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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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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은 13세기 말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영토 분쟁 결과로 건설된 건축물로, 카에르나본, 콘위, 하를레흐, 보마리스 성과 마을 성벽을 포함한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정복 후, 잉글랜드의 지배력 강화와 웨일스인 통제를 위해 이들 성곽을 건설했으며, 연심형 방어, 바비칸, 총안 등 당시 최첨단 군사 기술을 적용했다. 이들 성곽은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왕실의 궁정 건축과 상징성을 담고 있으며, 사보이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198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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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
개요
카나번 성
카나번 성
위치그위네드, 웨일스, 영국
등재 기준문화: i, iii, iv
ID374
등재 연도1986년
구성 요소

2. 역사적 배경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은 13세기 후반 웨일스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의 결과로 건설되었다. 1070년대부터 잉글랜드 왕과 웨일스 공작들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노르만과 잉글랜드 귀족과 정착민들은 수 세기에 걸쳐 천천히 그들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4] 1260년대에 웨일스 지도자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헨리 3세와 잉글랜드 반란 귀족 간의 내전을 이용하여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고, 몽고메리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았다.[5]

에드워드 1세는 1272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전쟁과 포위전에 대한 광범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그 모르트의 계획된 성벽 도시와 성 디자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럽 요새를 보았다.[7] 왕위에 오르자 에드워드는 런던 탑을 개조하고 확장했으며, 바스티드 건설을 승인하고 잉글랜드 전역에 새로운 계획 도시를 건설하도록 승인했다.[8]

에드워드와 르웰린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이는 1276년 에드워드가 북웨일스를 침공하는 결과를 낳았다.[5] 에드워드는 이 지역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주요 성을 건설했고, 1277년 애버콘위 조약으로 잉글랜드의 지배가 재확인되었다.[9] 1282년 초, 르웰린의 형제인 다피드 압 그루피드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고, 에드워드는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에 대응했다.[10] 릴리웰린은 그해 12월에 사망했고, 1283년 초 다피드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0]

2. 1. 13세기-14세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에드워드 1세의 초상화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은 13세기 후반 웨일스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의 결과로 건설되었다. 1070년대부터 잉글랜드 왕과 웨일스 공작들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노르만과 잉글랜드 귀족과 정착민들은 수 세기에 걸쳐 천천히 그들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4] 1260년대에 웨일스 지도자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헨리 3세와 잉글랜드 반란 귀족 간의 내전을 이용하여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고, 몽고메리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았다.[5]

에드워드 1세는 1272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1257년 웨일스에서 싸우고, 1266년 6개월간 케닐워스 성 포위전을 이끌었으며, 1270년 북아프리카 십자군에 참여하는 등 전쟁과 포위전에 대한 광범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6] 그는 에그 모르트의 계획된 성벽 도시와 성 디자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럽 요새를 보았다.[7] 왕위에 오르자 에드워드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런던 탑의 왕실 요새를 개조하고 확장하는 것이었다.[7] 에드워드는 또한 가스코뉴 지역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계획된, 대개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인 바스티드 일련의 건설을 승인했다.[8] 그는 잉글랜드 전역에 새로운 계획 도시를 건설하도록 승인했다.[8]

에드워드와 르웰린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이는 1276년 에드워드가 북웨일스를 침공하는 결과를 낳았다.[5] 에드워드는 이 지역 통제를 강화하고 작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여러 주요 성을 건설했다. 1277년 애버콘위 조약으로 잉글랜드의 지배가 재확인되었고 르웰린의 영토 대부분이 분할되었다.[9]

1282년 초, 르웰린의 형제인 다피드 압 그루피드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10] 에드워드는 보병 8,000명과 기병 75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에 대응, 북쪽의 러들란으로 진군했고, 남부 및 중부 웨일스에서는 마르체르 영주 군대가 카마던과 몽고메리에서 진격했다.[11] 에드워드는 앵글시 섬에 해상 침공을 감행하여 본토로 건너갈 임시 다리를 건설, 전쟁을 스노도니아의 웨일스 심장부로 가져갔다.[10] 릴리웰린은 그해 12월에 사망했고, 1283년 초 다피드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0]

