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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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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손홍은 전한 무제 시대의 정치가로, 젊은 시절에는 옥리였으나 죄를 짓고 해고된 후 돼지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40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춘추》에 정통했고, 60세에 현량으로 발탁되어 박사가 되었으나 흉노 사신으로 다녀온 후 무제와 갈등을 겪고 관직을 버렸다. 이후 재등용되어 서남이 개척 중단을 건의하고 좌내사, 어사대부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평진후에 봉해졌다.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지만,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며, 동중서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사마천은 그가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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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홍
기본 정보
공손홍의 초상화
공손홍의 초상화
공손 (公孫)
이름홍 (弘)
계차 (季次)
시호문 (文)
출생기원전 200년경
사망기원전 121년
시대전한
출신지제나라 치자현 (현재의 산둥성 지난시 리청구)
직업유학자
정치가
관직승상
생애
주요 경력낭관
박사
현령
어사대부
승상
주요 업적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채택 건의
오경박사 제도 확립
염철전매 시행 건의
가족 관계
아버지공손굴현 (公孫屈賢)
평가
특징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명성을 얻음.
비판겉으로만 청렴한 척 한다는 비판도 존재함.

2. 생애

공손홍은 젊어서 설현(薛縣)의 옥리(獄吏)를 지냈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었고, 가난하여 보하이 만 바닷가에서 돼지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40세가 되어서야 《춘추》와 잡설(雜說)을 공부하며 계모를 봉양했다.[8]

무제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 무제가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을 초빙하자 60세의 나이에 현량으로 추천받아 박사가 되었다.[8] 그러나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무제와 뜻이 맞지 않아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8]

원광 5년(기원전 130년), 무제가 다시 문학을 천거하게 하자 치천국(淄川國)에서 공손홍을 추천했다. 공손홍은 사양했지만, 치천국에서 강력히 권유하여 장안(長安)으로 갔다. 태상이 책문(策文) 시험을 쳤는데, 공손홍의 답안은 100위권 밖으로 평가되었으나 무제가 직접 1등으로 뽑고 박사로 임명했다.[8]

무제가 서남이(西南夷)를 개척하고 파촉(巴蜀) 백성들에게 부역을 가하고 있을 때, 무제의 명으로 서남이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척 중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 공손홍은 조정 회의에서 양쪽 의견을 모두 제시하고 최종 결정은 무제가 하도록 하여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았다. 무제는 그가 신중하고 변론에 능하며 실무에 밝고 유학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음을 알고 좌내사(左內史)로 삼았다.[8] 상소를 올릴 때 급암에게 먼저 문제를 제기하게 한 뒤 자신은 뒤에서 돕는 방식으로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대신들과 논쟁을 약속하고도 무제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고 무제의 뜻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창해군 설치와 삭방군 설치 논의에 반대했으나, 무제가 주매신을 시켜 삭방군 설치의 이점을 설명하게 하자, 공손홍은 서남이와 창해군 설치를 중단하고 삭방군에 전념할 것을 청했고, 무제는 이를 허락했다.[8]

급암은 공손홍이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초라한 옷을 입는 것은 속임수라고 비판했다. 무제가 공손홍에게 묻자, "관중제나라 환공의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사치스러웠지만 환공은 패자가 되었고, 안영이 경공의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검소했지만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습니다"라고 말하여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8]

원삭 5년(기원전 124년), 승상이 되었다. 당시 열후(列侯) 중에서 승상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공손홍은 작위가 없어 무제는 평진후(平津侯)에 봉했다.[8] 이후 승상을 열후에 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공손홍은 승상부(丞相府)에 객관(客館)을 열어 빈객(賓客)을 초청하고 나랏일을 의논하게 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회남왕 유안 등의 모반 사건 당시 병석에 있었지만, 무제의 만류로 정무에 복귀했다. 회남왕 유안형산왕 유사의 모반 사건 때 중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무제는 휴가를 주었다.[8] 몇 달 후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원수 2년(기원전 121년)에 사망하니, 시호(獻)이라 하였고 아들 공손도가 작위를 이었다.[8]

2. 1. 초기 생애와 학문

공손홍은 젊은 시절 설현(薛縣)의 옥리(獄吏)를 지냈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8] 가난 때문에 보하이 만 바닷가에서 돼지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40세가 되어서야 《춘추》와 잡설(雜說)을 공부하며 계모를 봉양했다. 공손홍은 《춘추》 중에서도 특히 《공양전》에 정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

2. 2. 관직 진출과 흉노 파견

무제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 무제가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을 초빙하자 60세의 나이에 현량으로 추천받아 박사가 되었다.[8]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환하여 보고했는데, 그 내용이 무제의 뜻과 맞지 않아 무제는 공손홍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8] 이에 공손홍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8]

2. 3. 재등용과 서남이 문제

원광 5년(기원전 130년), 무제가 다시 문학(文學)을 천거하게 하자 치천국(淄川國)에서 공손홍을 추천했다.[8] 공손홍은 이전에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난 것을 이유로 사양했지만, 치천국에서 강력히 권유하여 결국 장안(長安)으로 갔다.[8] 태상은 문학들에게 책문(策文)을 짓게 했는데, 공손홍의 답안은 100위권 밖으로 평가되었다.[8] 그러나 무제가 직접 공손홍의 책문을 읽고 1등으로 뽑았으며, 그의 풍채를 보고 박사로 임명했다.[8]

무제가 서남이(西南夷)를 개척하고 파촉(巴蜀) 백성들에게 부역을 가하고 있을 때, 무제의 명으로 서남이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와 그 땅을 폄하하며 개척 중단을 주장했다.[8] 그러나 무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8]

