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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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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독 마르크는 1948년부터 1990년까지 동독에서 사용된 통화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에서 독일 마르크가 도입되자, 소련은 동독 지역에 자체적인 통화를 발행했다. 동독 마르크는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서독 마르크와 1:1의 공식 환율을 가졌으나 실제 가치는 낮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서독 마르크의 유통이 증가하고, 1990년 독일 재통일 과정에서 동독 마르크는 독일 마르크로 교환되며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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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마르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현지 통화 이름Mark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현지 통화 이름 (언어)de
통화 ISO 코드DDM
사용 국가소련 점령 지역
독일 민주 공화국
페그 대상독일 마르크 = (DM1 – M1)
보조 단위 비율1/100
보조 단위 이름페니히
통화 기호M
보조 단위 기호pf
통화 복수형Mark
보조 단위 복수형Pfennig
별칭alu-chips
자주 사용되는 동전1pf, 5pf, 10pf, 20pf, 50pf, M1, M2
드물게 사용되는 동전M5, M10, M20 (기념 주화)
사용된 지폐M5, M10, M20, M50, M100, M200, M500
발행 기관Staatsbank der DDR
통화 폐지 여부
통화 역사
통화 명칭 (독일어)Mark der DDR
통화 명칭 (발음)/maʁk deːɐ̯ ˌdeːdeːˈʔɛʁ/
별칭 (독일어)Ostmark
별칭 (발음)/ɔstmaʁk/
이미지 정보
M1 동전
1948년 발행된 1마르크 지폐

2. 역사

동독 통화
명칭약칭도입 시기폐지 시기
도이치마르크 (Deutsche Markde)DM1951년 10월 31일1964년 7월 31일
독일노트은행 마르크 (Mark der Deutschen Notenbankde)MDN1964년 8월 1일1967년 12월 31일
동독 마르크 (Mark der DDRde)M1968년 1월 1일1990년 6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동독 마르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48년 6월 20일, 서독 지역을 점령한 서방 연합국은 일방적으로 통화 개혁을 단행하여 기존의 라이히스마르크렌텐마르크를 새로운 독일 마르크(DM)로 전환했다. 동독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서독의 자본주의화를 경계하며 이 조치에 반발했으나, 서독에서 가치를 잃은 구 화폐가 동독으로 유입되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은 해 7월 24일 독자적인 통화 개혁을 실시했다. 소련은 독일 발권·결제 은행(독일 발권 은행)을 설립하여 독자적인 "독일 마르크"(Deutsche Mark der Deutschen Notenbankde, DM)를 발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전후 독일 경제 회복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냉전 하에서 독일의 동서 분단을 고착화시켰고, 같은 해 베를린 봉쇄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1949년 10월 3일 수립된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이 "독일 마르크"를 공식 통화로 계승했다. 이후 동독의 통화 명칭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64년 8월 1일에는 "독일 국립은행 마르크"(Mark der Deutschen Notenbankde, MDN)로, 1968년 1월 1일부터는 독일 발권 은행이 독일국립은행(Staatsbank der DDRde)으로 통합되면서 "동독 마르크"(Mark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de, M)로 바뀌었다. 통화 명칭은 바뀌었지만 가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72년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로 양독 관계가 안정화되었지만, 두 개의 "마르크"는 계속 존재했다. 동독 경제는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평가받았으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과의 경제적 격차는 점차 벌어졌다.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던 서독 마르크와 구별하기 위해 동독 마르크는 흔히 "DDR 마르크" 또는 동쪽을 의미하는 독일어 'Ost'에서 유래한 "오스트마르크"(Ostmarkde)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서독 간 교류가 급증하면서 동독 내에 서독 마르크가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반면 동독 마르크의 가치는 불안정해졌고 서독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아, 동독 주민들은 불리한 환율로 환전해야만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독일 재통일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인민의회 선거에서 서독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 주민들에게 유리한 환율로 통화 통합을 실시하겠다는 정치적 공약을 내걸었고, 이는 선거 승리와 재통일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1990년 7월 1일, 같은 해 10월 3일의 공식적인 재통일에 앞서 통화 통합이 이루어져 동독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로 교환되었고, 이로써 동독 마르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 통화 개혁과 동독 마르크의 등장 (1948년)

1948년 6월 18일 서방 연합국은 서방 점령 지역에 대한 통화 개혁을 발표했고, 6월 20일 이를 단행했다. 소련라이히스마르크 위조 가능성 등으로 인한 경제 불안과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서방 점령 지역에서는 기존의 라이히스마르크렌텐마르크 사용이 중단되고 독일 연방 주 은행(Bank deutscher Länderde, 이후 독일연방은행의 전신)이 발행한 새로운 독일 마르크(DM)로 강제 전환되었다.

