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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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트 슈페어는 1905년 독일 만하임에서 태어난 건축가이자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다. 그는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나치당의 주요 건축가로 활동하며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장, 파리 만국 박람회 독일관 등을 설계했다. 1942년 군수장관이 되어 전시 경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했으나, 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히틀러의 초토화 명령을 저지하려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와 인도에 대한 죄로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석방 후에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며 '착한 나치' 이미지를 만들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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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페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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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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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베르톨트 콘라트 헤르만 알베르트 슈페어 |
출생일 | 1905년 3월 19일 |
출생지 | 만하임, 바덴 대공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81년 9월 1일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
국적 | 독일 |
직업 | 건축가, 정부 관료, 작가 |
학력 | 베를린 공과대학교 뮌헨 공과대학교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 |
정치 경력 |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31년–1945년) |
임기 시작 | 1942년 2월 8일 |
임기 종료 | 1945년 4월 30일 |
수상 | 아돌프 히틀러 |
전임자 | 프리츠 토트 (군수 및 탄약 장관) |
후임자 | 카를 자우어 (탄약 장관) |
임기 시작 | 1945년 5월 5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23일 |
국가 원수 | 카를 되니츠 |
정부 수반 |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직책 폐지 |
임기 시작 | 1942년 2월 8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23일 |
전임자 | 프리츠 토트 |
후임자 | 직책 폐지 |
임기 시작 | 1942년 2월 8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23일 |
전임자 | 프리츠 토트 |
후임자 | 직책 폐지 |
임기 시작 | 1942년 2월 8일 |
임기 종료 | 1944년 4월 14일 |
전임자 | 프리츠 토트 |
후임자 | 프란츠 크사버 도르슈 |
임기 시작 | 1937년 1월 30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23일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직책 폐지 |
내각 | 히틀러 내각 슈베린 폰 크로지크 내각 |
당원 번호 | 474,481번 |
군사 경력 | |
소속 군사 조직 | 국가사회주의 항공군단 |
복무 기간 | 1931년 - 1945년 |
형사 유죄 판결 | |
죄목 |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형벌 | 징역 20년 |
대상 | 수백만 명의 강제 노동자; 소련군 포로 등 |
수감 장소 | 슈판다우 교도소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마르가레테 |
자녀 | 힐데 (장녀)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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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이력
알베르트 슈페어는 1905년 3월 19일 독일 만하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베르트 프리드리히 슈페어와 어머니 루이제 마틸데 빌헬미네 사이의 세 아들 중 둘째였다.[1] 슈페어의 집안은 부유한 중산층 건축가 집안이었다. 슈페어는 어린 시절 가정에 사랑이 부족했고,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슈페어는 원래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건축가가 되기로 했다. 1923년 초인플레이션으로 칼스루에 공과대학교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으나,[7] 1924년 뮌헨 공과대학교로, 1925년 베를린 공과대학교로 옮겨 하인리히 테세노 밑에서 공부하였다.[9][10] 졸업 시험 통과 후 22세의 나이로 테세노의 조수가 되었고, 강의를 대신하기도 하였다.[11]
1928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르가레테 베버와 결혼했다.[11]
2. 1. 출생과 가족
알베르트 슈페어는 1905년 3월 19일 독일 만하임의 부유한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알베르트 프리드리히 슈페어와 어머니 루이제 마틸데 빌헬미네 사이의 세 아들 중 둘째였다.[1] 어린 시절 가정에는 사랑과 따뜻함이 부족했고, 형제들은 그를 괴롭혔다고 전해진다. 그는 스키와 등산을 즐기는 등 스포츠 활동을 하였다.원래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가업인 건축가의 길을 택했다.[5][6] 1923년 독일을 덮친 초인플레이션으로 칼스루에 공과대학교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으나,[7] 1924년 위기가 완화되자 뮌헨 공과대학교로 전학했다.[8] 1925년 다시 베를린 공과대학교로 옮겨 하인리히 테세노 밑에서 공부하였다.[9][10] 졸업 시험 통과 후 22세의 나이로 테세노의 조수가 되었고,강의를 대신하기도 하였다.[11]
1928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르가레테 베버와 결혼했다.[11] 두 사람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버지와 같은 건축가가 되었고, 장녀 힐데는 녹색당의 정치인이 되었다.[95][96]
2. 2. 교육
알베르트 슈페어는 만하임의 부유한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1] 그는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두어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5] 아버지의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6]1923년 초인플레이션 위기로 인해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다.[7] 1924년 위기가 완화되자 뮌헨 공과대학교로, 1925년에는 베를린 공과대학교로 옮겨[8][9] 하인리히 테세노 밑에서 수학했다.[10] 1927년 시험을 통과한 후 22세의 나이로 테세노의 조수가 되었는데, 이는 큰 영광이었다.[11] 슈페어는 테세노프의 강의를 대신하기도 했다.
1922년 중반, 슈페어는 마가레테 베버와 교제를 시작했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8년에 결혼했다.[11]
2. 3. 결혼
1922년 중반, 알베르트 슈페어는 50명의 직원을 고용한 성공한 장인의 딸인 마르가레테 베버(1905~1987)와 교제를 시작했다. 이 관계는 베버 가족이 사회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한 계급 의식이 강한 슈페어의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28년 8월 28일 베를린에서 결혼했다.3. 나치 건축가
슈페어는 젊었을 때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1930년 12월 자신의 학생들의 부탁으로 베를린의 나치당 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히틀러의 연설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의 카리스마에 빠져들고 히틀러의 이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1년 3월 1일 나치당에 가입하였다.[17]
슈페어는 처음에 나치당 내 지역 자동차 운전자 연합의 회장으로 나치당의 당직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베를린 나치 당의 책임자인 카를 항케 (Karl Hanke)를 알게 되었고, 항케가 살고 있던 자택의 리모델링을 보수없이 해주었다. 항케는 이 일을 매우 고마워했다.
1931년 슈페어는 테세노프의 조수직을 사임하고, 아버지의 인맥을 이용하여 건축가로 취직하려고 고향인 만하임으로 갔다. 그러나 슈페어는 형의 재산관리인의 자리밖에 구할 수 없었다. 1932년 7월 슈페어는 베를린으로 가서 나치 당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에 자원봉사하였다. 이 와중에서 항케의 소개로 요제프 괴벨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괴벨스는 이 젊은 건축가에게 나치 당 베를린 당사의 리모델링을 맡겼다. 슈페어는 이를 마치고 만하임으로 돌아왔고, 나치 당은 선거에 승리하여 1933년 1월 히틀러는 수상으로 취임했다.
나치 당이 승리한 후 항케는 슈페어를 베를린으로 불렀고, 새로 선전장관에 임명된 괴벨스는 슈페어에게 국민계몽·선전부의 재단장을 맡겼다. 또한 1933년 5월 1일 노동절의 행사도 슈페어가 꾸미게 되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작업에 대해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이 작업때문에 슈페어는 히틀러와 만나게 되었다. 히틀러에게 슈페어의 첫 인상은 매우 좋았고, 당장에 "당 집회의 예술 및 기술적 공연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슈페어는 다시 수상 관저의 리모델링을 맡았으며, 히틀러는 매일 슈페어로부터 일의 진척상황을 보고받았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성실성과 재능에 감동받아 슈페어를 총애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측근인사로 두게 되었다. 어렸을때부터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히틀러는 슈페어를 불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히틀러는 항상 슈페어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정도였다.