2. 1. 1. 배경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은 13세기 후반 웨일스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의 결과로 건설되었다. 1070년대부터 잉글랜드 왕과 웨일스 공작들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노르만과 잉글랜드 귀족과 정착민들은 수 세기에 걸쳐 천천히 그들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4] 그러나 1260년대에 웨일스 지도자 르웰린 압 그리피드는 헨리 3세와 잉글랜드 반란 귀족 간의 내전을 이용하여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고, 몽고메리 조약에 따라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으로 인정받았다.[5]

에드워드 1세는 1272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1257년 웨일스에서 싸우고, 1266년 6개월간 케닐워스 성 포위전을 이끌었으며, 1270년 북아프리카 십자군에 참여하는 등 전쟁과 포위전에 대한 광범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6] 그는 에그 모르트의 계획된 성벽 도시와 성 디자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럽 요새를 보았다.[7] 왕위에 오르자 에드워드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런던 탑의 왕실 요새를 개조하고 확장하는 것이었다.[7] 에드워드는 또한 가스코뉴 지역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계획된, 대개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인 바스티드 일련의 건설을 승인했다.[8] 에드워드는 또한 잉글랜드 전역에 새로운 계획 도시를 건설하도록 승인했다.[8]

한편, 에드워드와 르웰린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이는 1276년 에드워드가 르웰린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북 웨일스를 침공하는 결과를 낳았다.[5] 전쟁 동안 에드워드는 이 지역을 더 잘 통제하고 작전 기지 역할을 하기 위해 몇 개의 주요 성을 건설했다.[7] 에드워드는 성공했고, 1277년의 애버콘위 조약은 잉글랜드의 지배를 재확인하며 르웰린의 땅 대부분을 그의 형제들과 에드워드에게 분할했다.[9]

2. 1. 2. 1282년-1283년 전쟁

에드워드와 웨일스 공작들 사이의 동맹은 곧 깨졌고, 1282년 초 르웰린의 형제인 다피드 압 그루피드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10] 에드워드는 보병 8,000명과 기병 75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에 대응, 북쪽의 러들란으로 진군했고, 남부 및 중부 웨일스에서는 마르체르 영주 군대가 카마던과 몽고메리에서 진격했다.[11] 에드워드는 앵글시 섬에 해상 침공을 감행하여 본토로 건너갈 임시 다리를 건설, 전쟁을 스노도니아의 웨일스 심장부로 가져갔다.[10] 릴리웰린은 그해 12월에 사망했고, 1283년 초 다피드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0]

2. 1. 3. 1294년-1295년 반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르웰린 압 그리피드의 관계 악화는 1276년 에드워드의 북웨일스 침공으로 이어졌다. 에드워드는 이 지역 통제를 강화하고 작전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여러 주요 성을 건설했다. 1277년 애버콘위 조약으로 잉글랜드의 지배가 재확인되었고 르웰린의 영토 대부분이 분할되었다.[5]

2. 2. 15세기-17세기

1400년 글린두르 봉기를 통해 웨일스와 잉글랜드 간의 갈등이 재점화되었다.[42] 봉기 초기, 하를레흐 성은 장비가 부족했고, 콘위 성은 낡은 상태였다.[43] 콘위 성은 기습 공격으로 웨일스 반군에게 함락되어, 반군이 성벽 도시를 공격하고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44] 1401년 카에르나본이 포위되었고, 같은 해 11월 튜틸 전투가 벌어졌다.[45] 1403년과 1404년, 카에르나본은 프랑스 지원을 받은 웨일스 군에 의해 재차 포위되었으나 공격을 견뎌냈다.[46] 보마리스 성은 1403년 반군에게 포위, 점령되었다가 1405년 왕실 군대에 의해 탈환되었다.[47] 하를레흐 성은 1404년 말 공격받아 점령되었고, 1408년~1409년 겨울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에 의해 탈환될 때까지 글린두르의 군사 본부 역할을 했다.[48] 1415년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으나, 역사가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대규모 성과 성벽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성공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36]