2. 4. 중앙 관직 진출

공손홍은 조정에서 회의를 할 때, 양쪽 의견을 모두 제시하고 최종 결정은 무제가 하도록 하여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무제는 그가 신중하고 변론에 능하며 실무에 밝고 유학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음을 알고 기뻐하여 좌내사(左內史)로 삼았다.[8]

공손홍은 상소를 올릴 때 조정에서 직접 논쟁하지 않고,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에게 먼저 문제를 제기하게 한 뒤 자신은 뒤에서 돕는 방식으로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대신들과 논쟁을 약속하고도 무제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고 무제의 뜻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급암은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이 많고 믿음이 없다"라며 조정에서 그를 꾸짖었다. 무제가 그 일에 대해 공손홍에게 묻자, "저를 아는 사람은 저를 성실하다고 할 것이고, 저를 모르는 사람은 저를 불성실하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고, 무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더욱 신임했다.[8]

2. 5. 어사대부 시절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당시 창해군 설치와 삭방군 설치를 두고 논의가 있었는데, 공손홍은 이에 반대했다. 무제는 주매신을 시켜 삭방군 설치의 이점을 설명하게 했고, 공손홍은 열 가지 중 한 가지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8]

공손홍은 자신이 산동 출신의 식견이 좁은 사람이라 삭방군의 장점을 몰랐다며, 서남이와 창해군 설치를 중단하고 삭방군에 전념할 것을 청했고, 무제는 이를 허락했다.[8]

급암은 공손홍이 녹봉이 많은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초라한 옷을 입는 것은 속임수라고 말했다. 이 건에 대해 무제가 공손홍에게 묻자, "정말로 그렇습니다. 관중제나라 환공의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아내를 셋이나 맞이하는 등 군주와 같은 행위가 있었지만, 환공은 패자가 되었습니다. 안영이 경공의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제나라는 잘 다스려졌습니다"라고 말했으므로, 무제는 겸손한 마음이 있음을 느끼고 더욱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8]

2. 6. 승상 임명과 평진후 책봉

원삭 5년(기원전 124년), 공손홍은 승상이 되었다. 당시 전한에서는 열후(列侯) 중에서 승상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공손홍은 작위가 없었다. 이에 무제는 조서를 내려 고성현(高成縣) 평진향(平津鄕) 650호를 식읍으로 주어 평진후(平津侯)에 봉했다.[8] 이후 승상을 열후에 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공손홍은 승상부(丞相府)에 객관(客館)을 열어 빈객(賓客)을 초청하고 나랏일을 의논하게 했다.

공손홍은 검소한 생활을 계속했지만, 이중적인 면도 있었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는 잘 대해도 나중에 반드시 보복했다. 주부언을 죽이거나 동중서를 좌천시킨 것은 공손홍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회남왕 유안 등의 모반 사건 당시, 공손홍은 병석에 있었지만, 대신의 실력이 없어서 모반이 일어난 것이고 이대로 병사하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열후를 반납하고 사직하고자 했다. 무제는 위로하며 만류했고, 그 후 병이 나아 정무에 복귀했다.

2. 7. 회남왕 유안 사건과 죽음

회남왕 유안형산왕 유사의 모반 사건 때 공손홍은 중병이 들어 국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무제는 공손홍에게 약과 비단 등을 내리고 휴가를 주었다.[8] 몇 달 후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원수 2년(기원전 121년)에 사망하니, 시호를 (獻)이라 하였고 아들 공손도가 작위를 이었다.[8]

3. 평가 및 비판

공손홍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반고는 공손홍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으며, 중국학자 호머 H. 덥스는 "개인적인 행동에서 칭찬할 만하고, 논쟁에 능하며, 법률 문제에 능숙하며, 학문에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사마천은 공손홍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평가했고, 허를리 크리엘은 한무제의 독재적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인물로 평가했다.

3. 1. 긍정적 평가

공손홍은 묵가와 법가의 사상을 유교에 접목하여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검소함, 겸손함, 청렴함의 미덕을 장려했으며, 자신의 봉급 대부분을 동료 학자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관대했다.[3]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육성하는 데 힘썼으며, 황실 학원을 설립하여 젊은 인재들을 훈련시키고 오경을 연구하게 하여 초급 직책에 임명했다.[4]

공손홍은 법가적 사상을 바탕으로 황제의 독재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도덕적 측면에서 절대군주제를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신뢰의 가치를 주장하며 황로학 이념을 연상시키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6]

몇몇 동시대 인물들은 공손홍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전한 시대 초기의 역사가 반고는 그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중국학자 호머 H. 덥스는 그를 "개인적인 행동에서 칭찬할 만하고, 논쟁에 능하며, 법률 문제에 능숙하며, 학문에 훌륭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3. 2. 부정적 평가

공손홍은 겉으로는 유교적 가치를 따르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법가적 통치 방식을 옹호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마천은 공손홍이 동중서를 견제하고, 주부언의 처형을 권고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공손홍이 검소한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높은 봉급을 받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했다.[3] 그는 유교를 전복하고 법률 시스템을 조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4]

허를리 크리엘은 공손홍을 한무제의 독재적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인물로 평가했다. 많은 학자들은 공손홍과 장탕을 아첨과 기만, 위선의 화신으로 불렀다.

참조

[1] 기타 wuyin day of the 3rd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Yuan'shou era
[2] 서적 The Sinitic Civilization Book II https://books.google[...] 2018
[3] 서적 2011
[4] 서적 The Sinitic Civilization Book II https://books.google[...] 2018
[5] 서적 The Sinitic Civilization Book II https://books.google[...] 2018
[6] 서적 Ideology of Power and Power of Ideology in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2015
[7] 서적 서경잡기
[8] 기타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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