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시
1. 개요
정당시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협객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무제 치세에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경제 시기에 태자사인으로 등용되었고, 무제 즉위 후에는 노 중위, 제남 태수, 강도상을 거쳐 경조윤, 대농령을 지냈다. 청렴하고 사람을 아끼는 성품으로, 말년에 빈객 문제로 벌을 받아 평민이 되기도 했으나, 이후 장사, 여남 태수를 역임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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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전한의 관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2. 생애
협객을 자처하며 양나라와 초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다. 경제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고, 휴가 때마다 옛 친구들을 찾아가거나 빈객을 초청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접대하였다. 또한 황로학을 좋아하고 덕망 있는 자들을 사모하여 그들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나이가 젊고 벼슬이 낮았으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아버지 연배의 천하 명사들이었다.
무제 즉위 후, 정당시는 노중위·제남태수·강도상을 지내고 구경의 대열에 올라 우내사가 되었다. 전분과 두영의 다툼에 연루되어 첨사(詹事)로 강등되었으나, 원광 5년(기원전 130년)에 다시 대농령으로 승진하였다. 대농령 시절, 정당시는 문지기에게 "손님이 왔을 경우, 귀천을 막론하고 문에 머물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청렴하고 산업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봉급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무제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천하의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고, 사람을 추천할 때에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고 자신보다 현명하다고만 말했다.
말년에 이르러 전한 황실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정당시는 빈객을 대농령의 고용인으로 삼았는데, 그가 값지 못한 빚이 많았다. 사마안이 회양태수로 있으면서 이 일을 들추어내니, 정당시는 벌을 받아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얼마 후 장사에 임명되었으나 무제는 그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여남태수로 전임시켰고, 정당시는 몇 년 후 죽었다. 그의 공로로 이천석의 지위에 오른 형제나 자손이 예닐곱 명 있었다.
2.1. 초기 생애와 명성
정당시는 협객을 자처하며 양나라와 초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다. 경제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고, 휴가 때마다 옛 친구들을 찾아가거나 빈객을 초청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접대하였다. 황로학을 좋아하고 덕망 있는 자들을 사모하여 그들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아버지의 연배이고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무제 즉위 후, 정당시는 노중위·제남태수·강도상을 거쳐 구경의 대열에 올라 우내사가 되었다. 전분과 두영의 다툼에 연루되어 첨사(詹事)로 강등되었으나, 원광 5년(기원전 130년)에 대농령으로 승진하였다.
정당시는 대농령 시절 빈객을 고용했는데, 그가 값지 못한 빚이 많아 사마안이 이 일을 들추어내니, 정당시는 벌을 받아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얼마 후 장사에 임명되었으나 무제는 그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여남태수로 전임시켰고, 정당시는 몇 년 후 죽었다. 그의 공로로 이천석의 지위에 오른 형제나 자손이 예닐곱 명 있었다.
정당시의 선조인 정군(정영)은 항우를 섬겼지만, 항우 사후에 한나라에 귀순했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섬기던 인재를 여러 관직에 기용하면서 조서를 내렸다. "옛 주인을 항적이라 부르도록 하라." 고조는 항적(항우의 본명)이라고 불렀던 옛 신하에게 대부의 작위를 수여하고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정군은 이를 거절하고 도성에서 추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협객들 사이에서 정군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2.2. 무제 시대의 관직 생활
정당시는 협객을 자처하며 양나라와 초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다. 경제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고, 휴가 때마다 옛 친구들을 찾아가거나 빈객을 초청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접대하였다. 또한 황로학을 좋아하고 덕망 있는 자들을 사모하여 그들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나이가 젊고 벼슬이 낮았으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아버지 연배의 천하 명사들이었다.
무제 즉위 후, 정당시는 노중위·제남태수·강도상을 지내고 구경의 대열에 올라 우내사가 되었다. 전분과 두영의 다툼에 연루되어 첨사(詹事)로 강등되었으나, 원광 5년(기원전 130년)에 다시 대농령으로 승진하였다. 대농령 시절, 정당시는 문지기에게 "손님이 왔을 경우, 귀천을 막론하고 문에 머물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청렴하고 산업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봉급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무제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천하의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고, 사람을 추천할 때에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고 자신보다 현명하다고만 말했다.
말년에 이르러 전한 황실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정당시는 빈객을 대농령의 고용인으로 삼았는데, 그가 값지 못한 빚이 많았다. 사마안이 회양태수로 있으면서 이 일을 들추어내니, 정당시는 벌을 받아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얼마 후 장사에 임명되었으나 무제는 그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여남태수로 전임시켰고, 정당시는 몇 년 후 죽었다. 그의 공로로 이천석의 지위에 오른 형제나 자손이 예닐곱 명 있었다.
2.3. 말년과 죽음
정당시는 말년에 이르러 전한 황실의 재정 궁핍과 빈객의 빚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흉노 정벌과 사방의 오랑캐들을 달래는 과정에서 재정이 부족해졌고, 정당시가 대농령으로 있을 때 고용한 빈객이 값지 못한 빚을 많이 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사마안이 회양태수로 있으면서 이 일을 들추어내자, 정당시는 벌을 받아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얼마 후 장사에 임명되었으나, 무제는 그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여남태수로 전임시켰다. 정당시는 몇 년 후 임지에서 죽었다. 그의 공로로 이천석의 지위에 오른 형제나 자손이 예닐곱 명 있었다. 정당시는 청렴하여 산업을 일으키지 않았고, 봉급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