이후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간의 장미 전쟁이 발발했다. 1460년 노샘프턴 전투 이후, 하를레흐는 앙주 여왕 마가렛의 피난처가 되었고, 1461년~1468년 다피드 압 이에우안 지휘 하에 랭커스터 가 지지자들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에 맞서 점령했다.[49] 하를레흐는 자연 방어와 해상 보급로 덕분에 랭커스터 가의 마지막 주요 거점으로 남았고, 1468년 한 달간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는데, 이 사건은 ''하를레흐의 용사들'' 노래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51]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북웨일스 요새들은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에 의해 점령되어, 왕실군과 아일랜드 간 통신 경로의 일부로 중요해졌다.[57] 성과 마을 방어 시설은 수리되어 왕당파가 주둔했다.[58] 1646년 의회 군대가 북웨일스에 개입하여 카에르나본, 보마리스, 콘위를 점령했다.[59] 하를레흐는 1647년 3월 항복하며 내전의 1단계가 종식되었다.[60]

전쟁 이후 의회는 성의 훼손을 명령했다.[61] 북웨일스는 찰스 2세의 스코틀랜드 봉기 및 해상 공격 우려로 특별한 경우로 간주되었다.[61] 콘위, 카에르나본, 보마리스는 의회군이 주둔했고, 콘위는 1655년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카에르나본과 보마리스는 훼손을 면했다.[62][63] 하를레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완전히 철거되지는 않았다.[64]

1660년 찰스 2세 복위 후, 성 소유권이 변경되었다. 보마리스는 불클리 가문에 반환되어 자재를 제거했고, 콘위는 콘웨이 가문에 반환되어 폐허가 되었다.[65] 찰스 2세 정부는 카에르나본 성과 마을 벽을 안보 위험으로 간주, 파괴를 명령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66]

2. 2. 1. 글린두르 봉기(Glyndŵr Rising)와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00년 글린두르 봉기가 발발하면서 웨일스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의 긴장이 다시 나타났다.[42] 봉기 초기에 하를레흐는 장비가 부족했고, 콘위는 낡은 상태였다.[43] 콘위성은 두 명의 웨일스 형제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이들은 기습 공격으로 요새를 장악하여 웨일스 반군이 성벽 도시를 공격하고 점령할 수 있도록 했다.[44] 1401년에는 카에르나본이 포위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카에르나본 수비대와 포위군 사이에서 튜틸 전투가 벌어졌다.[45] 1403년과 1404년에는 카에르나본이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웨일스 군대에 의해 다시 포위되었지만, 공격을 견뎌냈다.[46] 보마리스는 1403년 반군에 의해 포위되어 점령되었고, 1405년에 왕실 군대에 의해 탈환되었다.[47] 하를레흐는 1404년 말에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고, 헨리 5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군대가 1408~09년 겨울에 포위 공격으로 성을 탈환할 때까지 글린두르의 군사 본부가 되었다.[48] 1415년까지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지만, 역사가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대규모 성과 성벽의 성과를 "부분적으로 성공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36]

이후,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의 경쟁 파벌 사이에서 장미 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내전이 발발했다. 1460년 노샘프턴 전투 이후, 하를레흐는 앙주 여왕 마가렛의 피난처가 되었고, 1461년에서 1468년 사이에 다피드 압 이에우안의 지휘하에 랭커스터 왕가 지지자들에 의해 에드워드 4세에 맞서 점령되었다.[49] 자연 방어와 해상 보급로 덕분에 하를레흐는 버텼고 결국 랭커스터 왕가 통제하에 있는 마지막 주요 거점이 되었다.[50] 결국 한 달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고, 이 사건이 노래 ''하를레흐의 용사들''의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51]

2. 2. 2.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과 그 이후

잉글랜드 내전 이후 의회에 의해 훼손된 하를레흐 성의 성문


잉글랜드 내전은 1642년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의회파 지지자들 사이에 발발했다. 북웨일스의 요새들은 왕을 지지하는 자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잉글랜드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왕실군과 아일랜드의 보급품 및 증원군 간의 통신 경로의 일부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해졌다.[57] 성과 마을의 방어 시설은 상당한 비용을 들여 수리되었고, 지역 왕당파가 주둔하면서 다시 사용되었다.[58] 그러나 의회가 잉글랜드에서 우위를 점했고, 1646년에는 군대가 북웨일스에 개입할 수 있었다. 카에르나본, 보마리스, 콘위가 그 해에 점령되었다.[59] 왕을 위해 마지막까지 버틴 요새인 하를레흐는 1647년 3월에 항복했고, 이는 내전의 1단계의 종식을 알렸다.[60]

