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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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독은 1949년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이 통합되어 수립된 독일 연방 공화국을 지칭한다. 분단된 독일은 냉전 시기 동독과 대립했으며, 콘라트 아데나워 시기에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해 경제 부흥을 이룩했다. 1960년대에는 학생 운동과 테러, 동방 정책 등이 전개되었고, 1970년대에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으로 동서독 관계가 개선되었다. 1980년대 헬무트 콜 정부는 독일 재통일을 추진하여, 1990년 동독을 흡수, 통일 독일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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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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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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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독일연방공화국 |
일반 명칭 | 서독 |
정부 형태 | 연방제 의회민주주의 공화국 |
국가 표어 |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1949–1962) |
국가 표어 (2) | 통일과 정의와 자유 (1962년 이후) |
국가 (비공식) | 나는 나를 바쳤네 (1949–1952) |
국가 (공식) | 독일의 노래 (1952–1990) |
수도 | 본 |
최대 도시 | 함부르크 |
공용어 | 독일어 |
종교 | 종교 참고 |
통화 | 독일 마르크 |
통화 코드 | DEM |
시간대 | CET |
시간대 (여름) | CEST |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 .de |
국제전화 코드 | +49 |
정치 | |
대통령 | 테오도어 호이스 (초대) |
대통령 (2)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마지막) |
총리 |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
총리 (2) | 헬무트 콜 (마지막) |
입법부 | 양원제 |
상원 | 분데스라트 |
하원 | 분데스탁 |
역사 | |
시대 | 냉전 |
건국 | 형성 |
건국일 | 1949년 5월 23일 |
본-파리 협정 | 1955년 5월 5일 |
NATO 가입 | 1955년 5월 9일 |
자르 협정 | 1957년 1월 1일 |
EEC 창설 | 1957년 3월 25일 |
동독과의 기본 조약 | 1972년 12월 21일 |
UN 가입 | 1973년 9월 18일 |
최종 해결 | 1990년 9월 12일 |
통일 | 재통일 |
멸망일 | 1990년 10월 3일 |
인구 | |
1950년 | 50,958,000명 |
1970년 | 61,001,000명 |
1990년 | 63,254,000명 |
인구 밀도 | 254명/km² |
경제 | |
GDP (PPP) | 약 1조 달러 (1990년) |
GDP (PPP) 순위 | 4위 |
기타 | |
사용 언어 | 독일어 |
현재 국가 | 독일 |
면적 | 248,717 km² |
로마자 표기법 | 베스트도이칠란트 (Westdeutschland) |
로마자 표기법 (약칭) | 베에르데 (BRD) |
로마자 표기법 (수도) | 보너 레푸블리크 (Bonner Republik) |
2. 역사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복하면서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나 이념 대립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947년 1월 1일 미국과 영국 점령 지역이 통합(바이존, Bizone)되었다. 이후 프랑스 점령 지역도 합쳐져 트라이존(Trizone)이 되었다.
1948년 6월 21일, 트라이존에서 통일 통화(독일마르크)를 발행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동독마르크를 발행했고, 이는 동서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소련은 서베를린을 경제 봉쇄했고, 서방은 대규모 공수 작전으로 1949년 5월 12일까지 서베를린을 지원했다.
1948년 초, 미국, 영국, 프랑스와 베네룩스 국가들은 런던 회의에서 트라이존에 제헌 의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7월 1일 "프랑크푸르트 문서"가 전달되었으나, 독일 각 주와 주민들은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라는 잠정 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 평의회"(Parlamentarischer Rat)를 열었다.
의회 평의회는 1948년 9월 1일 발족하여 기본법 안을 확정했고, 점령 당국도 서독 국가 조기 발족을 위해 이를 승인했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신 국가의 잠정 수도로 본을 추천하여 관철시켰다.
1949년 5월 23일, 서방 통치 주에 본을 수도로 하는 연방공화국 임시 정부(테오도르 호이스 대통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발족하고, 10월 7일 소련 통치 주에 독일민주공화국(빌헬름 피크 대통령)이 성립하여 동서독이 분단되었다. 베를린도 분단되었고, 1961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다.