당시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라이히스마르크가 여전히 법정 통화였기 때문에, 서쪽에서 가치를 잃은 구 라이히스마르크 지폐가 동쪽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갑작스러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소련 점령 지역 주민들이 보유한 현금은 사실상 가치를 잃게 되었다.[1]

이에 대한 긴급 조치로, 소련 군정 당국은 소유자가 출처를 증명할 수 있는 라이히스마르크렌텐마르크 지폐에 한해 1인당 최대 70 라이히스마르크까지 특수 쿠폰을 부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쿠폰 부착 작업은 독일 경제 위원회가 소련 군정과의 협의 하에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쿠폰 인쇄와 배포는 소련의 물류 지원을 받아 1948년 6월 19일부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공식 작업 시작일인 6월 23일에는 이미 상당량의 쿠폰 부착 지폐가 준비되어 대기 시간을 줄이고 교환 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후 독일중앙은행(동독의 중앙은행)이 새로운 독일 마르크를 발행하고 통화 개혁을 실시할 때, 이 쿠폰이 부착된 지폐만 교환 대상으로 인정되었다.[1]

소련은 서방의 일방적인 통화 개혁에 반발하며 1948년 7월 24일, 동독 지역에서 독자적인 통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를 위해 독일 발권·결제 은행(Deutsche Notenbankde)을 설립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독일 마르크"(Deutsche Mark der Deutschen Notenbankde, DM) 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1964년까지 공식 명칭을 유지했지만, 서방에서는 주로 "오스트마르크"(Ostmarkde, 동부 마르크)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서방과 동방의 각기 다른 통화 개혁은 혼란스러웠던 전후 독일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일부 기여했지만, 동시에 냉전 구도 속에서 독일의 동서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는 같은 해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2. 명칭 변경과 통화 정책 (1960년대 ~ 1980년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동독 마르크는 공식적으로 Mark der Deutschen Notenbank|독일 국립은행 마르크de(MDN)로 불렸다. 1968년과 1974년의 헌법 개정을 통해 동독 지도부는 통일 독일이라는 초기 목표에서 벗어나 국가 명칭 등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통화 명칭은 MDN에서 Mark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동독 마르크de(M 또는 Mark der DDR)로, 국립은행 명칭은 '독일 국립은행'(Deutsche Notenbankde)에서 '동독 국가은행'(Staatsbank der DDRde)으로 변경되었다. '독일 마르크'(Deutsche Markde)라고 표기된 구 동전(1마르크, 2마르크)들은 한동안 계속 유통되었으나, 1980년대 초까지 점차 '마르크'(Markde)라고 표기된 새 동전으로 대체되었다.

동독 마르크(Mark der DDR)는 동독 정부에 의해 서독 마르크(Deutsche Mark)와 공식적으로는 1:1의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환전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동독 외부로의 반출이 금지되어 동독 밖에서는 거의 가치가 없었다. 서독 방문이 허용된 소수의 동독 주민들은 서독에 있는 친척들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4년부터 동독 정부는 이른바 '강제 환전'(Zwangsumtauschde) 또는 '최소 환전'(Mindestumtauschde)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온 방문객 대부분에게 동독 체류 기간 동안 매일 일정 금액의 서독 마르크나 다른 경화를 정해진 환율에 따라 동독 마르크로 바꾸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루 1DEM 상당액이었으나, 1980년 10월 13일부터는 하루 최소 25DEM 상당액을 환전해야 했다. 일부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어, 경화로 동독 호텔 숙박비를 지불하는 관광객은 최소 환전 의무에서 면제되었는데, 이는 보통 하루 숙박비가 최소 환전액인 25DEM를 넘었기 때문이다. 서베를린 시민, 연금 수급자, 어린이, 청소년 등은 면제되거나 감면 혜택을 받았다. 서방 연합군 소속으로 서베를린에 주둔하던 군인들 역시 동베를린을 방문할 때 이 규정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서방 연합군이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내에서 연합군 군인의 활동을 규제할 권한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방 연합군은 오직 소련만이 그러한 권한을 가진다고 보았다.