전쟁 이후 의회는 전국적으로 성을 훼손하도록 명령하여, 왕당파의 봉기가 발생할 경우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조물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켰다.[61] 북웨일스는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봉기를 일으키고 이 지역에 해상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특별한 경우로 판명되었다.[61] 콘위, 카에르나본, 보마리스는 처음에는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의회군이 주둔했다.[62] 콘위는 나중에 1655년에 부분적으로 슬라이팅되었지만, 카에르나본과 보마리스는 완전히 훼손을 면했다.[63] 스코틀랜드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적었던 하를레흐는 의회에 의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완전히 철거되지는 않았다.[64]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복위했고 성의 소유권이 다시 바뀌었다. 보마리스는 전통적으로 성의 관리자였던 불클리 가문에게 반환되었고, 그들은 지붕을 포함한 남아있는 모든 자재를 즉시 제거했으며, 콘위는 콘웨이 가문에게 반환되어 성을 납과 목재를 위해 해체하여 폐허로 만들었다.[65] 찰스의 새로운 정부는 카에르나본 성과 마을 벽을 안보 위험으로 간주하고 파괴를 명령했지만, 그렇게 하는 데 드는 비용 때문에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66]

2. 3. 18세기-21세기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성곽 유적들은 미적이고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대륙 방문이 어려워진 영국 예술가들을 포함하여 많은 방문객과 예술가들을 끌어모았다.[69] 존 셀 코트만, 헨리 가스티노, 토마스 거틴, 모세스 그리피스, 줄리어스 이벳슨, 폴 샌드비, J. M. W. 터너, 존 바클리 등이 이 시기 북웨일스를 방문한 대표적인 예술가들이다.[70] 19세기에 이 지역의 교통 기반 시설이 개선되면서 1832년 빅토리아 여왕을 포함하여 방문객 수가 증가했다.[72]

19세기 중반에는 카에르나본과 콘위를 중심으로 유적지에 대한 학술 연구가 시작되었고,[73] 1984년 웨일스 정부의 역사 환경 서비스인 캐드우가 설립되어 4개 유적지의 관리를 맡아 관광 명소로 운영하면서,[83] 2007년에는 53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84]

20세기 초 영국 중앙 정부는 유적지들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보하기 시작했다. 카나번은 왕실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하를레흐는 1914년 공공사업부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뷰마리스는 1925년에, 콘위는 1953년에 공공사업부에 임대되었다.[76]

1986년, 이 유적들은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이 성과 성벽들을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유럽 군사 건축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간주했다.[1]

2. 3. 1. 낭만주의 시대와 관광 명소화

J. M. W. 터너의 미적으로 묘사된 카에르나본 성


19세기 초, 유적지들은 다양한 개인 소유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807년 토마스 벌클리 경은 왕실로부터 보마리스 성을 매입하여 자신의 지역 거주지를 둘러싼 공원에 통합시켰다.[67] 콘위 성은 콘웨이 가문의 후손들이 홀랜드 가문에 임대했다.[68]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폐허가 된 성들은 미적이고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방문객과 예술가들을 끌어모았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 예술가들이 유럽 대륙을 방문하기 어려워지면서, 많은 이들이 대신 북웨일스로 여행을 가게 되면서 이러한 유행은 더욱 커졌다.[69] 존 셀 코트만, 헨리 가스티노, 토마스 거틴, 모세스 그리피스, 줄리어스 이벳슨, 폴 샌드비, J. M. W. 터너, 존 바클리 등이 이 시기 북웨일스를 방문한 대표적인 예술가들이다.[70] 유적지들은 담쟁이덩굴과 기타 식물로 뒤덮였다. 1830년대에 카에르나본 성의 석조물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왕실은 앤서니 샐빈을 고용하여 긴급 수리를 실시했다.[71]