1955년 5월 5일 서독은 주권을 회복하고, 독일연방군을 편성하여 재군비를 실시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서독은 냉전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에 독일 재통일 직후까지 미·영·프 군대가 주둔했다. 1957년 1월 1일에는 주민 투표로 독일 귀속을 선택한 프랑스 보호령 사르를 사르란트주로 병합했다.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하여 자유시장경제와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는 아데나워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1963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총리에 취임하여 1963년 12월 성탄절 자유왕래 협정을 체결, 서베를린 시민이 동베를린 친인척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성장 둔화로 실업자가 증가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 빌리 브란트 외무장관의 대연정은 경제 위기 극복과 극우 정치 차단에 힘썼다. 1969년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방 정책을 추진, 1970년 소련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와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선으로 인정하는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7] 1971년에는 베를린 지위에 관한 4대국 협정이 체결되었다.[7]
1974년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1982년 10월 1일 헬무트 콜이 서독 총리가 되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2. 1. 정부 수립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나 이념 대립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947년 1월 1일 미국과 영국 점령 지역이 통합되었다. 1947년 4월 모스크바 외무부 장관 회의가 결렬된 후, 미국과 영국 통합 지역에는 경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했으며, 기민당과 사민당에서 각각 20명씩, 그리고 군소 정당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되었다.1948년 8월 18일, 콘라트 아데나워가 사회민주당의 쿠르트 슈마허 후보를 누르고 초대 총리로 당선되었다. 1949년 5월 23일, 서방 연합국 점령 지역에서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이 발표되면서 서독이 수립되었고, 본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전후 독일을 4개 점령 지역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포츠담 협정에 따라 4개 연합국은 '전체 독일'에 대한 공동 주권을 주장했다.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동쪽 지역은 독일 주권에서 분리되어 폴란드와 소련으로 이전되었다. 800만 명의 독일 추방자와 난민들이 서독에 정착했다.
1949년 냉전이 심화되면서 서방 연합국 지역과 소련 점령 지역은 각각 서독과 동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 민주 공화국(GDR)은 이전 소련 점령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1990년 서독과 동독은 독일과 관련된 최종 정착에 관한 조약(2+4 협정)을 체결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과도적 지위가 종식되었고, 4개 연합국은 전체 독일에 대한 공동 주권을 포기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연방 공화국에 합류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멸망하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에 의한 분할 통치와 비무장화·탈나치화 정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냉전의 시작과 함께 영국, 미국, 프랑스 3개국과 소련은 대립을 심화시켰다. 영국군 점령 지역과 미국군 점령 지역은 바이존(Bizone, 후에 프랑스군 점령 지역과 연합하여 트라이존(Trizone)이 됨)을 형성하고, 소련 점령 지역과의 균열이 심화되었다.
동서 균열이 결정적이 된 것은 1948년 6월 21일, 트라이존에서 통일 통화(독일마르크)를 발행했을 때였다. 소련 측은 이에 대항하여 동독마르크를 발행했고, 이것이 동서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소련은 서베를린을 경제 봉쇄했고, 서방은 대규모 공수 작전으로 1949년 5월 12일까지 서베를린을 지원했다.
1948년 초, 미국, 영국, 프랑스와 베네룩스 국가들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고, 트라이존에서 제헌 의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7월 1일, "프랑크푸르트 문서"가 전달되었다. 독일 각 주와 주민들은 점령 당국이 제시한 방침에 반발하여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이라는 이름의 잠정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의회 평의회"(Parlamentarischer Rat)를 열었다.
의회 평의회는 1948년 9월 1일에 발족하여 기본법 안을 확정했고, 점령 당국도 서독 국가를 조기에 발족시키기 위해 이 안을 승인했다. 신 국가의 잠정 수도에 대해서는 콘라트 아데나워가 본을 추천했고,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1949년 5월 23일, 서방 통치 주에 본을 수도로 하는 연방공화국 임시 정부(테오도르 호이스 대통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발족하고, 10월 7일 소련 통치 주에 독일민주공화국(빌헬름 피크 대통령)이 성립하여 동서에 두 개의 공화국이 나란히 서게 되었다. 베를린도 분단되었고, 1961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다.
