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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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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다치 겐조는 구마모토번 무사 집안 출신으로,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논란이 되었으며, 일본 중의원 의원을 14선 역임하고 체신대신, 내무대신을 지냈다. 만주사변 이후 국민동맹을 결성하고 대정익찬회에 참여하는 등 우익 정치 행보를 보였으며, 1942년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가졌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을미사변 가담 및 군부 독재 옹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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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겐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다치 겐조 (1929년)
인물 정보
이름아다치 겐조 (安達 謙蔵)
로마자 표기Adachi Kenzō
출생1864년 12월 20일
출생지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사망1948년 8월 2일
사망지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국적일본
직업정치인, 각료
학력사이사이코
정치 경력
소속 정당시메이카이 (紫溟会) → 구마모토 국권당
제국당
다이도구락부
주오구락부
입헌동지회
헌정회
입헌민정당
국책연구구락부
국민동맹
무소속
수상종3위
훈1등 서보장
배우자아다치 유키
총리제41대 내무대신
내각하마구치 내각
제2차 와카쓰키 내각
임기 시작1929년 7월 2일
임기 종료1931년 12월 13일
총리 2제30대 체신대신
내각 2가토 다카아키 내각
제1차 와카쓰키 내각
임기 시작 21925년 5월 30일
임기 종료 21927년 4월 20일
의원중의원 의원
선거구구마모토현 군부구
구마모토현 제4구
구마모토현 제2구
구마모토현 제1구
당선 횟수8회
임기 시작 31917년 4월 21일
임기 종료 31942년 4월 30일
의원 2중의원 의원
선거구 2구마모토현 군부구
당선 횟수 25회
임기 시작 41902년 8월 11일
임기 종료 41914년 12월 25일
직책초대 국민동맹 총재
임기 시작 51932년 12월 22일
임기 종료 51940년 7월 26일

2. 초기 내력

구마모토번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삿사 도모후사[14]구마모토현에 설립한 학교 "제제코(지금의 구마모토 현립 제제코 고등학교)"에서 교육받았다.[1]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 전쟁종군 기자조선에 건너가 ''조선지보''와 ''경성신보''를 창간했다. 미우라 고로와 함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핵심 주모자로 기소되었으나, 일본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1] 이 판결은 살인 및 살인 음모 혐의 모두 무죄를 받았고, 음모 증거가 인정되었음에도 무죄 판결이 내려져 현대 역사가들에게 비판받고 있다.[2]

2. 1. 출생과 가계

구마모토번 무사였던 안다치 니헤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6] 그의 아버지는 호소카와 씨를 섬기는 사무라이였다.[1] 이후 사사 도모후사[14]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설립한 학교인 제제코에서 공부했다.[6]

2. 2. 교육

구마모토번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삿사 도모후사[14]구마모토현에 설립한 학교 "제제코(지금의 구마모토 현립 제제코 고등학교)"에서 교육받았다.[1]

3. 조선에서의 활동

1894년 조선에 건너가 조선시보, 한성신보를 발행하고 사장 겸 기자로 활동하며 청일 전쟁에 종군 기자로 참전했다.[1] 미우라 고로와 함께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우고 1895년 실행에 옮겼다.[1]

3. 1. 조선에서의 언론 활동

1894년 사사 도모후사의 지시로 조선에 건너가 조선시보와 한성신보를 발행하였으며, 사장 겸 신문기자로 청일 전쟁에 종군하였다.[1][6]

3. 2. 을미사변 연루

미우라 고로가 주한 공사로 부임한 후, 명성황후 시해 계획에 참여하였다.[6] 1895년 낭인들을 동원해 을미사변을 실행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1] 이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1] 아다치는 구마모토 번 출신으로,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사사 도모후사의 지시로 한반도에 건너갔다.[6] 조선시보와 한성신보를 발행하며 사장 겸 기자로 활동했고, 청일 전쟁에도 종군했다.[6]

하지만 그의 무죄 판결은 현대 역사가들에게 비판받고 있는데, 살인 및 살인 음모 혐의에도 불구하고 음모 증거가 인정되었음에도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2]

3. 3. 재판과 석방

1895년 을미사변의 실행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히로시마 감옥으로 이송된 후 예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1] 이는 일본 정부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대 역사학계는 아다치 겐조가 명성황후 시해의 핵심 주모자 중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법원이 형식적인 재판 절차만을 거쳐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평가한다.[2] 법원 판결에서조차 음모의 증거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및 살인 음모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은 당시 일본 사법부의 한계를 보여준다.[2]

4. 일본 정계에서의 활동

아다치 겐조는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종군 기자한국에 건너가 조선지보와 경성신보를 창간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정계에 입문하였다.[1] 1902년 중의원 선거에서 입헌동지회 소속으로 처음 당선된 후, 1942년까지 14번이나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1]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1914년 총선거에서는 여당 입헌동지회(후의 입헌민정당)의 선거 책임자로 활약하여 대승을 이끌었고, 도쿠토미 소호로부터 "선거의 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5] 이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체신대신, 하마구치 내각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3]

