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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리트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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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귄터 리트핀은 1937년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베를린 장벽 건설 직전 서베를린으로 이주하려다 1961년 8월 24일 탈출을 시도하다가 동독 국경 경비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는 동독의 중도우파 정당 지부 회원이었으며, 베를린 장벽 건설 전 서베를린에서 일하는 국경 통행자였다. 리트핀은 베를린 장벽 탈출 시도 중 사망한 최초의 인물로, 그의 죽음은 동서독 양측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관과 거리 이름이 지어졌으며, 사살한 국경 수비대는 독일 재통일 후 과실치사죄로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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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리트핀
기본 정보
귄터 리트핀
귄터 리트핀
이름귄터 리트핀
로마자 표기Günter Litfin
출생일1937년 1월 19일
출생지베를린, 독일
사망일1961년 8월 24일
사망지베를린-슈판다우 운하, 서베를린, 서독
사망 원인경비병에게 총격당함 동베를린 탈출 시도 중
시신 발견 장소슈판다우어 시프파르츠카날
묘지성 헤드비히 묘지
묘지 좌표52.54619
기념물잔드크루크 다리
인발리덴 거리, 베를린
직업재단사
정당기독교민주연합
알려진 이유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첫 번째 사람
추가 정보
관련 인물Ida Siekmann
기념관 링크기념관 링크

2. 생애

귄터 리트핀은 1937년 1월 19일 베를린에서 쌍둥이 형제 알로이스와 함께 태어났다. 리트핀은 동독 동베를린의 바이센제 지역에서 살았고, 아버지 알베르트처럼 서독의 중도우파 정당인 기민련의 불법 지방지부 회원이었다. 재봉사였던 리트핀은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 근처에서 일하는 국경 통행자였다.[17]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국경을 갑자기 폐쇄하여 그를 동베를린에 갇히게 만들었다.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 리트핀은 직장 가까운 서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에 아파트를 구했고, 8월 12일에는 형제인 위르겐과 함께 새 아파트에 가구를 들여놓기 위해 샤를로텐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검문소가 설치되고 베를린 장벽의 첫 번째 철조망이 설치되면서 리트핀의 동독 탈출 계획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귄터 리트핀은 1937년 1월 19일 나치 독일 베를린에서 쌍둥이 형제 알로이스와 함께 태어났다. 알로이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의사에 의해 살해당했다.[1] 리트핀은 동독 동베를린의 바이센제 자치구에서 살았고, 아버지 알베르트(정육업)와 마찬가지로 서독의 중도우파 정당인 기민련의 불법 지방지부 회원이었다.[17] 재봉사였던 리트핀은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 근처에서 일하는 국경 통행자였다.[17]

1961년 8월 13일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국경이 동독에 의해 갑자기 폐쇄되었고, 사실상 동베를린에 갇혔다.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 리트핀은 자신의 직장과 더 가까운 서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에 아파트를 발견했고, 하루 전날인 8월 12일 동생 위르겐과 함께 새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샬로텐부르크로 차를 몰고 갔다. 동독을 탈출하려는 리트핀의 의도는 다음 날 아침 이미 도로 블록이 설치되고 베를린 장벽의 첫 번째 철조망이 세워졌기 때문에 갑자기 중단되었다.[17]

1948년 CDU는 독자성을 상실하고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위성 정당이 되면서 야코프 카이저 등 당 간부들이 서쪽으로 망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6] 리트핀의 아버지는 CDU 지지를 거부했다.[6] 리트핀과 그의 남동생 유르겐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1957년 동베를린에서 불법 정당으로 활동하던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에 입당했다고 한다.[6]

베를린 장벽 건설 직전에는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약 5만 3천 명 또는 약 9만 명으로 추정된다.[6][11] 그들은 매일 국경을 넘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오갔다.[6][11] 리트핀도 그중 한 명으로, 재봉사 직업 훈련을 마치고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역 근처의 유행 의류 전문점에서 일했다.[6] 리트핀의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동베를린에 속한 바이센제에서 함께 살았다.[6]

