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수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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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가수상부는 독일의 국가수상의 관저로 사용된 건물들을 지칭한다. 구 청사는 1869년 로코코 양식의 궁전을 매입하여 사용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모더니즘 양식으로 확장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집권 이후 내부 개조와 총통엄폐호 건설이 이루어졌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었다. 신청사는 1939년 완공된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로, 베르사유 궁전보다 넓은 공간을 자랑했으나, 전쟁 후 연합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두 건물 모두 나치 독일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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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수상부 | |
---|---|
건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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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름 | 제국수상부 |
원어이름 | Reichskanzlei (라이히스칸츨라이) |
다른 이름 | 총통관저, 수상관저 |
위치 | 베를린-미테구 빌헬름슈트라세 77번지 |
좌표 | 52°30′42″N 13°22′55″E |
완공 | 1939년 |
리모델링 | 1939년 |
파괴 | 1945년 |
건축가 | 카를 프리드리히 리히터 |
역사적 맥락 | |
용도 | 독일 총리 관저 (1878년–1945년) |
파괴 원인 |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 |
이후 | 잔해는 철거되고 부지는 분할되어 도로 및 건물로 재건축됨 |
추가 정보 | |
주소 (과거) | 빌헬름슈트라세 77번지 |
관련 장소 | 총통관저 신관, 프린츠 알브레히트 거리 (현재의 니더키르히너슈트라세) |
2. 국가수상부 구청사
1869년 프로이센 정부는 빌헬름 가 77번지에 위치한 라지비우 공작의 로코코 양식 궁전(슐렌부르크 궁)을 매입하여 1875년부터 수상부 건물로 사용하였다.[1] 1878년 베를린 회의, 1884년 콩고 회의 등 주요 국제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1938년 1월 말,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였던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빌헬름 거리의 서쪽 분기점인 Voßstraße 모퉁이에 새로운 총리 관저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히틀러는 1년 안에 건물을 완공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나치 독일의 대독일 제국 본부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옛 총리 관저는 적합하지 않다고 언급했다.[4]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사람들에게 인상을 줄" 웅장한 홀과 살롱을 만들도록 지시했다.[5]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신청사로 불러 모라비아·보헤미아 할양을 요구했다. 1942년 6월 9일, 암살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장례식이 신청사 "모자이크의 방"에서 거행되었다.[9]
1939년 신청사 완공 이후, 친위대(SS) 제1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SS 아돌프 히틀러", 총통 경호대, 육군 위병 연대 베를린(Wachregiment Berlin), 베를린 경찰, RSD(국가보안국), 돌격대 연대 "펠트헤른할레" 등이 경비를 담당했다. 빌헬름 가, 포스 가 등에 위치한 정문, 현관, 총통 집무실 등에 의장병과 경비병이 배치되었다.
신청사는 베를린 공방전으로 파괴되었고, 독일 주둔 소련 군정청의 지시로 1949년부터 1953년까지 해체 및 철거되었다.[12] 건물 잔해 중 일부 대리석은 트렙토 공원에 있는 소련 전쟁 희생자 기념비 건립에 사용되었다.[12] 철거된 부지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베를린 장벽 건설 후 동베를린 측 무인 지대의 일부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고층 주택들이 들어섰다. 2005년, 총통 관저 정원 부지 일부에 학살된 유럽 유대인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나치당 발상지인 뮌헨에도 총통 관저(:de:Führerbau)가 있었다. 쾨니히 광장에 있던 나치당 본부인 갈색 저택 옆에 있었고,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는 뮌헨 국립음악연극대학교의 교사로 사용되고 있다.
[1]
서적
"[[The Reich Chancellery and Führerbunker Complex]].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Seat of the Nazi Regime"
McFarland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모더니즘 양식으로 청사 남쪽을 확장하는 공사가 1930년에 완료되었다. 1932년-33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빌헬름 가 73번지 집무처 보수공사로 인해 국가수상부 건물에서 집무를 보았으며,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히틀러 집권 이후 구청사는 내부 장식이 히틀러 취향에 맞게 개조되었고, 마당에는 총통엄폐호가 건설되었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공습으로 파괴되었으며, 잔해는 1950년에야 치워졌다.