히틀러와 나치 당은 슈페어에게 계속 정부에 관련된 건축 작업을 맡겼고, 슈페어는 이를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이와 동시에 슈페어는 빠르게 승진하여 일약 나치 당의 최고위 인사 중 한명이 되었다.
3. 1. 나치당 입당
슈페어는 젊은 시절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나, 1930년 12월 베를린에서 열린 나치 집회에서 히틀러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그의 카리스마에 빠져들었다.[13][14][15] 히틀러는 공산주의 위협과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슈페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14][15] 이후 슈페어는 요제프 괴벨스가 사회를 본 집회에 참석했으나, 괴벨스의 선동적인 방식에 불쾌감을 느꼈다.[16]1931년 3월 1일, 슈페어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하여 당원 번호 474,481번을 부여받았다.[17] 그는 나치당 내 지역 자동차 운전자 연합의 회장으로 당직을 시작했고, 카를 한케를 알게 되어 그의 자택 리모델링을 보수 없이 해주었다.[21]
1932년 7월, 슈페어는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베를린을 방문했고, 카를 한케의 소개로 요제프 괴벨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괴벨스는 슈페어에게 나치당 베를린 당사 리모델링을 맡겼다.[22][23] 슈페어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괴벨스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치당이 승리한 후, 한케는 슈페어를 베를린으로 불러 괴벨스의 국민계몽·선전부 재단장을 맡겼다. 또한 1933년 5월 1일 노동절 행사도 슈페어가 꾸미게 되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작업에 매우 만족하여 그를 "당 집회의 예술 및 기술적 공연 책임자"로 임명했다.[27]
슈페어는 총리 관저 리모델링을 맡았고, 히틀러는 매일 그의 보고를 받으며 그를 총애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슈페어를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고, 함께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28]

3. 2. 초기 활동
알베르트 슈페어는 젊은 시절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1930년 12월 베를린에서 열린 나치 집회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나치즘|나치 이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13][14][15] 1931년 3월 1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가입하여 당원 번호 474,481번을 부여받았다.[17] 그는 나치당 내 자동차 운전자 연합 회장으로 당직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카를 항케와 알게 되어 그의 자택 리모델링을 무상으로 해주었다.[21]1932년 7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나치당의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베를린으로 간 슈페어는 카를 한케의 소개로 요제프 괴벨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나치당 베를린 당사 리모델링을 맡게 되었다.[22][23] 이 일은 슈페어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괴벨스는 슈페어의 작업에 만족하여 그를 히틀러에게 소개했고,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총통 관저 개축 작업을 돕도록 지시했다.[27] 슈페어는 총통 관저에 히틀러가 대중 앞에 나타나는 발코니를 추가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28]
1933년 뉘른베르크 집회 주최측은 슈페어에게 집회 디자인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고, 이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41] 이 작업을 통해 슈페어는 나치당 "당 집회 및 시위의 예술적 및 기술적 프레젠테이션 담당관"이라는 첫 국가 직책을 얻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성실성과 재능에 감동하여 그를 총애하고 측근으로 두었으며, 건축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41]
3. 3. 히틀러와의 만남
슈페어는 1930년 12월 베를린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자신의 학생들의 권유로 참석했다가,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1931년 3월 1일 나치당에 가입했다. 초기에는 나치당 내 지역 자동차 운전자 연합의 회장을 맡았고, 카를 항케의 자택 리모델링을 무료로 해주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항케의 소개로 요제프 괴벨스와 만나 나치당 베를린 당사의 리모델링을 맡게 되었다.1933년, 히틀러는 슈페어의 작업에 감탄하여 그를 당 집회의 예술 및 기술적 공연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1933년 뉘른베르크 집회 디자인을 통해 처음으로 히틀러와 접촉하게 되었고, 루돌프 헤스를 통해 히틀러의 승인을 받았다.
슈페어는 수상 관저 리모델링을 맡으며 히틀러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의 측근 인사가 되었다. 히틀러는 매일 슈페어로부터 일의 진척 상황을 보고받았고, 그를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했다. 히틀러와 나치 당은 슈페어에게 계속 정부 관련 건축 작업을 맡겼고, 슈페어는 빠르게 승진하여 나치 당 최고위 인사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21일 파울 트로스트가 사망하자 당의 주임 건축가 지위를 이어받아,[29]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의지의 승리』의 무대가 된 뉘른베르크의 당대회장을 건설하였다.[30] 그는 페르가몬의 대제단을 참고하여 2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확장했다.[31] 1936년 당대회에서는 130기의 대공 서치라이트로 "빛의 대성당"을 연출했다.[32] 그는 독일 스타디온 (:de:Deutsches Stadion (Nürnberg))과 같은 다양한 건축을 계획했다.[33]
슈페어는 "폐허 가치의 이론(Ruinenwerttheorie)"을 창안했는데,[34] 이 이론은 건축물이 수천 년 후에도 미학적으로 뛰어난 폐허가 되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5] 1937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의 독일관을 맡아 보리스 이오판이 설계한 소련관 맞은편에 건물을 세웠고, 양측 모두 금메달을 수상했다.[39][40]
3. 4. 주요 건축 활동 (1934년-1939년)
1934년,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를 건축부 수장으로 임명했다.[29] 슈페어는 전임자 트로스트(Troost)가 사망하여 미완성으로 남겨둔 뉘른베르크의 체펠린펠트 스타디움을 완공했다.[30] 이 경기장은 나치 집회 개최를 목적으로 34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30] 슈페어는 수많은 조명을 설치하여 '빛의 대성당'이라는 조명 효과를 연출해 많은 찬사를 받았다.[32]슈페어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처럼 수천 년 후 폐허가 되더라도 미적 가치가 남는 건물을 건축하려 했고, 히틀러는 이에 동조하여 제3제국의 모든 중요한 건물을 이 개념으로 지어야 한다고 명령했다.[34][35][36][37][38] 히틀러와 슈페어는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게르만 스타디움"을 포함한 여러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를 구상했으나, 대부분 구상에 그쳤다.[33]
슈페어는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건설 중인 올림픽 경기장에 대한 베르너 마르히의 설계를 수정하여 돌 외관을 추가했다.[31] 또한 1937년 파리 국제 박람회의 독일관을 설계했는데, 소련관을 압도하는 디자인으로 독일관과 소련관 모두 금상을 수상했다.[39][40]
1937년, 히틀러는 슈페어를 '제국수도 총건축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로 개조하는 도시 계획을 맡겼다.[42] 슈페어는 1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290m 높이의 돔 구조물과 120m 높이의 개선문을 포함한 웅장한 도시 계획을 수립했으나,[43][44]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모두 중단되었다.[45]


1939년, 슈페어는 새로운 국가수상부 청사를 건립하여 9개월 만에 완공했다. 이 건물은 히틀러를 압도할 정도로 웅장했지만, 베를린 공방전에서 크게 손상되었고, 소련군이 남은 건물마저 파괴했다.[41]
슈페어는 수정의 밤과 같은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알고 있었지만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46]
3. 5. 전쟁 발발 (1939년-1942년)
슈페어는 전쟁이 발발하면 자신의 건축 프로젝트의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어 벌어진 전쟁을 지지하였다.전쟁이 발발하자 슈페어는 자신의 부서를 독일 국방군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슈페어는 파괴된 도로수선이나 폭격 후의 잔해처리를 담당하는 신속대응팀을 만들어 전쟁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도왔다.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슈페어는 계속 베를린과 뉘른베르크의 건설 프로젝트에 매달릴 수 있었다. 또한 독일 육군과 공군을 위한 건설일도 슈페어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이러한 슈페어의 명성은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져 1940년 소련의 스탈린은 슈페어를 모스크바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슈페어가 웅장하고 새로운 모스크바를 설계해 줄지도 모른다는 히틀러의 반대로 이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슈페어는 소련 정복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으나, 히틀러는 베를린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하여 슈페어를 안심시켰다.