서독은 1955년 5월 5일 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선언하고, 독일연방군을 편성하여 재군비를 실시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서독은 냉전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에 미·영·프 군대가 독일 재통일 직후까지 주둔했다.
1957년 1월 1일에는 주민 투표에서 독일 귀속을 선택한 프랑스 보호령 사르를 사르란트주로 병합했다.
2. 2. 아데나워 시대 (1949-1963)
1949년부터 아데나워는 14년간 총리로 집권했다. 아데나워는 독일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서독의 민주 정치는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아데나워는 분단된 국토와 강대국으로부터의 고립 위협 속에서도 친서방 정책을 통해 외교적 기반을 강화했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경제 재건을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했다.[11]아데나워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하여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복지지향적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의 정책은 단기간에 전후 복구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를 크게 성장시켜 국민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초기에는 기아와 생필품 문제 해결을 위해 소비재 공업에 집중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 공업 분야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산업 생산량이 급증했다. 이러한 산업 생산량 증가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1950년대부터 1960년까지 연평균 8.6%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실업 문제 해결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인력 수급 문제를 야기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는 아데나워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고, 결국 2년 후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7] 1962년에는 주간지 데어 슈피겔de이 서독 군사 방어에 대한 분석 기사를 발표하며 시스템의 약점을 지적했다. 아데나워는 이를 반역죄로 간주하고 저자들을 기소하겠다고 분데스탁de에서 선언했다. 잡지 편집자이자 소유주인 루돌프 아우그슈타인은 체포되었으나 언론 자유 침해 논란이 커지면서 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아데나워 내각의 자유민주당(FDP) 의원들이 사임하고,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아데나워는 1963년 가을 사임하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뒤를 이었다.[12]
2. 2. 1. 서베를린 위기
냉전 시기 베를린은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베를린은 지리적으로 동독 영토를 통과해야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 서방 세계와의 교통 및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냉전 시기 서베를린은 '자유의 외딴섬' 또는 '육지의 섬'이라고 불렸다.[7] 서베를린은 냉전 기간 동안 세 번의 위기를 겪었는데, 1948년 베를린 봉쇄, 1958년 베를린 통첩,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였다.[7]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는 아데나워 수상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었고, 결국 2년 후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7]2. 3. 에르하르트 시대 (1963-1966)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 시절 경제장관으로 독일 경제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며, 일찍부터 아데나워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1963년 4월 당내 투표를 통해 총리에 취임했다.에르하르트 취임 당시 국제 정치는 긴장 완화 분위기로 가고 있었고, 동독과의 관계는 완만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1963년 12월에는 성탄절 자유왕래 협정이 체결되어 서베를린 시민이 동베를린에 사는 친인척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 시기 국내 상황은 어려웠다. 정치권에서는 극우 세력이 등장했고, 경제는 1950년대 고도성장과는 달리 1960년대 중반부터 성장이 둔화되어 실업자가 증가했다. 1965년 연방의회 총선에서 기민당과 자민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예산 편성안과 세입 문제로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자민당 의원들이 세금 인상에 반대하며 장관직을 사직하여 연립정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4. 키징거-브란트 시대 (1966-1969)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가 총리가 되고,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외무장관을 맡은 대연정이 출범했다. 당시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경제 위기 극복과 극우 정치 차단이었다. 키징거 총리는 연방은행의 긴축 재정에서 벗어나 연방 정부 차원의 신규 투자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여 경기 부양에 힘썼고, 이는 경기 활성화로 이어졌다. 대연정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지속되었다.[7]대연정은 긴급 조치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를 통해 집권당은 필요한 3분의 2 득표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조치들은 비상사태 발생 시 이동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 헌법 권리를 제한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법안 통과를 앞두고 자민당, 독일 학생운동, "민주주의의 비상사태"라고 자칭하는 단체, 그리고 노동조합으로부터 거센 반발이 있었다. 시위와 항의가 증가했고, 1967년에는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빌트 신문은 시위대를 공격했다.