암시장에서는 1DEM가 5~10 동독 마르크 사이에서 거래되었다. 1980년대 중반 서베를린의 환전소에서는 1DEM당 5 동독 마르크의 환율로 동독 지폐(주로 50마르크와 100마르크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독 마르크는 서방의 소비재를 판매하던 인터샵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오직 경화나 포럼 체크만 받았다. 결과적으로 암시장에서 동독 지폐를 주로 구매하는 사람들은 동베를린 방문 시 동독 세관의 검사를 받지 않았던 연합군 군인들이었다.

2. 3. 독일 재통일과 동독 마르크의 소멸 (1990년)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서독 간 교류가 급증하면서 동독 내에서 서독 마르크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반면 동독 마르크의 가치는 불안정해졌고, 서독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동독 주민들은 은행에서 불리한 환율로 동독 마르크를 서독 마르크로 교환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 재통일 논의를 가속화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인민의회 선거에서 서독헬무트 콜 총리는 자신이 속한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의 동독 자매 정당 지원 유세 중, 실제 가치보다 동독 주민에게 유리한 환율로 통화 통합을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 공약은 선거 승리에 기여하며 재통일의 길을 열었다.

1990년 7월 1일, 재통일을 앞두고 동독에서 서독 마르크(Deutsche Mark)를 공식 통화로 채택하면서 통화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동독 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비율로 서독 마르크로 교환되며 소멸되었다.

  • 임금, 물가, 기본 저축 (1인당 최대 4,000 마르크, 단 어린이와 연금 수령자는 차등 적용): 1:1
  • 기본 저축 초과액, 기업 부채, 주택 담보 대출: 2:1
  • 통일 직전 확보된 이른바 "투기 자금": 3:1


이러한 교환 비율은 사실상 동독에 대한 독일 연방 공화국 정부의 대규모 지원책으로 간주되었으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는 통화 교환이 독일 경제의 신속한 통합을 위한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일부는 이 조치가 동독 산업의 경쟁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등 재통일 과정의 혼란을 심화시켰다고 비판한다.

1990년, 랙비츠 금속 공장에서 동독 주화를 녹이는 모습


통화 통합 이후 유통이 정지된 동독 마르크 화폐는 폐기 수순을 밟았다. 1990년 작센주 랙비츠(Rackwitz)의 금속 공장에서 약 4,500톤의 동독 주화가 용해되었다.

거의 모든 지폐(약 1,000억 마르크 상당, 6억 2,000만 장, 부피 약 4500m3)는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작센안할트주 할버슈타트(Halberstadt) 인근 테켄베르게(Thekenberge)의 사암 동굴 두 곳에 보관되었다. 여기에는 통화 통합 과정에서 수거된 지폐뿐만 아니라 발행되지 않은 200마르크 및 500마르크 지폐도 포함되었다. 총 3,000톤에 달하는 지폐, 통장, 수표 등이 베를린의 동독 국영은행(Staatsbank der DDR)에서 군 호송 하에 옮겨졌다. 이 동굴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강제 노동으로 건설되었고, 이후 국가인민군이 "말라키트(Malachit)" 혹은 KL-12 NVA-Nr.16/630이라는 암호명으로 사용했던 길이 13km의 터널 시스템 일부였다. 돈은 두께 2m의 콘크리트 벽과 무거운 강철문으로 도난으로부터 보호되었으나, 비용 문제로 인해 자연 습도에 노출된 채 자갈로 추가로 덮여 보관되었다. 이 자산은 1994년 동독 국영은행의 법적 후신인 베를린 국영은행(Staatsbank Berlin)과 합병한 재건을 위한 신용기관(KfW, Kreditanstalt für Wiederaufbau)의 소유가 되었다.