4. 군수장관
1942년 2월 8일, 군수장관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슈페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강권으로 행정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독일 경제는 영국과 달리 아직 전시 체제로 전환되지 않아 전쟁 물자 생산이 부진했고, 일반 소비재는 전쟁 전과 다름없이 생산되고 있었다. 슈페어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슈페어는 히틀러의 권력을 바탕으로 여러 조직 개편과 행정 조치를 통해 독일의 전쟁 물자 생산력을 크게 늘렸다. 이는 독일군 최고 지도부도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1943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슈페어는 조직 능력의 천재이다"라고 기록했다. 슈페어의 능력과 업적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1943년 말부터는 슈페어를 잠재적인 히틀러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슈페어는 노동 부분 담당자로 항케를 임명하려고 했지만, 마르틴 보르만의 입김으로 프리츠 자우켈이 임명되었다. 슈페어는 여성 노동과 생산 효율을 늘리는 조치를 통해 공업생산을 증대시키려고 한 반면, 자우켈은 점령된 나라에서 인력을 끌어다가 강제노역을 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슈페어는 1943년 노예노동으로 가동되는 로켓무기 V2 제조공장을 방문하여 그 열악한 현장에 충격을 받고 개선조치를 취하도록 명령했으나, 이것은 그다지 지켜지지 않았고, 그 공장의 노동자는 반이 죽었다.
1943년까지 연합국은 제공권을 장악하여 독일의 도시와 산업시설에 전략폭격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슈페어는 탁월한 관리 수완으로 폭격으로 줄어든 손실분을 거의 보충하여 전쟁물자의 생산량은 도리어 늘어날 정도였다. 1943년에 독일의 탱크와 항공기 생산량은 전해의 두 배에 달했다. 또한 잠수함을 건조하는 기간은 1년에서 두달로 축소되었다. 독일의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44년 후반기부터였다.
1944년 1월 슈페어는 무릎 염증의 합병증때문에 직무를 떠나 와병하게 되었다. 슈페어가 없는 동안 슈페어의 잠재적 경쟁자인 괴링과 마르틴 보르만은 슈페어를 영원히 밀어내려고 했다. 반면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SS소속 의사에게 명령해 슈페어를 돌보는 척하면서 외부와 격리시켜 감시하였다. 4월에 이들은 슈페어를 건축담당에서 해임하는 데 성공했다.
슈페어는 이에 항의하여 히틀러에 나머지 자리에서도 사임을 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슈페어의 능력은 군수생산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공군 원수였던 에르하르트 밀히는 히틀러에게 사임을 말리라고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슈페어를 좋은말로 달래는 편지를 밀히를 통해 보냈고, 슈페어는 이에 감동하여 자리를 계속 맡게 되었다. 4월 23일 히틀러는 슈페어를 만나서 건축부문도 계속 슈페어가 맡을 것임을 약속했다.
4. 1. 임명
1942년 2월 8일, 군수장관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슈페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강권으로 행정직을 맡게 되었다. 히틀러는 토트의 자리에 슈페어를 임명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마틴 키친(Martin Kitchen)은 이 선택이 놀랍지 않았다고 말한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충성했고, 전쟁 포로 수용소 및 군사 시설 건설 경험이 그를 이 직책에 적합하게 만들었다. 슈페어는 라익 장관(Reich Minister)의 자리뿐만 아니라 독일 도로 감찰관(Inspector General of German Roadways), 수자원 및 에너지 감찰관(Inspector General for Water and Energy), 나치당 기술국장(Head of the Nazi Party's Office of Technology) 등 그의 모든 강력한 직책을 계승했다. 동시에 히틀러는 거대한 정부 관리 건설 회사인 토트 조직(Organisation Todt)의 수장으로 슈페어를 임명했다.당시 독일 경제는 영국과 달리 아직 전시 체제로 전환되지 않아 전쟁 물자 생산이 부진했고, 일반 소비재는 전쟁 전과 다름없이 생산되고 있었다. 슈페어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슈페어는 히틀러의 권력을 바탕으로 여러 조직 개편과 행정 조치를 통해 독일의 전쟁 물자 생산력을 크게 늘렸다. 1943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슈페어는 조직 능력의 천재이다"라고 기록했다. 슈페어의 능력과 업적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1943년 말부터는 슈페어를 잠재적인 히틀러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징적으로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는 권력과 통제를 위해 정권 내 동료들과 싸워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괴링의 4개년 계획(Four Year Plan) 하에 모든 군비 문제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고 싶어 했다. 괴링은 이를 꺼렸지만, 슈페어는 히틀러의 지지를 확보했고, 1942년 3월 1일 괴링은 슈페어를 4개년 계획의 "군비 업무 총책임자(General Plenipotentiary for Armament Tasks)"로 임명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슈페어는 야심차고, 냉혹하며, 무자비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슈페어는 군대의 군비 생산뿐 아니라 전체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 했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들은 그의 합리화 및 재편 요구가 그들을 제치고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그의 욕망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1942년 4월까지 슈페어는 괴링을 설득하여 4개년 계획 내에 3인 위원회인 중앙 계획위원회(Central Planning Board)를 설립했고, 이를 이용하여 원자재 조달 및 할당, 생산 일정에 대한 최고 권한을 얻어 독일 전시 생산을 단일 기관으로 통합했다.
