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급암은 위나라 경대부 출신으로, 전한 경제 때 관직에 나아가 무제의 태자선마를 거쳐 알자가 되었다. 동해태수, 주작도위를 역임하며 구경 반열에 올랐으나, 간언을 자주 하여 미움을 받았다. 흉노 정벌에 반대하고, 법가적 정책을 비판하며 무제와 갈등을 겪다 관직에서 쫓겨났고, 이후 회양태수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7년(혹은 10년)간 회양 태수를 지내고 사망했다.
급암의 집안은 7대 선조부터 삼진(三晉)의 속국으로 몰락한 시절의 위나라를 섬겨 대대로 경대부(卿大夫)를 지냈다.[1] 급암은 아버지의 임자로 관직에 나아가 경제 때 태자 세마가 되었고, 무제 즉위 후 알자가 되었다. 민월이 서로 공격했을 때 시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오나라까지 갔다가 돌아와 "월나라가 서로 공격하는 것은 풍습이어서 천자의 사자를 욕되게 하는 일은 아닙니다."라고 보고했다. 하내군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천여 호가 피해를 입었을 때 시찰사로 임명되어 돌아와서는 "화재는 가옥이 연이어 불에 탄 것뿐이라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내를 지나가는 길에, 빈민 1만여 호가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기에, 재량으로 하내의 창고를 열어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명령을 어긴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무제는 그를 현명하게 여겨 벌하지 않고 형양 현령으로 삼았으나, 급암은 현령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무제는 그를 중대부로 삼았다. 이후 강하게 간언하여 오랫동안 측근에 머물 수 없었고, 동해 태수로 옮겨졌다.[1]
급암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은 만나려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원앙을 존경했고, 관부, 정당시 등과 사이가 좋았다. 유협을 좋아했고, 간언할 때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아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없었다.[1]
2. 생애
급암은 황로의 사상을 배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부하를 골라 임명하고 사소한 일은 책하지 않았다. 그는 병약하여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일도 많았으나, 1년여 만에 동해군은 크게 다스려졌다. 무제는 건원 6년(기원전 135년)에 그를 주작도위로 삼았다. 주작도위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다스렸다.[1]
급암은 오만하여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맞는 자는 잘 대우했으나, 맞지 않는 자와는 만나려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원앙을 존경했고, 관부, 정당시 등과 사이가 좋았다. 유협을 좋아했고, 간언에서도 군주의 안색을 살피지 않아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을 수 없었다.[1]
무제는 대장군위청이 궁궐 내에 있을 때는 그의 앞에서 변기에 걸터앉기도 했고, 승상공손홍과 연회에서 만날 때는 관을 쓰지 않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급암을 만날 때는 반드시 관을 썼다.[1]
급암은 병약하여 휴가가 없어지려 하자 무제가 특별히 휴가를 주었으나 병이 낫지 않자, 장조가 그에게 휴가를 주도록 청했다. 무제가 "그는 어떤 인물이오?"라고 묻자, 장조는 "관직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은 없지만, 어린 군주를 돕고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맹분, 하육과 같은 용사도 빼앗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라고 답했다. 무제는 "그렇다. 옛날의 사직의 신하는 급암과 같은 자가 가까울 것이다."라고 말했다.[1]
이후 민간에서 위조 주화가 많았고, 특히 초나라 지방이 심했다. 그래서 급암을 회양 태수로 임명했다. 급암은 명을 받으려 하지 않았으나, 칙명으로 가게 되었을 때 대행 이식과 대화하며 "어사대부 장탕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도 함께 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나, 이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장탕이 실각했을 때 이식의 죄가 되었다.[1]
2. 1. 조정에서의 활동과 갈등
급암은 조정에서 일하면서 황제와 대신들에게 자주 간언하여 불쾌감을 샀지만, 무제는 급암에게 예를 갖추었고 대신들도 그를 두려워했다.[1] 급암은 엄격한 법 집행을 주장하는 장탕과 논쟁을 벌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했고, 흉노 정벌에 반대하여 찬성하는 장탕·공손홍 등과 대립했다.[1]
무제가 유학자를 초빙하려 했을 때, 급암은 "폐하는 마음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인의를 베풀려 하시니, 어찌 요순의 치세에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무제는 분노하여 안색을 바꾸고 물러났다. 주변 사람들은 급암을 책망했으나, 급암은 "천자가 공경대부를 두는 것은 아첨하여 주군을 불의에 빠뜨리기 위한 것인가? 높은 지위에 있는데, 이 몸을 아끼며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장탕이 정위가 되어 율령을 개정할 때, 급암은 무제 앞에서 장탕을 질책하며 "그대는 대신이면서 선제의 업적을 계승하지도 못하고 천하의 사악한 마음을 선으로 이끌지도 못하면서, 어찌 고조가 약속한 율령을 변경하려 하는가? 그대는 이러한 일을 하고 있어서 자손도 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흉노와의 전쟁이 계속 성공하고 장탕과 공손홍의 권세가 커지면서, 급암은 점차 조정에서 소외되었다. 자신이 구경이었을 때 아랫사람이던 공손홍이나 장탕이 자신을 앞질러 승상이나 어사대부가 되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급암은, 무제에게 "폐하께서 대신을 쓰는 것은 섶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온 자가 위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제는 "과연 사람은 학문을 해야 하는군. 급암의 말은 날마다 심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흉노 혼야왕의 투항 문제에서 무제의 노기를 사 관직에서 쫓겨났다.[1] 흉노 혼야왕이 한나라에 항복하자, 그 군세를 맞이하기 위해 말을 민간에서 징발하려 했으나, 백성들은 말을 숨겼다. 무제는 노하여 장안령을 베려 했으나, 급암은 "저를 베시면 백성들이 말을 내놓을 것입니다. 흉노가 항복했다고 해서 어찌 천하에 소동을 일으켜 중국을 피폐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고, 무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후, 흉노 혼야왕이 한나라에 온 이후, 흉노를 상대로 장사했다는 죄로 50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급암은 "제가 생각하기에 흉노의 항복자를 얻었으면 노예로 삼아 지금까지 종군하여 죽은 자의 집에 하사해야 합니다. 장안에서 흉노를 상대로 장사한 것이 죄가 되는 것을 몰랐을 뿐인 백성을 죽이는 것은 폐하께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몇 달 후, 급암은 법에 저촉되어 파면되었다.
