다.

3. 사상과 평가

겐요샤 계열의 우익 인사들과 교류하며 아시아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다. 이누카이 쓰요시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정당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쑨원의 신해혁명을 지원하는 등, 국제 정세에도 밝았으며, 특히 중국, 한국과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2] 창가학회의 전신인 창가교육학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등, 종교계와도 폭넓은 관계를 맺었다.

4. 저서 및 관련 서적


  • 一老政治家の回想일본어』 (주오코론신샤, 1969년 / 주오코론 문고, 1975년, 신판 2015년)
  • 小島一雄清談일본어』 (마이니치 신문사 편)
  • 政界五十年 小島一雄回顧録일본어』 (와시오 요시나오 편, 삼원사)
  • 子規言行録일본어』 (일본총서, 1902년)
  • 小島一雄일본어』 와시오 요시나오, 고이치넨회 편 (일본경제연구회 간행, 1949년), 비매품
  • 이토 긴지로 小島一雄 三代言論人集 第7巻일본어』 (지지통신사, 1962년)
  • 고지마 나오키 斬人斬馬剣 小島一雄の青春일본어』 (중앙공론사, 1988년 / 중공문고, 1993년), 전기 소설

5. 일화

마사오카 시키와는 평생의 맹우로, 시키 사후 『시키 언행록』(일본총서)을 출판했다. 만년에도 회상기 「시키와 후세츠」를 잡지 「신성」에 기고했다.[2]

누노비키마루 사건으로 억울한 처지에 놓인 이누카이 쓰요시를 변호하여 무죄를 이끌어냈다. 또한, 미우라 고로의 회고담 『칸주 장군 회고록』(세이쿄샤, 1925년 간행)을 교열했다.[2]

바둑 애호가로, 기타 분코 등 기사를 지원하고, 「일본 및 일본인」 지상에 이시이 센지와 타무라 야스히사의 십번기에 바둑 사상 최초의 관전기를 게재했다. 알고 지내던 창가학회의 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에게 종전 시기를 알려줬다고 한다.[2]

참조

[1] Kotobank 古島一雄 2024-12-24
[2] 간행물 官報 第8520号 1911-11-13
[3] 간행물 官報 第1561号 193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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