4. 2. 전시 경제 체제 개편
1942년 2월 8일 군수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슈페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47] 슈페어는 히틀러의 강권으로 이 직책을 맡게 되었다.[48] 당시 독일 경제는 전시 체제로 전환되지 않아 전쟁 물자 생산이 부진했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조직 개편과 행정 조치를 통해 독일의 전쟁 물자 생산력을 크게 늘렸다.[50][51] 1943년 요제프 괴벨스는 슈페어를 "조직 능력의 천재"라고 평가했다.[41]슈페어는 여성 노동력 활용과 생산 효율 증대를 통해 공업 생산 증대를 꾀했다. 하지만 마르틴 보르만의 입김으로 프리츠 자우켈이 노동 담당자로 임명되었고, 자우켈은 점령지에서 인력을 끌어다 강제 노역을 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41]
1943년까지 연합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독일의 도시와 산업 시설에 전략 폭격을 실시했다. 슈페어는 관리 수완으로 폭격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여 전쟁 물자 생산량을 늘렸다. 1943년 독일의 탱크와 항공기 생산량은 전년의 두 배에 달했고, 잠수함 건조 기간은 1년에서 2개월로 단축되었다. 독일의 생산량 감소는 1944년 후반부터 시작되었다.[41]
1944년 1월 슈페어는 무릎 염증 합병증으로 와병하게 되었다. 헤르만 빌헬름 괴링과 마르틴 보르만은 슈페어를 밀어내려 했으나, 하인리히 힘러는 SS 소속 의사를 통해 슈페어를 감시했다. 4월에 슈페어는 건축 담당에서 해임되었으나, 히틀러에게 항의하여 사임을 번복하고 자리를 유지했다.[41]
군수장관으로 임명된 후, 슈페어는 국방군의 무기 생산만을 통제했다. 그는 독일 공군과 독일 해군의 무기 생산 통제도 원했으며, 1943년 7월까지 이를 장악했다. 1943년 8월, 그는 경제부 대부분을 장악하여 "유럽의 경제 독재자"가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1943년 9월 2일에 "군수 및 전쟁 생산 총통부 장관"으로 변경되었다.[41]
1943년 12월, 슈페어는 라플란드의 토트 조직 노동자들을 방문했다가 무릎을 다쳐 몇 달 동안 활동하지 못했다. 1944년 1월 중순, 슈페어는 폐색전증으로 심각한 병에 걸렸지만, 병상에서 군수부 업무를 계속 지휘했다.[41]
연합군의 "빅 위크"에 대응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전투기 참모부를 설립했다. 슈페어의 명령으로 1944년 3월 1일 설립된 이 태스크포스는 전투기 생산 유지와 증진을 목표로 했다. 1944년 8월 1일, 슈페어는 전투기 참모부를 군수 참모부에 통합했다.[41]
전투기 참모부는 전시 경제에서 강제 노동 착취 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SS는 여러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를 제공했고, 이들은 융커스, 메서슈미트, 헨셸, BMW 등에서 일했다. 슈페어는 노동자 처벌 시스템을 도입하여 질병 가장, 태만, 생산 방해, 탈출 시도 등을 처벌했다. 1944년에는 5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체포되었다.[41]
슈페어의 지휘 아래 가장 큰 기술적 진보는 로켓 프로그램이었다. 1942년 3월, V-2 로켓의 전신인 A4 로켓이 주문되었다. 로켓은 페네뮌데 시설에서 연구되었고, V-2의 첫 번째 표적은 1944년 9월 8일 파리였다. 이 프로그램은 발전되었지만, 대규모 자본 투자는 군사적 효과로 상쇄되지 않았다. 로켓은 미텔베르크의 지하 공장에서 건설되었고, 미텔바우-도라 강제 수용소에서 온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수감자 6만 명 중 2만 명이 끔찍한 환경으로 사망했다.[41]
1944년 4월 14일, 슈페어는 프란츠 크사버 도르슈에게 토트 조직의 통제권을 잃었다. 그는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시도에 반대했고, 음모 이후 그의 라이벌들은 그의 동맹국을 공격하여 그의 권위를 약화시켰다.[41]

슈페어는 "군수 기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이는 신화였다. 슈페어는 통계 조작을 사용했고,[41] 무기 생산 증가는 슈페어 취임 전의 재편성, 노예 노동 동원, 품질 저하 등의 원인 때문이었다. 1943년 7월까지 슈페어의 군수 선전은 무의미해졌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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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강제 노동
알베르트 슈페어는 군수장관으로 재직하며 군수 물자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강제 노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슈페어는 프리츠 자우켈을 통해 점령지에서 인력을 끌어와 강제 노역을 시키는 정책을 실시하도록 했다. 1942년 9월 9일, 슈페어는 군수 완제품 생산을 친위대에 위탁하고, 일부 공장 노동자를 강제 수용소 수감자와 유대인으로만 구성하자는 제안을 했다. 또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확장 계획을 승인하여 13만 명 이상의 수감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1943년, 슈페어는 노예 노동으로 가동되는 V-2 로켓 제조 공장을 방문했을때 그 참혹한 환경에 충격을 받고 개선 조치를 명령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그 공장의 노동자는 반이 죽었다.
슈페어가 1943년 하인리히 힘러가 포즈난에서 "유대인 절멸"에 대해 언급한 연설에 참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슈페어는 회의 시작 전에 자리를 떴다고 주장하며 증거 문서를 제시했지만, 문서에는 슈페어의 서명만 있어서, 홀로코스트 연루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93]
4. 4. 연합군의 폭격
1942년 군수장관 프리츠 토트가 사망하고, 슈페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1943년부터 연합국은 제공권을 장악하여 독일의 도시와 산업시설에 전략폭격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슈페어는 탁월한 관리 수완으로 폭격으로 줄어든 손실분을 거의 보충하여 전쟁물자의 생산량은 도리어 늘어날 정도였다. 1943년에 독일의 탱크와 항공기 생산량은 전해의 두 배에 달했고, 잠수함 건조 기간은 1년에서 두 달로 단축되었다. 독일의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44년 후반기부터였다. 1944년 5월, 슈페어는 연료 공장의 9할이 파괴된 것을 계기로, 처음으로 "미래의 파국"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히틀러를 경고했다.[61] 그러나 히틀러는 이 보고를 무시했다.[62]4. 5. 권력 투쟁
1944년 1월 슈페어는 무릎 염증의 합병증때문에 직무를 떠나 와병하게 되었다. 슈페어가 없는 동안 슈페어의 잠재적 경쟁자인 괴링과 마르틴 보르만은 슈페어를 영원히 밀어내려고 했다. 반면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SS소속 의사에게 명령해 슈페어를 돌보는 척하면서 외부와 격리시켜 감시하였다. 4월에 이들은 슈페어를 건축담당에서 해임하는 데 성공했다.슈페어는 이에 항의하여 히틀러에 나머지 자리에서도 사임을 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슈페어의 능력은 군수생산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공군 원수였던 에르하르트 밀히는 히틀러에게 사임을 말리라고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슈페어를 좋은말로 달래는 편지를 밀히를 통해 보냈고, 슈페어는 이에 감동하여 자리를 계속 맡게 되었다. 4월 23일 히틀러는 슈페어를 만나서 건축부문도 계속 슈페어가 맡을 것임을 약속했다.