19세기 동안 이 지역의 교통 기반 시설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1832년에는 미래의 빅토리아 여왕을 포함하여 유적지를 찾는 방문객의 수가 증가했다.[72] 카에르나본과 콘위를 중심으로 유적지에 대한 학술 연구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73] 지방 및 중앙 정부의 관심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865년 콘위 성은 콘위 마을의 시민 지도부로 넘어가 폐허에 대한 복구 작업을 시작했으며, 여기에는 철거된 제빵소 탑의 재건도 포함되었다.[68] 1870년대부터 정부는 카에르나본 성의 수리를 지원했다. 부관인 르웰린 터너는 기존 석조물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성의 복원 및 재건을 감독했다.[74] 지역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성 북쪽의 해자는 경관을 망친다고 여겨지는 중세 이후의 건물들을 철거했다.[75]

2. 3. 2. 국가 주도의 복원 사업

20세기 초 영국 중앙 정부는 이 유적지들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보하기 시작했다. 카나번은 왕실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하를레흐는 1914년 공공사업부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뷰마리스는 1925년에, 콘위는 마침내 1953년에 공공사업부에 임대되었다.[76] 정부는 이 유적지 보존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1920년대에는 뷰마리스와 하를레흐에서 대규모 보존 사업이 진행되어, 초목을 제거하고 해자를 파내고 석조물을 보수했지만, 유적 자체는 그대로 유지하고 완전한 복원은 피했다.[77]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콘위에서 대규모 작업이 진행되어, 13세기 성벽을 침범하는 새로운 건물들을 철거했다.[78]

20세기 초에 들어 학술 연구가 증가했고, 공공사업부가 이 유적지들을 통제하면서, 이에 대한 정부의 지출도 시작되었다.[79] 시드니 토이와 찰스 피어스와 같은 역사가들이 이 유적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1935년 공공사업부 보조 검사관으로 합류한 아놀드 테일러의 지도 아래 연구가 계속되었다.[73] 1950년대에는 주요 학술 보고서가 발표되어 이 유적지의 명성을 더했다.[80] 테일러는 또한 1970년대에 콘위 유적지의 외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뻔한 도로 건설 계획에 대한 성공적인 반대 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81] 20세기 후반에는 테리 볼, 존 밴버리, 이반 래퍼를 포함한 역사 화가들이 성의 상세한 복원 그림을 그렸다.[82]

1984년에는 웨일스 정부의 역사 환경 서비스인 캐드우가 설립되어 4개 유적지의 관리를 맡아 관광 명소로 운영했다.[83] 2007년에는 53만 명 이상이 이 유적지를 방문했다.[84]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성과 마을 성벽은 웨일스 정체성에 대한 논쟁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85] 예를 들어, 1911년과 1969년 웨일스 공의 대관식에 카나번 성을 사용한 것에 대해 알룬 프레드 존스와 같은 웨일스 민족주의자들이 이의를 제기했다.[85] 캐드우는 이 유적지에서 제공하는 해석을 확장하여, 성 건설이 원주민인 웨일스인에게 미친 영향과 1282년 침략으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웨일스 공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86]

2. 3. 3. 세계유산 등재

1986년, 이 유적들은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이 성과 성벽들을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유럽 군사 건축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간주했다.[1] 유네스코는 에드워드 1세와 생 조르주와의 연관성, 규모, 진보된 군사 건축, 이례적으로 훌륭한 상태와 역사적 기록의 중요성을 언급했다.[87] 이 유적들은 지속적인 유지 관리가 필요하며, 2002~2003년 사이 유적의 역사적인 부분을 유지하는 데 239500GBP가 들었다.[88] 부적절한 개발이나 피해로부터 경관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유적 주변에 "완충 구역"이 설정되었다.[89] 이 유적들은 영국의 지정 기념물, 지정 건축물 및 보존 지구 관련 법률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90]

3. 주요 유적


  • 뷰마리스 성(Beaumaris Castle): 앵글시 섬 보마리스에 있으며, 1295년부터 건설되었지만 미완성 상태이다.
  • 카나번 성(Caernarfon Castle): 귀네드 주 카나번에 있으며, 1283년부터 건설되었다. 웨일스 공과 관련된 성이다.
  • 콘위 성(Conwy Castle): 콘위 자치구 콘위에 있으며, 1283년부터 1289년까지 건설되었다.
  • 하를레흐 성(Harlech Castle): 귀네드 주 하를레흐에 있으며, 1283년부터 1289년까지 건설되었다. 15세기에는 오와인 글린두르 군이 이곳에 웅거하여 7년 동안 잉글랜드 군에 포위되기도 했다.