2001년 7월, 할버슈타트에 거주하는 두 명의 주민(24세, 26세)이 안전하지 않은 개구부를 통해 동굴 시스템에 진입하여 많은 양의 지폐를 훔쳐간 것이 발각되었다. 두 주민은 유죄 판결을 받고 4개월의 징역형과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또한 비영리 단체에 120EUR를 지불해야 했다. 미사용 200마르크와 500마르크 동독 지폐와 발행되지 않은 군용 통화가 수집가들 사이에 나타난 것은 이 도난 사건 때문으로 여겨진다. 도난 사건과 지폐의 느린 부패 속도 때문에 KfW는 남은 통화를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2002년 4월부터 6월까지 통화 잔여물이 담긴 컨테이너 298개가 일반 생활 쓰레기와 함께 소각로에서 소각되었고(하루 6개 컨테이너 분량), 마지막 컨테이너는 2002년 6월 25일에 소각되었다.[2][3]

3. 가치

동독 정부는 동독 마르크(Mark der DDR)가 서독 마르크(Deutsche Mark)와 공식적으로 1:1의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의 평가일 뿐, 실제 국제 시장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제한된 환전 가능성과 수출 제한 조치로 인해 동독 마르크는 동독 영토 밖에서는 사실상 가치가 거의 없는 통화였다. 이 때문에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던 소수의 동독 주민들은 필요한 경화를 얻기 위해 서독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4년부터 동독 정부는 이른바 강제 환전(독일어: Zwangsumtauschde) 또는 최소 환전(독일어: Mindestumtauschde)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서방 진영 등 비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동독 체류 기간 동안 하루당 일정 금액 이상의 서독 마르크나 다른 경화를 정해진 비율(공식적으로는 1:1)로 동독 마르크로 바꾸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처음에는 하루 1 서독 마르크 상당액이었으나, 1980년 10월 13일부터는 하루 최소 25 서독 마르크 상당액으로 인상되었다. 다만, 경화로 호텔 숙박비를 지불하는 관광객이나 서베를린 시민, 연금 수급자, 어린이 등 일부는 면제되거나 감면 혜택을 받았다. 특히 서베를린에 주둔하던 서방 연합군 군인들은 동베를린 방문 시 이 규정에서 완전히 면제되었는데, 이는 서방 연합군이 동베를린 내 군 활동 규제 권한을 동독이 아닌 소련에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공식 환율과는 별개로 암시장에서는 동독 마르크의 가치가 훨씬 낮게 평가되었다. 일반적으로 1 서독 마르크당 5~10 동독 마르크의 비율로 거래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의 환전소에서 1 서독 마르크당 5 동독 마르크의 환율로 동독 지폐(주로 50마르크와 100마르크권)를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또한 동독 마르크는 서방 상품을 판매하는 인터샵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오직 경화나 포럼 체크만 통용되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암시장에서 동독 지폐의 주요 구매자는 동독 세관 검사에서 면제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동독 마르크를 반출할 수 있었던 연합군 군인들이었다.

3. 1. 동서독 마르크 간 환율 문제

동독 마르크는 공식적으로는 서독 마르크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되었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서독 마르크의 가치가 훨씬 높게 평가되어 두 통화 간에는 상당한 가치 차이가 존재했다. 특히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고 동독 사회의 혼란이 커지면서 이러한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는 실제 환율이 1 서독 마르크당 10 동독 마르크에 이르렀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러한 동서독 마르크 간의 환율 문제는 독일의 재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쟁점으로 부상했다. 1990년 동독 인민의회 선거를 앞두고, 당시 서독 총리였던 헬무트 콜(CDU)은 동독 내 자매 정당인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을 지원하기 위한 선거 전략으로, 실제 시장 가치보다 동독 마르크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통화 통합을 실시하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제시했다.

콜 총리가 약속한 통화 교환 비율은 다음과 같았다.

교환 대상교환 비율 (동독 마르크 : 서독 마르크)
개인 저축 (1인당 4,000 마르크 한도)11 : 1
한도를 초과하는 개인 저축, 기업 부채, 주택 융자2 : 1
일부 특정 부문3 : 1

1 단, 14세 미만은 2,000 마르크, 60세 이상 연금 수령자는 6,000 마르크까지 1:1 교환 가능.