5. 제3제국의 몰락
1944년 10월, 영국군과 미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독일 서부 침공이 시작되었고, 그 겨울,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이 연합군의 포화에 의해 괴멸되었다. 슈페어는 루르 지역을 시찰하여 독일에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63] 그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어떻게 생산 조달할 것인가"라는 방침에서 "어떻게 하면 패전 후 독일이 빨리 재건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방침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1945년 2월, 슈페어는 "전쟁은 패배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패전 후 사용될 식량과 물자를 모아두는 작업에 착수했다.[53][54] 3월 중순까지 슈페어는 독일 경제가 향후 8주 이내에 붕괴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는 전쟁 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령 위험 지역의 산업 시설 파괴 지시를 방해하려고 했다.[65]
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과 점령지에서의 초토화 명령(소위 "네로 명령")을 내렸다.[64] 슈페어는 히틀러의 이 명령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온갖 방법으로 히틀러에게 그 잘못을 간청했다. 한때 마음을 바꾼 히틀러였지만, 결국 초토화 작전은 실행되었고, 전후 독일 재건의 발목을 잡았다. 슈페어는 히틀러를 찾아가 전쟁은 졌다고 말했으나 히틀러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네로 명령"의 집행을 위한 배타적인 행정권을 달라고 했고,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다. 슈페어는 이 행정권으로 장군들이나 행정관리를 설득하여 전후에 필요하게 될 사회인프라와 산업기반을 네로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65]
슈페어는 함부르크의 안전지대에 있었으나, 베를린의 함락이 임박하자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퓌러엄폐호에 도착했다. 1945년 4월 22일 히틀러는 슈페어와 독대하여 오랜 시간 이야기 했고, 자살 의사를 밝혔다. 슈페어의 회상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슈페어는 자신이 "네로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은 히틀러에게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말하자, 히틀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67]
다음날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퓌러엄폐호를 떠나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히틀러는 남긴 유언장에서 슈페어를 해임할 것을 명령했다.[68]
5. 1. 전쟁 패배 인식
1944년 10월, 영국군과 미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독일 서부 침공이 시작되었고, 그 겨울,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이 연합군의 포화에 의해 괴멸되었다. 슈페어는 루르 지역을 시찰하여 독일에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63] 그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어떻게 생산 조달할 것인가"라는 방침에서 "어떻게 하면 패전 후 독일이 빨리 재건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방침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1945년 2월, 슈페어는 "전쟁은 패배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패전 후 사용될 식량과 물자를 모아두는 작업에 착수했다.[53][54] 3월 중순까지 슈페어는 독일 경제가 향후 8주 이내에 붕괴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는 전쟁 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령 위험 지역의 산업 시설 파괴 지시를 방해하려고 했다.[65]
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과 점령지에서의 초토화 명령(소위 "네로 명령")을 내렸다.[64] 슈페어는 히틀러의 이 명령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온갖 방법으로 히틀러에게 그 잘못을 간청했다. 한때 마음을 바꾼 히틀러였지만, 결국 초토화 작전은 실행되었고, 전후 독일 재건의 발목을 잡았다. 슈페어는 히틀러를 찾아가 전쟁은 졌다고 말했으나 히틀러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네로 명령"의 집행을 위한 배타적인 행정권을 달라고 했고,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다. 슈페어는 이 행정권으로 장군들이나 행정관리를 설득하여 전후에 필요하게 될 사회인프라와 산업기반을 네로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65]
슈페어는 함부르크의 안전지대에 있었으나, 베를린의 함락이 임박하자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퓌러엄폐호에 도착했다. 1945년 4월 22일 히틀러는 슈페어와 독대하여 오랜 시간 이야기 했고, 자살 의사를 밝혔다. 슈페어의 회상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슈페어는 자신이 "네로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자신은 히틀러에게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말하자, 히틀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67]
다음날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퓌러엄폐호를 떠나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히틀러는 남긴 유언장에서 슈페어를 해임할 것을 명령했다.[68]
5. 2. 네로 명령 저지
1944년 말부터 독일 경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1945년 1월, 슈페어는 괴벨스에게 군수 생산을 최소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달 말 소련군이 실레시아 산업 지역을 점령한 후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슈페어는 연합군이 주장하는 무조건 항복보다 더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3월 중순까지 슈페어는 독일 경제가 곧 붕괴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전쟁 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점령 위험 지역의 산업 시설 파괴 지시를 방해하려고 했다.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과 점령지에서의 초토화 명령(소위 "네로 명령")을 내렸다. 슈페어는 히틀러를 찾아가 전쟁은 졌다고 말했으나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네로 명령"의 집행을 위한 배타적인 행정권을 달라고 요청했고,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다. 슈페어는 이 행정권으로 장군들이나 행정관리를 설득하여 전후에 필요하게 될 사회 기반 시설과 산업 기반을 네로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히틀러는 3월 19일 군대가 후퇴함에 따라 모든 기반 시설을 파괴하라는 "네로 칙령"을 발표했고, 슈페어는 여러 주요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이를 무시하게 했다. 3월 28/29일 회의에서 히틀러는 이 칙령을 철회하고 그에게 파괴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명령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온갖 방법으로 히틀러에게 그 잘못을 간청했다. 한때 마음을 바꾼 히틀러였지만, 결국 초토화 작전은 실행되었고, 전후 독일 재건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부하는 "이렇게 격분한 슈페어를 본 적이 없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슈페어는 "3월 18일까지는 전황의 호전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독일 국민의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파괴라는 수단을 총통 스스로 사용하지 않도록"이라고 독일을 파괴하는 히틀러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초토화 작전의 어리석음을 적은 친서를 히틀러에게 건넸다. 그러나 히틀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5. 3. 히틀러와의 마지막 만남
1945년 4월 22일, 베를린 함락이 임박하자 슈페어는 퓌러엄폐호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와 독대하여 오랜 시간 이야기하며 자살 의사를 밝혔다.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네로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음을 고백했지만, 히틀러에게 끝까지 충성할 것이라고 말했고, 히틀러는 눈물을 흘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가 리처드 J. 에반스는 슈페어가 히틀러에게 자신의 정책을 어기고 있었다고 고백했다는 주장을 "순전히 허구"라고 묘사했다.다음 날,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퓌러엄폐호를 떠났다. 히틀러는 자살 직전 남긴 유언장에서 슈페어를 해임하고, 카를-오토 자우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슈페어는 히틀러가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6. 뉘른베르크 재판
히틀러 사후, 알베르트 슈페어는 카를 되니츠가 대통령이 된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23일, 연합국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체하고 각료들을 체포했다. 슈페어는 전쟁 범죄로 기소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뉘른베르크로 이송되어 구금되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4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 전쟁 음모
# 전쟁 개시
# 전쟁 범죄
# 인도에 대한 범죄
미국측 수석 검사 로버트 잭슨은 슈페어가 포로와 외국인 노동자들을 독일 전쟁 산업에 강제 동원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노동자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동안 생산량은 증가했다고 말했다. 슈페어의 변호사는 그를 정치에 휩쓸린 예술가이자 항상 비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유지해 온 인물로 묘사하며 다른 피고들과 대조시켰다.
슈페어는 주로 노예 노동과 강제 노동 사용 혐의로 전쟁 범죄와 인도에 대한 범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나치의 멸종 계획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연합군은 그가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1971년에 작성된 비밀 서신에서 거짓으로 드러났고 2007년에 공개되었다. 1946년 10월 1일,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8명의 판사 중 3명(소련 판사 2명과 미국 판사 프랜시스 비들)이 사형을 주장했지만, 다른 판사들은 그렇지 않았고, 이틀간의 논의 끝에 타협된 형량이 결정되었다. 재판부는 슈페어가 히틀러에게 전쟁 패배를 솔직하게 말하고 네로 명령 실행을 저지한 점을 고려하여 사형을 면했다고 판결문에 명시했다.