1931년 만주에서의 일본 제국 육군의 공세와 와카쓰키 총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입헌민정당을 탈당하고, 나카노 세이고와 함께 국민동맹을 결성하였다.[5] 이후 대정익찬회에 참여하는 등 군부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3]

4. 1. 구마모토 국권당 결성

구마모토현으로 돌아온 아다치 겐조는 삿사 도모후사와 함께 구마모토 국권당을 결성하고 1896년(메이지 29년)에 당무 이사로 취임했다.[1] 1902년(메이지 35년) 제7회 총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어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15]

4. 2. 중의원 의원 당선

1902년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아다치 겐조는 이후 14번 연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1] 1914년 총선거에서는 여당 입헌동지회(후의 입헌민정당)의 선거 책임자로서 대승을 이끌어 도쿠토미 소호에게 "선거의 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5]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체신대신, 하마구치 내각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했다.[3] 내무대신 재직 시에는 지방 선거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하기도 했다.[4]

1931년, 만주에서의 일본 제국 육군의 공세와 와카쓰키 총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입헌민정당을 탈당했다.[5] 이후 나카노 세이고와 함께 국민동맹을 결성하고, 대정익찬회에 참여하는 등 군부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3]

4. 3.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1902년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아다치 겐조는 1914년 중의원 선거에서 여당이었던 입헌동지회의 선거 책임자를 맡아 당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도쿠토미 소호는 아다치를 "선거의 신"이라고 칭송했다.[15]

아다치는 구마모토 번의 호소카와 씨를 섬기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사사키 도키후사가 설립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종군 기자한국에 건너가 조선지보와 경성신보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핵심 주모자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으나, 일본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1]

구마모토로 돌아온 후에는 사사 도모후사와 함께 구마모토 국권당을 결성하고 1896년 당무 이사를 맡았다. 1902년 총선에서 입헌동지회 소속으로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1914년까지 4번 연속 재선되었다. 1917년 총선에서 다시 중의원에 선출되어 1942년까지 8번 연속 임기를 역임했다.

입헌동지회는 이후 헌정회를 거쳐 민정당으로 변화했는데, 아다치는 이러한 합당과 변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 1928년 총선에서는 민정당이 야당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된 전직 내무 관료들로 구성된 선거 감시대를 전국에 파견하여 정우회를 1석 차이로 따라잡는 데 기여했다.

1930년 총선에서는 하마구치 내각의 내무대신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며 민정당 후보 난립을 억제하고 득표수를 예측하여 최대 투표율을 낼 수 있도록 조정하여 273석의 압도적 다수를 획득했다.

4. 4. 가토 다카아키 내각과 하마구치 내각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체신대신을, 하마구치 내각에서는 내무대신을 역임했다.[3] 1929년 7월부터는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맡았고, 1931년 12월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도 같은 직책을 유지했다.[4]

내무대신 재직 시, 아다치는 전국 단위의 여성 참정권으로 가는 첫 단계로 지방 선거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했다.[4] 그는 강경파로서 군부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며, 정우회와의 협력 내각 성립을 꾀하기도 했다.[3]

그러나 만주에서의 일본 육군의 공세와 와카쓰키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대로 인해 1931년 민정당과 결별했다.[5] 라이벌 정우회와의 연립 제안이 거부되자, 내각 회의를 보이콧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무너뜨렸다.[5]

4. 5. 협력내각 운동

만주 사변과 10월 사건 등으로 일본 국내외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은 경제 악화와 달러 매입 문제 등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내무대신이었던 아다치 겐조는 입헌정우회와 협력하여 '협력내각' (거국일치내각)을 구성, 군부와 제휴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5]

1931년 10월 28일, 아다치는 정우회의 구하라 후사노스케와 협력하여 협력내각 운동 성명을 발표하고, 이누카이 쓰요시를 총리로 하는 연립내각 성립을 추진하였다. 고이소 구니아키 등 군부와 사이온지 긴모치에게도 협력내각 구상을 알렸다. 정우회 내에서도 마쓰오카 요스케 등이 초기에는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과 이노우에 준노스케 재무대신 등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는 입장을 바꿔 협력내각 구상을 철회하였다. 정우회 내에서도 모리 가쿠 등 시데하라 외교 비판 세력이 강해지면서, 정책적으로 민정당과 협력하기 어려워졌다.

이후에도 아다치는 협력내각 수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31년 12월 10일, 아다치의 심복인 도미타 고지로와 구하라 간 협력내각 수립 각서가 교환되어 와카쓰키에게 전달되었으나, 와카쓰키는 이를 거부하고 각의에서 아다치를 추궁하였다. 결국 아다치는 사임을 거부하고 자택에 칩거하였고, 12월 11일 와카쓰키 내각은 내각 총사퇴하였다. 사이온지 긴모치는 정우회 총재 이누카이 쓰요시를 후임 총리로 추천하였고, 민정당은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와카쓰키는 아다치 등 협력파를 제명하려 했으나, 아다치 등은 제명 처분 전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미우라 도라오, 가자미 아키라 등 아다치 파 의원들도 탈당하였다.