이 공약은 당시 실제 환율보다 동독 측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통일 이후의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동독 주민들, 특히 자신들이 평생에 걸쳐 이룬 저축의 가치가 낮게 평가될 것을 우려했던 고령층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당초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우세가 점쳐졌던 선거 예측을 뒤엎고 기독교민주연합(CDU)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재통일의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에게 유리하게 책정된 이 환율 정책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했다. 우선 재통일에 필요한 막대한 경제적 비용 부담이 서독으로 전가되면서 서독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또한, 인위적으로 높게 평가된 동독 마르크 가치는 동독 지역의 임금 상승을 부추겼다. 이는 서독 제품에 비해 품질 경쟁력이 떨어지는 부분을 가격 경쟁력으로 메워왔던 동독 기업들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임금 상승으로 가격 경쟁력마저 상실한 수많은 동독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문을 닫았고, 이는 대량 실업 사태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환율 정책은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의 심각한 경제 불황을 초래하고 재통일 비용을 더욱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4. 화폐

동독 마르크는 동전과 지폐로 발행되었다.

유통된 동전은 주로 1, 5, 10, 20, 50 페니히와 1, 2 마르크 액면가의 것들이었다. 이 중 20 페니히 동전은 황동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액면가의 동전들은 대부분 알루미늄 재질이었다.

지폐는 여러 차례 디자인과 명칭이 변경되어 발행되었으며, 독일 재통일 시점까지 유통된 마지막 지폐 시리즈는 1971년과 1975년에 발행된 것들이었다. 또한, 고액권인 200 마르크와 500 마르크 지폐가 인쇄되었으나 실제로는 유통되지 않았다. 이 미발행 지폐들은 1991년 동독 마르크가 폐지될 때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할버슈타트 인근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던 다량의 폐기 지폐가 소각 처리되는 과정에서 일부가 도난당해 유출되기도 했다.

4. 1. 동전

동독 마르크의 최초 주화는 1948년에 발행되었으며, "Deutschland"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1, 5, 10 페니히 주화는 톱니바퀴 위에 밀 이삭을 묘사하고 있었고, 1950년에는 알루미늄 청동으로 만들어진 50페니히 주화가 추가되어 공장을 묘사했다. 1952년 시리즈의 소액 주화에는 밀 이삭 외에 나침반과 망치가 묘사되었다.

1960년 1페니히 주화를 시작으로, 1963년 10페니히 주화, 1968년 5페니히 주화 순으로 기존 주화는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독일 민주 공화국)이라는 국가명이 새겨진 새로운 주화로 점차 대체되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1마르크, 2마르크, 50페니히 주화는 각각 1956년, 1957년, 1958년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20페니히 주화가 도입되었고, 1968년부터 니켈 청동(후에 구리-니켈 합금)으로 만들어진 5마르크 주화가 발행되었다. 1973년과 1974년에는 1마르크와 2마르크 주화가 재설계되어 이전의 "Deutsche Mark"(독일 마르크) 명칭이 제거되었다. 황동 20페니히 주화는 공중전화 요금이 20페니히로 표준화되어 있었고, 알루미늄 주화의 가벼운 무게로 인해 기기 작동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발행되었다. 주화에 알루미늄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동독 주화는 "알루미늄 칩"(Alu-Chipsd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

기념용 5마르크, 10마르크, 20마르크 주화도 다양한 종류로 발행되어 간혹 유통되었다. 총 123종의 기념주화가 발행되었으며, , 구리/니켈/아연(양은) 또는 기타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발행된 모든 기념주화의 전체 목록은 독일어 위키백과의 "''Liste der Gedenkmünzen der DDR''"에서 찾을 수 있다.[5] 일부 기념주화는 매우 많은 수량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는데, 이 주화들은 발행량이 많아 수집가들에게는 큰 가치가 없었다.