2. 5. 브란트 시대 (1969-1974)
1969년 사민당과 자민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하였고, 빌리 브란트가 총리가 되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방 정책을 추진하여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루었다. 1970년 소련과 상호 무력 포기 및 유럽 국경선 인정을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해 폴란드와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의 서부 국경선으로 인정하는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7] 1971년에는 베를린 지위에 관한 4대국 협정이 체결되었다.[7]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서베를린 시장,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미국, 프랑스, 영국과 같은 우방 국가에 신뢰를 주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과 프랑스의 외교 안보 정책의 기본 방향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7]
폴란드와 체결한 조약은 논란을 야기하여, 비판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점령된 독일 영토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지지자들은 독일 재통일과 동유럽과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7] 브란트는 유럽 경제공동체(EEC) 확대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영국 등의 EEC 가입에 기여했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는 1970년 독일군에 의해 진압된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비를 방문하던 브란트 총리가 무릎을 꿇고 침묵 속에 명상에 잠긴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1974년 그의 정부 내 간첩사건(귄터 기욤)으로 총리직을 사임했다.[7]
2. 6. 슈미트 시대 (1974-1982)
헬무트 슈미트는 빌리 브란트의 사임에 뒤이어 1974년 5월 16일 총리로 선출되었다. 총리 시절 슈미트는 대체로 독일 국민 대부분의 존경을 받았고 영향력 있는 서유럽 정치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조세개혁, 기업경영법, 사회 안전망 확대, 교육 개혁, 형법과 가족법 개혁 등 의료보험과 연금보험,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의 기본축을 이루는데 커다란 치적을 남겼다.[17]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받아 여러 차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와 외교관계를 완만하게 지냈으나, 소련에 유화적이라는 이유로 미국과 야당(기민당 등 보수세력)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동서간의 대화 중단 사태 이후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과 함께 초강대국 간의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한 것뿐이었음을 강조했다.[18]
국제무대에서 상당한 실력을 행사하고 있던 슈미트는 1976년과 1980년 재선되었으나 경제 불안정과 자유민주당의 연합 이탈 등으로 이후 일련의 국내 문제 악화로 1982년 10월 1일 치러진 하원의 불신임 투표 결과 총리직을 사퇴했다.
헬무트 슈미트는 사민당(SPD) 소속으로, 자유민주당(FDP)과의 연정을 통해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서독 총리로 재직했다.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자유민주당(FDP)의 주요 인물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슈미트는 유럽 공동체(EC)와 대서양 동맹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미국과의 파트너십 속에서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강조했다.[17] 증가하는 외부 문제로 인해 슈미트는 외교 정책에 집중해야 했고, 국내 개혁은 제한적이었다. 소련이 중거리 미사일을 업그레이드하자, 슈미트는 핵균형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위협이라며 정치적 강압 가능성을 증가시키고 서방의 대응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나토는 이중 트랙 정책으로 대응했다. 이는 SPD 내부에서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고 FDP와의 연정을 약화시켰다.[18] 슈미트가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의 협력을 통해 거둔 주요 성공 중 하나는 1978년 4월 유럽 통화 시스템(EMS)을 출범시킨 것이다.[19]
그러나 사민당(SPD)과 자유민주당(FDP)의 목표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1982년 10월 1일 FDP는 기민당/기사당(CDU/CSU)과 연합하여 CDU 의장 헬무트 콜을 총리로 선출하는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했다.