5. 만주사변과 국민동맹 결성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아다치 겐조는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의 경제 정책과 일본 제국 육군의 만주 군사 행동에 반대하여 입헌민정당을 탈당했다.[5] 입헌정우회와 연립 내각을 구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내각 회의를 보이콧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붕괴시켰다.[5]

1932년 나카노 세이고와 함께 국민동맹을 결성했다.[3] 국민동맹은 전략 산업과 금융 기관에 대한 정부 통제, 일본-만주국 경제 연합 창설을 통한 국가지도경제를 주장했다.[3]

5. 1. 대정익찬회 참여

아다치는 1931년 만주에서의 일본 제국 육군의 공격적인 행보와 와카쓰키 총리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입헌민정당과 결별했다. 입헌정우회와의 연립 제안이 거부된 후 내각 회의를 보이콧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무너뜨렸다.[5] 1932년 나카노 세이고와 함께 국민동맹을 결성, 전략 산업 및 금융 기관에 대한 정부 통제와 일본-만주국 경제 연합 창설을 통해 국가지도경제를 옹호했다.[3]

1940년, 국민동맹은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끄는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었다.[3] 아다치는 대정익찬회 고문이 되었으나, 1942년 익찬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 은퇴와 최후

1942년 익찬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일본의 항복 이후, GHQ에 의해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고, 불우한 가운데 1948년 8월 2일에 83세로 사망했다.[1]

7. 평가

아다치 겐조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긍정적으로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언변으로 입헌 민정당, 국민동맹 등 여러 정당에서 활동하며 일본 정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정당 간의 합병을 주도하고, 국가 지도 경제를 옹호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으며, 내무 대신으로 재직하면서는 여성 참정권 확대를 위한 법안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3][4][5]

반면, 1895년 낭인들을 동원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일으킨 주모자라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1] 그는 이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는데, 살인 및 살인 음모 혐의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 음모 증거가 인정되었음에도 두 혐의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점은 현대 역사가들에게 비판받는다.[2] 또한 1931년 일본 제국 육군만주에서의 공격적인 행보와 와카쓰키 총리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입헌 민정당과 결별했고, 이후 일본 제국의 군부 독재를 옹호하며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끄는 대정익찬회에 참여하였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5]

7. 1. 긍정적 평가

아다치 겐조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언변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입헌 민정당, 국민동맹 등 여러 정당에서 활동하며 일본 정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3] 그는 정당 간의 합병을 주도하고, 국가 지도 경제를 옹호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다.[3][5] 내무 대신으로 재직하면서는 여성 참정권 확대를 위한 법안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4]

7. 2. 부정적 평가

1895년 낭인들을 동원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일으켰다.[1] 주모자로 투옥되었으나, 아다치를 포함한 가해자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의 무죄 판결은 현대 역사가들에게 비판받았는데, 살인 및 살인 음모 혐의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 음모 증거가 인정되었음에도 두 혐의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2]

1931년 일본 제국 육군만주에서의 공격적인 행보와 와카쓰키 총리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입헌 민정당과 결별했고, 이후 일본 제국의 군부 독재를 옹호하며,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끄는 대정익찬회에 참여하였다.[5]

8.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신비고
아내유키구마모토현 사족 오오사토 하치로의 셋째 딸[1]
양자도지구마모토현 사족 하라 요시타츠의 동생[1]
양자 며느리노리코구마모토현 사족 후지이 케이신의 넷째 딸[1]
차녀아츠구마모토현 사족 후지이 케이신의 장남 토시마사에게 시집감 [1]


9. 기타

삼현당(구마모토시)

  • '''팔성전'''


호류지 유메도노를 본떠 1933년(쇼와 8년)에 요코하마시 나카구 혼모쿠에 건립된 삼층 누각 팔각형 건물이다. 그리스도,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쇼토쿠 태자, 고보 대사, 신란, 니치렌 등 팔성인을 모시는 묘로, 사람들의 정신 수양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현재는 혼모쿠 린카이 공원의 시설로, 어구 등 민속 자료를 전시하는 향토 박물관(요코하마시 팔성전 향토 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삼현당'''


아다치가 고향인 구마모토시에 건립한 원형 건축물이다. 팔성전과 마찬가지로 구마모토 시민의 정신 수양 시설로 설치되었으며, 내부에 기쿠치 다케토키, 가토 기요마사, 호소카와 시게카타 ("히고의 삼현인")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현재는 구마모토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2] 웹사이트 을미사변 (乙未事變) https://encykorea.ak[...] 2024-01-30
[3] 서적 State and Intellectual in Imperial Japan
[4] 서적 Molding Japanese Minds
[5] 서적 The Lever of Empire
[6]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7] 서적 政友会と民政党 中公新書 2012
[8] 뉴스 若槻総裁が協力派四人除名を決意 大阪毎日新聞 1931-12-12
[9] 뉴스 安達、富田、中野の三人が脱党 東京朝日新聞 1931-12-13
[10] 뉴스 安達系の七人が続いて脱党 大阪毎日新聞 1931-12-14
[11] 문서
[12] 간행물 官報 1931-12-28
[13] 간행물 官報 1938-02-11
[14] 문서
[1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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