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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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 모벌관문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관문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박천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해 축조되었으며,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 방어를 담당했다. 관문성은 산과 산을 연결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건설되었으며, 그 규모가 12km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 안에는 성문, 창고, 건물 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경주 남산성과 비교했을 때 발달된 성쌓기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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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문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관문성 |
| 영어 이름 | Gwanmunseong Fortress |
| 유형 | 사적 |
| 지정 번호 | 48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주소 |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동대산) ~ 울주군 두동면(치술령 망부석) |
| 시대 |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
| 면적 | 30필지 992,124m2 |
2. 역사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3]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3]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km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3]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
2. 1. 축조 배경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3]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3]2. 2. 명칭 변화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3]3. 구조 및 특징
관문성은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3]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3]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km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3]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
3. 1. 성내 시설
4. 역사적 의의
관문성은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3]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3]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3]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km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3]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3]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
참조
[1]
웹인용
관문성
https://www.bukgu.ul[...]
2021-05-13
[2]
웹사이트
문화재청
http://www.cha.go.kr[...]
[3]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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