2. 7. 헬무트 콜 시대 (1982-1990)
1982년 10월 1일 보수 정당인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이 서독 총리가 되었다. 헬무트 콜은 기민당·기사당·자민당과 연립하여 1983년 3월 6일 전국총선에서 사민당을 상대로 승리했다. 헬무트 콜 정부는 경제 정책에 중점을 두고 실업자를 줄이는 데 주력했다. 외교 정책에서는 사민당 정권에서 추진했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고 기존의 우방들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의 가치 회복과 인권 보호 그리고 자유를 보장하고 준법국가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기로 했다.[7]
1987년 1월 25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재선되었으나, 기민당-기사당 연합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의 행정부는 중도 노선을 채택하여 정부 지출을 적절히 삭감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서독의 공약을 강력히 후원했다. 그 후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과 더불어 그해 12월 2일에 실시된 전독일 총선에서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다.[7]
그러나 헬무트 콜은 갑작스럽게 독일 통일을 맞았기 때문에 통일 후 콜 정부는 구 동독 지역에 넘쳐나는 실업자들과 신나치주의 세력들의 이민 정책 반대 및 외국인 습격 등의 문제에 직면했고, 실업자 문제 등에서 비판받았다. 1994년에도 재선되었으나 1998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패하여 16년간의 독일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7]
3. 경제
서독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독과 달리 시장경제를 채택한 자본주의 국가였다. 서독은 '마셜 계획'의 주요 수혜국 중 하나로서 상당한 양의 물자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았다.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풍부한 내수 인구와 주변의 유럽 시장을 배경으로 '라인강의 기적' 이라 불리는 상당한 경제적 부흥을 이루어 내는 것에 성공하며 세계적인 산업 대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30]
서독 경제 부흥의 중심에는 '아우토반'이라 불리는 고속도로를 배경으로 루르 지방의 중공업, 바이에른 일대의 자동차 산업 등이 발달하였다.
1950년에 시작된 서독의 Wirtschaftswunder|경제기적de(영국 일간지 ''타임스''가 만든 용어)는 1948년의 통화 개혁으로 Reichsmark|라이히스마르크de를 Deutsche Mark|독일 마르크de로 대체하고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으면서 지속되었다. 연합군의 서독 석탄 및 철강 산업 해체는 1950년에 최종적으로 종식되었다.[30]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가스트알바이터(Gastarbeiter)로서 터키와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민이 유치되었다. 그들은 서독의 인력 부족과 경제 성장 가속화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재에 대한 수요 증가로 발생한 부족 현상은 독일 제품 구매에 대한 미온적인 저항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독일은 중앙 및 동유럽에서 독일인들의 탈출과 추방으로 인해 최대 1,650만 명의 독일인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숙련되고 저렴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이 전쟁 중 수출액을 2배 이상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인구의 근면성과 장시간 근무, 그리고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수천 명의 Gastarbeiter|가스트아르바이터de(게스트 워커)가 공급한 추가 노동력은 경제 호황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30]
연합군의 배상금 폐지, 독일 지적 재산권의 자유화, 그리고 마셜 플랜의 자극 효과를 통해 서독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중 하나를 발전시켰다. 동독 경제는 어느 정도 성장을 보였지만 서독만큼은 아니었는데, 이는 소련에 대한 지속적인 배상금 때문이었다.[31]
1952년 서독은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이는 나중에 유럽 연합으로 발전하게 된다. 1976년 서독은 주요 6개국(G6)의 창립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73년 세계 인구의 약 1.26%를 차지하는 서독은 세계 4위의 GDP인 9440억달러(세계 총액의 5.9%)를 기록했다. 1987년 서독은 세계 총생산량의 7.4%를 차지했다.