3. 1. 보마리스 성 (Beaumaris Castle)

앵글시 섬 뷰마리스에 있으며, 1295년부터 건설되었지만 미완성된 채 현재에 이른다.[1] 메나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웨일스 저항 운동이 격렬했던 가스 셀린에 면하도록 설계되었다.[1]

3. 2. 카나번 성 (Caernarfon Castle)

귀네드 주카나번에 있는 성이다. 1283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영국 왕세자 칭호인 웨일스 공과 관련된 성이다.

3. 3. 콘위 성 (Conwy Castle)

콘위 자치구콘위에 있는 성으로, 1283년부터 1289년까지 건설되었다. 콘위 성에는 역사학자 제레미 애쉬비(Jeremy Ashbee)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시대의 개인 왕실 침실"로 간주하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는 여왕이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정원이 포함되어 있다.[98] 건설 당시 콘위 성은 13세기의 유행에 따라 오늘날보다 더 화려했는데, 예를 들어 벽은 석회 모르타르로 하얗게 칠해졌고, 벽의 putlog 구멍은 ''타지''라고 불리는 칠해진 방패를 벽에 전시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100]

3. 4. 하를레흐 성 (Harlech Castle)

하를레흐 성은 귀네드 주 하를레흐에 있는 성이다. 1283년부터 1289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15세기에는 웨일스 대공의 후손을 자처하는 오와인 글린두르 군이 이 성에 웅거하여 7년 동안 잉글랜드 군에 포위되었다.

4. 건축학적 특징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은 독특한 건축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군사 건축, 궁정 건축과 상징성, 그리고 사보이 가문의 영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군사 건축 측면에서 보우마리스 성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보우마리스 성은 해수면 근처에 건설되었고, 앵글시 지역의 돌로 지어졌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으며,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 출입구는 "바다 옆 문"으로, 조석 부두와 인접하여 바다를 통해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부두는 건너스 워크(Gunners Walk)와 투석기 공성 무기를 수용했을 사격 플랫폼으로 보호되었다. 외성은 12개의 탑이 있는 팔각형 성벽으로, 내성은 더 견고한 벽과 탑, 문루를 갖추고 있었다. 역사학자 아놀드 테일러는 보우마리스 성을 "가장 완벽한 대칭적 동심원 계획의 예"라고 묘사했으며, 유네스코는 이 성이 "특징적인 13세기 이중벽 구조와 중앙 계획"을 결합한 "독특한 예술적 성과"라고 평가한다.[119][120]
궁정 건축과 상징성 측면에서는 하를레흐 성이 주목할 만하다. 하를레흐 성은 리노기드 바위 능선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자로 보호되는 동심원 설계를 가지고 있다. 현지 회녹색 사암으로 지어졌으며, 주 출입구는 동쪽 해자 다리 탑 2개와 주 게이트하우스 사이의 석조 다리를 건너는 방식이었다. 게이트하우스는 여러 방으로 나뉜 두 개의 위층을 가지고 있으며, 안뜰을 내려다보는 창문과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뜰은 네 개의 원형 탑으로 보호되며, 예배당, 주방, 대강당 등 다양한 건물이 있었다.
사보이의 영향은 카나번 성과 마을 성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나번 성의 다각형 탑과 색깔 있는 돌을 사용한 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카나번 마을 성벽의 서쪽 문은 항구를 향하고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의 주요 관문에서 이름을 따와 골든 게이트라고도 불렸다.[105]