1961년 여름, 리트핀은 서베를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직장 근처 수아레스 거리에 새 집을 마련했다.[6] 리트핀과 그의 남동생 유르겐은 8월 12일 자정까지 새 집 정리를 마치고 심야 S반(S-Bahn)을 타고 동베를린으로 돌아왔다.[6] 8월 12일 심야에 운행된 S반은 결국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마지막 기차였다.[6]

8월 13일 새벽, 에리히 호네커(후에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을 역임)의 지휘 아래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6] 장벽 건설로 동서 베를린 왕래가 전면 금지되면서 서베를린에서 일하던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실업을 당했다.[6][7][11] 리트핀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는 직장과 새 집을 모두 잃게 되었다.[6][7]

2. 2. 베를린 장벽 건설 이전

귄터 리트핀은 1937년 1월 19일 나치 독일 베를린에서 쌍둥이 형제 알로이스와 함께 태어났다. 알로이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의사에 의해 살해되었다.[1] 리트핀은 동독 동베를린의 바이센시 자치구에서 살았고, 아버지 알베르트(육사)와 마찬가지로 서독의 중도우파 정당인 기민련의 불법 지방지부의 일원이었다. 국경 통행자(Grenzgänger)였던[17] 리트핀은 재봉사로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 근처에서 일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에 의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국경이 갑자기 폐쇄되었고, 리트핀은 사실상 동베를린에 갇혔다.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 리트핀은 자신의 직장과 더 가까운 서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에 아파트를 발견했고, 하루 전날인 8월 12일 동생 위르겐과 함께 새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샬로텐부르크로 차를 몰고 갔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검문소가 설치되고 베를린 장벽의 첫 번째 철조망이 세워지면서 동독을 탈출하려는 리트핀의 의도는 갑자기 중단되었다.[1]

리트핀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당원이었다.[6] 1948년 CDU는 독자성을 상실하고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위성 정당이 되면서 야코프 카이저 등 당 간부들이 서쪽으로 망명하였다.[6] 리트핀의 아버지는 CDU 지지를 거부했다.[6] 리트핀과 그의 남동생 유르겐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1957년 동베를린에서 불법 정당으로 활동하던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에 입당했다고 한다.[6]

베를린 장벽 건설 직전에는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약 5만 3천 명 또는 약 9만 명으로 추정된다.[6][11] 그들은 매일 국경을 넘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오갔다.[6][11] 리트핀도 그중 한 명으로, 재봉사 직업 훈련을 마치고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역 근처의 유행 의류 전문점에서 일했다.[6] 리트핀의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 동베를린에 속한 바이센제에서 함께 살았다.[6]

1961년 여름, 리트핀은 서베를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직장 근처 수아레스 거리에 새 집을 마련했다.[6] 리트핀과 그의 남동생 유르겐은 8월 12일 자정까지 새 집 정리를 마치고 심야 S반(S-Bahn)을 타고 동베를린으로 돌아왔다.[6] 8월 12일 심야에 운행된 S반은 결국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마지막 기차였다.[6]

8월 13일 새벽, 에리히 호네커의 지휘 아래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6] 장벽 건설로 동서 베를린 왕래가 전면 금지되면서 서베를린에서 일하던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실업을 당했다.[6][7][11] 리트핀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는 직장과 새 집을 모두 잃게 되었다.[6][7]

2. 3. 베를린 장벽 건설과 탈출 시도

귄터 리트핀은 1937년 1월 19일 베를린에서 쌍둥이 형제와 함께 태어났다. 동베를린의 바이센제에서 살았고, 아버지처럼 서독의 기민련 불법 지방지부 회원이었다. 재단사였던 리트핀은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 근처에서 일하는 국경 통행자였다.[17] 1961년 8월 13일, 동독에 의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국경이 갑자기 폐쇄되면서 사실상 동베를린에 갇히게 되었다.