1990년 7월 독일의 재통일 과정에서 독일 마르크가 채택된 후 몇 달 동안, 동독의 저액권 주화(50페니히 이하)는 구 동독 지역에서 법정 통화로 계속 유통되었다. 이는 독일 연방은행(Bundesbank)이 기존 동독 주화를 신속하게 대체할 만큼 충분한 소액 주화를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주로 통용된 동독의 공식 주화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독의 공식 주화'''
앞면뒷면재질무게크기
1페니히
1펜니히 앞면
1펜니히 뒷면
알루미늄0.75g17mm
5페니히
5펜니히 앞면
5펜니히 뒷면
알루미늄1.1g19mm
10페니히
10펜니히 앞면
10펜니히 뒷면
알루미늄1.5g21mm
20페니히
20펜니히 앞면
20펜니히 뒷면
황동5.4g22.2mm
50페니히
50펜니히 앞면
50펜니히 뒷면
알루미늄2g23mm
1마르크
1마르크 앞면
1마르크 뒷면
알루미늄2.5g25mm
2마르크
2마르크 앞면
2마르크 뒷면
알루미늄3g27mm



'''동독 기념주화 (예시)'''
앞면뒷면재질무게크기
5마르크
동독 건국 20주년 기념주화 (1969년)
----니켈 청동 / 구리 니켈9.7g29mm


4. 2. 지폐

1948년 6월, 소련군정 하의 독일 지역에서는 새로운 지폐 발행 준비 기간 동안 기존 라이히스마르크렌텐마르크 지폐의 유효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접착 우표(스티커)를 부착하여 사용했다. 이 임시 지폐는 1, 2, 5, 10, 20, 50, 100 마르크 액면가로 발행되었으며, 구어체로 '클레베마르크'(Klebemark|클레베마르크de, 스티커 마르크) 또는 '쿠폰마르크'(Kuponmark|쿠폰마르크de, 쿠폰 마르크)라고 불렸다.

1948년 7월 24일, 이 임시 지폐를 대체하여 "독일중앙은행 발행 독일 마르크"(Deutsche Mark von der Deutschen Notenbank|도이체 마르크 폰 데어 도이첸 노텐방크de)라는 명칭의 새로운 지폐 시리즈가 발행되었다. 액면가는 50 페니히, 1, 2, 5, 10, 20, 50, 100, 1,000 마르크였다.

1955년에는 두 번째 시리즈가 발행되었으며, 5, 10, 20, 50, 100 마르크 액면가로 구성되었다. 명칭은 이전과 동일했다.

1964년에는 "독일 국립은행 마르크"(Mark der Deutschen Notenbank|마르크 데어 도이첸 노텐방크de, MDN)라는 새로운 명칭의 지폐 시리즈가 발행되었다. 액면가는 5, 10, 20, 50, 100 마르크였으며, 이 시리즈가 발행되면서 이전 1948년 및 1955년 시리즈 지폐는 회수되었다.

마지막 지폐 시리즈는 1971년과 1975년에 발행되었으며, 명칭은 "동독 마르크"(Mark der DDR|마르크 데어 데데에르de)였다. 액면가는 5, 10, 20, 50, 100 마르크로 구성되었다. 이 시리즈가 도입되면서 1964년 MDN 시리즈는 점진적으로 회수되었고, 5 마르크 MDN 지폐는 1981년에 마지막으로 회수되었다.

200마르크와 500마르크 지폐도 인쇄되었으나, 실제 유통되지는 않았다. 이 고액권 지폐들은 1991년 독일 재통일 이후 동독 마르크 폐기 과정에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할버슈타트 인근 지하 저장소(Komplexlager 12)에 보관 중이던 막대한 양의 폐기 지폐를 소각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200마르크 및 500마르크 지폐가 도난당해 유출되기도 했다.

독일 재통일 시까지 유통된 지폐 (1971/1975년 시리즈 및 미발행 고액권)
액면크기앞면 도안뒷면 도안발행 연도
5 마르크112mm x 50mm토마스 뮌처콤바인 하베스터1975
10 마르크120mm x 53mm클라라 체트킨라인스베르크 원자력 발전소 제어실의 여성 기술자1971
20 마르크127mm x 55mm요한 볼프강 폰 괴테하교하는 학생들1975
50 마르크135mm x 59mm프리드리히 엥겔스슈베트 PCK 정유소 산업 단지1971
100 마르크143mm x 61mm칼 마르크스베를린 공화국궁베를린 텔레비전탑1975
200 마르크152mm x 66mm가족과 현대식 아파트유치원 교사와 아이들미발행
500 마르크160mm x 70mm동독 국장국가평의회 건물미발행