슈페어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소련을 제외한 서방 연합국의 동정을 얻어야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70][70] 이러한 태도는 검찰에 완강히 저항한 헤르만 괴링과 정반대였기 때문에 주목받는 피고가 되었다. 또한 체포된 후 미국 전략 폭격팀에 기꺼이 정보를 제공했다.[72]
1946년 6월 19일부터 변호측 신문이 시작되었고,[75] 슈페어는 자우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자우켈이 제공해 준 노동자들에 대해 항상 그에게 감사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75] 반면 자우켈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를 지배하거나 관리했던 것은 아니라고 증언했다.[76] 또한, 침략 전쟁 계획 및 준비에 관여했냐는 질문에는 1942년까지 건축가로 일했고, 자신의 활동으로 군수 공장이나 전시 경제 활동을 약화시켰을 것이라고 증언했다.[77]
6월 21일 검찰측 반대신문에서 미국 검사 잭슨은 슈페어를 옹호하는 질문을 잇달아 했다.[79][80] 잭슨은 슈페어에게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었는지,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시찰에 대해서도 전혀 질문하지 않았다.[83]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약정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었으며,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82]
한편, 소련 검사 라진스키는 슈페어를 가차 없이 공격했다.[82] 그러나 슈페어는 소련 검사에게만 답변을 거부하는 거만한 태도를 자주 취했고,[82] 영국인 재판장 서 제프리 로렌스는 여러 차례 슈페어를 편들며 라진스키의 추궁을 막았다.[82]
1946년 10월 1일 판결에서 슈페어는 "전쟁 범죄"와 "인도에 대한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침략 전쟁의 공동 모의"와 "평화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86]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88]
{{인용문3|right|
독일과 같이 진보되고 문명화된 국가에서 히틀러의 악마적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현대 기술에 있다. (중략) 기술이 발전할수록 개인의 자유가 근본이 된다. 과연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이 전쟁은 원격조정 로켓이 나오면서 끝났다. (중략) 대규모 전쟁이 인간 문화와 문명을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재판이 그런 재앙을 막아야 한다. 신이여 우리 독일과 인간 문화를 보존하소서!
|슈페어|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최후 변론}}
7. 복역
1947년 7월 18일 슈페어는 베를린의 슈판다우 감옥으로 이감되어 수감번호 5번으로 복역생활을 시작하였다. 수감 중 그의 부모는 사망했다. 그는 독서와 회고록 집필을 통해 복역 기간을 보냈고, 회고록은 네덜란드 간호원의 도움을 받아 외부로 전달되었다. 1954년에는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를 탈고했다.
슈페어는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가상으로 전 세계를 여행하며 거리를 측정하기도 했다. 또한 책을 읽고, 건축 잡지를 연구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복습했다. 감옥 안에서 약 500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모범 수감자로 여겨졌지만, 때때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간수를 욕하여 징벌을 받기도 했다.
샤를 드골, 조지 와일드먼 볼, 빌리 브란트 등 여러 인사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1966년 10월 1일, 20년 형기를 모두 마치고 석방되었다. 석방 당시 발터 쉬라흐와 악수를 나누고, 아내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
8. 석방 이후
슈페어의 석방은 전 세계 언론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자들과 사진사들은 슈페어가 하룻밤을 보낸 베를린 호텔 로비와 슈판다우 감옥 밖 거리에 가득 찼다. 1966년 11월 슈페어는 슈피겔(Der Spiegel)의 긴 인터뷰에 응했다. 여기서 그는 나치의 범죄행위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통감함을 밝혔다. 그는 말을 아꼈고, ''슈피겔(Der Spiegel)''에 실린 주요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의견을 밝혔다.
슈페어는 나치 시대를 다룬 두 권의 자서전을 출판했다. 독일어로 ''Erinnerungen''(회상) 또는 ''제3제국의 내부(Inside the Third Reich)''과 ''슈판다우: 비밀 일기(Spandau: The Secret Diaries)''이다. 그는 나중에 히믈러와 SS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는데, 영어로는 ''The Slave State: Heinrich Himmler's Masterplan for SS Supremacy'' 또는 ''Infiltration: How Heinrich Himmler Schemed to Build an SS Industrial Empire''(독일어, ''Der Sklavenstaat - Meine Auseinandersetzung mit der SS'')로 출판되었다. 1970년에는 탄생부터 뉘른베르크 재판까지의 반생을 기록한 회고록 『』(영어: Inside the Third Reich, 독일어: Erinnerungen, 또는 Reminiscences, 일본어판은 品田豊治 번역 『나치 광기의 내막―슈페어의 회상록―』〈후에 개제하여 『제3제국의 신전에서―나치 군수상의 증언―』〉)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많은 직원들이 참여하여 2년간의 편집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나치 연구가였던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도 보수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6년 후에는 『Spandau Diaries(슈판다우 일기)』를 발간했다. 이것은 역사가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슈페어는 울슈타인 출판사의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와 볼프 요브스트 지들러(Wolf Jobst Siedler)의 도움을 받아 이 작품들을 만들었다. 슈페어는 책으로 펴낸 인세의 상당액을 유대인 자선단체에 기부했는데, 혹시 거절당하거나, 또는 위선자라는 말을 들을까봐 익명으로 기부했다. 1979년에는 미술품을 익명으로 비밀리에 경매에 매각하여 거액의 현금을 손에 넣었다. 이것은 전시 중에 유대인으로부터 약탈당한 후 종전 직전에 친구에게 넘겨 숨겨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슈페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히틀러를 "범죄자"로 묘사했는데, 이런 묘사 때문에 전직 나치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건축가가 된 아들 알베르트를 포함하여 자녀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슈페어의 딸 힐데 슈람(Hilde Schramm)에 따르면, "내 자매와 형제들은 하나씩 포기했습니다. 소통이 없었습니다." 그는 전쟁 후 그의 형제 헤르만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다른 형제 에른스트는 부모의 슈페어에 대한 송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에서 사망했다.
슈페어는 역사가들과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에 자주 응했다. 1973년 10월에는 적국이었던 영국을 방문하였다. 영국정부는 처음에 그를 공항에서 억류하였으나, 후에 그에게 48시간 동안의 체제 허가를 내주었다. 슈페어는 이 짧은 체제 시간 동안 BBC와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1973년 10월, 그는 영국으로 처음 여행을 가서 런던으로 날아가 BBC의 ''미드위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세계 대전''에도 출연했다.
슈판다우에서 석방된 후 슈페어는 그의 개인 일기인 ''연대기''를 독일 연방문서보관소(German Federal Archives)에 기증했다. 그것은 볼터스에 의해 편집되었고 유대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은 속임수로 편집된 ''연대기''와 독립적인 문서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했다. 슈페어는 볼터스에게 기증에서 생략한 자료를 파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볼터스는 거부하고 원본 사본을 보관했다. 볼터스와 슈페어의 우정은 악화되었고, 슈페어가 사망하기 1년 전 볼터스는 마티아스 슈미트에게 편집되지 않은 ''연대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슈미트는 슈페어를 매우 비판적으로 다룬 첫 번째 책을 저술했다.
1981년 9월 1일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내와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런던에 살고 있는 독일 여성과 관계를 맺었고 사망 당시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의 딸인 마가렛 니센(Margret Nissen)은 2005년 회고록에서 슈페어가 슈판다우 감옥에서 석방된 후 모든 시간을 "슈페어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보냈다고 적었다. BBC 출연을 위해 영국에 건너갔을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하이델베르크의 베르크프리트호프(Bergfriedhof)에 부부가 함께 묻혀 있다.