국경 폐쇄 직전, 리트핀은 직장과 더 가까운 서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에 아파트를 구했고, 8월 12일 동생 위르겐과 함께 새 아파트를 준비하기 위해 샤를로텐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검문소가 설치되고 베를린 장벽의 첫 번째 철조망이 세워지면서 리트핀의 동독 탈출 계획은 갑자기 중단되었다.[1]

베를린 장벽 건설 직전에는 약 5만 3천 명에서 9만 명으로 추정되는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에서 일하고 있었다.[6][11] 리트핀도 그중 한 명으로, 재봉사 직업 훈련을 마치고 서베를린 베를린 동물원역 근처의 유행 의류 전문점에서 일했다.[6] 1961년 여름, 리트핀은 서베를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직장 근처 수아레스 거리에 새 집을 마련했다.[6] 8월 12일 자정에 새 집 정리를 마치고 심야 S반(S-Bahn)을 타고 동베를린으로 돌아왔는데, 이 S반은 결국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마지막 기차였다.[6]

8월 13일 새벽, 에리히 호네커의 지휘 아래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6] 장벽 건설로 동서 베를린 왕래가 전면 금지되면서 서베를린에서 일하던 많은 동베를린 시민들이 실업을 당했고,[6][7][11] 리트핀도 직장과 새 집을 모두 잃게 되었다.[6][7]

리트핀은 서베를린으로의 이주를 포기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베를린 장벽 건설 현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6] 1961년 8월 24일 오후 4시 무렵, 리트핀은 베를린 슈판다우 운하가에 서 있었다.[6] S반 다리 부근까지 걸어갔을 때, 다리 위에서 경비하고 있던 교통경찰에게 발견되어 제지당했다.[6][8] 리트핀은 명령에 따르지 않고 운하에 뛰어들었다.[6] 20미터 정도 헤엄쳤을 때 경찰은 위협 사격으로 경고를 몇 차례 했지만, 다른 경찰의 자동소총 사격이 리트핀에게 치명상을 입혔다.[6][7][8] 총알은 목에서 턱을 관통했고, 리트핀의 시신은 수중으로 가라앉았다.[6]

총성은 서베를린 쪽에도 들렸고, 300명 이상의 시민들이 강 건너편에 모였다.[6] 리트핀의 시신은 오후 7시 10분경 제복 경찰 5명에 의해 운하에서 인양되어 선착장에 안치되었다.[6][8]

리트핀을 사살한 경찰 2명은 탈출을 막은 공로로 동독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7] 그들은 기념품으로 시계를 받고, 200마르크의 상여금도 받았다.[7] 이 두 명은 독일 재통일 후 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집행유예 판결이었기 때문에 수감되지는 않았다.[7]

3. 사망

1961년 8월 31일, 귄터 리트핀은 바이센시에 있는 성 헤트비히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슈타지 요원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18][19] 그의 죽음은 동서 양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방 국가들은 리트핀을 공산주의의 희생자로 여기며 그 잔혹성을 비난했다.[6] 동독은 처음에는 침묵했지만, 노이어스 도이칠란트는 약 일주일 후 사건에 대해 보도하며 리트핀을 비난하고 사살을 정당화했다.[6]

독일 재통일 후인 2000년, 구 동베를린의 슈타트바르트 바이센제에 있는 거리가 "리트핀 거리"로 개칭되었다.[6] 2003년 8월 24일에는 동생 유르겐에 의해 현장 근처에 사건을 알리는 자료관이 개관되었다.[6][7][10] 리트핀은 베를린 장벽 탈출 실패로 인한 최초의 사망자였다.[15][16]

3. 1. 탈출 시도와 피격

8월 24일 오후 4시경, 귄터 리트핀은 슈프레 강의 작은 항구인 훔볼트타펜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작은 운하를 통해 수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국경을 구성하는 철도 다리를 건너자마자 동독 교통경찰에 의해 발견되었고 즉시 수영하여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18][19] 리트핀은 서베를린 쪽 강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물에서 손을 들어 올린 후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2][3]

동생 유르겐은 리트핀이 사살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7]

> "형은 발견되었을 때 수중에서 손을 들고 항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그를 쏴 죽였습니다."