4. 3. 동독 군용 화폐

1980년, 동독국민군(NVA)이 해외 임무를 수행할 때 사용할 특수 군용 지폐를 준비했다.[7] 그러나 이 지폐는 실제로 발행되지는 않았다.[7] 이 군용 지폐는 기존 1955년 시리즈 지폐(DN B13 – DN B17)에 동독 국장을 손으로 찍은 형태였으며, 일부 지폐에는 '견본 지폐'(Musternotede) 또는 '군용 화폐'(Militärgeldde)라는 글자가 추가로 인쇄되어 있었다.[7]

1980년에 이 지폐들을 도입하려는 준비가 있었지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7] 발행되지 않은 군용 지폐와 다른 동독 지폐 및 동전들은 1990년과 1991년에 할버슈타트 근처 테켄베르게의 거대한 사암 동굴 지하 저장고로 옮겨져 보관되었다.[7] 하지만 1990년대에 지역 주민 두 명이 이 저장고에 침입하여, 보관 중이던 1955년 시리즈 군용 지폐와 미발행된 1985년 시리즈 지폐 2장을 포함한 일부 화폐를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했다.[7] 이 도난 사건 이후, 독일 당국은 남은 군용 지폐들을 2002년 4월부터 6월 25일 사이에 모두 소각하여 폐기했다.[7]

현재 진품 동독 군용 지폐는 극소수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그러나 당시 사용된 1955년 시리즈 지폐와 국장 도장은 상당수 남아 있어, 이를 이용해 위조된 군용 지폐가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진품과 위조품을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7]

5. 평가 및 영향

동독 마르크는 서독독일 마르크(DM)와 구별되어 사용되었으며, 두 통화의 존재는 냉전 시대 독일 분단의 상징 중 하나였다. 동독 경제는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을 이룬 서독과의 격차는 점차 벌어졌다. 이로 인해 미국 달러에 이어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서독 마르크와 달리, 동독 마르크는 국제 시장에서 거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며, 서독 마르크와 구별하기 위해 'DDR 마르크' 또는 동쪽을 의미하는 독일어 'Ost'에서 유래한 '오스트마르크'(Ostmark)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영향으로 동독 정부가 국경 개방을 결정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동서독 간 교류가 급증했다. 통화 관리 정책이 완화되자 동베를린 등 동독 지역에 서독 마르크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반면, 동독 마르크는 서독에서 거의 통용되지 않았으며, 동독 주민들은 자국의 화폐를 은행에서 불리한 환율로 서독 마르크로 교환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 재통일 논의를 가속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1990년 3월 동독 총선에서 당시 서독 총리였던 헬무트 콜(CDU)은 동독 지역 기독교민주연합에 대한 지원책으로, 실제 가치보다 동독 주민에게 유리한 환율로 서독 마르크와의 통화 통합을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 공약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쳐 CDU가 승리하는 데 기여했고, 재통일의 길을 열었다. 결국 1990년 7월 1일, 같은 해 10월 3일로 예정된 재통일에 앞서 동독 마르크는 서독 마르크로 통합되었고, 이로써 동독 마르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동독 마르크의 소멸은 단순히 화폐가 사라진 것을 넘어, 독일 분단의 종식과 통일 독일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참조

[1] 뉴스 Währungsreformen im Juni 1948 http://www.kulturwer[...] Landesamt für Kultur und Denkmalpflege/Landesarchiv/Archivalie 10/2008 2010-08-06
[2] 웹사이트 East Germany's phantom banknotes https://www.dw.com/e[...] 2016-04-18
[3] 웹사이트 Picking up the pieces: The story of East Germany's central bank https://www.dw.com/e[...] 2018-07-02
[4] 웹사이트 Geld der DDR: "Alu-Chips" und Scheine https://www.mdr.de/z[...] 2020-01-03
[5] 위키 Liste der Gedenkmünzen der DDR
[6] 웹사이트 "German Democratic Republic", Numista https://en.numista.c[...]
[7] 서적 The Banknote Book http://www.banknoteb[...] Banknot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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