9. 유산 및 평가
뉘른베르크 감옥 부속 심리 분석관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재판 시작 전에 피고인 전원에게 실시한 웩슬러-벨뷰 성인 지능검사에 따르면, 슈페어의 지능지수는 128이었다.[91]
그 자신이 후년에 밝힌 바에 따르면, 때때로 주인 히틀러의 악행을 엿볼 수는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수십억 마르크의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얻게 되자 열중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히틀러에게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92] 1953년에는 전후 히틀러 비판으로 전향한 이유에 대해 “베를린 개조 프로젝트는 나의 삶의 이유였다. (중략) 오늘 내가 히틀러를 거부하는 심층적인 이유를 찾아보면, 그가 드러낸 모든 잔혹성과 함께, 나의 실망도 조금 포함되어 있다. 그는 정치 권력 게임에서 전쟁으로 치달았고, 평생을 바친 나의 계획을 망쳐놓았다는 실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약간 사투리가 있었지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71]
==== '선한 나치' 이미지 ====
슈판다우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을 "착한 나치"로 묘사했다. 그는 교육받은 중산층 부르주아였기에, 대중에게 "악한 나치"의 전형으로 인식되는 이들과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있었다. 슈페어는 회고록과 인터뷰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중요한 사실을 누락하여 그의 거짓말은 "신화"가 되었다. 심지어 출생 상황까지 날조했는데, 실제로는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태어났음에도 정오에 천둥과 교회 종소리 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슈페어는 자신의 신화 만들기를 대중매체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그의 "교묘한 사과"는 전후 독일에서 자주 재생산되었다. 이자벨 트롬머는 슈페어의 전기에서 페스트와 지들러가 슈페어 회고록의 공동 저자이자 신화의 공동 창조자라고 썼다. 그들은 인세와 금전적 유인책으로 막대한 돈을 받았다. 슈페어, 지들러, 페스트는 역사적 증거가 거짓임을 보여줌에도 수십 년 동안 유지된 "착한 나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슈페어는 제3제국의 범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탈정치적 기술관료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휴 트레버-로퍼는 슈페어를 "기술관료의 철학을 키운 기술관료"라 칭하며, 건설 프로젝트나 장관직에만 관심이 있고 정치는 무관하다고 생각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트레버-로퍼는 슈페어를 "나치 독일의 진정한 범죄자"라고 비난했다.
슈페어 사후, 마티아스 슈미트는 슈페어가 유대인들을 베를린 집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을 출판했다. 1999년까지 역사가들은 슈페어가 광범위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대중의 인식은 하인리히 브렐로어가 2004년 ''슈페어 운트 에어''를 방영할 때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담 투즈는 슈페어가 자신의 지위를 얻기 위해 교활하고 무자비했으며, 그가 명령을 따르는 기술관료였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트롬머는 슈페어가 탈정치적 기술관료가 아니라 나치 정권에서 가장 강력하고 파렴치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고 말했다. 키친은 슈페어가 뉘른베르크 재판과 전후 독일을 속였다고 말했다. 브레히트켄은 슈페어의 대량학살 연루가 재판 당시 알려졌다면 사형 선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착한 나치" 이미지는 여러 신화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탈정치적 기술관료였다는 신화 외에도, 홀로코스트나 유대인 박해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신화는 군수장관 임명 후 독일 전쟁 기계를 혁신했다는 것이다. 그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대한 신화도 만들었다. 브레히트켄은 슈페어의 가장 대담한 거짓말이 1952년 프랑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들어졌다고 썼다.
슈페어는 자신을 히틀러 지도력의 반대자로 묘사하려 했다. 7월 20일 음모에 반대했음에도, 회고록에서 음모자들에게 동정적이었다고 거짓 주장했다. 또한 전쟁 초기에 패배를 알았고, 민간인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보존하려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을 연장하려 했고, 독일이 입은 피해에 기여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의 전쟁 범죄를 인정했다. 석방 후에도 독일의 범죄를 비판했지만,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주장하면서도 "알고 싶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93] 그는 자신을 “비정치적인 기술관료”라고 표현하며 “착한 나치” 이미지를 퍼뜨렸다.[93] 요아힘 페스트도 슈페어에게 영향을 받았다.[93] 이러한 “착한 나치” 이야기는 독일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94]
하지만 슈페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발언을 비교하면 명백한 차이가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확장 계획 설계에서 그의 부하가 현지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바탕으로 확장 계획서와 설계도에 그가 허가를 내렸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 시설의 목적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93]
==== 비판적 시각 ====
최근 연구에서는 슈페어가 자신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독일의 범죄를 비판하면서도,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93]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직접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93], 역사가 마틴 키친은 슈페어가 "'최종 해결 방안'에 밀접하게 관여했다"고 말한다. 슈페어는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와 구센 강제 수용소를 방문했으며,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슈페어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확장을 위한 자재 배정을 승인했다는 문서를 보도했다.
1942년 9월, 슈페어는 군수 생산을 강제 수용소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친위대에 위탁하고, 일부 공장 노동자를 강제 수용소 수감자와 유대인으로만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오스발트 폴에게 5만 명의 유대인 노동자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수감자로 확보하겠다는 말을 듣고, 13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수용소 확장 계획을 승인했다.
하인리히 히믈러가 1943년 포젠 연설에서 "유대인 절멸"을 언급했을 때 슈페어가 회의에 참석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93] 슈페어는 회의 시작 전에 자리를 떴다고 주장했지만,[93] 가디언은 1971년 슈페어의 편지를 인용하며, 슈페어가 "의심할 여지 없이—나는 1943년 10월 6일 히믈러가 모든 유대인을 죽일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슈페어는 "군수 기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이는 신화였다. 슈페어는 통계 조작을 사용했으며, 실제로는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독일 국민에게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슈페어는 자신을 “비정치적인 기술관료”라고 표현하며 “착한 나치”라는 이미지를 퍼뜨렸고,[93], 독일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94] 그러나, 슈페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전후 발언을 비교하면 명백한 차이가 있으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확장 계획 설계에서 그의 관여가 드러났다.[93] 이러한 비판은 1980년대부터 제기되었으며,[89] 2017년에는 “연방 공화국의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기획전이 Documentation Center Nazi Party Rally Grounds에서 개최되었다.[94]
==== 건축 유산 ====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건물 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나치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를린에는 지크에스자울레로 이어지는 4개의 입구 정자와 지하도, 그리고 1941년경에 건설된 슈베어벨라스퉁스크뢸퍼(Schwerbelastungskörper, 중하중 지지체)가 남아 있다. 높이 14m의 콘크리트 원통은 히틀러의 베를린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 계획의 일환으로 거대한 개선문과 다른 대규모 구조물 건설의 타당성 조사를 위해 지반 침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원통은 현재 보호되는 랜드마크이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뉘른베르크의 체펠린필트 경기장의 트리뷴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볼 수 있다.