리트핀을 사살한 경찰 2명은 탈출을 막은 공로로 동독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7] 그들은 기념품으로 시계를 받고, 200DDRM의 상여금도 받았다.[7] 이 두 명은 독일 재통일 후 살인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집행유예 판결이었기 때문에 수감되지는 않았다.[7]

3. 2. 동생의 증언

귄터 리트핀의 동생 위르겐은 리트핀이 살해될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7]

위르겐에 따르면 장례식은 "희극"이었는데, 대부분의 애도자들은 그의 형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며 그가 동독을 떠나려다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18][19]

4. 여파

귄터 리트핀은 베를린 장벽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희생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었으며, 1989년 2월 5일 크리스 규프로이가 마지막으로 희생되었다.[15][16] 베를린 장벽 희생자는 조사 기관에 따라 125명에서 136명으로 추산되는데,[12][13][14] 여기에는 사고사나 탈출 의도 없이 희생된 30명, 탈출자나 탈출 방조자의 반격으로 사망한 국경 경비대원 8명도 포함된다.[13]

4. 1. 동서독의 반응

귄터 리트핀의 죽음은 동서 양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방 국가들은 리트핀을 공산주의의 희생자로 여기며 그 잔혹성을 비난했다.[6] 동독은 처음에는 침묵했지만, 노이어스 도이칠란트(SED 기관지)는 약 일주일 후에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리트핀에 대한 부당한 비난과 사살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6]

노이어스 도이칠란트의 보도에서는 리트핀이 서베를린의 유행 의류 전문점에서 일했던 것을 언급하며, 그가 서방의 악영향을 받아 타락한 "동성애자"였다고 단정 지었다.[6] 또한 리트핀이 출국 비자를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출국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6]

4. 2. 사후 처리

1992년 귄터 리트핀의 동생 위르겐 리트핀의 주도로 귄터 리트핀과 베를린 장벽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20] 이 기념관은 베를린-슈판다우어 쉬파흐르츠카날에 위치한 옛 키엘러 에크(Kieler Eck)의 망루에 있다.[20] 2000년 8월 24일에는 스트라세 209(Stra Nichee 209) 거리가 귄터-리트핀-슈트라세 (Gunter-Litfin-Stra Niche)로 개칭되었다.[21] 그의 고향인 바이센시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21] 라이히스타그 건물 옆 흰 십자가 기념 장소에 있는 십자가 중 하나가 그에게 바쳐졌다.[18][19]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서독 통일 이후, 베를린 지방법원은 리트핀을 총살한 국경수비대에 대해 과실치사죄를 인정하여 징역 18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18]

리트핀의 죽음은 동서 양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방 국가들은 리트핀을 공산주의의 희생자로 여기며 그 잔혹성을 비난했다.[6] 동독은 처음에는 침묵했지만, 노이어스 도이칠란트는 약 일주일 후 사건에 대해 보도하면서 리트핀을 "동성애자"로 매도하고 사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6]

독일 재통일 후인 2000년, 구 동베를린의 슈타트바르트 바이센제에 있는 거리가 "리트핀 거리"로 개칭되었으나, 주민과 구 동독의 독재 정당 사민당(PDS)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6] 2003년 8월 24일, 동생 유르겐은 현장 근처에 사건을 알리는 자료관을 개관하고,[6][7][10] 키엘러 거리에 있는 구 국경 경비대 감시탑을 베를린 시로부터 빌려서 개설하였다.[6][7] 연금 생활자가 된 유르겐은 자료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매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6][7][10]

베를린 장벽에서의 사망자는 조사에 따라 125명 또는 136명으로 알려져 있다.[12][13][14] 리트핀은 베를린 장벽 탈출 실패로 인한 최초의 살인 피해자였으며, 마지막 살인 피해자는 1989년 2월 5일 크리스 규프로이(당시 20세)였다.[15][16]

4. 3. 기념 사업

1992년 귄터 리트핀의 동생 위르겐 리트핀의 주도로 베를린-슈판다우어 쉬파흐르츠카날에 위치한 옛 키엘러 에크(Kieler Eck) 망루에 기념관이 세워졌다.[20] 2000년 8월 24일에는 이전 이름이었던 스트라세 209(Stra Nichee 209) 거리가 귄터-리트핀-스트라세 (Gunter-Litfin-Stra Niche)로 개칭되었다. 바이센시에 있는 그의 고향 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21] 독일 의회 의사당 옆에 있는 흰 십자가 기념 장소에 있는 십자가 중 하나가 그에게 바쳐졌다.[18][19]