1948년 6월, 라이히스마르크가 1/10의 화폐 개혁을 거쳐 독일 마르크로 대체되었다. 또한 연방준비제도를 본뜬 멀티 리저브 시스템이 같은 해 3월 설립된 를 정점으로 정비되었다. 현금 이외의 금융 자산 전환이 이루어졌고, 일반 채권 채무는 통화와 동일 비율인 1할이 되었다. 국채는 모두 폐기되었다. 예금은 1할로 줄어든 후, 인출이 절반으로 제한되었다. 동결분은 10월에 2할을 인출할 수 있게 되었고, 1할이 중장기 투자 계정으로 돌려졌다. 나머지 7할은 삭감되었다. 따라서 예금은 1할이 아닌 6.5%만 보호되었다. 한편, 임금과 물가는 동결되었다. 이 불공정한 조치는 기업의 현실 자산에 유리했다. 인플레이션 대책으로는 효과를 거두었고, 기업이 인플레이션 기대 하에 보유하고 있던 금융 자산이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했다.[46]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세계적으로 물자 수요를 높였고, 당시 서독에는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以東)의 구 독일 동부 영토와 동독에서 온 난민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서독에는 임금이 낮은 숙련 노동자가 비교적 많았다. 이를 강점으로 삼아 서독은 여러 나라의 수입 수요에 부응하여 수출을 급격히 늘렸다.[46]
1983년 중반에도 여전히 실업자 수가 230만 명(9.3%)에 달했고, 독일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헬무트 콜 총리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제시했다.
4. 정치
서독의 정치 생활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시대(1949~1963년) 이후 루트비히 에르하르트(1963~1966년)의 짧은 기간이 이어졌고, 그는 다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1966~1969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49년부터 1966년까지 모든 정부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기독교사회연합(CSU)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유민주당(FDP)이나 다른 우익 정당과 연정을 이루기도 했다.[11]
키징거의 1966년~1969년 "대연정"은 서독의 두 가장 큰 정당인 CDU/CSU와 사회민주당(SPD)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새로운 비상 조치를 도입하는 데 중요했는데, 대연정은 집권당들에게 이를 통과시키는 데 필요한 3분의 2의 득표율을 제공했다. 이러한 논란이 많은 조치들은 비상사태 발생 시 이동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헌법적 권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12]
법안 통과를 앞두고, 특히 FDP, 부상하는 서독 학생 운동, Notstand der Demokratie|노트슈탄트 데어 데모크라티|민주주의의 비상사태de라고 자칭하는 단체, 그리고 노동조합으로부터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시위와 항의는 늘어났고, 1967년 학생 벤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에게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특히 타블로이드 신문인 Bild-Zeitung|빌트-차이퉁de 신문은 시위대에 대한 공격을 벌였다.[13]
1968년까지 나치즘 과거에 맞서 싸우려는 강한 욕구가 생겨났다. 1970년대에는 환경운동과 반국가주의가 좌파 독일인들 사이에서 근본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 결과, 1979년 녹색당은 브레멘 주 선거에서 의회 의석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최소 5%를 달성할 수 있었고, 1980년 전국 정당이 설립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성공적인 녹색 운동 중 하나로 발전했다.
1960년대의 불안의 또 다른 결과는 적군파(RAF)의 창설이었다. RAF는 1968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1970년대 서독에서 일련의 테러 공격을 가했다. 1990년대에도 여전히 "RAF"라는 이름으로 공격이 자행되었다. 마지막 행동은 1993년에 있었고, 1998년에 그룹은 활동 중단을 발표했다.[16]
1969년 선거에서 SPD는 FDP와 연정을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표를 얻었다. SPD 지도자이자 총리인 빌리 브란트는 그의 참모 중 한 명이 동독 정보기관인 Stasi|슈타지de의 스파이로 드러난 기욤 사건 이후인 1974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정부 수반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브란트의 사임을 위한 단순한 계기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널리 여겨진다. 대신 브란트는 알코올과 우울증 관련 스캔들[20][21]과 1973년 석유 위기의 경제적 여파로 인해 단순히 지쳐버린 것처럼 보인다. 브란트 자신이 나중에 말했듯이, "나는 당시 진행 중인 과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유로 지쳐 있었다."[22]
그러자 재무장관 헬무트 슈미트(SPD)가 정부를 구성하여 SPD-FDP 연정을 이어갔다. 그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총리로 재직했다. FDP의 주요 인물인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같은 해에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유럽 공동체(EC)와 대서양 동맹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슈미트는 "미국과의 파트너십 속에서 유럽의 정치적 통합"에 대한 그의 헌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SPD와 FDP의 목표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1982년 10월 1일 FDP는 CDU/CSU와 연합하여 CDU 의장 헬무트 콜을 총리로 선출하는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했다. 1983년 3월 총선 이후 콜은 정부와 CDU 모두를 확고하게 장악했다. 5.6%의 득표율을 얻은 녹색당의 분데스탁 진출로 CDU/CSU는 과반수에 근접하지 못했다.