3. 국가수상부 신청사
슈페어에게는 백지 수표가 주어졌고, 히틀러는 프로젝트 비용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건물은 견고하게 건설되어야 했으며, 다음 해 1월 새로운 건물에서 열릴 신년 외교 리셉션에 맞춰 완공되어야 했다.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부지 정리, 설계, 건설, 가구 비치 작업을 1년도 안 되어 완료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1935년부터 초기 계획과 설계 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로운 총리 관저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Voßstraße 2-10번지 북쪽에 있는 건물들은 1937년에 철거되었다.
4,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3교대로 작업하여 24시간 내내 공사가 진행되었다.[6] 엄청난 공사는 예정보다 48시간 일찍 완료되었고, 이 프로젝트는 슈페어에게 훌륭한 조직가라는 평판을 안겨주었다. 이는 슈페어가 전쟁 후반에 강제 노동 책임자인 군수부 장관이 되는 데 기여했다. 내부 설비는 1940년대 초까지 완성되지 않았지만, 결국 9,000만 독일 제국 마르크 () 이상의 비용이 들었고, 제국의 여러 부처가 입주했다.[7]
신청사의 외부는 형무소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가까이서 보면 웅장하고 영속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보다 넓은 공간을 자랑하며, 특히 153m 길이의 대리석 복도(마블 갤러리)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모방한 것이다.
신청사 내부에는 히틀러 집무실, 마블 갤러리, 원형 홀, 모자이크 홀 등 다양한 공간이 있었다. 모자이크 홀은 붉은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고, 매우 매끄러워 고관들이 미끄러질까 조심했을 정도였다. 히틀러의 개인 집무실은 400제곱미터 크기였으며, 웅장한 대리석 상판 테이블이 있었다. 이 테이블은 1944년까지 장식용으로 남아 있었지만, 나치즘 지도자의 군사 본부의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되었다.[8]
제2차 세계 대전 중 베를린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후 연합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는 네오나치의 상징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9] 신청사 잔해는 트렙토 공원에 위치한 소련 전쟁 기념비 등 다른 건축 자재로 사용되었다.[10] 현재 신청사가 있던 자리에는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4. 나치 독일 시기의 활용
1941년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을 포함한 여러 일본인들이 방문했으며, 1942년 4월 20일에는 재독 일본인들이 총통 관저 참관에 초대되기도 했다.
5. 경비
담당 구역 담당 부대 병력 빌헬름가에 면한 신 총통 관저 정문 라이프슈탄다르테-SS 아돌프 히틀러 위병 부대 및 총통 경호대 의장병 2명 "영예의 안뜰" 중앙 현관 의장병 2명 총통 집무실 앞 의장병 2명 포스 거리에 면한 세 개의 정문 중 정문(서쪽) 의장병 2명 78번지 관저 육군 위병 연대 베를린(Wachregiment Berlin) 의장병 2명 포스 거리에 있는 대통령 관저의 정문(동쪽) 의장병 2명 포스 거리에 면한 정문(중앙) 의장병 4명 77번지 관저(총통 거주 구역) 베를린 경찰 1명 78번지 관저 2명 빌헬름가와 포스 거리 모퉁이 1명 77번지 관저(총통 거주 구역) RSD (국가보안국) 7명 계단 1명 현관 홀 1명 엘리베이터 1명 포스 거리 돌격대 연대 "[펠트헤른할레" 2명
6. 전후 처리 및 현재
7. 기타 총통 관저
또한, 히틀러의 별장 (베르크호프)이 있는 베르히테스가덴에는 총통 관저 베르히테스가덴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참조
[2]
서적
The Reich Chancellery and Führerbunker Complex.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Seat of the Nazi Regime
McFarland
[3]
서적
The Reichs Chancellery and the Berlin Bunker then and now
Seymour Press
[4]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Orion Books
1970
[5]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Orion Books
1970
[6]
서적
The Reich Chancellery and Führerbunker Complex
McFarland and Company, Inc., Publishers
2006-04-27
[7]
웹사이트
Who Was Who in Nazi Germany
http://nuremberg.law[...]
2011-08-09
[8]
서적
The Reich Chancellery and Führerbunker Complex
McFarland & Co.
2006
[9]
서적
Памятное
Политиздат
[10]
간행물
Marmor der Reichskanzlei
Harrassowitz Verlag
[11]
웹사이트
Architektur der Angst
http://einestages.sp[...]
[12]
서적
Die Schleifung. Zerstörung und Wiederaufbau historischer Bauten in Deutschland und Polen
Harraso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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