4. 1. 군사 건축



보우마리스 성은 해수면 근처에 건설되었으며, 앵글시 지역의 돌로 지어졌다.[112] 성의 설계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차례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현재는 부분적으로 매립되었다.[113] 성의 주요 입구는 "바다 옆 문"이었으며, 성의 조석 부두와 인접해 있어 바다를 통해 직접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114] 부두는 이후 건너스 워크(Gunners Walk)로 명명된 벽과 중세 시대에 투석기 공성 무기를 수용했을 수도 있는 사격 플랫폼으로 보호되었다.[115] 외성은 12개의 작은 탑이 있는 팔각형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입구는 바다 옆 문으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인 랜페스 문은 성의 북쪽으로 이어졌다.[116] 내성의 벽은 외성의 벽보다 더 견고했으며, 거대한 탑과 두 개의 큰 문루가 있었다.[117] 내성은 성의 숙소와 기타 부속 건물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건물의 범위가 성의 서쪽과 동쪽을 따라 뻗어 있었다. 이 건물들의 벽난로 잔해 일부는 석조 건축물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118]

역사가 아놀드 테일러(Arnold Taylor)는 보우마리스 성을 영국의 "가장 완벽한 대칭적 동심원 계획의 예"라고 묘사했으며, 오랫동안 이 성은 에드워드 1세 통치 기간의 군사 공학의 정점으로 여겨졌다.[119] 유네스코는 이 성이 "특징적인 13세기 이중벽 구조와 중앙 계획"을 결합하고 "비율과 석조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지닌 "독특한 예술적 성과"라고 평가한다.[120]

4. 2. 궁정 건축과 상징성

하를레흐 성은 리노기드라고 불리는 바위 능선인 하를레흐 돔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으로 땅이 급격하게 떨어져 나간다. 바위에 파인 해자는 성으로 접근하는 다른 길을 보호한다.[121] 이 성은 동심원 설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방어선이 다른 방어선으로 둘러싸여 안뜰과 바깥뜰을 형성한다. 바깥 벽은 원래 오늘날보다 약간 더 높았다.[122] 하를레흐 성은 현지 회녹색 사암으로 지어졌으며, 탑에는 크고 규칙적인 블록이 사용되었고, 해자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불규칙한 재료가 벽에 사용되었다.[123]

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입구는 동쪽 해자 다리 탑 2개와 주 게이트하우스 사이의 석조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오늘날 다리 탑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게이트하우스로 들어가는 나무 입구가 다리를 대신한다.[124] 물문은 절벽 기슭까지 이어지는 127개의 계단으로 보호되는 계단을 내려다본다.[125]

게이트하우스는 입구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거대한 "D자형" 방어탑을 가지고 있다.[126] 성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세 개의 철문과 최소 두 개의 무거운 문으로 보호되었다.[127] 게이트하우스에는 여러 방으로 나뉜 두 개의 위층이 있다.[128] 각 층에는 안뜰을 내려다보는 세 개의 큰 창문이 있으며, 2층에는 게이트하우스 측면에 두 개의 추가 대형 창문이 있다. 게이트하우스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원래는 눈에 띄는 굴뚝이 있었을 것이다.[129]

안뜰은 한때 지하 감옥과 포병 작업장이 있던 네 개의 큰 원형 탑으로 보호된다.[130] 예배당, 주방, 서비스 건물, 곡물 창고 및 대강당을 포함한 여러 채의 건물이 안뜰 주변에 지어졌다.[131] 성벽은 원래 콘위 성과 유사하게 세 개의 첨탑으로 지어졌을 수 있지만, 현대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132]

4. 3. 사보이의 영향

카나번 성과 마을 성벽은 사보이 가문의 영향을 받아 지어졌다. 특히 카나번 성의 다각형 탑과 색깔 있는 돌을 사용한 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카나번 마을 성벽의 서쪽 문은 항구를 향하고 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의 주요 관문에서 이름을 따와 골든 게이트라고도 불렸다.[105]

참조

[1] 웹사이트 Castles and Town Walls of King Edward in Gwynedd https://whc.unesco.o[...] UNESCO 2012-11-15
[2] 서적
[3] 간행물 TNA 372/131/26
[4] 서적
[5] 서적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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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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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웹사이트 World Heritage Site Management Plan: Part 1 http://cadw.wales.go[...] Cadw 201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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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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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Harv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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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웹인용 귀네드의 에드워드 1세 시대 성곽군 [Castles and Town Walls of King Edward in Gwynedd] https://web.archive.[...] 유네스코한국위원회 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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