동·서독의 재통일 이후, 베를린 지방 법원은 리트핀을 사살한 국경 경비대원을 과실치사로 유죄 판결하고 18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2]

2003년 8월 24일, 동생 유르겐은 현장 근처에 사건을 알리는 자료관을 개관했다.[6][7][10] 이 자료관은 키엘러 거리에 있는 구 국경 경비대 감시탑을 베를린 시로부터 빌려서 개설한 것이다.[6][7] 연금 생활자가 된 유르겐은 자료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매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6][7][10]

5. 갤러리

동독 국경수비대가 슈프레 강에서 귄터 리트핀의 시신을 인양하는 모습


1961년 귄터 리트핀이 매장된 곳인 스메타나슈트라세 36-54, 바이스제에 있는 성 헤드비히 묘지 정문


1943년 베를린 주소록 표지. 귄터 리트핀과 다른 베를린 장벽 희생자들에 대한 논의에 사용된 내부 페이지


귄터 리트핀에 대한 논의에 사용된 1943년 베를린 주소록 1804페이지

6. 참고 문헌


  • 위르겐 리트핀, 『타인의 손에 의한 죽음. 베를린 최초의 장벽 희생자와 한 가족의 역사』(Tod durch fremde Hand. Das erste Maueropfer in Berlin und die Geschichte einer Familie), 페를라흐 데어 나치온 출판사, 후숨, 2006.
  • 마티아스 메젠회러, 「잔혹한 장벽」(Die grausame Mauer), 『지오』(GEO), 2011년 8월호, 73쪽.
  • 크리스티네 브레히트, 「귄터 리트핀」(Günter Litfin), 『1961년~1989년 베를린 장벽 희생자들. 전기적 핸드북』(Die Todesopfer an der Berliner Mauer 1961–1989. Ein biographisches Handbuch), 링크스, 베를린, 2009, 37~39쪽.

참조

[1] 뉴스 Der Kommunismus ist ein Scheißhaufen ohne Ende! (Communism is a turd heap without end!) http://www.focus.de/[...] Focus Online 2014-10-09
[2] 웹사이트 Short portrait of Günter Litfin at Chronik der Mauer http://www.chronik-d[...]
[3] 웹사이트 Short portrait of Günter Litfin at Berlin Wall Memorial https://web.archive.[...] 2017-06-08
[4] 뉴스 Zorniges Gedenken an den ersten Mauertoten (Angry remembrance of the first Berlin Wall victim) http://nachrichten.r[...] Rheinische Post 2011-08-10
[5] 웹사이트 Günter-Litfin-Straße https://berlin.kaupe[...] Kauperts, Straßenverzeichnis Berlin (Street directory Berlin)
[6] 서적 (정보 부족)
[7] 서적 (정보 부족)
[8] 서적 (정보 부족)
[9] 일반
[10] 웹사이트 Geschichte http://www.gedenksta[...] gedenkstaetteguenterlitfin.de 2015-01-26
[11] 서적 (정보 부족)
[12] 서적 (정보 부족)
[13] 서적 (정보 부족)
[14] 서적 (정보 부족)
[15] 서적 (정보 부족)
[16] 서적 (정보 부족)
[17] 뉴스 Der Kommunismus ist ein Scheißhaufen ohne Ende! (Communism is a turd heap without end!) http://www.focus.de/[...] Focus Online 2014-10-09
[18] 웹사이트 Short portrait of Günter Litfin at Chronik der Mauer http://www.chronik-d[...]
[19] 웹인용 Short portrait of Günter Litfin at Berlin Wall Memorial https://web.archive.[...] 2017-06-08
[20] 뉴스 Zorniges Gedenken an den ersten Mauertoten (Angry remembrance of the first Berlin Wall victim) http://nachrichten.r[...] Rheinische Post 2011-08-10
[21] 웹사이트 Günter-Litfin-Straße https://berlin.kaupe[...] Kauperts, Straßenverzeichnis Berlin (Street directory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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