1987년 1월 콜-겐셔 정부가 다시 집권했지만, FDP와 녹색당은 대형 정당을 희생하여 성장했다. 사회민주당은 녹색당이 연정을 구성할 가능성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정이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두 가지 조건 모두 1998년까지 변하지 않았다.
thumb, 중간의 무인 지대에 보이는 것은 동독 측 국경경비대원이다.]]
서독에는 “동독과의 통일 후에 헌법을 갖기로 한다”는 의지에서 헌법(Verfassung)이 없고, 기본법(Grundgesetz)만이 있었다(이는 기본법 146조에 명기되어 있었다).
동서 냉전 최전선에 서 있는 국가였던 만큼 미국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의존도가 높았고, 많은 미군 기지가 국내에 있었다. 또한 동독과의 대립으로 재군비 직후인 1956년 이후 18세에서 45세까지의 남성 국민에게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서독 시대 독일 연방군의 역할은 억제된 것이었다. 환경보호운동과 마찬가지로 반전운동도 성행하였고, 1983년에는 1979년 조인의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I)에도 불구하고 서독에 핵미사일이 반입된 것을 계기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대규모 반핵운동이 일어났다.
5. 명칭
통일 이전 독일은 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de(독일연방공화국, 일반적으로 '서독'으로 알려짐)과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도이체 데모크라티셰 레푸블리크de(독일민주공화국, 일반적으로 '동독'으로 알려짐)으로 나뉘어 있었다. 독일 통일 이후, Bundesrepublik Deutschland|분데스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de는 통일된 독일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동독에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Westdeutschland|베스트도이칠란트de(서독) 또는 westdeutsche Bundesrepublik|베스트도이체 분데스레푸블리크de(서독 연방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선호되었다. 1974년 헌법 개정으로 동독이 단일 독일 국가라는 개념을 버리면서 동독은 서독인과 서베를린 시민을 외국인으로 간주했다. 약칭 ''BRD''(영어로는 FRG)는 1970년대 초 Neues Deutschland|노이에스 도이칠란트de 신문을 시작으로 동독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이를 따랐다.
1965년 서독의 범독일문제연방장관 에리히 멘데는 약칭 BRD를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독일 명칭에 대한 지침"을 발표했다. 1974년 5월 31일 서독 연방 및 주 정부 수반들은 공식 발표물에서 항상 전체 명칭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그 이후 서독에서는 좌파 단체들이 사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약칭이 사용되지 않았다. 1979년 11월 연방 정부는 서독 공영 방송 ARD와 ZDF가 약칭 사용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독일연방의회에 알렸다.[6]
서독의 ISO 3166-1 alpha-2 국가 코드는 DE (''Deutschland'', 독일의 약자)였으며, 이는 통일 후에도 독일의 국가 코드로 남아 있다. DE 코드는 특히 우편번호 확장 및 인터넷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de로 국가 식별자로 사용된다. 덜 널리 사용되는 서독의 ISO 3166-1 alpha-3 국가 코드는 DEU였으며, 이는 통일된 독일의 국가 코드로 남아 있다. 반면에 현재 삭제된 동독의 코드는 ISO 3166-1 alpha-2에서 DD, ISO 3166-1 alpha-3에서 DDR이었다.
Westdeutschland|베스트도이칠란트de는 독일어권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정치적 함의 없이 널리 사용되는 구어체 형태이기도 했다.