2. 2. 흉노와의 관계
흉노 정벌에 반대하여 찬성하는 장탕, 공손홍 등과 대립했다.[1] 흉노 정벌이 계속 성공하고, 장탕과 공손홍의 권세가 커지면서 급암은 점차 조정에서 소외되어 갔다. 결국 흉노 혼야왕의 투항 문제에서 무제의 노기를 사 관직에서 쫓겨났다.[1]
한나라가 흉노와 싸우고 주변의 이민족을 회유하고 있었는데, 급암은 일을 줄이는 데 힘썼고, 흉노와 화친을 맺고 군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항상 주장했다. 또한 무제는 유학자인 공손홍이나 법률에 밝은 관리인 장탕을 중용했으나, 급암은 공손홍은 거짓을 꾸며 아첨하는 자, 장탕과 같은 관리는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자라고 비판했다. 공손홍과 장탕도 급암을 미워하여 죄를 씌워 죽이려고 했다.
무제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전과를 올리게 되자, 급암의 말은 더욱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흉노의 혼야왕이 한나라에 항복하자, 그 군세를 맞이하기 위해 말을 민간에서 징발하려 했으나, 백성들은 말을 숨겼다. 무제는 노하여 장안령을 베려 했으나, 급암은 "저를 베시면 백성들이 말을 내놓을 것입니다. 흉노가 항복했다고 해서 어찌 천하에 소동을 일으켜 중국을 피폐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고, 무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후, 흉노의 혼야왕이 한나라에 온 이후, 흉노를 상대로 장사를 했다는 죄로 50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급암은 "흉노의 항복자를 얻었으면 노예로 삼아 지금까지 종군하여 죽은 자의 집에 하사해야 합니다. 장안에서 흉노를 상대로 장사한 것이 죄가 되는 것을 몰랐을 뿐인 백성을 죽이는 것은 폐하께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몇 달 후, 급암은 법에 저촉되어 파면되었다.
2. 3. 회양태수 시절과 죽음
몇 년 후, 오수전 위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무제는 급암을 회양 태수로 임명하여 회양의 정치를 맑게 하였다.[1] 급암은 회양에서도 이전과 같은 통치를 하여 정치를 깨끗하게 했고, 7년간 회양 태수를 지내고 사망했다.[1]
3. 평가
무제가 유학자를 초빙하려 했을 때 급암은 "폐하는 마음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인의를 베풀려 하시니, 어찌 요와 순의 치세에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무제는 분노하여 안색을 바꾸고 물러났지만, 급암은 "천자가 공경대부를 두는 것은 아첨하여 주군을 불의에 빠뜨리기 위한 것인가? 높은 지위에 있는데, 이 몸을 아끼며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1]
장조는 무제에게 급암이 "관직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은 없지만, 어린 군주를 돕고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맹분, 하육과 같은 용사도 빼앗을 수 없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무제는 "그렇다. 옛날의 사직의 신하는 급암과 같은 자가 가까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제는 대장군위청에게는 변기에 걸터앉고 승상공손홍에게는 관을 쓰지 않기도 했지만, 급암을 만날 때는 반드시 관을 썼다.[1]
장탕이 정위가 되어 율령을 개정할 때 급암은 무제 앞에서 "그대는 대신이면서 선제의 업적을 계승하지도 못하고 천하의 사악한 마음을 선으로 이끌지도 못하면서, 어찌 고조가 약속한 율령을 변경하려 하는가? 그대는 이러한 일을 하고 있어서 자손도 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질책했다.[1]
한나라가 흉노와 전쟁을 벌이고 주변 이민족을 회유할 때 급암은 흉노와 화친하고 군사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제가 유학자인 공손홍과 법률 전문가 장탕을 중용하자 급암은 이들을 거짓으로 아첨하고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자라고 비판했다. 공손홍과 장탕은 급암을 미워하여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1]
원삭 5년(기원전 124년), 공손홍이 승상이 되자 급암을 다스리기 어려운 우내사로 추천했으나, 우내사의 업무는 지체되는 일이 없었다. 급암은 공손홍과 장탕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에 불만을 품고 무제에게 "폐하께서 대신을 쓰는 것은 섶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온 자가 위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제는 "과연 사람은 학문을 해야 하는군. 급암의 말은 날마다 심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1]
흉노 곤야왕이 항복했을 때 백성들이 말을 숨기자 무제는 장안령을 벌하려 했으나, 급암은 "저를 베시면 백성들이 말을 내놓을 것입니다. 흉노가 항복했다고 해서 어찌 천하에 소동을 일으켜 중국을 피폐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반대했다. 흉노와 장사한 백성 500명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급암은 이들을 변호했으나 무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몇 달 후, 급암은 법에 저촉되어 파면되고 수년간 은거했다.[1]
4. 가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