전쟁 중 슈페어가 설계한 신 제국 수상 관저는 공습과 베를린 전투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외벽은 남아 있었지만, 결국 소련군에 의해 해체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따르면 잔해가 훔볼트 대학교, 모렌슈트라세 지하철역 및 베를린의 소련 전쟁 기념관과 같은 다른 건물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9. 1. '선한 나치' 이미지
슈판다우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을 "착한 나치"로 묘사했다. 그는 교육받은 중산층 부르주아였기에, 대중에게 "악한 나치"의 전형으로 인식되는 이들과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있었다. 슈페어는 회고록과 인터뷰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중요한 사실을 누락하여 그의 거짓말은 "신화"가 되었다. 심지어 출생 상황까지 날조했는데, 실제로는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태어났음에도 정오에 천둥과 교회 종소리 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슈페어는 자신의 신화 만들기를 대중매체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그의 "교묘한 사과"는 전후 독일에서 자주 재생산되었다. 이자벨 트롬머는 슈페어의 전기에서 페스트와 지들러가 슈페어 회고록의 공동 저자이자 신화의 공동 창조자라고 썼다. 그들은 인세와 금전적 유인책으로 막대한 돈을 받았다. 슈페어, 지들러, 페스트는 역사적 증거가 거짓임을 보여줌에도 수십 년 동안 유지된 "착한 나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슈페어는 제3제국의 범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탈정치적 기술관료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휴 트레버-로퍼는 슈페어를 "기술관료의 철학을 키운 기술관료"라 칭하며, 건설 프로젝트나 장관직에만 관심이 있고 정치는 무관하다고 생각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트레버-로퍼는 슈페어를 "나치 독일의 진정한 범죄자"라고 비난했다.
슈페어 사후, 마티아스 슈미트는 슈페어가 유대인들을 베를린 집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을 출판했다. 1999년까지 역사가들은 슈페어가 광범위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대중의 인식은 하인리히 브렐로어가 2004년 ''슈페어 운트 에어''를 방영할 때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담 투즈는 슈페어가 자신의 지위를 얻기 위해 교활하고 무자비했으며, 그가 명령을 따르는 기술관료였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트롬머는 슈페어가 탈정치적 기술관료가 아니라 나치 정권에서 가장 강력하고 파렴치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고 말했다. 키친은 슈페어가 뉘른베르크 재판과 전후 독일을 속였다고 말했다. 브레히트켄은 슈페어의 대량학살 연루가 재판 당시 알려졌다면 사형 선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착한 나치" 이미지는 여러 신화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탈정치적 기술관료였다는 신화 외에도, 홀로코스트나 유대인 박해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신화는 군수장관 임명 후 독일 전쟁 기계를 혁신했다는 것이다. 그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대한 신화도 만들었다. 브레히트켄은 슈페어의 가장 대담한 거짓말이 1952년 프랑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만들어졌다고 썼다.
슈페어는 자신을 히틀러 지도력의 반대자로 묘사하려 했다. 7월 20일 음모에 반대했음에도, 회고록에서 음모자들에게 동정적이었다고 거짓 주장했다. 또한 전쟁 초기에 패배를 알았고, 민간인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보존하려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을 연장하려 했고, 독일이 입은 피해에 기여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의 전쟁 범죄를 인정했다. 석방 후에도 독일의 범죄를 비판했지만,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주장하면서도 "알고 싶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93] 그는 자신을 “비정치적인 기술관료”라고 표현하며 “착한 나치” 이미지를 퍼뜨렸다.[93] 요아힘 페스트도 슈페어에게 영향을 받았다.[93] 이러한 “착한 나치” 이야기는 독일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94]
하지만 슈페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발언을 비교하면 명백한 차이가 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확장 계획 설계에서 그의 부하가 현지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바탕으로 확장 계획서와 설계도에 그가 허가를 내렸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 시설의 목적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93]
슈페어 발언과 연구에 대한 비판은 1980년대부터 제기되었지만,[89] 2005년 드라마 ‘Speer und Er’ 공개 후, 슈페어를 비판적으로 보는 연구도 많아졌다. 2017년에는 “연방 공화국의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기획전이 Documentation Center Nazi Party Rally Grounds에서 개최되었다.[94]
9. 2. 비판적 시각
최근 연구에서는 슈페어가 자신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독일의 범죄를 비판하면서도,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93]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직접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93], 역사가 마틴 키친은 슈페어가 "'최종 해결 방안'에 밀접하게 관여했다"고 말한다. 슈페어는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와 구센 강제 수용소를 방문했으며,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슈페어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확장을 위한 자재 배정을 승인했다는 문서를 보도했다.1942년 9월, 슈페어는 군수 생산을 강제 수용소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친위대에 위탁하고, 일부 공장 노동자를 강제 수용소 수감자와 유대인으로만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오스발트 폴에게 5만 명의 유대인 노동자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수감자로 확보하겠다는 말을 듣고, 13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수용소 확장 계획을 승인했다.
하인리히 히믈러가 1943년 포젠 연설에서 "유대인 절멸"을 언급했을 때 슈페어가 회의에 참석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93] 슈페어는 회의 시작 전에 자리를 떴다고 주장했지만,[93] 가디언은 1971년 슈페어의 편지를 인용하며, 슈페어가 "의심할 여지 없이—나는 1943년 10월 6일 히믈러가 모든 유대인을 죽일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슈페어는 "군수 기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이는 신화였다. 슈페어는 통계 조작을 사용했으며, 실제로는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을 독일 국민에게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슈페어는 자신을 “비정치적인 기술관료”라고 표현하며 “착한 나치”라는 이미지를 퍼뜨렸고,[93], 독일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94] 그러나, 슈페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전후 발언을 비교하면 명백한 차이가 있으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확장 계획 설계에서 그의 관여가 드러났다.[93] 이러한 비판은 1980년대부터 제기되었으며,[89] 2017년에는 “연방 공화국의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기획전이 개최되었다.[94]
9. 3. 건축 유산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건물 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나치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를린에는 지크에스자울레로 이어지는 4개의 입구 정자와 지하도, 그리고 1941년경에 건설된 슈베어벨라스퉁스크뢸퍼(Schwerbelastungskörper, 중하중 지지체)가 남아 있다. 높이 14m의 콘크리트 원통은 히틀러의 베를린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 계획의 일환으로 거대한 개선문과 다른 대규모 구조물 건설의 타당성 조사를 위해 지반 침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원통은 현재 보호되는 랜드마크이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뉘른베르크의 체펠린필트 경기장의 트리뷴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볼 수 있다.
전쟁 중 슈페어가 설계한 신 제국 수상 관저는 공습과 베를린 전투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외벽은 남아 있었지만, 결국 소련군에 의해 해체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따르면 잔해가 훔볼트 대학교, 모렌슈트라세 지하철역 및 베를린의 소련 전쟁 기념관과 같은 다른 건물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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ヒトラー全記録:20645日の軌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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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アルベルト・シュペーア ヒトラーと6人の側近たち
Z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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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er: Architekt des Todes
https://www.zeit.de/[...]
ZEIT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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ナチス狂気の内幕 シュペールの回想録
読売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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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ベルト 2001 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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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ベルト 2001 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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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ベルト 2001 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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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ベルト 2001 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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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ベルト 2001 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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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ルベルト 2001 下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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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ーシコ 1996 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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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ーシコ 1996 上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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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k lagerte Speers Bilder in der Ga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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ゲーリング言行録 :ナチ空軍元帥大いに語る
荒地出版社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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