6. 탈나치화
탈나치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이 독일의 정치, 사법, 사회, 문화, 언론, 경제에서 나치 이데올로기와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추진한 계획이었다. 이는 나치당 또는 SS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을 권력과 영향력 있는 지위에서 제거하고, 나치즘과 관련된 조직을 해체하며, 저명한 나치 인사들을 전쟁 범죄로 기소하는 것을 포함했다.[23] 이 프로그램은 서독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콘라트 아데나워의 신정부의 반대에 직면했다.[24] 1951년, 사면을 부여하고 탈나치화를 종식시키는 여러 법률이 통과되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나치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 서독의 정치 기구에 들어가게 되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나우만 서클로 알려진 전직 나치 관리들의 비밀 조직이 자유민주당(FDP)에 침투하여 권력을 되찾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노력까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폭로되어 무산되었지만, 많은 전직 나치들이 여전히 정치 체제에서 권력과 영향력 있는 지위를 얻었다.[25] 발터 셸(Walter Scheel) 서독 대통령(1974~1979)과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Kurt Georg Kiesinger) 총리(1966~1969)는 모두 전직 나치당원이었다. 콘라트 아데나워의 국무장관 한스 글로브케(Hans Globke)는 나치 독일에서 반유대주의적인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초안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6] 1957년, 서독 사법부 고위 관리의 77%가 전직 나치당원이었다.[27]
7. 독일 재통일 (동독 병합)
1989년 동구권의 붕괴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독일 재통일과 전후 독일의 특수 지위에 대한 최종 정산을 향한 빠른 움직임이 있었다. 민주적인 선거 이후, 동독은 통일 조약 조건에 따라 서독 가입을 선언했다. 서독과 동독은 조약 조항에 따라 각 헌법을 개정했다. 이후 동독은 해체되었고, 전후 5개 주 (Länder|랜더de)가 재편되었으며, 재통합된 베를린은 특수 지위를 종식하고 추가적인 주가 되었다. 이들은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서독에 합류하여 주의 수를 10개에서 16개로 늘리고 독일 분단을 종식시켰다. 확장된 서독은 서독의 정치 문화를 유지했고, NATO와 유럽 연합과 같은 서방 동맹의 기존 국제기구 회원 자격과 서방 외교 정책 방향 및 제휴 관계를 유지했다.[45]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 공식 행사는 Reichstag에서 열렸으며, 총리 헬무트 콜,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총리 빌리 브란트 등이 참석했다. 다음 날, 통일된 독일 의회는 제국 의사당 건물에서 상징적인 회합을 가졌다.
당시 베를린의 역할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1991년 6월 20일, 의회 논쟁 끝에 분데스타크de는 근소한 차이로 정부와 의회가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서독 헌법(Grundgesetz|그룬트게제츠de, "기본법")은 다른 독일 지역과의 통일을 위한 두 조항을 규정했다.
- 23조는 다른 독일 지역이 (서독 헌법에 따라) 서독에 가입할 가능성을 규정했다.
- 146조는 새 헌법에 따라 모든 독일 지역의 통일 가능성을 규정했다.
1989년 동독 평화 혁명 이후, 동독 인민의회는 1990년 8월 23일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의 서독 가입을 선포하여 1990년 10월 3일 발효될 통일 과정을 시작했다. 통일 행위 자체는 1990년 8월 31일 이후 통일 조약을 통해 헌법적으로 달성되었다. 이는 국제법상 서로를 별개 주권 국가로 인정하는 전 동독과 서독 간의 구속력 있는 협정이었다. 이 조약은 1990년 9월 20일 인민의회와 독일연방의회에서 3분의 2 다수결로 효력을 발생시켰다. 한편으로는 동독 소멸과 동독 영토에 대한 연방주de 재건을, 다른 한편으로는 서독 기본법에 대한 합의된 개정을 가져왔다. 개정 중에는 동독이 서독에 대한 사후 가입을 선언했던 23조 폐지가 포함되었다.
두 독일 국가는 1990년 7월에 통화 및 관세 동맹에 진입했고,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이 해체되고 재건된 동독의 5개 주(통일된 베를린 포함)가 서독에 가입하여 동서 분단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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